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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산(靈鷲山) 통도사는 '삼국사기 (三國史記) '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新羅)의 자장율사 (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귀국하여 ' 대국통 (大國統) '이 된 후, 646년 신덕왕의 명에 따라 창건한 절이다.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계시를 받고, 불사리(佛舍利)와 부처의 가사(袈裟) 한 벌을 가져와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 모시고, 보름마다 이곳에서 설법을 하여 계율종(戒律宗)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고 한다.
삼보사찰 三寶寺刹
불교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믿음의 대상으로 불(佛), 법(法), 승(僧) 등의 삼보(三寶)는 각각 부처와 불법과 승려를 가리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 삼보 '를 각기 상징하는 대표적 사찰로서 삼보사찰 (三寶寺刹)이 된다. 부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 고려대장경 (高麗大藏經) '을 모신 합천 해인사(海印寺)는 법보사찰 (法寶寺刹)이라 하고, 보조국사(普照國師)를 기점으로 16명의 국사(國師)들을 배출한 승주 송광사(松廣寺)가 승보사찰 (僧寶寺刹)이라면, 부처의 법신(法身)을 상징하는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통도사는 불보사찰 (佛寶寺刹)로서의 사격(寺格)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통도사(通度寺)는 '자장율사'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창건한 절이다. 그는 불경과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할 목적으로 이곳 통도사에 ' 금강계단 '을 조성하였다. 그는 승통(僧統)이 되어 금강계단에서 승니(僧尼)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고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셨다고 하여 통도사를 불보사찰(佛寶寺刹)이라고 한다.
해인사(海印寺)는 석가모니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대장경'을 봉안한 곳이라고 해서 법보사찰(法寶寺刹)이라고 한다. 강화도에서 완성한 고려대장경은 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조선 초기에 가야산 해인사로 옮겨졌다. 이곳은 풍수지리에 의하여 예로부터 승지(勝地)로 손꼽히는 곳이었고, 장경각(藏經閣)을 따로 지어 고려대장경을 안치하게 된 것이다.
송광사(松廣寺)는 큰스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해서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한다.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이곳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도모하였다. 원래 팔공산의 거조사(居祖寺)에서 이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뒤에 송광사로 장소를 옮겼다. 그 후 그의 제자이었던 혜심(慧諶)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까지 16명의 국사(國師)가 연이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고 하여 '승보사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언제부터 '삼보사찰 (三寶寺刹)'이라는 칭호가 붙여지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 쓰이게 되었다고 보인다. 오늘날 이 '삼보사찰'은 전통적인 승려 교육과정인 선원(禪院), 강원(講院) 그리고 율원(律院)의 세 기능을 다 집합시켜 놓았다는 뜻에서 각각 총림(叢林)이라고도 한다.
통도 通度
통도사라 이름한 것은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석가모니가 설법한 영취산(靈鷲山)의 모습과 통하므로 '통도사 (通度斯)'라 이름하였고 ( 此山之形通於印度靈鷲山形 ) ,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금강계단을 통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하였으며 ( 爲僧者通而度之 ),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한다는 의미에서 ( 通萬法度衆生 ), 절의 이름을 ' 통도사 (通度寺) '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영축산 靈鷲山
영축산 (靈鷲山)은 고대 인도(古代 印度) 마가다국 (Magadha) 왕사성 (王舍城)의 동쪽에 있던 그리드라 (Gridhra ...독수리라는 의미 즉, 독수리 '鷲' )라는 산 이름이었다. 본래 이 산은 석가모니부처가 법화경을 설법한 유명한 곳으로, 신선과 독수리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영축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는 산 정상의 형상이 날개를 펴고 있는 독수리를 닮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 산의 정상에는 왕사성 남쪽 시타림(屍陀林)에 조장(鳥葬)을 위하여 버려지는 시신들을 파먹는 독수리들이 항상 돌아와 쉬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영축산'으로 번역한 것은 독수리들이 신령스러워 사람이 죽으려고 하면 미리 그것을 알고 그 집에 모여들어 '시타림'으로 장송(葬送)하는 것을 기다려 장송이 끝나면 곧 내려와 파먹었기 때문에 이를 영축(靈鷲)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靈鷲山 ... 영축산 또는 영취산
통도사가 위치하고 있는 영축산의 한자 표기는 ' 靈鷲山 '과 ' 鷲栖山 ' 두 가지로 표기되지만 이에 대한 한글표기는 ' 영축산 ' ' 영취산 ' ' 축서산 ' ' 취서산 ' 등으로 표기되고 있어 혼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러한 원인은 한자 '취'자에 대한 한글 표기의 문제에서 비롯되는데, 일반옥편에서는 ' 독서리 취'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 축 '으로 발음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예를 들어 ' 탱화(幀畵) '라고 할 때에 ' 탱(幀) '자는 옥편에서 ' 정'자로 찾아야 나오고, 영축산의 '축'도 '취'를 찾아야 되며, 깨달음을 의미하는 '보리(菩提)는 한자사전식으로 '보제'라고 읽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취'자가 원래 '축'으로 표기되었다는 근거는 1463년에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 법화경언해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산(山) 이름 혼동의 원인은 불교에서 유래된 ' 축(鷲) '자를 일반인들이 접하기 쉬운 한자사전의 표기 ' 취 '로 읽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양산시에서는 영축산에 대한 그동안의 혼란을 바로잡고 고유의 산 이름을 찾기 위하여 위원회를 구성하여 ' 영축산 '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통도사 가람배치의 특징
통도사(通度寺)의 가람형태는 창건(創建) 당시 신라(新羅) 이래의 전통법식에서 벗어나, 냇물을 따라 동서(東西)로 길게 잇는 산지(山地)도 평지(平地)도 아닌 구릉(丘陵) 형태로서 탑(塔)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는 자유식(自由式)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대웅전을 심으로 한 상로전(上爐殿)과 통도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한 중로전(中爐殿), 그리고 영산전(靈山殿)을 중심으로 한 하로전(下爐殿)으로 구분되어 있다. 현존하는건물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대부분 전각들이 소실(燒失)된 후,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12개의 큰 법당이 있으며, 여축산 산내에는 20여 개의 암자들이 들어서 있고, 전각의 수(數)는 80여 동(棟)에 이른다
사찰에 있어서 건물의 배치를 가람 배치라고 한다. 가람배치는 일반적으로 평지에 있으면 평지가람 (平地伽藍), 산지에 있으면 산지가람 (山地伽藍) 그리고 산지도 평지도 아닌 곳에 있으면 구릉가람(丘陵伽嵐)이라고 한다. 이러한 구분은 사찰이 어느 곳에 있느냐에 따른 구분이며, 그 안에 탑이나 금당 등 건물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갖고 자리잡느냐에 따라,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 쌍탑일금당식(雙塔一金堂式), 무탑식(無塔式), 자유식(自由式)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건물들을 배치할 때 주축(主軸)이 동서의 방향인지, 남북의 방향인지에 따라 동서주축 배치 또는 남북주축 배치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통도사의 가람배치는 신라 이래의 전통 법식에서 벗어나 냇물을 따라 동서(東西)로 길게 향했는데, 서쪽에서부터 가람의 중심이 되는 상로전(上爐殿)과 중로전(中爐殿), 하로전(下爐殿)으로 이어진다. 또한 그 서쪽 끝에 보광선원(普光禪院)이 자리 잡고 있다. 본래 이 절터에는 큰 연못이 있었고, 이 연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으나, 창건주 ' 자장율사 (慈藏律師)'가 이들을 제도하고, 한 마리 용을 이곳에 남겨 사찰을 수호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신지(九龍神池)의 자그마한 상징적인 연못이 있다.
삼성반월교 三星半月橋
통도사는 동서(東西)로 길게 조성된 가람이다. 최근에 건립된 산문(山門)을 지나면 통도사의 서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는 시내가 있다. 일주문 앞에 이 시내를 건너는 다리가 바로 ' 삼성반월교 '이다.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는 세 개의 무지개 돌다리로 구축하였다.
난간도 없고, 폭이 매우 좁은
삼성반월교라는 이름은 불교의 상징인 '마음'을 의미한다. 삼성반월 (三星半月)은 ' 마음 심(心) '자를 의미한다. ' 心 ' 자를 풀어 쓴 것으로 '삼성 (三星)'은 세 개의 점(點)을, ' 반월 (半月) '은 나머지 한 획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삼성반월교는 곧 ' 일심교 (一心敎) '를 의미하고 있다. 깨끗한 마음으로 다리를 건너야 하는 다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다리에는 난간이 없고, 폭도 매우 좁다. 헛된 생각으로 정신을 못차리면 다리에서 떨어질 수도 있음을 일깨우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있다. 불교적 세계관에 의해 산지가람을 형성할 때, 제일 먼저 남섬부주 (南贍浮洲 ..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수미산 주변에 네 곳의 땅이 있는데, 그 가운데 남쪽에 있는 땅으로 이곳에만 인간이 산다고 한다)에서 수미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바다를 건너가는 다리를 조성한다. 사찰마다 다리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찰의 입구에 개울물 등이 흘러야 하고, 만약 자연적인 개울이 없다면 인위적으로도 사찰의 위치에 개울이 흐르게 하고 난 뒤에 개울을 건너야 사찰에 진입하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찰들은 거의 대부분 자연적으로 흐르는 계곡물을 이용하여 반드시 한 번은 계곡물을 건너는 다리로 유도해 놓았다.
홍예교 虹霓橋
돌로 만들어지는 다리는 크게 두가지 종류가 있다. 널다리 (珩橋. 형교)와 무지개 다리 (虹橋. 홍교)이다. 널다리는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널을 깔 듯 판돌을 건너질러 만든 다리이고, 구름다리라고도 하는 무지개 다리는 교각 대신 다듬은 돌로 아취 모양의 홍예 (虹霓 .. 무지개)를 틀어 만들고 그 위에 돌이나 흙으로 메운 다리이다. 돌다리 가운데 널다리가 압도적으로 많이 축조되었지만, 오래된 다리 중에서 현존하는 다리는 무지개다리가 더 많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만 그만큼 구조적으로 안정성 있고, 내구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홍예교란 돌을 양쪽 끝에서부터 놓아서 이어 만들어가는 다리로, 반원을 그리며 만들어가다 마지막 한 가운데에 끼여지는 돌이 박히는 순간부터 밟으면 밟을수록 튼튼해지는 구조이다. 이곳 통도사의 ' 삼성반월교 '는 이러한 ' 홍예 '가 모두 3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개의 홍예를 ' 半月 '로 보았고, ' 반월 '을 다시 별로 상징하여 반월이 세 개나 되어 있는 ' 삼성반월교 '인 것이다.
삼성반월교의 건립 과정
지금의 삼성반월교는 1937년 근,현대의 고승이었던 경봉(鏡峰 .. 1892~1982) 스님이 중수한 다리이다. 그리고 이 다리의 이름 표지석 글은 경봉스님이 글씨이다. 경봉스님은 통도사 일주문(一柱門)의 징검다리를 장마철에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튼튼한 다리로 바꾸어 놓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견적을 받아보니 6천원의 견적이 나왔다. 당시 통도사 1년 수곡의 판매대금이 1만여 원이었다.
하지만 경봉스님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공사대금을 모았다. 그러던 어느날, 인천에 산다는 '김치수'거사가 경봉스님을 찾아 왔다. 그는 불공을 드려 아들의 다리를 낫게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경봉스님은 그런 요행을 바라기보다는 계곡에 튼튼한 다리를 놓는데 동참하여 수 많은 사람의 다리 노릇을 해 주는것이 더 큰 공덕이 된다는 것을 일깨웠다. 법문을 들은 '김치수거사'는 크게 감동하여 그 자리에서 3천원을 시주(施主)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경봉스님은 그동안 모아놓은 1,300원과 포담스님으로부터 받은 200원 등을 합하여 1937년 2월 17일, 드디어 다리의 기공식을 가졌고, 그 해 6월5일에 낙성식을 가졌다.낙성식 날, 경봉스님은 법문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고 한다. 통도사를 창건한지도 벌써 1,300여 년, 그동안 시냇물에 이르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내를 건넜을 것인가. 오늘 삼성반월교가 조성됨은 인연이 도래하여 꽃과 열매를 맺어지는 것과 같도다....고 말하며, 김치수거사의 시주(施主) 인연을 밝히며 그를 치하하였다고 한다.
절은 승려나 불교도들이 수행(修行)을 하는 도량(道場)이다. 본래 불교에서는 무소유(無所有)를 이상(理想)으로 삼았으나 절이라는 그들만의 공간(空間)이 생긴 것은 인도(印度)의 독특한 기후(氣候) 때문이다. 인도(印度)는 고온다습(高溫多濕)한 아열대 기후에 속한다. 특히 불교가 발생한 북부지방은 여름철 내내 비가 자주 내리는 지역으로, 세계에서도 강우량(降雨量)이 가장 많은 곳이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수도승(修道僧)들은 여름 석 달간은 일정한 장소에 모여 살게 되었고, 이를 하안거(夏安居)라 불렀다. 우기(雨期)에 하안거(夏安居)를 하던 장소가 후에 ' 절 '이 된 것이다. 역사상 최초(最初)의 절은 ' 죽림정사 (竹林精舍) ' 이다. 와같이 초기의 절에 정사(精舍)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말 그대로 절이 정신(精神)을 수양하는 집이라는 것을 알게해준다.
절의 유래 및 의미
절 이름에 ' 사 (寺) '자가 붙은 것은 중국의 후한(後漢)시대 행정기구(行政機構)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후한(後漢)에 불교를 전한 인도의 두 승려(僧侶)를 홍노사(鴻爐寺)라는 곳에 머물게 하였는데, 홍노사(鴻爐寺)는 본래 손님을 접대하는 행정기구의 명칭이었다. 그후 승려들이 머무는 장소에 사(寺)자를 붙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절은 우리나라의 고유어(固有語)이다. 고구려 승(僧) 묵호자(墨胡子)가 신라(新羅)에 불교를 전할 때 머물던 집의 주인 이름인 ' 모례 (毛禮) '에서 절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의견이 유력하다. 모례(毛禮)는 우리말 ' 털레 '의 이두식(吏讀式) 한자인데, ' 털레 '가 ' 덜레 '로 되었다가 ' 절레 '가 되었으며, 여기에서 ' 절 '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日本)에서는 절을 ' 데라 '라고 하는데, 이 역시 ' 털레 '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는 것이다.
대개 명산(名山)에 명찰(名刹)이 있듯이 산(山)과 절은 떼어내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니 불교 도입 초기에는 절이 인가(人家)가 밀집하여 있는 도심에 세워졌다. 평지가람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러한 절들은 건축물들이 장엄하며, 왕실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선종(禪宗)과 풍수지리(風水地理)의 영향을 받아 산지(山地)가람형으로 절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석굴(石窟)가람형이나는 독특한 형태의 절도 세워졌다. 자연굴을 개조하거나 암벽을 뚫어 법당을 세우는데, 석굴암은 대표적인 석굴가람형이다.
옛 절에는 대개 독특한 창건(創建) 비화(秘話)가 전해진다. 통도사(通度寺)의 경우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종가(宗家)나 다름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唐)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문수보살(文殊普薩)로부터 불사리(佛舍利)와 가사(袈裟), 그리고 대장경(大藏經)을 받아와 646년에 통도사를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셨으며, 최초(最初)로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하였다는 점등은 절의 격(格)을 한층 높여주는 것이다. 통도(通度)라는 절 이름은 전국의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득도(得道)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고, 만법(萬法)에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도 있다. 또 통도사가 깃들어 있는 영축산이 인도(印度) 영축산과 통(通)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국장생(國長生)이란 국가의 명령으로 건립한 ' 장생 (長生) '의 의미이며, 이정표, 경계표와 풍수사상(풍수사상)에 의한 방액(防厄) 구실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사찰(寺刹)에 급여한 토지가 많아서 사찰 영토와 일반 촌락(村落)들을 구분하는 경계(境界) 표시로 장생(長生)을 세운 기록이 있고, 사찰 경계 안에서 사냥이나 살생(殺生), 시목(柴木)이 금지되었던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석표(石標)는 사찰 경내라는 신성(神聖) 구역의 역할을 한것으로 간주된다.
