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죽과 속내
손진숙
3월 초, 아직 창밖 봄바람이 차갑다. 추위에 떨고 있는 나뭇가지 끝에 새순이 앙증스럽다. 나무의 속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연두색 립스틱처럼 내미는 걸까? 거죽이 싸고 있는 신비한 속내를 엿보고 싶다.
나의 졸작 <뒷심>은 내게 덕지덕지 달라붙은 무력감을 어쩌지 못하고 토로한 글이다. <뒷심>을 수필 잡지에 발표한 뒤 동인회에서 합평을 했다. 첫 평에 나선 회원부터, 뒷심이 부족해 다툼에서 진다는 작품 속의 예화와 작가의 이미지가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돌아가며 비슷한 평이 이어졌다. 나로서는 뜻밖의 반응이었다. 어떻게 내가 뒷심이 있어 보인다는 건지 의아하고 놀라웠다.
그 회원들은 기껏해야 3개월에 한 번 열리는 합평회에서 대면할 뿐이다. 오랜만에 보는 인상(印象)이 평소에 나 스스로 바라보는 내 모습과 정반대라니? 얼마든지 거죽은 실제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새로운 발견이자 깨침이었다.
외면 말고 나의 내면은 어떻게 보일까?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타인과 나눌 기회란 없는 편이다. 설령 있다고 해도 남의 내면을 섣불리 말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외면도 매한가지지만, 내면은 오롯이 자신이 가꿀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면이 외면에 비어져 나올 것이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언젠가는 드러나고야 말 내면을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답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답을 알지만 결심하기는 쉬워도 결행하기는 어려우리라.
남편은 내가 수필 쓰는 자체를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직업을 가진 사람이 글을 쓸 때 그 가치를 발휘한단다. 가정주부가 글을 써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투다. 공무원이나 교직원이 글을 쓴다면 직장의 공무와 연계되어서 효과를 더한다고 한다.
실례로 서점에서 책을 구입할 때도 약력을 보고 고르게 된단다. 이쯤 되면 약력으로 책을 사고파는 게 된다. 글의 내용은 별 역할을 못한다. 글과 상관없이 작가의 직업이나 직위로 판단 기준을 삼는단다. 글의 내용 자체로 온전히 대우를 받는 게 아니라 어떤 화려한 경력을 가졌느냐에 따라 취급이 달라진다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지 않았나 싶다.
겉모습에 의해서 환영받기도 하고 천대받기도 하는 세상. 외부가 내부를 집어삼키는 무서운 공룡처럼 느껴진다. 우리 공동체에는 편견과 오류가 만만치 않다. 한 개인의 오판에 머물지 않고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현실이라면 실망을 넘어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과연 제대로 형성된 의식 수준인지, 입맛이 쓰디쓰다.
겉을 보고 어찌 속을 다 헤아려볼 수 있으랴. 문득 ‘화씨지벽(和氏之壁)’이 떠오른다. 중국 전국시대 때, 초나라 화씨가 옥돌 원석을 여왕(厲王)에게 바쳤으나 쓸모없는 돌로 판정되어 왼쪽 발이 잘리고, 무왕(武王)이 즉위해 감정시켜도 돌이라고 하자 오른쪽 발을 잘렸다. 화씨가 사흘 밤낮을 운다는 소문을 들은 문왕(文王)이 까닭을 묻고 그 원석을 다듬게 하여 천하에 둘도 없는 보물이 된 데서 유래한다. “나는 발을 잘려서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옥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하여 벌을 준 것이 슬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는 화씨. 진귀한 내면을 알아보지 못한 어리석은 군주들을 깨우치기 위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를 위험도 불사한 화씨의 기개를 오늘날 우리 정치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으려나.
누구든 노력하면 막돌의 굴레를 벗고 옥돌로 탈바꿈할 수가 있을 것이다. 껍데기 없는 사물이 어디 있으며, 내용물 없는 생물이 어디 있으랴. 옥돌을 감별하지 못하고 끝내 평범한 돌이라는 판별에 그쳤다면 ‘화씨지벽’과 ‘완벽’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은 화씨의 인내와 용기가 보옥처럼 빛난다. 화씨는 보석과 같은 속내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을까.
“수필집 두 권을 냈는데 뒷심이 없을 리가?”라는 회원들 시각은 나의 표면만 보고 내면을 못 본 것인지, 표면이 아니라 내면을 본 것인지, 모호하다. 자신과 타인의 관점이 동일하고, 표면과 내면의 진실이 통할 순 없는 걸까.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각이 나와 같아지도록 노력하는 길이 내게 남은 세월, 이루어야 할 삶의 과제가 아닐는지.
일그러진 내 모습을 거울 가까이 비춰본다. 보이는 것은 표면일까, 내면일까, 아리송하다.
《계간수필》 2024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