오늘은 사순 제3주일이다. 요한복음 4장 5-42절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다.
배경: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 정오 무렵, 유다 사람, 사마리아 여자
한 낮의 중동 지방이면 위의 첫번째나 두번째 그림이 현실감이 있다.
하단의 중간 또는 오른쪽 그림은 현대 미술 또는 바로크풍의 미술 작품으로 작가가 느끼는 성서의 의미를 부각시키려고 한 듯 싶다.
유다 사람과 사마리아 여자라는 대립 구도를 이해하려고 ChatGPT에 몇가지 검색을 해봤다.
아래는 북이스라엘(수도 사마리아)과 남유다와 관련된 이야기 정리다.
우선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
이 지역의 고고학적 유물은 4000년전부터 이스라엘 지역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유적을 살피면, 다윗 왕궁 및 성벽은 BC 1000년경, 솔로몬의 성벽은 BC 960년경, 예루살렘의 성벽은 BC620년경과 BC586년경에 재건되었으며, 이사야 성전은 BC8세기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이 이외의 역사는 모두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바다 민족 침략 전의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제국과 미케네 제국 등의 강력한 왕국들이 번영하고 있었고, 이들 왕국은 수도를 중심으로한 도시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지방 국가들을 통제하며, 상업과 농업을 발전시켰다. 특히 히타이트 제국은 철기시대 말기부터 철기시대 말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동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으며, 동지해안을 포함한 많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이전 시대에는 수메르, 아카드 등의 문명이 번영하였으며, 그들의 기술적 발전과 경제적 발전이 이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다. 바다 민족 침략 전의 메소포타미아는 상업, 농업, 기술 등의 분야에서 발전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지중해와 유럽 등과의 교류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바다 민족의 침략 이전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지방에서 아모리, 모압, 에돔, 필리스티아 등 여러 지배자들 중 하나였으며, 다양한 지역적인 권력 중심에서 각자의 영토를 지켜나갔다.
바다 민족 침략 이후의 메소포타미아
바다 민족의 침략(Sea Peoples invasions)은 약 BC 1200년경부터 지중해 지역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이동민족의 공격으로, 이 때 다양한 문명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바다 민족들은 해적질을 비롯한 다양한 공격을 지속하며 지중해 동부 지역의 다양한 문명을 유린하였다. 이 공격은 약 50년 정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바다 민족들은 이집트, 헷국, 신국, 우가리트 등을 비롯한 많은 문명들과 전쟁을 벌였다.
바다 민족의 침략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바다 민족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도인 바빌론(Babylon)을 포함한 다수의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아갔다. 이로 인해 지역의 인구와 경제는 감소했으며, 다양한 문화적 전통과 역사를 지니고 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많은 요소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약간의 회복을 이루었지만, 기존의 히타이트 제국과 같은 대규모 국가는 붕괴하여 작은 도시 국가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 국가들은 서로 경쟁하며 발전하면서 새로운 문화적인 발전을 이루기도 하였다.
한편 바다 민족의 침략 이후에는 이스라엘 왕국이 생성되었고,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의 개략적인 역사
고대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전국적인 국가를 형성. 이 때 다윗왕과 솔로몬왕 시기에서는 국가의 규모가 크게 발전하였으며, 유대교가 만들어졌음
바벨론 포로: BC 586년, 바벨론 왕국의 왕 네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되었음
로마 제국의 침략: BC 63년, 로마 제국은 이스라엘 지역을 침략하고, 유대인들은 로마에 굴복
바로크 반란: AD 132년,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음. 이 반란은 유대인들의 전국적인 항쟁으로 이어졌지만, 로마에 패배
중세 이스라엘: 이슬람 제국에 의해 정복되어, 유대인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흔적을 유지하는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생활
이스라엘의 창국: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에 의해 재창국. 이스라엘은 이후 여러 차례의 전쟁과 분쟁을 겪었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지속적인 중동 지역의 정치적 갈등의 중심지가 되고 있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기원전 10세기 후반부터 기원전 6세기 초반까지 존재했던 유대 왕국의 두 지방임.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922년에 분열한 이후부터 존재했으며, 이 지방의 왕들은 유다 왕국의 왕들과 대립하면서 많은 시기 동안 교전 상태에 놓였음.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기원전 7세기 중반까지 존재했던 지방으로, 이후 바빌론 출신의 왕이 편집관을 겸하면서 유대 왕국 전체를 통치하게 되면서 남유다는 사실상 유다 왕국으로 합쳐지게 됨.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성립은 다윗 왕이 유대 왕국을 통일한 이후부터 시작되었음.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설하면서 왕국의 권력이 강화되었고, 그의 후계자들도 유대 왕국을 지배하면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강력한 국가를 유지했음. 그러나 기원전 922년에 솔로몬 왕의 아들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나면서 유대 왕국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게 됨.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은 다소 복잡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졌음.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 제국의 시냅헤리브 왕이 이 지방을 정복하면서 일어났음. 이후 북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강제 이주시켜져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었음.
남유다의 멸망은 약 150년 후인 기원전 586년, 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일어났음. 이후 남유다의 유대인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예루살렘의 성전은 파괴되었음.
앗시리아 관련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유대인 종교와 역사적 전통, 문화 등이 유사했기 때문에 서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종종 협력하거나 연합하여 외국의 침략에 대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한 이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사실상 독립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는 북이스라엘의 지역이 다른 외국의 지배를 받으며, 지리적으로 멀어져서 서로 연락이 끊기기도 했다.
앗시리아의 정책에 따라 북이스라엘은 매우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앗시리아의 왕들은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격적인 식민정책을 적용하여 북이스라엘은 전쟁, 포로수용, 인구 이동 등의 참상을 겪게 되었다.