고려(高麗) 시절에는 절에서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는데, 호부(戶部)에서 사원이 소유하고 있는 전토(田土)의 경계선에 세운 석표(石標)가 이 국장생(國長生)이라 하는 것이다. 국장생(國長生)이라 함은 나라의 하명(下命)에 따라 세웠다는 장승이며, 이러한 것들은 통도사 주변과 밀양의 무안리(武安里)에만 남아 있는데, 두 곳의 것이 모두 고려 선종 2년(1085년)에 세운 것으로써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장승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장승은 용도나 그 세워진 장소에 따라 이름과 그 모습도 달라진다. 사람의 얼굴 장승은 사원 입구나 마을 밖 또는 성문 밖에 세워지며, 귀신 얼굴 장승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비보지(裨補地)나 사원 입구 또는 성문 밖에 세워진다. 또 석표(石標)로 된 장승은 사원 입구, 사원 경계, 절의 사방 비보지역(裨補地域)에 세워지며 돌을 쌓아 올린 모양의 것은 사원의 비보지역, 사찰 경계 표지로 세워진다.
남근(男根) 모양의 돌장승과 미륵불 모양의 것, 장군석(將軍石)으로 된 장승은 마을 입구나 서낭당에 세워지며, 돌하루방은 성문 밖에 세워진다. 장승에 대한 이름도 지방에 따라 달라진다. 평안도나 함경도는 당승,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장승, 장신, 수살목, 수살막이이라고 부르며, 호남지방은 장승, 장생, 미륵님, 수부막(守府幕), 영남지방은 장승, 벅수, 제주도에서는 돌하루방, 우성목, 옹중(翁仲), 옹중석(翁仲石), 돌부처, 돌미륵으로 부른다. 장승은 또 이정표(里程標)로도 세워 그 장승이 있었던 자리를 '장승백이'라고 하는 곳이 적지 않다. 통도사의 ' 사리가사사적약록 (舍利袈裟事蹟略錄) '에 따르면 비보장생표가 12개인데, 장소에 따라 목방장생표(木榜長生標), 석상장생표(石像長生標), 석비장생표(石碑長生標)를 두었다고 한다.
통도사에서 약 2km 떨어진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 35번 국도 도로변에 서 있는 높이 167cm의 돌기둥이며, 보물 제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국장생(國長生)은 47,000보(步)나 되는 통도사를 중심으로 사방 12곳에 세워졌다고 하는 장생표(長生標)의 하나이다. 사찰의 경계, 풍수, 방액(防厄)을 위한 용도로서, 앞 부분에 명문(銘文)이 네 줄로 음각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 통도사 손내천 국장생 일좌(一座)는 절에서 문의한 바, 상서호부 (尙書戶部)에서 을축년 (乙丑年) 5월이 통첩에 있는 이전의 판결과 같이 다시 세우게 하므로 이를 세운다 ' 는 것으로 , 나라에서 통첩을 받아 명에 의하여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작연대는 1085년 (고려 선종 2)에 세웠다.
通度寺孫仍川國長生一坐段寺 통도사손잉천국장생일좌단사 / 所保尙書戶部乙丑五月入諜前 소보상서호부을축오월입첩전 / 判兒如改立令是於爲了等以立 판아여개입영시어위료등이립 / 太安元年乙丑十二月日記 태안원년을축십이월일기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 통도사 손내천 국장생 일좌는 절에서 문의한 바 상서호부에서 을축년 5월일자의 통첩에 있는 이전의 판결과 같이 다시 세우게 하므로 이를 세운다. 태안 원년 을축 12월일에 쓰다 ' 이러한 명문(銘文) 내용으로 보아 제작연대는 고려 선종 2년(1085)이다. 고려 선종시대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외교에서 거란을 포함한 송나라,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여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1084년에는 승과(僧科)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변경을 지키는 사졸(士卒)들에게 저고리와 바지를 하사하였다. 이러한 시대이었기에 통도사의 국장생석표를 다시 세우게 된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 74호
국장생 (國長生)이란 나라의 명령으로 건립한 ' 장생 (長生) ' 의미이며 이정표, 경계표와 풍수사상에 의한 방액 (防厄) 구실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나라에서 사찰에 급여한 토지가 많아서 사찰 영역과 일반 촌락들을 구분하는 경계표시로 '장생'을 세운 기록이 있고, 사찰 경계 안에서는 사냥이나 살생과 시목(柴木)이 금지되었던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석표 (石標)는 사찰의 경계라는 신성한 구역의 표시 역할을 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앞면에 새겨진 명문 (銘文)은 글자의 지름이 6 ~ 10cm의 크기로 해서 (楷書)로 음각되어 있는데, 이두문 (吏讀文)이 섞인 금석문으로 보아 신라시절인 646년 무렵 통도사 창건 이후에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석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속명(俗名)은 김선종랑(金善宗郞)이며 아버지는 무림(茂林)이다. 진골(眞骨) 출신으로 소판(蘇判)의 관직에 있던 무림(茂林)은 아들을 낳으면 출가(出家)시킬 것을 축원하여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한 뒤 그를 낳았다. 그는 어버이를 여읜 뒤에 처자를 버리고 깊은 산에서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왕이 재상으로 기용하려 하였으나, ' 내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戒)를 깨트리고 백 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 吾寧一日持戒死 不願百年破戒而生 ' 이라고 하며 응하지 않아서, 왕(王)은 출가(出家)를 허락하였다.
자장율사는 선덕여왕 5년인 636년, 승실(僧實) 등 제자10여 명과 함께 당(唐)나라로 가서, 청량산(淸凉山)의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에 기도하고, 가사(袈裟)와 부처의 발우(鉢盂), 그리고 불두골(佛頭骨) 한 조각과 함께 사구게(四句偈)를 받았다. 이에 당(唐) 태종(太宗)이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무르도록 한 뒤 명성을 얻어 대중이 따르자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의 동쪽 산록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수도(修道)하다가 다시 장안(長安)으로 가서 태종에게 두터운 예우를 받았다. 643년 선덕여왕(善德女王)은 당 태종에게 글을 보내어 자장(자장)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자장율사 진영 慈藏律師 眞影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影幀)이다.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가로 96.5cm, 세로는 147.5cm의 크기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영정은 통도사와 금강계단을 세운 자장율사가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대장경이 봉안되었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해장보각(海藏寶閣)에 고려대장경과 함께 모셔져 있다.
이 진영은 붉은색 등받이를 한 검은 갈색 의자 위에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으로 가부좌(跏趺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어깨가 떡 벌어진 당당한 체격과 둥글고 부드러운 얼굴에 단정한 이목구비를 갖추어 우리나라 남산율종(南山律宗) 개조(開祖)로서의 기품과 함께 자애로움이 넘치는 듯하다. 특히 피부색을 흰색에 가까울 정도로 맑고 투명하게 처리하여 진골(眞骨) 출신다운 귀족풍의 피부와 체온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이 그림에서 돋보이는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녹색 장삼에 붉은색 가사(袈裟)를 두르고 있는 자장율사의 지물(持物)은 불자(拂子 .. 번뇌와 장애를 물리치는 데 쓰이는 불구의 하나)뿐이다. 왼손으로는 대나무 모양의 자루 끝 부분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불자(拂子)의 술 하단부를 살포시 쥐고 있다. 벽면과 바닥으로 구분지어 자칫 이분(二分)되기 쉬운 화면의 분리를 막고 안정감을 부여하고자 직선적인 의자를 중앙에 큼직하게 배치하였다. 그래서 다소 딱딱한 느낌이 들고 있다. 반면에 하단부에는 아름답게 장식된 가죽 신발이 가지런히 놓인 자그마하고 꾸밈새 있는 신발대를 그려 놓음으로써 경직성을 해소하여 주는 구성상의 재치를 엿볼 수 있다.
색채는 녹색과 적색을 주조색으로 삼고 백색과 황토색을 가미하여, 그림이 안정되면서도 경쾌한 맛을 더해 준다. 화면 우측 상단에는 ' 帝師新羅國師慈藏律師之眞 .. 제사신라국사자장율사지진 '이라는 법호(法號)가 또렷하게 남아 있다. 하단 중앙부에는 화기(畵記)가 쓰여 있는데, 1804년 (순조 4), 풍오(豊悟)를 증명법사(證明法師)로 하여 양공(良工), 계한(戒閑) 그리고 이 진영을 그린 화원(畵員)으로 성인(性仁), 상엽(尙曄), 계근(戒僅), 최희(最羲) 등이 기록되어 있다.
자장율사 (慈藏律師. 590~658)는 신라의 승려로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세우는 등 전국 각처에 10여 개의 사찰을 건립하였다. 저서로는 ' 四分律喝磨私記. 사분율갈마사기 '와 ' 十誦律目次記. 십송율목차기 '등이 있다.
자장율사(慈藏律師)의 이름은 김선종(金善宗)이며, 진골(眞骨) 출신인 소판(蘇判) 김무림(金茂林)의 아들이다. 일찍 부모를 여윈 이후, 본인의 집을 절로 바꾼 원녕사(元寧寺)를 세웠으며 세속의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홀로 깊은 산에 들어가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선덕여왕이 대보(臺輔)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636년 왕명으로 제자 10여 명과 당나라에 가서 청량산의 문수보살에게 기도하였으며, 문수보살로부터 가사(袈裟) 1벌과 사리(舍利) 100과(顆)를 받았다.
중국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서 3년간 도(道)를 닦고, 화엄종의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道銑)에게 배운 뒤, 643년 장경(藏經) 400여 함(函), 당번, 화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분황사(芬皇寺)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과 황룡사(皇龍寺)에서 대승론(大乘論)과 보살계본(菩薩戒本) 등을 설한 후,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승니(僧尼)의 규범과 승통(僧統)을 통괄하였다. 선덕여왕에게 황룡사 9층탑 창건을 건의하고 3년 후인 645년(선덕여왕 14)에 완성한 후 황룡사의 2대 주지승이 되었다. 또한 영축산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이듬해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였다.
전국 각처에 10여 개의 사찰을 건립하고, 649년에는 왕에게 상주하여 중국의 제도를 따라 신라에서 처음으로 관복을 입게 하였으며, 650년에는 당나라의 연호(年號) 사용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만년에는 서울을 떠나 강릉에 수다사(水多寺)를 짓고, 뒤에 태백산에 석남원(石南院 .. 현재의 淨巖寺)를 세워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후에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開祖)로 받들여졌다. 현재는 신라 10성(聖) 중의 한 사람으로 추대되어 흥륜사(興輪寺) 금당에 모셔져 있다.
이곳 통도사 돌당간 (石幢竿)은 기단부 전체가 후대에 와서 중수(重修)된 것이다. 지주 (支柱)는 당간과 함께 조립하였으나, 지상에 노출된 부분만 가공된 상태이고, 표토(表土) 부위에서 지하 2m 가량 묻힌부분은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다. 이 당간의 높이는 754cm, 지주의 높이는 241cm, 지대의 폭은 166cm의 크기이다. 기단부는 전반적으로 후대 중수 시에 개수 보완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치 탑의 기단부와 같이 장대석을 놓아 사방의 하대 윤곽을 잡은 다음 다시 간격을 좁혀 조금 짧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기단석 남북 양쪽에 지주가 맞물릴 수 있도록 유구(遺溝)가 있다.
그리고 지주의 상하에는 타원형으로 2개의 간공(竿孔)을 만들고, 동서 방향으로 장대석을 보완한 다음 다시 중앙에 간대 (竿臺)를 놓고 당간 (幢竿)을 세웠다. 당간의 중앙에는 ' 나무아미타불 (南無阿彌陀佛) '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통도사 석당간은 원래의 형태는 아니고, 후대에 보수하면서 다소 변형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당간이 현존하는 사례는 흔하지 않으며, 제작 시기는 기단의 구조나 지주(支柱)의 규모 등으로 미루어 보아 여말선초 (麗末鮮初)로 추정하고 있다.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솟을 삼문 입구 하천변에 세워져 있는 이 당간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3호이다. 통도사 경내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지만, 통도사를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당간이다. 당간은 어느 절이나 절 입구에 세워놓기 때문에, 절이 폐사되었어도 당간의 위치를 보면 그 절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석당간(石幢竿)은 우리나라에는 몇 기만이 남아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조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통도사 석당간은, 기단부 전체가 후대에 와서 중수된 것이다. 기단부는 전반적으로 후대에 중수하면서 개보수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통도사 당간이 특별한 것은 마치 탑(塔)의 기단부와 같이 조성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장대석으로 사방 하대의 윤곽을 잡고, 다시 짧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았다. 기단석 남북 양편으로 지주(支柱)가 맞물릴 수 있도록 유구를 두었다. 지주의 상하에는 타원형으로 두 개의 간공(竿孔)을 내고, 동서방향으로 장대석을 보완하였다.
삼성반월교를 건너면 통도사 일주문(一柱門)을 만난다. 일주문은 절에 들어갈 때 지나는 첫번 째 문으로 기둥의 배열이 한 줄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일주문은 우리나라 고유의 양식으로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처럼 독특한 일주문의 양식은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진리의 세계, 깨달음이 세계, 부처님의 세계로 향하는 마음가짐을 올곧게 다지는 깊은 뜻을 상징하고 있다. 일주문 정면에 걸린 현판 글씨인 ' 영축산통도사 '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夏膺)이 쓴 것으로 영축산의 장엄한 기상에 어울린 만큼 매우 장중하다.
일주문 주련 一柱門
두 기둥의 주련(柱聯)에는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의 글씨로 ' 불지종가 (佛之宗家) ' 그리고 ' 국지대찰 (國之大刹) '이라고 쓰여있다. ' 부처님의 으뜸 가는 사찰이요, 나라의 큰 절이다 '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불보종찰(佛寶宗刹)임을 알려주는 사격(寺格)을 잘 표방해 주고 있다.
통도사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양쪽 두 개의 돌기둥에 이런 글귀가 있다. ' 이성동거필수화목 (異姓同居必須和睦) ' 그리고 ' 방포원정상요청규 (方袍圓頂常要淸規) '이다. 이를 풀이하면 ' 다른 성을 가진 이들끼리 모여서 사나니, 화목을 근본으로 해야한다 ' 그리고 ' 가사와 삭발한 이들은 반드시 항상 계와 청규를 따라야 한다 '는 뜻이니, 이는 통도사에서 생활하는 모든 스님들에게 승단의 화목을 위해 규율을 잘 지키고 열심히 수행하라는 가르침이다.
방포원정상요청규 方袍圓頂常要淸規
이성동규필수화목 異姓同居必須和睦
천왕문 天王門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숲을 따라서 걷다보면 오른편에는 노천박물관이 있고, 그 길을 계속 가거나 주차장에서 주차를 하고 하천을 가로지르는 월영교를 건너 오르면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에 이르게 된다. 통도사 천왕문이 처음 창건된 것은 고려 충숙왕 6년(1337)이라 하나, 현재의 건물은 1800년대의 건축 양식으로 판단된다. 건물의 장대석은 3별대로 쌓았으며, 갑석으로 마무리한 높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건물의 안정감을 주기 위하여 기둥머리 부분이 기둥뿌리보다 폭이 좁게 만들어진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워 익공으로 만든 단층 겹처마 맞배지붕 형식을 지니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중간 어간은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 옆으로는 담장을 쌓아 세속의 공간과 부처의 공간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석회와 백토, 세사(細沙) 따위를 반북하여 바른 벽인 회사벽(灰沙壁)으로 마무리한 좌우 측간에는 인방(引枋)이 가로지르고 있다. 특히 상인방 위의 중앙에 햇빛이나 햇볕이 들도록 광창(光窓)으로 정자(井)살 교창(交創)을 단 것이 특색이 있다. 그 교창 좌우에는 뇌록색 바탕의 산수화가 두 점씩 그려져 있다. 그리고 창방 위로는 중간 간의 좌측에는 '공양비천상'과 '학' 그림이, 그 위로는 매화그림이 있다. 우측에는 '주악비천상' 그림 두 장이 있다.
