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빼떼기죽
장영랑
“지난 가실에 삐져 말린 고메가 뿌연 분이 올라서 빼떼기죽 끓일낀데 오이라.”
‘진주라 천릿길’ 먼 길을 옆집에 사는 양 엄마는 음식을 핑계로 나를 부른다. 막내딸이 보고 싶은 마음을 에둘러 죽 한 그릇 먹이는 것에 갖다 붙이나 보다. 엄마의 달큰하고 걸쭉한 빼떼기죽 맛이 혀 속 깊은 곳부터 밀려온다. 그립던 엄마의 손맛이 진주로 가는 차창에 비친 햇살같이 내 몸을 나른하게 훑어준다. 입맛을 다시며 까무룩 단잠에 빠져든 나는 어느새 팔랑거리는 소녀가 되어 엄마의 부뚜막에 서 있다.
엄마가 찬장 구석에서 무명천 콩 자루를 풀며 ‘동부 콩이 얼마 없어 팥을 마이 넣어야겠네’ 혼잣말을 한다. 옆에 있는 또 다른 자루를 꺼내는데 사그락사그락 소리가 유난스럽다. 생고구마를 얇게 썰어 말린 빠삭한 빼떼기가 드러난다.
“엄마! 오늘 빼떼기죽 끓이는 거 맞제?”
나의 달뜬 목소리와 함께 엄마는 빼떼기를 물에 불린다. 솥에서 막 퍼지기 시작한 죽은 콩과 팥에서 우러난 붉은 빛과 함께 고구마 빼떼기가 삶아 뭉그러지면서 고유의 갈색빛을 띠는 죽으로 변하고 있다. 술술 뿌려지는 설탕으로 어우러진 단내가 먹고 싶어 안달 난 마음을 더 부추긴다. 계속 조릴수록 구수하고 달콤해진다며 엄마는 불 앞에서 쉴 새 없이 주걱을 휘젓고 있다. 뜨거울 때는 후루룩 죽처럼, 차갑게 식으면 탱글탱글한 양갱처럼 두 가지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빼떼기죽.
나에게 빼떼기죽은 호들갑스럽지 않은 엄마의 사랑처럼 은은한 단맛으로 나의 세상살이의 쓴맛을 달래주는 특별한 죽으로 기억되어 있다.
낯익은 담장 너머로 빼떼기죽의 아련한 냄새가 나를 먼저 맞이한다. ‘엄마’ 하며 들어선 부엌은 예전과 달리 난리 북새통이다. 풀어 헤쳐 놓은 자루에서 팥알이 뒹굴고, 방태기는 찹쌀가루 반죽이 덕지덕지 묻은 채 뒹굴고 있다. 뜨거움에 못 이겨 숨구멍을 튀우 듯 동그란 호흡을 퍽퍽 내뱉는 죽은 사방팔방으로 튀어 가스레인지 주위가 질척거리고 있다. 언제 엄마가 이런 난장인 채 음식을 만들었던가 의문을 품기도 전에 엄마는 죽 한 대접을 퍼주며 얼른 먹어라 성화다. 한술 뜨기도 전에 희멀건한 색이 마음에 걸리더니, 입안에서는 이미 엄마의 손맛이 아니라고 새알이 걸린다. 착 감기는 듯 혀에 안기는 느낌도 없고, 달착함도 없는 그야말로 맹탕인 맛이라니.
가까이 사는 언니가 엄마가 변했다며 푸념처럼 늘어놓던 말이 실감이 났다. 언니에게 장엇국을 끓여났으니 퇴근길에 가져가라, 연근조림이 많으니 가져다 먹으라 채근하는데 예전 엄마 솜씨가 아니라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간도 못 맞춰 재료만 낭비하고, 막무가내로 벌리기만 해서 뒷감당도 못 하신다는 것이다. 언니의 투정이 야속하게 들렸는데 어지러운 부엌과 죽 맛을 보니 그제야 구십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슬거리는 엄마의 주름진 얼굴, 흐릿한 기억 속을 헤매는 듯 초점 잃은 눈빛.