앗시리아의 왕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북이스라엘의 이민자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고, 앗시리아인들을 북이스라엘 지역으로 유입시켰다. 이에 따라 북이스라엘 지역은 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예를 들어, 앗시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신들과 종교를 북이스라엘 지역으로 가져와 현지인들에게 강요하였고, 북이스라엘의 원래 종교와 문화는 퇴색하게 되었다.
또한 앗시리아의 왕들은 북이스라엘을 근거지로 하여 다른 국가를 침략하였다. 이로 인해 북이스라엘은 다양한 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북이스라엘 지역은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앗시리아와 북이스라엘 지역 간의 문화 교류는 두 지역의 경제 발전과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앗시리아 제국은 북이스라엘의 농업, 광업, 그리고 상업 분야에서 기술과 지식을 전파했다. 또한, 앗시리아 문명이 성장함에 따라 북이스라엘도 문화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문화 교류는 다른 지역에도 확산되었다.
앗시리아와 남유다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앗시리아는 북쪽으로 발전하며 남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해갔고, 남유다 역시 독자적인 왕국을 유지하며 독자적인 종교문화를 유지했다.
앗시리아와 남유다는 많은 전쟁과 갈등을 겪어왔다. 예를 들어, 앗시리아 왕국은 8세기 BC에 남유다를 침략하며 여러 차례 남유다를 정복하고는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또한, 앗시리아 왕국은 남유다를 포함한 다른 지역들도 제국의 속성하에 두었으며, 이로 인해 남유다 역시 앗시리아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앗시리아와 남유다는 종종 서로 결합하여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앗시리아와 남유다는 바벨론 제국의 침공에 대처하기 위해 서로 결합한 적도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분열 이후 서로 다른 왕국으로 존재했던, 북이스라엘은 이스라엘 12 지파 중 10 지파가 포함되어 있으며, 남유다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함께하는 왕국이다.
이 두 왕국은 역사적으로 유대인 종교 및 문화적인 면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는 매우 차이가 있었다. 북이스라엘은 수많은 왕조 전쟁과 정치적 분열에 시달려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고, 반면에 남유다는 다소 안정적이며 지속적으로 왕조를 이어나갔다.
또한, 이 두 왕국은 종교적 이념과 관행에 대한 견해 차이도 있었다. 북이스라엘은 종종 이방 신앙에 노출되어 이스라엘 하느님에 대한 순수성을 잃는 경향이 있었고, 이로 인해 여러 선지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반면에, 남유다는 다소 보수적인 종교적 이념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의 종교문화는 유대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빌론 유배와 경과
바빌론 유배(Babylonian exile)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 제국에 포로로 잡혀 간 시기를 가리킨다. 이는 기원전 586년부터 539년까지 약 50년간 지속되었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으며,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고, 다수의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후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에서의 생활을 강제로 시작해야 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어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중심지와 기념비적인 장소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유배는 유대인들의 종교, 언어, 문화 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유는 바빌로니아에서의 생활은 유대인들이 각종 문화와 언어, 기술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후에 유대교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빌로니아 유배는 유대인들에게 굉장한 고통을 안겼지만, 그들이 살아남고 유대교를 지속시키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건 중 하나이다.
바빌론 유배 이후,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에서 50년간 생활하다가 기원전 538년에 페르시아 왕국의 대왕 쿠로스 2세(Cyrus II)에 의해 석방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지만, 건설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바빌로니아에 남아있는 것이었다. 또한 성전 건설을 막기 위해 주변 국가들이 저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원전 516년에 성전이 완성되었으며, 유대인들은 성전 안에서 예배를 하고 율법을 지키며 생활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다양한 외교적, 군사적 사건들이 있었지만, 성전은 그대로 지켜졌다.
바빌론 유배 이후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도전과 어려움을 극복하면서도 유대교를 유지하고 전통을 계승해왔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종교적 운동이 등장하기도 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기원전 2세기에 일어난 마카비 반란(Maccabean Revolt)이다. 이 운동은 유대교를 위협하는 헬레니즘 문화와 외국 종교의 침해로부터 유대교를 지키기 위해 일어났으며, 이후에는 유대교가 세계적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 제국 통제 아래 있을 때
로마 제국이 통치하는 시기인 1세기 경과 후에는, 북이스라엘 지역은 사라지고 남유다 지역만이 유대인의 고향으로 남았다. 이 시기에 남유다 지역의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지만, 여전히 유대교의 중심지이자 유대인들의 정치, 종교, 문화적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이에는 여전히 역사적인 갈등과 대립이 존재했다. 북이스라엘 지역은 이미 고대 이스라엘의 12개 지파 중 10개가 속해 있던 지역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이라는 주장을 하고 남유다 지역을 혐오했다. 반면에 남유다 지역의 유대인들은 북이스라엘 지역을 "이방인"으로 여겨, 상호적인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갈등과 대립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도 유지되었고, 이후에 유대인들의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 반란은 로마 제국의 경악을 불러일으키며, 이후에 로마 제국은 남유다 지역을 완전히 지배하고 유대인들을 흩어지게 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로마 제국이 남유다 지역을 완전히 지배하고 유대인들을 흩어지게 한 사건은 유대 전쟁(Jewish War) 이후인 70년이다. 유대 전쟁은 로마 제국과 유대인들 간의 대규모 갈등으로, 로마 제국은 유대 지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가져오고자 하였다. 로마 제국은 7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성전을 파괴하고, 이에 따라 유대인들은 강제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남유다 지역은 로마 제국의 통제 하에 있게 되었고, 유대인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사마리아 라는 지역의 의미는, 외세에 의해 순수성과 정통성을 잃어버린 지역이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방인으로 바라봐지는 지역이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