천왕문은 부처님이 계신 곳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신 문이다. 사천왕문(四天王門)이라고도 한다. 천왕문은 4천왕과 금강역사의 힘으로 절을 보호하고 악귀를 막아서 사찰을 청정한 도량으로 만들려는 데 있으며, 절을 찾는 이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엄숙하게 하려는 뜻도 담겨 있다. ' 사천왕 '은 인도 재래의 신이 대승불교가 발달하면서 불법 외호신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사찰의 문이나 불조전의 내외 벽면, 혹은 불상의 외호로써 도는 불,보살 탱화의 사방에 위치하여 불법에 귀의하고 크게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천왕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예법을 알아보자. 천왕문을 지날 때에는 金堂을 향하여 세 번 절을 하거나, 각각 두 분씩 세 번 절을 하거나 또는 네 분의 천왕마다 세 번 절을 한다. 두 분씩 할 때는 오른쪽부터 하며, 각각 세 번 절을 할 때는 들어가는 방향에서 오른쪽의 동방 지국천왕부터 몸을 시계방향으로 돌려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의 순서로 세 번 절을 한다.
사천왕 四天王
부처님이 살고 있는 성스러운 공간에 인간 세상을 찌들린 인간들이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냥 들어오게 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마음의 심판을 받기 위해 우리는 천왕문을 지나야 한다. 그곳에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하여 사천왕들이 기다리고 있다. 일주문과 불이문의 중간에 천왕문이 있다. 수행의 중간단계를 의미하는 천왕문은 불가에서 수미산 중턱에 있는 사천왕의 궁궐을 형상화한 것이다.
천왕문 앞에는 사찰에 따라 금강문(金剛門)을 세우기도 하지만,도사에는 금강문이 없다.보통 천왕문에는 사천왕의 모습을 불화 또는 조각상으로 배치하나 통도사에서는 목조상(木造像)의 거대한 사천왕을 죄우에 배치하였다. 그래서 천왕문에 들어서면 일단 거대한 형상들에 압도감과 힘과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 혹 내가 어떤 잘못을 한 것은 없는가. 스스로 되돌아보게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꽃과 타오르는 불꽃으로 꾸며진 화려한 관(冠)을 쓰고, 불거져 티어나올 듯한 눈, 잔뜩 치켜올린 눈썹, 손에는 칼, 비파, 창, 용, 탑을 잡고 있다. 두터운 갑옷을 입고 있으며, 허리에는 귀신 얼굴을 한 귀면상(鬼面像)을 두르고 있다. 사천왕의 이러한 모습은 사람이 죽어 반 쯤 부패하면 눈알이 튀어나오고 피부가 부풀어 오르는 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발 밑에는 신음하는 마귀들의 고통과 일그러진 얼굴 형상으로 인하여 보는 사람의 몸을 움츠러들 하고 있다. 그러나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준다. 그러니 착한 이들은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사천왕이 밟고 있는 악귀의 모습은 절마다 다르다. 악귀의 모습도 다양하다.
불교에서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의 여섯 세계를 윤회하는 육도윤회(六道輪廻)에서 인간 세상보다 즐거움이 더 많은 하늘 세계를 스물 여덟 하늘로 생각한다. 욕심이 남아 있는 욕계(欲界)의 여섯 하늘과 욕심은 사라지고 물질만이 필요한 색계(色界)의 열여덟 하늘, 물질조차 필요없는 무색계(無色界)의 네 합한 스물 여덟 하늘(28天)이다. 사천왕은 하늘세계에서 가장 낮은 하늘인 욕계의 사천왕의 동남서북의 네 지역을 지키면서 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神 가운데 왕이다.
사천왕은 욕계6천의 첫 번째 문이자 수미산 세계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에 이르면 좌우에 해와 달의 세계가 빛나고 그 위로는 수미산 정상부 도리 33천의 하늘이 펼쳐진다. 사천왕은 33천 중 욕계 6천의 첫 번째인 사천왕천의 지배자로서 수미의 4주를 수호하는 신으로 호세천이라 하며, 수미산 중턱 4층급을 주처로 하는 신이다. 이들 사천왕은 우리 인간계는 물론 전 우주를 수호하며, 모든 중생의 사악을 없애주고 신변을 보호해준다는 의미에서 호세천왕(護世天王)이라고도 불린다. 사천왕과 그의 부하들은 천하를 다니면서 세상의 선악을 살피다가 착한 이에게는 상을, 악한 이에게는 벌을 내린다. 그리고 그 결과를 매달 8일에는 사천왕의 부하들이 14일에는 사천왕의 태자들이, 15일에는 천왕 자신이 도리천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에게 반드시 보고하게 된다.
북방 다문천왕 北方 多聞天王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암흑세계의 사물을 관리하고, 어둠 속에 방황하는 중생을 제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문(多聞)이란, 언제나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는 의미이다. 몸은 흑색이며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왼손에는 비파를 잡고 오른손으로 연주하는 모습이다. 야차와 나찰 두 신을 지배한다.
남방 증장천왕 南方 增長天王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자신의 위엄과 덕으로 만물을 소생시키고 덕을 베푸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소 붉은 얼굴빛에 오른손에는 용을 꽉 움켜쥐고 왼손의 엄지와 중지로 여의주를 들고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는 형상이다. 그의 부하로는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고 말머리에 사람의 몸을 취하는 귀신인 부단나와 아귀(餓鬼)의 두목인 폐례다를 거느리고 있다.
동방 지국천왕 東方 持國天王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선한 이에게는 복을,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면서 인간을 고루 보살피고, 불국토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얼굴빛은 푸른빛을 띠고 있으며, 왼손에는 칼을 오른손에는 주먹을 쥔 채 허리에 대고 있거나, 손바닥에 보석을 올려놓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의 부하로는 부단나와 건달바가 있다. 건달바는 육체가 죽은 뒤 다른 육신을 받는 태어나기 전의 영혼의 신이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 맡는 음악의 신이다.
서방 광목천왕 西方 廣目天王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도심(道心)을 일으키도록 한다. 몸은 흰빛이며 웅변으로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입을 벌리고 있다. 광목(廣目) 도는 악안(惡眼)이라 부르는 것은 눈을 부릅뜸으로서 그 위엄으로 나쁜 것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오른쪽에는 삼지창을, 왼손에는 보탑(寶塔)을 들고 있다. 삼지창은 벌을 내리는 도구이고, 보탑(寶塔) 속에는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며, 복과 덕을 얻게 하는 진귀한 보물이 들어 있다. 그의 부하로는 용신과 용의 살과 피를 빨아먹는 식혈육귀로 불리는 비사사(毘舍道)를 거느린다.
가람각 伽藍閣
통도사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 현판을 보다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작은건물이 담 너머로 보인다. 천왕문보다 조금 바깥에 위치하지만 건물은 담 안쪽에 있다. 그 건물이 통도사를 수호하는 神을 모신 가람각(伽藍閣)이다. 가람각에서 '가람'이란, 승려들이 사는 사찰 등의 건축물을 의미한다. 즉 가람은 ' 승가람 (僧伽藍) '의 약칭으로, 범문(梵文)으로는 '상가라마'의 음역으로 곧 절의 또다른 명칭이다.그리고 각 (閣)은 불보살을 모시는 전(殿)과는 달리 호법선신(護法善神)을 보시는 곳이다. 따라서 가람각은 절의 영역을 수호하는 가람신(伽藍神)을 모신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가람각은 본래 불교의 신이 아니라 민간신앙(民間神仰)을 받아들여 모신 神이기에 경내에 모시기는 하였지만, 보통 일주문 가기 전에 일주문에서 사천왕문 사이 또는 사천왕문 옆에 모시고 있다. 통도사의 가람각은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을 지나서 볼 수 있다. 방위상으로는 천왕문이 남동쪽 곁에 붙어 있지만, 그 위치는 천왕문보다 조금 아래 공간에 배치하고 있어 절묘하게 배치한 모습이다. 이는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얻으려는 절묘한 배열이라고 할 수 있다.
통도사의 가람각의 건물은 정면 1칸의 작은 단칸의 법당으로 도량의 수호를 위한 토지대신을 안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초창은 조선 숙종 32년(1706)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외벽에 붉은 말(赤馬)의 그림이 그려졌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건물은 원명스님에 의해 신축되었다. '토지신'은 사전에 따르면, 신상(神像)은 백발흑의(白髮黑衣)의 노인이라 하지만, 통도사의 가람각 안에 모셔진 '토지대신'은 단지 회색빛 수염에 검은 옷을 입고, 맞은편의 범종루를 보고 있다.
부처님을 모시며 생활하는 스님들에 있어서 절의 주인은 주지가 되겠지만, 토속신앙의 측면에서는 가람신이 절의 주인이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땅을 신성시하였다. 땅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요, 먹여살리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토지신과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고구려 고국양왕 때 즉, 392년에 국사(國社) 즉, 사직을세우고 종묘를 수리하기도 하였다..고 처음으로 나온다. 사직의 ' 社 '는 토지신을 ' 稷 '은 곡물신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단지 기록일뿐이고, 옛날부터 하늘과 땅 그리고 산은 신앙대상이었으며 그것은 민간인과 국가적 차원에서 행하여졌을 것이다. 특히 道敎와 연결되어 있음은 '무녕왕릉'에서 발견되는 지신(地神)에게 묘소를 매입하는 문서인 매지권(買地券)에서도 알 수 있다. 아무튼 '사직'에 대한 제사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 땅에서 존속되어온 뿌리깊은 신앙이었다. 그만큼 토지신에 대한신앙은 그 뿌리가 깊고 오래되었다. 왕이 즉위할 때 맨 먼저 종묘사직에 인사드리 듯, 절에서도 주지가 부임하면 맨 먼저 인사드리는 곳이 가람각이라고 한다. 또 죽은 자의 영혼인 영가(靈駕)가 경내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모셔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부처와 관계된 절에서 부처와 무관한 민간신앙 또는 도교의 신앙대상을 모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할까 ? 물론 절에서 가람각뿐만 아니라 산신각, 칠성각과 같은 비불교적인 건물들을 역시 만날 수 있다. 불교와는 관련이 없지만 같이 어울려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 불교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인 ' 통불교적 (通佛敎적)인 성격, 즉 조화불교적인 성향을 만난다. 불교는 결코 속이 좁은 종교는 아니다. 종교적인 터부와 금기를 버리고 단지 문화유산을 가슴으로 느끼겠다는 포용력을 가지고 눈맛을 즐겨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역사 유물들이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 있을 것이다.
가람신(伽藍神)은 절을 수호하는 신으로 수가람신(守伽藍神), 사신(寺神), 호가람신(護伽藍神)이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가람신으로는 사천왕, 금강역사, 제석천 등을 들 수 있으며, 지금까지 내려오는 가람신으로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별히 내세울 만한 특정한 가람신을 사찰마다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성행하였다. 대체로 가람신은 마을의 성황당과 유사한 역할을 하였다. 가람각을 국사당, 국사단, 성황각, 가람당 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과 이곳 통도사의 독룡(毒龍)이 문헌상 나타나는 최초의 가람신들이다.
범종루 梵鐘樓
보물 제 11 - 6 호
이 범종의 크기는 높이 160cm의 커다란 종으로, 종신(鐘身)은 상대 (上帶 .. 위의 띠부분)에서부터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팽창하다가 종복(鐘腹) 부분을 정점으로 하대에 이르기까지 점차 좁아지듯이 수직선형으로 변화되는데, 이는 한국 범종의 전형인 신라 범종의 형태에 가까운 것이다. 현재 이 동종은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한마리의 용과 음통으로 구성된 용뉴(龍紐)는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용두(龍頭)가 매우 역동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용의 몸체가 똬리를 틀어 음통을 휘감고 있다. 범종 어깨부분에 이중의 원(圓) 속에 범자(梵字)와 한자를 양각하여 2단으로 배치하였는데, 한자의 내용으로 보아 범자(梵字)는 육자대명왕진언 (六字大明王眞言) 과 파지옥진언 (破地獄眞言)으로 추정하고 있다.
네 곳의 유곽에 각각 9개의 연판이 새겨져 있는데, 이 가운데 중앙의 연판에만 연뢰(蓮雷)가 돌출되어 있다. 유곽 사이에 연화 가지를 쥐고 구름 위에 서 있는 보살상을 네 곳에 새겨 넣었다. 이 동종은 형태가 다양화되는 조선 후기의 범종의 대표작으로 용뉴의 형태나 기형은 전통 범종 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상대의 표현은 보편적으로 연화당초문이 조각된 것과 달리 梵字가 새겨진 원권(圓圈)을 2단으로 둘러 처리한 방식은 17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범종의 새로운 양식이다.
특히 종신(鐘身)에 새겨진 팔괘 (八卦)는 중국 범종의 영향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현존하는 사인(思印) 비구의 범종 가운데 유일한것이며, 이 시기 다른 범종에서 좀처럼 찾아 몰 수 없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사인비구(思印比丘)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종의 제조 기법에 독창성을 가미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범종의 종복(鐘腹)에는 3단에 걸쳐 명문(銘文)이 양각되어 있다. 이 동종의 조성연대가 1686년 (숙종 12)이며, 이 범종을 만든 인물이 ' 사인비구 (思印比丘) '임을 확인할 수 있다. 명문 밑으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팔괘(八卦)가 배치되었고, 하대에는 연화당초문이 새겨져 있다. 범종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 200여 명에 달하는 사실을 통해 당시 통도사의 사세(寺勢)와 지역 사회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양산 통도사는 다양한 문화유산을 가진 불보사찰이다. 사찰은 종교적 건물이다. 종교적 경배의 대상을 모신 전각들마다 문패인 현판이 있다. 이 현판들은 보통 유명한 서예가의 글씨인 경우가 많다.이곳 통도사 출신으로 최근 100년에는 구하스님, 경봉스님, 월하스님의 글씨가 유명하다. 경봉스님의 글씨로는 극락암, 비로암, 백련암과 같은 암자에서 볼 수 있다.
통도사와 추사 김정희
이곳 통도사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모두 5점이 있다. 그중 서예 작품이 1점, 현판이 4점이다. 통도사 박물관에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 성담상게 (聖覃像偈) '가 있다. 이것은 1855년 2월, 추사 김정희의 나이 70세 때인 과천시절의 글씨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面門月滿 (면문월만) / 頂輪花現 (정윤화현) / 噫辣聖師 (희랄성사) / 宛其在玆 (완기재자) / 可以塞老淸之悲歟 (가이색노청지비여) / 是大悲相歟 (시대비상여) / 文字般若 (문자반약) / 互攝登光 (호섭등광)
얼굴은 둥근 달 같고 / 정수리에는 꽃무늬가 어렸네 / 아 ! 성사(성사)의 / 완연한 모습이 여기 있구나 / 늙어 스산한 자의 슬픔을 달랠 만하니 / 바로 대자비의 형상이어라 / 문자의 반야가 / 함께 빛을 발하도다.
이 글의 주인공인 성담(聖覃)은 19세기 통도사에서 이름을 떨친 대강백이었다. 성담스님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시작, 불교의 경전은 물론 도가, 유가의 경전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성자앟여서는 당시 이름난 영호남 지역의 강당을 찾아 다니며 선지식들에게 선교의 깊은 뜻을 공부하였다. 성담스님의 학문적 명성은 총림에 떨쳤으며, 유림들에게까지 알려져 권돈인(權敦仁)과 추사 김정희 등 사부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현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는 권돈인의 찬이 있는 스님의 진영(眞影)이 있다.
1847년 팔공산 은해사(銀海寺)에 큰 불이 나서 이 거의 전소되어. 그 후 3년 이상의 중창 끝에 추사 김정희에게 여러 전각의 현판을 부탁하였다. 당시 영천 군수이었던 이학래(李鶴來)가 쓴 ' 銀海寺沿革辨 '에 의하면 .. 은해사 불당인 대웅전, 종각인 보화루가 모두 추사의 글씨이며, 노전(爐殿)을 ' 일로향각 '이라고 했는데, 이도 역시 추사의 글씨이다...라고 했다. 아마도 통도사에 있는 추사의 현판글씨는 은해사의 것을 모각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추사 김전희 예서(隸書)의 백미인 이 '일로향각'은정상적인 글자 형태가 아니다. 노(爐)자의 부수인 화(火)를 작게 위에 붙여 놓은것이나, 향(香)의 글자를 원래 글자와 달리 변형시킨 것이나, 각(閣)자의 문(門)자의 획을 본래의 안으로가 아닌 밖으로 삐쳐 변형시킨 것은 미적 구성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통도사 주지실 앞의 현판은 탑광실(塔光室)이다. 탑광실은 ' 부처님의 은덕이 있는 방 '을 의미한다. 추사 김정희 행서(行書)의 멋과 힘이 함께 느껴지는 과천 시절의 작품이다. '탑광실'은 현재 주지실의 편액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 어느 곳에 걸려 잇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추사의 행서 중에 보기 드문, 사찰에 종종 보이는 글씨체로 강건한 필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통도사와 흥선대원군
추사 김정희의 글씨 제자는 아니지만 ' 난 (蘭) ' 그림의 제자로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 (李夏膺)이 있다. 통도사를 소개하는 책자 등에는 일주문과 금강계단의 글이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통도사에는 흥선대원군의 글씨가 모두 4점이 있다.
통도사에서 처음 만나는 글씨는 일주문 현판인 ' 영축산 통도사 '이다. 임금의 아버지의 글씨이고 통도사 첫문이기 때문에 금칠한 글씨이다. 경내로 들어서면 '관음전' 맞은 편, '감로당'의 동쪽 측면 건물인 '원통소'의 현판은 흰 바탕에 검정 글씨로 대원군의 호인 '석파'가 분명히 보인다. 그리고 통도사 대웅전은 4면의 이름이 각각 다르다.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 법신불이 계시는 화엄의 근본 도량'을 의미하는 '대방광전' 그리고 남쪽은 '수행자들이 사미계, 구족계 등을 받으면서 금강 같은 계율을 잘 지킬 것을 부처님이 계시는 계단에서 서약하는 것'을 의미하는 '금강계단' 그리고 북쪽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뜻하는 '적멸보궁'이다.
이 4개의 현판 글씨 중 '적멸보궁'만 구하스님의 글씨이다. 흥선대원군의 사후 1903년 '조선고적도보'에는 동쪽의 대웅전 편액만을 확인할 수 있으나 누구의 글씨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언제 대원군의 글씨 '적멸보궁'과 '대방광전'이 통도사 대웅전에 걸렸는지는 알 수 없다. 금강계단 편액은 그가 대원군에 봉해진 1863년 이후에 쓴 글씨이다. 임금의 아버지가 쓴 글씨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금강과 같은 굳건한 계율이 설해지는 곳이어서 그런지, 글씨를 금색으로 칠하며 전각의 위엄을 더해준다.
은입사 향로 銀入絲 香爐
보물 제334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향로(香爐)로 높이 33cm, 입지름 30cm, 밑지름 24.7cm의 크기이다. '향로'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의미를 지닌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기구를 총칭하는 말로 '화완' 또는 '향완'이라고도 한다. 향로는 모양에 관계없이 향을 피우는 도구를 총칭하는 말이고, 화완과 향완은 밥그릇 모양의 몸체에 나팔모양의 높은 받침대를 갖춘 향로만을 말한다.
이 향로는 가장자리가 넓고 완형의몸체와 원형의 높은 대(臺)를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양식의 원형이다. 신대(身臺) 각부에는 굵고 가는 은,금사(銀金絲)를 병용하여 연화(蓮花), 보상화(寶相華), 봉황(鳳凰), 운문(雲紋) 등이 만루(滿縷)되어 있다.
우선 신부(身部) 중앙에는 네 곳에 원좌(圓座)를 두고 그 주위에 여의두문(如意頭文)이 있다. 지금 원좌(圓座) 안에는 범자(梵字)를 찍은 둥근 주석판을 네 개의 못으로 고정시켰는데, 이것만은 나중에 보수한 것이다. 원좌와 원좌 사이에는 유려한 보상화문(寶相華文)이 입사(入絲) 되었고, 신부(身部) 밑에는 돌아가면서 판(瓣) 안에 꽃무늬와 사선으로 장식된 중판(重瓣) 연화가 돌려 있다. 특히 신부(身部)의 보상화문 사이를 은판(銀板)으로 채운 것은 이 향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신부(身部) 밑에는 3단의 굄이 있는데, 이곳에도 반원문(半圓文)이 입사되었고, 대(臺)의 위쪽에는 신부(身部) 아래 쪽에서와 비슷한 무늬로 장식된 단판(單瓣) 연화(蓮華)를 돌렸다. 대(臺)의 밑은 넓게 확대되어 좁다가 넓어진 경사진 넓은 공간을 잘 살려서 굵고 가는 두 선으로 여의두문, 봉황, 운문(雲紋) 등이 적당히 배치되어 있는데,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있음은 넓은 공간에 알맞은 형태라고 하겠다. 하단의 넓은 굽에도 당초문(唐草文) 비슷한 모양이 가늘게 입사되었다. 비록 일부는 나중에 서투르게 보수한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외형이 완미(完美)하고 입사된 무늬도 정교하고 유려하다, 제작연대도 고려 전반기에 두어야 할 것이니, 이 시대 향로의 대표적 작품이다.
영산(靈山) 또는 영축산(靈鷲山)이라고 불리는 곳은 석가모니부처가 설법을 하던 곳으로 불교의 성지이다. 이러한 정신을 집약하여 부처님이 계신 불국토를 형상화한 곳이 바로 ' 영산전 '이다. 통도사 영산전의 건립 시기를 정확히 고증하는 문헌은 없으나, 1704년(숙종 30)에 송곡선사(松谷禪師)가 중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하로전 下爐殿
영산전을 중심으로 앞쪽에 만세루, 서쪽에 약사전, 동쪽에 극락보전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을 하로전(下爐殿)이라고 한다. 하로전 지역은 석가모니, 아미타불, 약사여래의 삼여래 (三如來)에 대한 신앙을 각각 불전을 달리하여 분화해 나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하로전 지역은 석가신앙에서 보신불(保身佛) 신앙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전개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에 영산전 정면의 '만세루'와 합쳐져 하나의 영역을 구성하는 이른바 ' 4동중정형 ( 四棟中廷形) '의 구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불국토를 상징하는 영산전,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를 나타내고 있는 극락보전 그리고 약사불의 동방유리정토를 의미하는 약사전이 모두 불국토를 상징하는 정토신앙(淨土信仰)의 전각들로써 구체적인 부처의 세계이면서 물리적 경계를 갖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일정한 영역적 특성을 지닌 공간으로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1911년 당시의 영산전 모습
팔상도 八相圖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가로 151cm, 세로 233cm의 크기로 비단에 채색한 그림이다. 각 폭은 거의 빈 공간을 남기지 않고 건물과 나무, 구름 등의 배경으로 적절하게 구도를 나누어 해당하는 장면을 잘 표현하였다. 또한 각각 묘사된 장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글을 써놓아 이해를 돕고 있다. 산악이나 바위는 뛰어난 필치로 처리하였고, 인물의 묘사도 생동감이 넘치고 있다. 1775년 (영조 51)에 여러 화원(畵員)들이 그렸으며, 현재 보물 제1041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솔래의상 兒率來儀相
도솔래의상(兒率來儀相)은 ' 과거현재인과경 (過去現在因果經) '에 보이는 바와 같이 석가모니가 이미 보살육도(菩薩六度)의 行을 마치고 도솔천에서 염부주하생(閻浮洲下生)의 시기가 도래하였음을 천인중(天人衆)에 고하여 도솔천궁으로부터 흰 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마야부인의 몸에 입태(入胎)하는 내용이 여러 팔상도의 공통 주제로 되어 있다.
그림의 맨 위쪽 월륜(月輪) 안에 흰 코끼리를 타고 내려오는 보살상과 이를 에워싸고 기악을 연주하고 시중하는 모습의 천중상(天衆相)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단 왼쪽에 마야부인이 여러 시녀를 거느리고 잠든 모습에서 보는 바와 같이 태몽을 묘사한 것이다.
비람강생상 毘藍降生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은 마야부인이 '룸비니공원'에 나아가 그곳에서 태자 탄생의 모습을 묘사한것이다. 즉 마야부인의 룸비니원출유(藍毗尼園出遊), 불탄우협생(佛誕右脇生), 석범봉접(釋梵奉접), 칠보거수사자후(七步擧手獅子吼), 용왕관불(龍王灌佛), 아사타불인점상(阿私陀佛人占相) 등의 여러 모습이 한 도폭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상단부에 불탄생상이 묘사되어 있는데, 마야부인이 나뭇가지를 잡고 오른쪽 겨드랑이로부터 출생하시는 佛의 모습과 강탄 후 일곱 걸음을 옮겨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며 '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 '이라 하시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상단 왼쪽에는 용왕관불상(龍王灌佛相)으로 구름 위의 구룡왕(九龍王)이 청정수를 토하여 탄생불의 몸을 씻겨 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하단 오른쪽에는 아사타(阿私陀) 선인점상(仙人占相)으로 아사타선인(阿私陀仙人)이 정반왕(淨飯王)의 궁에 들어가서 태자의 상을 보고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을 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사문유관상 四門遊觀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은 태자가 사문출유시(四門出遊時)에 동문에서는 老人을 만나고, 남문에서는 病者를, 서문에서는 죽은 사람을, 북문에서는 비구를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즉 인간세상의 무상과 출가한 사문의 수도생활과 고귀함을 깨닫는 장면인 것이다. 가운데 쌍송(雙松)의 엉켜있는 모습과 가로지른 전각의 묘사 구도는 4장면을 자연스럽게 분할하여 구분시켜 주고 있다.
유성출가상 瑜城出家相
유성출가상(瑜城出家相)은 궁을 버리고 출가하는 모습의 그림이다. 상단에 태자가 차닉(車匿)과 함께 백마건척(백마건척)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때 제천(諸天), 야차신(夜叉神) 등이 와서 사족(四足)을 받들고 신중(神衆)들이 수종하는 모습이 서운(瑞雲)의 활달한 필치와 함께 표현되어 있다.
하단의 가비라성(迦毗羅城) 내에는 탁자에 기대어 비파를 안고 잠들어 있는 야수타라(耶輸陀羅) 등이 묘사되어 있고, 맨 아래 오른쪽에는 성문에 기대어 잠든 위사(衛士)들이 그려져 있다. 중앙에는 차닉과 건척이 돌아와서 정반왕(淨飯王)에게 태자의 출가를 고하여 모두 슬퍼하고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화면을 가로지른 지그재그식의 성벽은 석가모니가 출성하는 장면을 효과적으로 구분해주는 구도로 사용되고 있다.
설산수도상 雪山修道相
위 그림의 설산수도상(雪山修道像)은 출성 후 십년 수행하는 모습의 그림이다. 하단에 태자가 말에서 내려 자신의 머리카락을 칼로 자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그 옆에 천신인 제석천이 태자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받들고 있다. 삭발하고 있는 태자 앞에 꿇어 안자 잇는 차닉과 비 울부짖는 듯이 표현된 건척이 그려져 있으며, 그 오른쪽 아래에는 태자와 고별하고 성으로 돌아가는 차닉과 건척이 묘사되어 있다.
상단에는 고행림(苦行林)에서 수행을 마친 다음 니영선하(尼連禪河)에 목욕하고 난타파라(難陀波羅)의 乳미공양을 받으시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배경이 되는 산악의 묘사가 청록산수(靑綠山水)을 연상케 하여 괴탈감을 갖고 있는 암석과 토파(土坡)의 필치가 돋보인다. 특히 상단 맨 뒷쪽에 이 그림을 전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설산(雪山)이 구름에 감싸인 채로 백색 처리의 효과가 잘 되어 있다.
수하항마상 樹下降魔相
중앙 오른쪽 보리수 아래 결가부좌한 석가모니 앞에는 각종의 무기를 든 마군과 칼을 든 마왕 파순의 모습이, 또 한편에는 마군 퇴거의 모습이 율동적이고 생기있게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극적 표현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48일을 정진하여 지금까지 그를 유혹하던 온갖 마중(魔衆)을 항복하고 명성을 보시고 오도(悟道)하시는 모습을 가장 회화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하단에는 마군(魔軍)이 퇴거하는 모습과 상단 왼쪽에는 항마상(降魔相)의 부처 두광(頭光)에 표현된 과거칠불(過去七佛)이 있다.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은 팔상도 중 가장 표현적이고 또한 석가모니가 인간에서 부처가 되는 획기적인 순간으로 즉, 불교의 시발점을 여기에 둘 수 있기 때문에 도설(圖說)의 중요성은 대단한 것이다.
녹원전법상 鹿苑轉法相
위 그림은 부처의 성도(成道) 이후 처음으로 녹야원(鹿野苑)에서 설법하게 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상단에는 수미단 위에서 보관을 쓰고 천의(天衣), 화만, 영락(瓔珞)을 걸치고 설법하는 부처와 그 주위에는 협시보살과 보살중(菩薩衆), 천중(天衆), 외호신중(外護神衆)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부처 위쪽에는 제불(諸佛)의 내영상(來迎像)이 있다. 하단에는 보탑과 그 위에 합장의 불입상, 좌우측에는 십방세계의 불, 신중, 성중이 묘사되어 있다.
쌍림열반상 雙林涅槃相
석가모니가 구시나가라(拘尸那竭羅)의 쌍수림(雙樹林)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는 모습이다. 석가모니의 열반은 비록 육신은 없어졌지만 그가 남긴 法은 영원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광경이다. 하단의 부처가 열반에 드는 모습은 의와우협(倚臥右脇) 저지(著地)하여 우주로써 머리를 괸 자세로 표현되어 있으며, 주위에는 비탄하고 있는 비구상, 합장한 보살상, 외호(外護)하고 있는 신중상(神衆像)이 묘사되어 있다. 상단에는 佛의 입멸(入滅) 후 다비(茶毗)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중앙에는 불입멸(佛入滅) 후 다비(茶毗)할 때에 시자(侍者)를 거느리고 내려온 마야부인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영산전 내부 벽화
통도사 영산전 내부 벽화 52점은 현재 보물 제 1711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특히 우리나라 사찰의 벽화로는 유일한 법화경 ' 견보탑품 (見寶塔品) '벽화를 비롯하여, 벽체는 물론 내목도리 윗벽과 대량, 창방 등 내외부 전체에 골고루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 또한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어 조선 후기 사찰 벽화의 백미라고 평가되고 있다.
외벽에는 모두 17점의 벽화가 남아 있으나, 현재 훼손이 심하여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부는 모두 52면의 벽면에 벽화가 조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서벽에 묘사된 묘법연화경의 '견본탑품'의 내용은 3면으로 분할되어 있으나, 하나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므로, 이를 한 장면으로 볼 경우 총 50장면의 벽화가 도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묘법연화경' 견보탑품의 내용과 불상 뒷벽의 상단에 그려진 운룡도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48면에 그려진 '석씨원류응화사적'의 내용을 표현한 벽화들이다. 이들 내부 벽화들은 1715년에 총안(聰眼) 외 14명의 畵師들이 그린 것으로 보인다. 1792년에 영산전의 단청을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으나, 내부 벽화들에서는 개채나 보수 흔적을 살필 수 없고, 훼손 시 떨어져 나온 벽화 층을 살펴보아도 동일한 1개의 안료층을 보이기 때문에 1714년부터 1716까지 3년간 새로 영산전 건물을 중창할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위 사진의 기린도(麒麟圖)는 영산전 내부 동측면 창방에 그려진 벽화이다. 말의 형상을 한 머리에는 녹색으로 채색된 갈기와 더불어 뿔이 하나 솟아 있고, 황금색 몸통에는 적갈색으로 비늘을 표현하였다. 몸통 주위에는 적색으로 서기(瑞氣)를 표현하였으며, 앞쪽에 떠 있는 여의주를 쫓아 힘차게 달리는 듯한 생동감을 주고 있다.
기린(麒麟)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영수(靈獸)이다. 기(麒)는 수컷, 인(麟)은 암컷이다. 전한(前漢) 말 경방(京房)의 저서 ' 역전(易傳) '에는 .. 인(麟)은 몸이 사슴 같고, 꼬리는 소와 같으며 , 발굽과 갈기는 말과 같으며 빛깔은 五色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공상적 요소가 한나라 이후에는 더욱 추가되었는데, 봉황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출현하면 세상에 성왕(聖王)이 나올 길조라고 여겼다.
인(麟)은 이마에 뿔이 하나 솟아 있는데, 그 끝에 살이 붙어 있어 다른 짐승을 해치지 않는다 하여 인수(仁獸)라고도 하였다. 백수(百獸)의 영장이라는 점에서 걸출한 인물에 비유되었고, 뛰어난 젊은이를 기린아(麒麟兒)라고 한다. 또한 말과 비슷하여 준마로 비유되는 경우도 많으며, 말마(馬) 변을 붙여 기린(騏麟)으로 쓰기도 한다.
위 그림의 ' 석씨원류응화사적벽화 '는 영산전 내부 동서남북 상벽과 포벽에 그려져 있다. 상벽의 직사각형 화면에 그려진 25장면의 벽화는 모두 석가모니불과 관련된 것이고, 이에 대응되게 그려진 하단의 사다리꼴 비슷한 포벽에 그려진 벽화는 주로 고승들의 행적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러한 수직적인배치는 붓다와 제자 간의 위계를 고려한 배치로 여겨진다. 필선, 인물의 묘사, 채색 등 화풍에서 '견보탑품도'와 비슷한 동일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견보탑품 見寶塔品
견보탑품 벽화는 석가여래가 영축산에서 설법할 때 다보여래의 탑이 땅에서 솟아나 설법을 찬탄하니 그 탑 안으로 석가여래가 들어가 다보여래와 같이 앉았다는 '묘법연화경' 제 11품 '견보탑품'의 내용을 장엄하게 묘사한 우리나라 유일의 '견보탑품' 벽화이다. 특히 세밀한 인물 표현, 유려한 필선, 안정된 구도, 부드럽고 장엄한 색조 등에서도 뛰어난 화격을 보여준다.
영산전의 서쪽 벽면 중앙에 그려져 있는 벽화로,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권 4, 견보탑품 (見寶塔品)의 내용을 도상화한 그림이다. 중앙에는 다보불과 석가불이 병좌한 보탑을 크게 그리고, 그 좌우에 각각 2구 씩의 보살과 성중을 배치한 대칭구도를 이루고 있는데, 안정감 있는 구성이 돋보이고 있다.
보탑은 수많은 영락장식과 보령경(寶鈴鏡)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는데, 3층 탑신에 석가불과 다보불이 함께 마주보고 앉아 있으며, 그 좌우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합장한 4구의 보살과 비구가 석가모니와 다보불을 향하여 설법을 듣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보탑은 좌우가 엄격하게 대칭적인 엄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윗부분의 좌우에는 황색, 녹색, 적색의 구름으로 공간을 메우고 있어 장식적 효과가 돋보이고 있다. 석가불, 다보불의 좌측에도 구름에 싸여 설법을 듣고 있는 성중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의 날카로운 의습선이나 짙 채색 등은 병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지방보살도(1798년 작)의 권속들의 표현과 유사하다. 전반적으로 도식적인 표현법이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유일의 견보탑품 벽화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곧 보물로 지정될 것으로 예고되어 있다.
영산회상탱 靈山會上撑
보물 제13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을 그린 탱화이다. ' 탱화 '란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 법당에 걸 수 있도록 만든 불교 그을 말한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 10대 제자, 제석, 범천, 사천왕, 팔부신중 등의 무리가 석가모니불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다.
석가모니불은 높다란 수미단(須彌壇) 위의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에 앉아 있으며, 등 뒤에는 커다란 키 모양의 광배를 두르고 있다. 얼굴은 둥글고 이목구비는 단정하며, 굵은 목에는 세 개의 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손 모양은 악귀를 누르고 있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법의(法衣)는 적색 위주로 전면에 걸쳐 원무늬와 함께 잔잔한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으며, 기타 인물들의 무늬와 더불어 화려하면서도 온화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영산회상탱은 그림의 내력을 적어 놓은 기록에 의하면, 조선 영조 10년 (1734년)에 임한 (任閑)의 지휘 아래 민휘(敏煇) 등이 참여하여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선이 뛰어나고 선명한 색채의 사용과 잔잔한무늬를 채용함으로써 명랑한 분위기와 함께 부드러움을 제공해 주는 불화로, 18세기 전반기 불화의 흐름, 특히 임한(任閑)이 주도한 불화의 경향 파악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어 보물 제13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사전 藥師殿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극락보전과 마주하여 서 있다. 약사전의 처음 창건은 1369년 (고려 공민왕 18), 성곡선사(星谷禪師)가 세웠다고 하며, 그 뒤에 언제 보수하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18세기 후반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포는 건물 4면에 모두 둘러져 있는데 반해 여기서는 앞면과 뒷면에만 있는 약사전의 특징이다. 약사전 내부에는 중생들의 병을 고쳐주는 약사여래불과 불상 뒤에 약사후불탱을 봉안하였다.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보전 極樂寶殿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전각이다. 1369년 (고려 공민왕 18)에 성곡대사(星谷大師)에 의해 건립되었고, 조선시대에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비교적 작은 전각이지만 뛰어난 짜임새와 벽화로 인하여 중요성을 인정 받아 경남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부처로 무량수불(無量壽佛)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을 무량수전 또는 미타전이라고도 부른다. 아미타신앙은 살아서는 장수하고, 죽어서는 극락왕생을 바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소망을 근거로 하여 불교의 전래와 함께 가장 대중적인 신앙이 되었다.
극락보전 외벽 벽화 ... 나라연금강역사
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대체로 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 (守門神將)의 구실을 담당하며, 인왕역사(仁王力士)라고도 한다. 이 신은 석가여래의 온갖 비밀된 사적(事迹)을 알고, 500 야차신(夜叉神)을 거느리면서 천불(千佛)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보통 사찰 문의 왼쪽에는 밀적금강(密迹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서 있다.
이 중 '나라연금강'은 천상계의 역사로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 배가 된다고 한다.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金剛杵)라는 무기를 가지고 항상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으로, 부처님의 비밀한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밀적(密迹)이라고 한다. 이들의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형의 두광(頭光)이 있다.
이는 이들이 단순히 힘센 이가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고루 갖추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보통 이들 중 '나라연금강'은 입을 크게 열어 ' 아 '하고 소리를 내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흔히 입을 열고 있는 금강역사를 ' 아 금강역사 '라고 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금강역사를 ' 흠 금강역사 '라고 하는데, 이때의 '아'는 범어의 첫째 글자이고, '흠'은 끝 글자이다. 이 금강역사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을 상징하는 것이다.그리고 상의를 입지 않고 옷을 허리에 걸친 채 주먹을 쥐어 밖에서 안으로 한 팔을 올리고 한 팔을 내린 자세를 취하거나, 한 손으로 칼을 잡고 있는 모습 등을 취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금강역사상의 특징은 중국 및 일본의 것과는 달리 무섭다기보다는 악의없는 순진성을 읽을 수 있다는 데 있으며, 석굴암 입구의 금강역사상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극락보전 외부 벽화 ... 밀적금강역사
근본비나야잡사경(根本毘奈耶雜事經)에 의하면,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가 기원정사(祇圓精舍)를 세워 채화(彩畵)로서 장엄하려고 석가모니부처에게 물었을 때, 석가모니부처가 ' 문의 양쪽에 집장(執杖)의 야차(夜叉)를 만들라 '고 말한 것에서 유래된다. 깨지지 않는 금강석과 같은 마음을 내어서 사찰로 들어가는 사람마다 다시 한 번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기를 서원하고 가정으로 돌아갈 때는 보살도를 실천하는 보현행원을 깨어지지 않게 마음에 새겨 원하는 곳이 바로 금강문의 금강역사(金剛力士)이다.
고대 인도 신화에서 등장하는 신들로 본래 인도 귀족의 의상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중국으로 전해질 무렵에는 완전히 서역풍(西域風)의 갑옷으로 갈아입게 되었으며, 그 얼굴 모습도 분노하는 모습의 험악한 인상으로 굳어졌다. '서역'이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를 말한다. 지금이야 현대식 도로가뚫려 있기는 하지만, 세계의 지붕이라 하는 파미르고원에서 발원하는 큰 산들이 솟아 있는데다가 타르시막이 펼쳐지는 등 척박한 자연조건으로 사람들의 접근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곳이다. 옛날 현장스님이 이 곳을 지날 때, 귀신 소리가 귓전을 때리며 곳곳에 인골이 나뒹군다고 했을 정도이니, 그 살벌하고도 무시무시한 풍광을 짐작할 만하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죽음보다 무서운 악조건을 퇴치하는 강력한 무인(武人)의 모습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반야용선 般若龍船
극락보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외벽에 그려진 ' 반야용선도 '이다. 험한 바다를 건너 극락세계로 향하는 반야용선도는 배의 모습은 용머리 (龍頭), 뒤를 용꼬리 (龍尾)로 나타내었고, 그 앞 뒤에는 '인로왕보살'과 '지장보살'이 합장하고 있는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다. 이 그림은 비록 근세에 그려지기는 하였으나, 구도와 내용 면에서 보기 드문 우수한 작품이라고 한다.
통도사 극락보전 측벽에는 가장 구체적인 모양의 반야용선도가 그려져 있다. 반야용선(般若龍船)은 어지러운 세상을 넘어 피안의 극락정토에 갈 때 탄다는 배를 말한다. 반야(般若)란 모든 미혹(迷惑)을 끊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힘이나, 모든 법을 통달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반야용선도는 망자(亡者)를 위해 걸었던 그림으로, 그림에는 보통 좌로부터 극락의 주인인 아미타부처, 극락으로 인도하는 깃발을 든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반야용선과 망자(亡者)가 표현되며, 슬픔에 젖은 유가족이 그려지기도 한다. 즉, 반야용선이 그려진 것은 망자(亡者)가 아미타부처가 계시는 서방극락정토에 왕생(往生)하기를 염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 그림은 배의 앞뒤에 큰 돛을 각각 세우고, 전진하는 배의 위상을 나타내고 있다. 배의 중앙에는 장형(帳形) 지붕으로 건물을 짓고 보탑(寶塔)의 상륜부와 같은 모양으로 나타난다. 배의 아래로는 푸른 파도가 일고 있고, 넓은 大海를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그림의 하단부 우측으로 흰 연꽃을 구름 위로 솟아 내어, 이미 연화장 세계에 이르렀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용의 큰 힘, 푸른 파도, 보살의 원력 그리고 중생의 정토왕생 발원으로 이어지는 극적인 장면을 펼쳐주고 있다.
용선(龍船) 앞 선두에는 ' 인로왕보살 (引路王菩薩) '이 합장을 하고 서있고, 맨 뒤쪽에는 지장보살이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서있다. 인로왕보살은 망자를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영계(靈界)의 안내자이다. 육환장(六環杖)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 등 육도(六道)를 상징하며, 육도를 윤회하는 뭍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지옥문이 한 해에 한 번 열린다는 우란분절일에 육환장으로 지옥문을 열어 지옥의 중생들을 구제하다는 의미도 포함되고 있다. 여섯 개의 고리를 달았다고 해서 '육환장 (六環杖) '이라고 불리지만, 바로 그 고리에서 육환장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지장보살은 육도윤회(六道輪廻)의 현실 세계에 몸을 나투어 중생들을 구제하도록 석가모니부처로부터 수기를 받은 보살이라고 한다.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맹세가 누구보다도 크고, 위대한 분으로 그 원력의 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안락은 뒷전으로 돌리고, 지옥이든 천상이든 고통 받는 중생들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찾아가서 구원하는 보살이다.
용선의 중앙에는 비구, 아낙, 선비, 양반, 노인 등 여러 신분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용선에 몸을 싣고 있다. 배 안에는 각각 신분을 달리하는 여러 사람들이 극락왕생(極樂往生)한다는 기대감에 젖어 있는 모습으로 배에 몸을 싣고 있다. 그 중에는 이승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뒤를 돌아보는 사람도 있다. 배 아래의 파도는 잔잔하게 보이나 매우 깊게 느껴진다.
만세루는 법회나 밥당의 주요 행사를 열 때 사용하던 누각이다. 부처의 설법이 만세를 누린다는 뜻으로 '만세루'라고 이름 지었다. 만세루를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44년 (조선 인조 22)에 영숙화상 (靈淑和尙)이 중건하였다.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기둥의 높이가 길고, 기둥 사이가 넓어 대규모의 건물로 느껴진다. 가운데 칸 양쪽 기둥 위에 밖으로는 용머리를, 그 안쪽으로는 용꼬리를 새겨 출입구를 강조하였다. 내부 역시 기둥 위와 그 사이에 꽃 모양 받침의 장식이 있어 위엄이 느껴진다. 원래 누각은 땅에서 높이 들려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건물은 돌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그 이유는 건물이 높으면 많은 승려나 신도가 오르내리는 데 불편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원래 벽이 없고 기둥만 있던 것인데, 내부바닥이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라는 점을 빼고는 누각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전체적으로 짜여진 구조로 보아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이며,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3층석탑 三層石塔
영산전 앞에 서 있는 이 삼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으로 올린 모습이다. 기단에는 기둥 모양이 표현되고 특히 아래층에는 안상(眼尙)이 얕게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올려 조성하고, 지붕돌 처마의 곡선 처리와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붕돌 밑면에 새긴 4단의 받침도 탑의 외형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부분으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이 탑은 1987년 해체 복원 시 기단의 맨 윗돌에서 조선시대의 백자가 발견되어 이전에도 탑의 보수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전체 높이는 약 350cm이고,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부터 만나는 통도의 세번 째 문으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1305년 (고려 충렬왕 31)에 처음 지은 후, 조선 후기에서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이 (不二)란 둘이 아님을 뜻한다. 生가 死가 둘이 아니고 번뇌와 깨달음, 善과 불선(不善) 등 모두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닌 경지를 의미한다. 본래 ' 진리의 법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라는경전의 글귀에서 유래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다포식 팔작지붕이며, 동향의 전면 3칸에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게 되어 있다. 내부의 층고를 높게 만들어 대웅전 쪽으로의 경관을 유도하는 공간적 효과를 얻고 있다. 불이문을 통과하면 중로전(中爐殿)으로 진입하게 된다.
불이문 건물의 특징은 대들보 위에 두터운 솟을 합장재를 삼각형으로 깐 뒤, 그 부재 위에 장혀를 걸쳐 중도리, 하중도리, 종도리를 얹어 서까래를 받치고 있다. 이는 고식(古式)의 가구법(架構法)으로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중앙에는 대들보 대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를 받쳐 지붕의 하중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도 매우 독특하다.
중로전 中爐殿
중로전(中爐殿)에 있는 대광명전, 용화전, 관음전 등 3개의 전각 중 가장 크고, 가장 뒤에 배치되어 있는 대광명전은 그 웅장함이나 위엄에 있어서 대웅전 다음으로 우수한 건물이다. 대광명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법당으로,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전하지 않는다. 다만 1725년 (조선 영조 원년)에 수리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1968년에도 수리가 있었다.
중로전 일곽에는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용화전, 관음전, 해장보각 등의 종속건물이 있다. 중로전 지역은 석가모니가 열반하면서 남긴 법신상주 (法身常主) 사상에 의하여 형성된 법신불신앙 (法身佛信仰)이 바탕이 된 신앙형태를 지닌 가람이다. 중로전의 구성 원리는 대광명전, 용화전, 관음전이 하나의 중심축선을 기준으로 일렬로 배열된 축성 구현의 방법이다.
건물이 일렬로 배치되면 뒤의 건물을 가리게 되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앞의 전각의 규모를 줄였다. 넓이와 높이를 모두 줄여 기존의건물과 중첩되어 보이게 하였다. 따라서 '중로전'의 신앙적 중심은 용화전(龍華殿)의 미륵 신앙이며, 엄격한 계율의 수행을 요구하며 이의 건축적 특성은 강한 중축성의 구성을 가진다. 즉 불전, 탑, 석등의 구조물을 일렬로 배열하는 것이다.
중로전 구역에서 가장 웅장한 대광명전은 정면 5칸, 측면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의 뒤쪽에는 고주(高柱)가 세워져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25년 (조선 영조 원년)에 축환대사(竺環大師)가 중수하였다고 하나, 실제 건립연대는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내부에는 독존(獨尊)으로 봉안된 목조 비로자나불좌상과 삼신불후불탱,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목조 비로자나불좌상은 진경(眞景)시대의 양식적 특징인 단아한 사대부 형상을 보이고 있어 조선시대에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신불도 三神佛圖
보물 1042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불(佛)을 법신불 (法身佛), 보신불 (報身佛), 화신불 (化神佛 .. 또는 응신불)의 삼신불로 나누고 있다. 초기 불교에서의 불신(佛身)은 하나의 의미를 갖고 있었으나, 점차 교리가 발달하면서 삼신불이 보편화된 것이다. 부처의 몸이 다양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먼저 법신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만유의 본체를 형상화한 부처로 진리를 상징하므로 빛깔도 없고, 형체도 없다. 사찰에서는 비로자나불을 가리킨다.
보신불은 보살이 오랫동안 고행과 난행을 거쳐서 된 부처이다. 아미타불이 여기에 속한다. 이에 비해 응신불 또는 화신불은 법신불이나 보신불을 볼 수 없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직접 현세에 나타난 부처를 말하고,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불이 대표적이다.
이 '삼신불도'는 이러한 교리를 바탕으로 하여 가로 3.15m, 세로 3.6m의 비단에 채색하여 삼신불을 세 폭에 각각 그린 작품이다. 주존인 비로자나불은 양 어깨를 감싼 통견의 법의를 입고,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의미의 수인인 지권인을 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처럼 통견을 입은노사나불은 양 손을 위로 한 설법하는모습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이 삼신불도는 1759년 (영조 35)에 임한(任閑), 하윤(夏閏) 등이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석가모니, 아미타, 약사여래를 삼신불로 표현하였는데 비해 이 '삼신불도'는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여래를 삼신불로 표현하고 있는 드문 사례로서 미술사적으로 불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부처가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받아 앞으로 출현할 분을 미륵불이라고 한다. 미륵불이 출현하는 시기는 석가모니가 열반한 이후 56억7천만년이 지난 후이며, 이때까지 도솔천의 보살로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 따라서 미륵을 보살이라고도 하고, 부처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미륵불이 하생(下生) 할 곳은 용화수(龍華樹) 아래이므로, 미륵불을 봉안한 법당을 용화전 또는 미륵전이라고 한다.
통도사 용화전은 1369년 (고려 공민왕)에 건립되었다. 이후 1725년 (영조 원년)에 청성대사(淸性大師)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특징은 세부 장식에 용무늬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륵후불탱 彌勒後佛幀
이 미륵후불탱은 1798년의 작품으로, 불화로 표현될 때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궁에서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 미륵정토변상. 彌勒靖土變相 '과 용화수 아래에서 미륵불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는 모습의 ' 미륵하생도. 彌勒下生圖 '그리고 보관을 쓴 미륵보살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 미륵내영도. 彌勒來迎圖 '등 세가지 형식이 있다. 이곳 통도사 용화전의 불화는 바로 위의 두번 째 형식이지만, 화면에는 미룩불만이 묘사되어 매우 간략한 구도를 보이고 있으며, 조선시대 불화 중 미륵불이 불전(佛殿)의 후불탱으로 모셔지는 예가 매우 귀하여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에게서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받아 앞으로 출현하실 분을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한다. 미륵불는 시기는 석가모니불이 열반하고 나서 56억 7천만년이 지난 후이며, 이때까지 도솔천의 보살로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 따라서 미륵을 보살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실 곳은 용화수(龍華樹) 아래이므로 미륵불을 모신 법당을 용화전(龍華殿) 또는 미륵전이라고 한다.
서유기 벽화 西遊記 壁畵
서유기(西遊記)는 당나라 태종 시절, 현장(玄莊)스님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온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소설이다. 명나라 오승은(吳承恩)이 100회본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몇 장면이 용화전 내부 벽화로 그려져 있음이 확인되었다.
통도사 용화전 내부의 서유기도(西遊記圖)는 서유기이 내용 가운데 일부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내부 동측면에 3점, 서측면 벽에 4점이 그려져 있다. 지금까지 이들 벽화는 정확한 내용을 알지못하여 '인연설화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동측벽 면에 그려진 그림은 서유기 100회 가운데 94회, 12회, 87회의 내용을 묘사한 것이고, 서측면 벽에 그려진 것은 85회, 12회, 81회의 내용을 묘사한 것이다. 이 가운데 12회의 내용이 동, 서측면 벽 모두에 나누어 그려져 있어 그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용화전의 '서유기도'는 전체적으로 5회의 내용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은 모두 6점이 된다.
세존비각 世尊碑閣
통도사 세존비각(世尊碑閣)은 중로전(中爐殿) 영역에 있는데, 개산조당과 해장보각의 서쪽 편 금강계단 옆에 바짝 붙어 있다. 세존비각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서,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였고 형방은 가설하지 않았다. 공포(拱包)는 출목(出目)이 있는 주심포식으로, 살미첨자는 쇠서의 형태로 조각하였다. 세존비각은 1706년(숙종 32)에 승려 계파(桂坡)가 금강계단을 중수하면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소장하게 된 내력을 자세히 밝힌 비(碑)가 세워진 다음 지은 것이다. 세존비각 내부에 있는 비석의 높이는 약 2.5m, 폭 1m 정도인데, 밀양의 표충비처럼 간혹 땀을 흘린다고 한다.
비각 가운데에 귀신 문양을 조각하였고, 양쪽에는 단순한 꽃무늬를 조각한 비석 받침이 있으며, 천장에는 비석을 내려다 보는 용의 형상을 만들었다. 비석은 ' 娑婆敎主釋迦如來靈骨浮屠碑 . 사바교주석가여래영골부도비 '라는 또 다른 비명(碑銘)이 있으며, 비문은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이 썼다. 비문의 내용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가져온 일과 임진왜란 때에 사명대사가 석가모니 사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둘로 나누어 금강산에 있는 서산대사에게 보냈더니 서산대사가 하나는 묘향산에, 다른하나는 현재의 통도사 금강계단에 두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관음전 觀音殿
관음전은 통도사의 중로전(中爐殿)에 있는 3개의 법당 중 하나로 가장 앞쪽에 남향하고 있으며, 그 뒤로 용화전과 대적광전이 있다. 조선 영조 원년 (1749년)에 용암대사(龍岩大師)가 창건하였고, 그 후 여러 번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3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 모습이 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내부는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고 있으며, 벽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있다. 또한 따로 기둥을 세우지 않아 공간을 넓게 확보하였다.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1858년에 조성한 관음탱이 있고, 대들보에는 사자문과 하늘을 나는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사각석등 四角石燈
보물 제 471호이다. 통도사 용화전 앞에 서있는 것으로 정확하게 어떤 목적으로 세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석가모니의 옷과 밥그릇을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이어받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조형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명칭을 탑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의 여지가 있고, 유물의 성격상 ' 석조발우 (石造 鉢盂) '라고 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는 봉발대(奉鉢臺)라고 부르자는 의견도 있다.
보물 제 471호
석가모니부처의 상수제자(常隨弟子)인 가섭존자(迦葉尊子)가 석가여래의 발우(鉢盂)와 가사(袈裟)를 가지고, 미래에 성불할 미륵불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이때 가섭존자가 미륵불에게 바칠 발우이 모양을 화강석으로 조각하여 세운 것이 바로 이 봉발탑이다. 이 석조물은 우리나라에 하나 밖에 없는 조형물이다.
봉발탑은 석가모니의 발우를 바쳐 장차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할 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린다는 신앙상의 의미에서 미륵불이 봉안되어 있는 용화전(龍華殿) 앞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봉발탑이라는 명칭은 이 유물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여겨진다. 탑은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집이다. 그러나 봉발탑에는 사리를 모신 것도 아니고 그 형태에 있어서도 탑과는 전혀 다른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가섭존자의 예에 따라 불가에서는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전법(傳法)의 표로 생각하고 있다.
기본 형태는 받침부분 위에 뚜껑이 있는 큰 밥그릇을 얹은 듯한 희귀한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돌은 아래, 가운데, 윗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고를 세워 놓은 듯한 모양이다. 받침돌 위에는 뚜껑과 높은 굽 받침이 있는 그릇 모양의 석조물 등이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연꽃조각과 받침부분의 기둥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지만, 받침부분과 그릇 모양의 조각물과는 품격의 파이가 느껴지므로 동 시대의 작품인지에 의문이 간다고 한다. 전체 높이는 약 230cm의 크기이다.
통도사 상로전 (上爐殿) 지역에는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대웅전, 명부전, 응진전, 삼성각, 신령각, 일로향각 등의 종속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상로전 지역은통도사 가람의 중심구조를 이루고 있다. 즉 이 지역이 통도사의 창건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석가모니불에 대한 신앙 형태가 중심이 되고 있는 지역이 된다. 즉 건물의 배치가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일로향각, 응진전, 삼성각, 신령각 그리고 금강계단이 원형을 이루며 빙 둘러져 있는 것이다.
대웅전은 통도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지붕 모양이 ' 정(丁) '자 모양인 특이한 건물이다. 사방에 현판을 걸었는데, 동쪽에는 대웅전(大雄殿), 서쪽에는 대방광전(大方廣殿). 북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그리고 남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는 현판이 각각 네 곳에 걸려 있는 것이다.
금강계단의 현판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쓴 글씨라고 하며, 대웅전은 석가모니 세존을 모신 곳이고, 대방광전은 진리의 몸인 법신불이 상주하는 대화엄(大華嚴)의 근본도량이라는 이미이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적멸보궁이라 하였고, 사리탑은 깨트릴 수 없는 금강과 같은 계율의 근본도량이라는 뜻에서 금강계단이라 하였다.
신중탱 神衆幀
1804년에 그려진 이 탱화는 한때 통도사 '대광명전'에 봉안되기도 하였으나, 화기(畵記)에 따르면 '제석천룡탱'으로서 대웅전에 모신 탱화이다. 신중(神衆)이란, 고대 인도 신화 속에 등장하는 토속신이었으나 불교에 되면서 불법을 옹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신중탱은 대개 대웅전과 같은 주요 불전의 측벽에 봉안되명을 모신 단을 신중단(神衆壇)이라고 한다.
신중탱화는 구성요소에 따라 여러가지 유형으로 분류되기, 크게 천룡부 그리고 명왕부로 나눌 수 있고, 이 세가지 구성요소의 조합에 의해 제석탱, 천룡탱, 제석천룡탱 형식과 천붠룡부, 명왕부와 함께 한 화면에 그려지는 형식으로 크게 나누기도 한다. 따라서 이 신중탱은 제석탱 1폭과 천1폭이 모여 제석,천룡탱을 이루는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그림의 화면을 좌우로 구획하여 좌측은 각각 합장하고 있는 제석천(帝釋天)과 동진보살(童眞菩薩)을 중심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녹색과 붉은색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곳곳에 당초(唐草)와 연꽃무늬를 세밀하게 그려 넣고 있다. 우측은 합장하고 서 있는 4명의 천신(天神)과 팔금강(八金剛)이 상하 2단으로 배치되어 있다. 불꽃형태의 두광을 지니고 있는 팔금강의 활달하고 해학적인 표정을 통해 작가의 능숙한 필력을 엿볼 수 있다. 신중탱은 주로 무복(武服)을 입은 무사(武士)나 장사(壯士)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엄격한 도상(圖像)을 하는 불보살탱과는 달리 화사(畵師)의 의지에 따라 표정이나 자세가 달라진다. 신중탱은 불화를 그리는 사람의 기교와 감성이 가장 잘 표현되는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금강탱 金剛幀
1804년에 그려진 통도사 대웅전 금강탱은 일반 신중탱과는 달리 팔금강을 상하 2단에 나란히 배치하고, 그 한 켵에 4보살을 상반신만 표현한 구도가 특이하다. 특회 화면을 구획하여 제석,동진탱을 묘사한 신중탱과 함께 팔금강4보살을 동시에 그려 봉안하고 있는 매우 드문 경우이다. 화기에 따르면 이 금강탱은 본디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탱화이다. 화사는 계한(戒閑)비구를 비롯하여 성인(性仁), 탄잠(坦岑), 취엽(就曄), 영순(永淳)비구 등 7명이 참여하였다. 적흑황색이 화면을 주도하고 있고 필력을 잃지 않았다.
통도사 대웅전의 더욱 특징적인 것은 내부에 불상이 봉안되어 잇지 않고, 불상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佛壇)만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텅 빈 불단 뒤로 창이 넓게 나 있고, 유리창 너머로 금강계단이 보이고 있다.
불상을 봉안하고 있는 다른 대웅전과는 달리 통도사 대웅전은 금강계단에 모신 석가모니부처의 진신사리를 받들고 있으므로 불상을 다시 모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진신사리 (眞身舍利)를 모시고 있는 곳을 ' 적멸보궁 (寂滅寶宮) '이라고 한다. 대웅전과 금강계단은 별개의 건조물처럼 보이지만, 한 기능을 수행하는 동일한 구조물로 보아야 한다. 즉, 금강계단의 사리탑이 예배의 대상이고, 대웅전은 금강계단에 대한 예배장소인 것이다.
금강계단 金剛戒壇
통도사가 불보종찰(佛寶宗刹)인 것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게단(金剛戒壇)이 있기 때문이다. 금강계단 ... 계단(戒壇)은 승려가 계(戒)를 받는 장소 즉, 수계의식(受戒儀式)을 집행하는 장소이다. 금강(金剛)은 그 무엇으로도 깨트릴 수 없이 단단하고 보배롭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예리하다. 단단하고 보배로운 것은 바로 부처의 몸, 진신사리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戒를 받음은 곡 부처에게서 직접 계를 받는 것이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 (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나란타 사원의 금강계단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금강계단은 인도에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 당나라 때 도선(道銑)이 정업사(淨業寺)에 이 계단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불사리를 얻어 귀국한 후, 통도사를 창건하면서 이 계단을 설치한 것이 최초이다. 당시의 계단 형태는 인도, 중국의 것과 유사하였으리라 추정하고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통도사의 계단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친 것으로 우리나라 전통양식으로 정착한 형태이다.
7세기,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 (舍利)를 가져와 세운 금강계단 (金剛戒壇)의 현재 모습은 정방형의 석조 구조물로, 2개층의 기단 위에 종(鐘)을 거꾸로 엎어 놓은 듯한 부도, 즉 사리탑을 얹어 놓았다. 그리고 그 바깥은 또 정방형의 석조 울타리를 둘러 놓았다. 1층 기단 한 변의 길이는 10m 정도,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였고, 각 면석에는 불상을 새겨 놓았다. 2층 기단에는 비천상이 각 면석마다 부조(浮彫)되어 있다. 2층 기단 중앙의 부도는 다시 연꽃의 받침돌 위에 올려져 있다.
짐작컨데, 2개 층의 기단과 그 위의 사리탑은 그대로 불교의 삼보(三寶)를 상징하고 있다. 사리탑은 그 자체로 불(佛)이요, 1층과 2층의 기단은 각각 법(法)과 승(僧)을 나타낸다. 계단 건축의 모범을 제시하였던 7세기 중국 도선스님의 저작 ' 계단도경 (戒壇圖經) '이 3층의 기단으로 삼보(三寶)를 상징할 것을 주문하였지만, 통도사 금강계단은 이미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니, 하나의 층을 더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을 터이다.
금강계단때문에 통도사 대웅전에는 여느 사찰과 다른 모습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를 모시는 전각, 하지만 통도사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 대웅전에 인접해 금강계단, 부처의 진신사리가 있기 때문이다. 부처의 본 몸이 있는데, 그 상(像)은 만들어 무엇하나. 대웅전 내부에 들어가면, 불단 쪽의 벽체에 옆으로 긴 창(窓)이 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금강계단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금강계단에서 반사되어 들어오는 빛이 신비하여 신심(信心)을 더욱 북돋우고 있는 것이다.
자장율사와 금강계단
자장율사는 636년(신라 선덕왕 5),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643년 귀국한다. 부처님 진신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모셔온 자장스님은 서라벌의 황룡사와 울산의 태화사 그리고 통도사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통도사에는 금강계단에 모셨다고 한다. 금강계단이 설치되기까지의 이야기는 '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 '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 종남산 (終南山) 운제사 (雲際寺)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은 승려로 화하여 가사(袈裟) 한벌과 진신사리 100과(顆)와 불두골(佛頭骨)과 손가락 뼈 (指節), 염주, 경전 등을 주면서 말하였다.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袈裟)이고, 또 이 사리(舍利)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뼈이다. 그대는 말세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沙門)이 될 것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남쪽 취서산 (鷲栖山 .. 영축산의 다른 이름) 기슭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산지(神地)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毒害)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들이 살고 있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 ... 물, 바람, 불의 재앙)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느니라.
자장율사는 귀국하여 선덕왕과 함께 취서산을 찾아서 독룡들이 산다는 연못에 이르러 용들을 위해 설법을 하였다. 그런 뒤 자장은 못을 메우고 그 위에 계단을 쌓았다. 이때 자장에게 항복한ㄷ ㅗㄱ룡은 모두 아홉마리이었는데, 그 가운데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오직 한 마리만은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맹세하였으므로, 자장은 그 龍의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그 용을 머물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 (九龍池)인데, 규모가 작은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수량(水量)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금강계단에 봉안된 사리는 그 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변화를 겪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려 초에 사리와 가사(袈裟)를 덮은 석종이 개봉된 사실이 있었다. 문헌상으로 볼 때 사리에 손을 댄 최초의 기록인 것이다... 후술
삼국유사의 기록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조 (前後所將舍利條)에 의하면, ' 선덕여왕 때인 정관(貞觀) 12년 계묘년(癸卯年 .. 643년)에 자장율사께서 당나라에서 불두골(佛頭骨), 불치(佛齒), 불사리(佛舍利) 100립(粒)과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한 벌을 모셔 왔다. 이중 사리를 삼분(三分)하여 일부분은 황룡사탑(皇龍寺塔)에, 일부분은 태화사탑(太和寺塔)에, 일부분은 가사(袈裟)와 함께 이곳 통도사에 두었다 '는 기록이 있다. 자장율사는 못을 메우고, 그 위에 통도사를 세웠다고 한다. 금강계단 사방의 신장상, 천인상 등은 고려와 조선시대 중수과정에서 새롭게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 사진은 통도사가 보관하고 있는 석가모니부처의 가사(袈裟)이다. '통도사사적기'에서는 이 가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가사(袈裟)가 희기(稀奇)하고 영이로운 것은 세존(世尊)이 재세 시에 교화를 펼 때 제석천왕이 천상의 공장(工匠)을 거느리고 방(方), 원(圓), 장(長), 단(短), 광(廣), 협(俠)을 일일이 법대로 짜서 자르고 기워 만들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두루 사방의 중생을 교화하는데 복전(福田)인 가사를 항상 입으시고 중생을 제도하도록 이를 바쳤다. 그러므로 인간의 보배가 아니고 천상의 보배로운 옷이다.
위 사진은 통도사의 창건주인 자장율사의 가사(袈裟)이다. 이 가사는 선덕여왕이 재세 시에 지어준 것으로 자장율사의 입적 후 관음전 등에서 보관되어 오다가, 석가모니의 가사와 함께 통도사 설법전에서 상시 전시하고 있다. 현재 두 벌의 가사는 방습, 항온과 보안장치가 마련된 유리관 내부에 보관되어 전시되고 있다.
적멸보궁 寂滅寶宮
위와같은 금강계단의 역사를 보면 현재 금강계단에 봉안되어 있는 사리는 자장율사가 봉안할 당시의 사리가 그대로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으며, 그 數도 많이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대로라면 사리는 數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고 하니, 그것을 확인하려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신앙은 산앙으로서 존재할 뿐이니까...
적멸 (寂滅) ... 산스크리트어 '니르나바 (nirvna),를 한자로 옮긴 말이다. 번뇌의 불을 끈 상태로 깨달음을 이르었음을 의미한다. 불자들은 부처님이 괴로움을 여의고 열반 즉, 적멸을 이루었음을 믿는다. 비롯 석가모니부처의 육신은 이 세상과 인연을 다하였지만, 정각(正覺)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줄여서 ' 보궁(寶宮) '이라 한다.
진신(眞身)을 모셨기에 불상을 따로 조성하지 않는다. 적멸보궁 또는 적멸궁으로 불리는 이 법당 뒷편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 (통도사), 탑 (정암사, 법흥사, 봉정암), 탑비 (塔碑 .. 상원사)를 모셔 놓는다. 자장율사에 의해 모신 사리가 현존하는 적멸보궁은 모두 다섯 곳이다. 양산 통도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강원도에 있다.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중대, 영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등이다. 이를 ' 5대 적멸보궁 '이라고 한다.
불사리 佛舍利
통도사 금강계단에는 석가모니부처의 정골(頂骨)과 지절(指節 .. 손가락 뼈) 그리고 치아사리(齒牙舍利), 금라가사(金羅袈裟)가 봉안되어 있다. '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 '에 의하면, 원래 통도사가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는데, 자장율사는 연못을 메운 후 그곳에 금강계단을 쌓고 통도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사리를 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1235년 (고종 22)에 상장군 김리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臾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의 석종(石鐘 ..부도)를 들어내고, 석함 속의 사리를 예경하였다고 한다. 이때 석함 (石函) 속에 있는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 유석 '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통(水晶桶)을 기부하여 그곳에 사리를 보관하였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문헌상으로 볼 때 사리에 손을 댄 최초의 사례로 보인다. 이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고려조에 들어와서 연거푸 두 명의 안렴사(按廉使)가 돌 뚜껑을 열고 예배를 하였는데, 앞사람은 큰 구렁이가 함 속에 있는 것을 보았으며, 뒷 사람은 큰 두꺼비가 돌 위에 쭈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후부터는 이것을 들지 못하였는데, 근래에 상장군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 (臾碩)이 고묘조 (高廟朝 .. 고려 고종 때) 때에 왕의 명령을 받고 강동지방을 지휘하다가 임금의 신임장을 가지고 절에 가서 그 돌을 들고 예배를 하고자 하니 절의 중이 예전 일을 빙자하여 이를 꺼리는지라, 두 사람이 군사들을 시켜 기어코 이것을 들었더니, 안에 작은 돌함이 있고, 함 속에는 겹으로 유리통을 채우고 통 속에는 다만 사리 네 개가 있어 예배를 하게 해 두었다. 그 통에는 조금 상하여 터진 곳이 있었는데, '유석'이 마치 수정함 한개를 준비하였던 것이 있어서 이것을 시주하여 함께 간직하도록 하고, 이 일을 기록해 남겼으니, 이 해가 바로 강도(江都)로 수도를 옮긴 지 4년 째가 되는 을미년(1235년)이다. 고기(古記)에는 사리 100개를 세 곳에 나누어서 간직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다만 4개 분인 것을 보면 사리는 원래 삼라에 따라서 숨고 드러나서 많게도 보이고 적게도 보이는 것이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아니다.
사리를 지키다
1377년(고려 우왕 3)에 이르러서 왜적이 침입하여 불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당시 통도사의 주지이었던 월송대사(月松大師)가 깊이 감추는 일이 있었고, 다시 1379년에 왜적이 다시 공격하자 월송대사는 불사리를 모시고 수도 개경까지 피신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의 전후 사정은 목은 이색(李穡)이 지은 ' 양주통도사석가여래사리기 (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記) '에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불사리와 금강계단은 더욱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영남지방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들은 1592년 임진왜란과 함께 본격적인 약탈행위를 감행, 불사리와 계단도 피해를 입어 왜적에게 불사리를 약탈 당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이때 동래에 사는 백옥거사(白玉居士)가 왜적에게 잡혀있다가 사리와 영골(靈骨)을 찾아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그후 1603년(선조 36), 의승장 사명대사(四溟大師)는 왜적의 침탈을 우려하여 사리를 크고 작은 두 개의 함(函)에 넣어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보냈다. 서산대사는 ' 영남이 침해 당하고 있는 이 마당에 동해변에 있는 이곳 금강산도 안전하지못하다. 영축산은 문수보살께서 친히 계단을 설치하라고 부촉한 장소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믿음의 보배인 사리가 목적이 아닐 것이다. 옛날 계단 터를 수리하여 사리를 봉안하라 '라고 하면서 한개의 함을 불려보내고 다른 하나의 함은 태백산의 갈반사(葛盤寺 .. 현재의 정암사로 추정)에 봉안하게 하였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명을 받고 계단을 수리하여 사리를 안치하였다.
이곳 통도사 명부전은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건립되었으며, 중건과 중수의 기록은 알 수 없으나 '통도사사적기'에 따르면 1760년(영조 36)에 춘파대사(春波大師)가 개건(改建)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범종루에 걸려 있는 '명부전중수기'에 의하, 1887년(고종 24) 봄에 감방(甘房)에서 실화로 인하여 원통방(圓通房), 화엄전(華嚴殿)과 함께 명부전이 회록(回祿)되자, 다음 날 보집원(普集院)에서 대신들과 의논하기를 ' 방료(房寮)의 회복이 하루라도 급한 것은 아니지만, 저승에서도 제도 받을 중생들이 노좌(露坐)하여 있는 것은 어찌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장로 호성화상(虎惺和尙)의 주관으로 산 내 18개의 방사 및 암자에서 시주를 받고 표충사 등 9곳의 다른 사찰과 전 승통 문우대사(文佑大師), 정일화상(定日和尙) 등 수 많은 도속(道俗)의 희사가 이루어져 역사를 모두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도사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그리고 염라대왕(閻羅大王) 등 시왕(十王)을 봉안한 전각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으로, 낮은기단 위에 주초(柱礎)를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양 퇴칸은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어 앞면 어칸 및 양 협칸의 문이 분합문임에 비하여 양 퇴칸은 판장문을 달았다. 또한 건물의 외벽이 흙벽이 아니라 나무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붕의 하중을 받치기 위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공포를 이루는 세부적인 구조물이 많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말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절충적 수법이다.
명부전 벽화 ... 삼국지
통도사 명부전 서측면 포벽에는 누구나 책으로, 영화로 보고 읽었던 '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의 삼고초려도 (三顧草廬圖)와 탄금주적도 (彈琴走賊圖)의 두 장면을 그린 벽화가 전하고 있다 (위 사진). 그러나 얼핏 보면 선과 채색이 부분적으로 지워져 있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하여튼 세밀한 삽화 형식은 아니지만, 삼국지의 두 대목을 압축하여 민화적인 수법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삼고초려도 三顧草廬圖
후한 말기 한나라의 부흥을 위하여 애쓴 '유비'는 의형제를 맺은 관우, 장비와 같은 강한 군사력이 있으면서도 조조(曺操)에게 여러 차례 패하였다. 유비는 그 이유를 적절한 전술을 발휘할 지혜로운 책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깨닫고 유능한 책사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어느날 유비는 사마휘(司馬徽)를 찾아가 유능한 책사를 천거해 달라고 부탁하자, 사마휘는 복룡(伏龍)과 봉추(鳳雛) 가운데 한 사람만 선택하라고 하였다. 이에 유비는 복룡이 '제갈량'임을 알고 관우, 장비와 함께 예물을 싣고 양양(襄陽)에 있는 복룡의 집으로 찾아 갔으나 그는 집을 비우고 없었다. 그러기를 두 차례, 마침내 세 번째 찾아 갔을 때 비로소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 군사(軍師)로 모실 수 있었다.
위 벽화는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째 찾아간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화면의 윗쪽에는 ' 차간유복룡봉추한제삼고 ... 此間有伏龍鳳雛漢帝三顧 '라고 쓴 화제(畵題)가 있는데, 여기서 '복룡'은 제갈량이고, '봉추'는 방통(龐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나라 황제가 둘 가운데 하나를 세 번 방문하였다 ..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화면 중앙에 ' 남양초당 (南陽草堂) '이라는 편액이걸린 초가집이 있고, 집 안에는 낮잠을 자고 있는 제갈량을 묘사하고 있다. 마당에서는 동자가 손가락을 들어 초가집을 가리키고, 흰 학 한마리가 날개짓을 하고 있는데, 이는 주인의 고고한 인품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사립문 밖에는 '유비'와 갑옷을 입은 한 사람이 서서 집안에 주인이 있는지를 묻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도 내용의 중심이 되는 초가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제갈량, 마당의 동자, 사립문 밖에 서있는 유비 일행만 세심한 채색을 보이고 있고, 그 외 배경은 형식적으로 처리하였다.
탄금주적도 彈琴走賊圖
제갈량은 '가정'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하는 한편, 스스로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서성(西城)으로 가서 군량미 운반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나갑자기 사마의(司馬懿)의 15만 대군이 '서성'으로 몰려온다는 긴급보고를 받았는데, 이때 성안의 군사는 2,50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깃발과 북 등을 치우고 군사들을 시켜 성문을 활짝 열어 성문 입구와 길을 청소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제갈량 자신은 망루에 올라 거문고를 타기 시작하였다. '사마의'는 군대를 이끌고 성 앞에 도착하여 이 모습을 보고, 제갈량이 복병을 두고 자신을 유인하려는 속임수라 생각하여 바로 군사를 후퇴시켰다. 이렇게 하여 제갈량은 간신히 위급을 면할 수 있었다.
이 '탄금주적도'는 명부전 서측면 포벽에 그려진 벽화로, 한서문(漢西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성문 위 2층 누각에서 한 인물이 거문고를 타고 있고, 성문에서는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성벽 위에는 금고(金鼓), 순시(巡視), 청도(淸道)라고 쓴 깃발 아래 머리만 드러낸 군사들이 표현되었고, 성의 안쪽으로는 높은 봉우리 아래 깃발이 그려져 있다.
누각의 지붕 위로는 절벽이 있는데, 이 절벽에 반쯤 가려진 둥근달이 그려져 있어 배경이 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성문 밖으로 펼쳐진 숲에도 세 곳에서 깃발과 더불어 머리만 드러낸 군사들의 모습이 보여, 성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소설의 이야기와 벽화를 비교해 보면, 성문 위 누각에 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는 인물은 제갈량이고, 성문 밖에서 청소하는 인물은 그의 명령을 받은 군사이다.
응진전은 1677년(숙종 3)에 지섬대사(智暹大師)가 창건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중기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친 것이다. 지대석, 면석, 갑석 등을 고루 갖추어 고풍스러운 멋이 느껴지는 기단 위에 동향으로 앉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비교적 간결하지만 주심포 형식으로된 공포는 다포식을 많이 수용한 절충양식을 보여 준다. 내부에는 중앙의 석가여래좌상을 증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상을 봉안하고 있다. 다시 그 좌우로 16나한상과 범천, 제석천 등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1775년에 유성(有誠)스님이 조성한 석가모니후불탱과 1926년에 조성한 16나한탱이 봉안되어 있다. 특히 이 건물에서 주목되는 것은 안팎에 그려진 벽화들로서 외벽에는 달마도와 금강역사상이, 내부에는 나한, 학, 호랑이, 독수리 등이 그려져 있다.
응진전 주련 應眞殿 柱聯
有山有水乘龍虎 유산유수승용호
無是無非伴竹松 무시무비반죽송
曾昔靈山夢授記 증석령산몽수기
而今會坐一堂中 이금회좌일당중
산수간에 용과 호랑이를 타고 / 시비없이 소나무와 대나무를 벗하네 / 일찍이 영산회상에 수기를 받은 분이 / 지금 한 집안에 다 모여 있네.
응진전은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 현세불인 석가여래,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두 모시고 16나한과 함께 봉안하고 있는 전각이다. 주련의 내용 중 첫 구절과 두번 째 구절은 이미 깨달은 수행인에게 있어 걸릴 것이 없는 경계를 표현하고 있다. 용이나 호랑이 소나무, 대나무 등이 주는 초월적 이미지들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그리고 뒷 구절은 이미 부처가 되기로 예약 (授記)을 받은 분들이 이 전각에 모두 모여 있다는 뜻으로 응진전의 거룩함을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달마도 달마도
응진전 외벽에 그려져 있는 '달마도'는 세밀한 구도와 묘사가 돋보인다. 청도 운문사의 비로전 등 국내 사찰에서도 볼 수 있는 달마도는 중국 선종의 개조(開祖) 달마스님을 그린 그림이다. 달마스님은 5세기 경,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서 일찍이 출가하여 반야다라(般若多羅)에게 불법을 배워 대승선(大乘禪)을 제창하였고, 스승의 부촉에 따라 선법(禪法)을 펴고자 중국으로 왔다.
현존하는 국내 사찰 벽화 가운데에서도 이곳 응진전 외부 벽화 '달마도'는 우수작으로 평가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달마도는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작품으로 기암괴석과소나무에 둘러 쌓인 깊은 산 속에서 달마스님과 제자가 마주한 모습을 담고 있다. 크기는 가로 271cm, 세로 143cm이다.
달마스님은 왼쪽 옆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둥근 멍석 위에 앉아 있는데, 제자를 향하여 왼손에 들고 있는 발우(鉢盂)를 내밀고 있다. 맞은 편의 제자는 스승에 비해 작게 묘사되었으며, 마치 길을 가다가 들어선 듯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앞으로 내민 자세에서 오른손으로 발우를 받으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황토색 배경에 먹선(墨線)만을 사용하므로써 달마스님의 선풍을 표현하였고, 발우와 제자의 옷자락만을 붉게 채색하였다. 응진전 외부 서측면 토벽의 중앙에 그려져 이 벽화는 서역인(西域人)임을 표현하려고, 달마스님의 부리부리한 큰 눈과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비롯하여 수염의 표현, 소나무의 세밀한 묘사, 빠르고 활달한 필치 등 기량이 뛰어난 화승(畵僧)의 솜씨가 돋보이고 있다.
달마는 왜 무섭고 추한 얼굴이 되었나.
달마스님이 고향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가기 위해 항구에 이르렀다. 달마가 항구 마을을 지나던 중, 이무기가 썪어 냄새가 진동하기에, 자신의 육신에서 영혼만 잠시 나와 이무기의 몸으로 들어가 이무기를 큰바다로 끌고 가서 빠트리고, 영혼만 다시 나와 원래 자기 육신을 찾아서 이전의 장소에 와보니, 육신은 없고 험상궂게 생긴 시체가 하나 있는지라, 급한대로 달마의 영혼은 시체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머리를 내려가 내 모습이 누구냐고 묻고, 곤륜산의 신선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곤륜산으로 들어가 그 신선을 찾아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신선은 용서를 빌며 자신의 모습이 너무 추해서 자신의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줄 수 없어서 그랬노라고 용서를 빌었다. 이에 달마스님은 그대로 자신의 육신을 사용하라 허락하고 자신은 험상궂은 모습으로 그대로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응진전 내부 동측면 토벽에는 백호도가 그려져 있다. 그림은 가로 266.5cm, 세로는 135.5cm의 크기이다. 백호는 네 발을 벌린 채 왼쪽을 향하고 있는 자세에서 오른쪽을 바라보며 포효하는 듯 입을 크게 벌린 모습이다. 하얀 몸통에 흑색 줄무늬를 그렸는데, 실선을 사용하지 않고 무늬와 털의 표현으로 윤곽선을 그린 점이 독특하다.
얼굴 표현은 민화적 표현이 강하며, 부릅 뜬 눈에는 다이아몬드형으로 눈동자를 그려 넣었다. 커다란 입의 가장자리에 삐져나온 날카로운 이빨을 표현하여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전반적으로 묵화 느낌의 색상을 지니고 잇는 가운데 입과 눈 부분은 적색으로 나타내었다. 그림의 상태는 양호하나 벽체의 갈라짐 현상이 심각하여 부분적으로 흙을 메운 흔적이 완연하다.
구룡지 九龍池
사찰의 연기 설화는 사찰을 대상으로 거기에 얽힌 창건, 중건, 폐사 혹은 고승, 보살, 부처 등 불교적 인간을 등장시켜 불교적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는 설화이다. 양산 지역의 사찰 연기 설화는 주로 통도사와 내원사에 관련된 설화가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고승으로는 자장율사와 원효대사의 신이(神異)한 행적을 담고 있는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곳에 통도사를 창건할 때 이곳에는 구룡지(九龍池)라는 큰 못이 있었다. 이 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자장율사가 주문과 경을 읽으며 아홉마리의 용들에게 이 못을 떠나 달라고 하였지만, 龍들은 응하지 않았다. 자장율사가 종이에 ' 화(火) '자를 써서 하늘로 날리며 법장으로 못 물을 저으니 못 물이 끓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용 세마리는 이미 죽었는데 그것을 집어던지니 부딪친 바위에 피가 묻어서 후세 사람들이 이를 용혈암이라고 하였다. 나머지 다섯 마리는 통도사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달아났으므로, 그곳을 오룡곡(五龍谷)이라 부른다. 마지막 눈 먼 용은 통도사를 수호할 것을 맹세하고 조그마한 못을 만들어달라고 애원하였다.
사찰의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용들이 대부분 불법과 나라를 수호하는 선룡(善龍)인데 비하여, 통도사 창건에 나타나는 용은 절의 창건을 방해하는 독룡(毒龍)이다. 이처럼 독룡이 저항하는 이야기는 의상의 구룡사와 도선의 옥룡사 창건 설화에도 전하고 있어, 그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재래 민간신앙에서 용은 물을 지배하는 수신으로 신앙되면서 많은 용신신앙(龍神信仰)을 발생하게 하였다.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할 때 방해가 되었던 용은 바로 재래신앙 속의 용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통도사가 있는 영축산의 상류에는 신라시대부터 용신제를 모시는 ' 가야진사 '가 있어 이 지역이 재래 용신신앙이 강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용혈암과 구룡지의 유래는 초기 불교의 전파 이후에도 세력을 잃지 않았던 재래신앙과 외래 종교인 불교와의 갈등 그리고 결국 재래신앙이 불교로 습합(習合)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설화이다.
구룡지(九龍池)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지만,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개,보수 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은 일제강점기 때 정비된 것이다. 이러한 창건설화를 통하여 당시 강력했던 지방세력에 대한 중앙집권세력의 제압을 확인할 수 있는데, 설화와 관련된 내용을 이렇듯 정치적 측면으로 해석하는 경우은 처용설화를 비롯하여 비일비재하다.
삼성각 三星閣
구용지의 서쪽에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칠성여래, 나반존자, 산신을 함께 모시고 잇는 전각이 칠성각(七星閣)이다. 통도사 삼성각에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성여래(七星如來)와 함께 지공(指空)스님, 나옹선사, 무학대사를 봉안하였다. 세 스님은 조선 초에 우리나라의 불교를 융성시킨 성인으로 三大和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곳 통도사의 삼성각은 조사당(祖師堂)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에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하여 공덕산(公德山)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에게서 득도한 헤근(惠勤 .. 나옹선사) 그리고 중국을 거쳐 고려에 온 인도의 승려 지공(指空), 18세에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자초(自超 .. 무학대사) 등 3대 호상의 진영을 봉안한 곳이다.
이곳 통도사의 삼성각(三星閣)은 1870년 (고종 7)에 영인대사가 조성하였고, 현재 건물은 1935년에 경봉스님이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단칸의 규모가 작은 건물로 주심초계 익공식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건물 내부 중앙에는 삼성탱을 안치하고 오른쪽에는 칠성탱, 왼쪽에는 독성탱을 안치하였다. 3대 화상에 대한 추앙과 구복(求福) 그리고 깨달음을 기원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
칠성(七星)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이는 주군(主君)으로 인간의 복과 명(命)을 맡고 있다. 독성(獨聖)은 나반존자(那畔尊者)라고도 하는데, 12 인연(因緣)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 성인의 지위에 올라 독성(獨聖)이라 한다. 그러므로 삼성각은 삼성(삼성 .. 지공, 나옹, 무학대사 등)을 추앙하는 외에 인간이 수복(壽福)과 이치의 깨달음을 기원하는 법당의 구실도 하고 있다.
선각 금강역사상 線刻 金剛力士像
하대석과 간석(竿石)으로 구성된 대석(臺石) 위에 발우형(鉢盂形)의 그릇을 얹어 놓은 특이한 형태의 석탑이다. 절에서는 석호(石壺) 또는 의발탑(衣鉢塔)이라고도 한다. 이 넓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는 원형의 복련(覆蓮) 하대석이 놓여 있는데, 옆면에 돌린 두 줄의 선을 중심으로 아랫부분에 탱주 모양의 기둥을 8개 새겨 넣었으며, 윗부분에는 4중의 중판 복련을 조각하였다.
하대석 윗면에는 3단의 얕은 굄이 간석을 받치고 있다. 간석(竿石)은 부등변 팔각형으로 중앙에 융기된 테두리를 돌렸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마찬가지로 8엽의 앙련(仰蓮)을 조각하여 서로 마주 보게 하였으며, 윗면에는 3단의 얕은 굄이 있다. 상대석 위에 있는 석조발우(石造鉢盂)는 뚜껑이 덮여 있고, 그 밑에 굽받침이 새겨져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개산조당(開山祖堂)과 해장보각(海藏寶閣)은 용화전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개산조당'은 '해장보각'의 조사문으로 솟을 삼문(三門) 형식이며, 해장보각은 자장율사(慈藏律師)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조사당(祖師堂)이다.
개산조당과 해장보각은 1727년(영조 3)에 초창되어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00년(고종 4)에 고산대사가 크게 수리한 후의 모습이라고 한다. 개산조당은 3칸의 건물로 중앙 칸이 양측면 칸보다 높은 솟을삼문이다. 3칸 모두 두 쪽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해장보각(海藏寶閣)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앞쪽에 퇴칸을 달고 있는 형식이다. 내부 앞쪽에는 내진 기둥이 배치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는 '자장율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주변에는 고려대장경 1,234권이 있다. 해장보각이라는 이름은 '대장경'의 보관처가 바다의 용궁이며, 그 내용이 바다 속의 수많은 보배와 같다는 의미이다.
자장율사의 진영
자장율사 진영(眞影)의 크기는 가로 96cm, 세로 146cm이며, 1804년에 조성되었다. 얼굴가 몸이 약간 오른쪽을 향한 채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전신 좌상으로, 긴 술이 달린 불자(拂子)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긴 술의 끝부분을 받쳐들고 있는 모습이다. 화면의 상단 우측에 주색 바탕에 묵서로 ' 제신라국사자장율사지진 (帝新羅國師慈藏律師之眞) '이라는 화제(畵題)가 적혀 는것이 보인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의자 앞 받침대에 벗어 놓은 신발의 색깔과 문양이 화려하다. 배경을 어두운 녹색으로 처리하였는데, 붉은 색의 의자가 잘 조화된 색의 대비를 보이고 있고, 녹색의 장삼과 붉은색의 가사(袈裟)가 또한 뛰어난 색의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녹색과 붉은색을 기본 색상으로 하여 화려한 듯 단조로운 구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해장보각 벽화 .. 호작도 (虎鵲圖)
해장보각 외벽에 그려진 민화풍의 까치 호랑이 그림이 친숙하게 다가오고 있다. 길게 뻗어 잇는 호랑이 꼬리와 까치를 바라보고 있는 호랑이의 자세는 마치 까치를 놀리고 있는 듯하다. 호랑이는 벽사(벽邪 .. 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침)를 상징하고 까치는 기쁨을 상징하지만, 호랑이와 까치가 아우러져 신년보희(新年報喜) 즉, 새해를 맞아히여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도품석당 道品石幢
통도사 개산조당 앞에는 두 개의 석물이 있다. 왼쪽에는 석탑이, 오른쪽에는 돌기둥이 보인다. 이 두 개의 석물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록은 없다. 왼쪽 석탑은 용화전 앞의 봉발탑이나, 관음전 앞의 석탑과 기둥의 문양이 유사하다. 그러나 돌기둥은 그렇지 않다.
이 돌기둥은 몸통과 그 위에 얹은 돌이 두 개이다. 탑으로 보면 2층탑이다. 각 돌은 팔각형이다. 그러나 그 팔각형 돌의 모양은 서로 다르다. 각 면의 넓이가 다르다. 긴 팔각형 기둥에 정팔각형의 돌과 그보다 큰 팔각형 돌이 각이 엇갈리게 얹혀 있다. 보는 사람은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아랫기둥은 내려갈수록 폭이 약간 좁다. 그래서 안정감이 느껴지며 불균형의 균형이다. 총 24면 중, 23면에 용어로는 23개, 낱자로는 50개의 한자어가 새겨져 있다. 높이는 약 1.4m이다.
첫 번째 상대석은 각각 마주보는 면의 길이가 같다. 한자 두 글자와 4글자 길이로 각각 4면환전한 팔각 아니고 다소 글자 수만큼 대칭적이다. 각 면은 아래쪽으로 약간 경사지게 다듬어져 있다. 윗면은 평평한데 윗면을 보면 갈라진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야간에 법회가 있을 경우에 불을 밝힐 수 있도록 만든 화광대와 비슷한 형태인 것으로 보아, 불교행사가 있을 때 어떤 물건을 올려놓는 용도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또 도품석당이 통상 학승들의 수학하는 강당 앞에 위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수행을 격려하는 상징성과 석당에 경전의 내용이나 불명을 수를 놓아 걸어두었던 것으로 보아, 부처님에 대한 공양봉구로써 항마(降魔)의 법기(法器)로 사용하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상대석에는 총 8면에 7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시게방향으로 삽칠, 도품, 사염처, 사여의, 오근, 오력사, 정근 등이다. 이것을 불교용어로 다시 정리하면 ' 삽칠도품, 사염처, 사여의,오근, 오력, 사정근 '이다. 사염처와 사여의 면에는 글자가 없다.
장경각(藏經閣) 안에는 '목판 대장경'을 안하고 있는데,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오가해, 법수, 사집 등 15종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단칸으로 맞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인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다. 18세기 이후의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부처의 사리와 가사(袈裟) 뿐만 아니라 대장경을 가져와 통도사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따라서 통도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다.
5층석탑 五層石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