젊을 때 엄마는 누가 아프다거나 입맛이 없다는 소식이 들리면 죽을 쒀서 들여다보곤 했다. 봄에는 햇 쑥으로 초록 새알심을 빚어 넣은 노릿한 콩죽을 만들었다. 봄날의 춘곤증이 쨍하고 물러가는 맛이었다. ‘너그 엄마가 끼리 준 콩죽 먹고 봄을 이긴 거라’며 빈 그릇을 들고 오는 친구분들이 제법 있었다. 가을엔 늙은 호박 나이만큼 곤드라지게 푹 곤 호박죽으로 아파 누워 있는 동네 어른들의 빈속을 가득 차게 해주었다.
살가운 표현을 잘 못 했던 엄마는 죽 한 그릇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며 마음의 온기를 올려주던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웃들은 한결같이 음식을 나누는 엄마의 마음 씀과 정갈한 죽 맛에 감탄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솜씨를 부끄러워하며 당신은 잘하는 게 없다며 늘 민망해했다.
집 앞 사거리가 낯설게 느껴졌다며 집을 못 찾아온 그 날부터 엄마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늘 뒷전이던 엄마의 모습이 없어져 갔다. 노인복지센터에서 운동하고 오면 친구들의 흉을 보기 시작한다. 누구는 바보처럼 된장도 못 담는다는 둥, 김치에서 구린 젓갈 냄새가 난다는 둥 여태 살면서 그런 것도 제대로 못 하는 등신 같다는 둥, 한바탕 퍼붓고 나서 세상에서 제일 야무진 사람이 당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여야 입을 다문다. 유난히 다른 사람의 음식에 트집을 잡고, 식탐을 부리는 심술궂은 노인네가 되어 버렸다.
죽처럼 따스했던 엄마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노년의 쓸쓸함을 읊조리며 홀로 방에 누워 허공을 바라보는 엄마는 세월의 더께에 눌러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일까? 얌전하던 엄마의 머릿속을 누가 흩트려 놓았을까.
빼떼기죽은 날로 납작하게 썰어 놓은 고구마가 빼닥빼닥 비틀어지게 말랐을 때 먹는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마당 귀퉁이 채반에 끓이고 남은 빼떼기가 널려있다. 하얗게 분이 오른 빼떼기는 푹 고아 건져 낸 사골 뼈다귀처럼 보인다. 골수에 든 속을 다 우려낸, 경상도 말로는 ‘빼다구’라 부르는 백골. 고구마 빼떼기라는 말은 어쩌면 가을철 단물을 가득 품고 있던 고구마가 빼다구처럼 하얗게 말라 비틀어져 빼떼기라 부르게 된 것이리라.
빼떼기는 모든 것을 쏟아내고 이제는 허연 백발이 된 엄마 모습 같았다. 솥에 찐 포근한 고구마 같았던 엄마는 자식 셋을 세상에 내놓느라 당신은 진이 다 빠진 빼떼기가 되어 버렸나 보다. 백골이 되어버린 아흔 살의 엄마는 기억조차 하얗게 말라 당신이 얼마나 촉촉한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특별한 죽을 잘 끓이는 사람이었는지 잊어버렸나 보다. 누구보다도 새끼들 먹이고, 죽을 끓여 이웃과 나눌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을 엄마는, 그 시절이 그리워 지금도 음식으로 사람을 부르고, 음식으로 사람을 타박하며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일까.
“마이 무라. 와 안 묵노? 인자 내도 옛날에 우찌 빼떼기죽을 끼릿나 암 생각도 안난데이”
엄마의 넋두리와 함께 엄마의 손맛을 잃은 멀건 빼떼기죽이 한입 가득 슬픔으로 밀려와 내 목을 타고 흐른다.
첫댓글 글을 다 읽고나니 목이 메이네요?
포근한 고구마 같았던 엄마가 자식들을 잘 키워 세상에 내 놓느라 빼떼기가 되었다니~~~
그토록 절묘하게 표현하는 님의 글솜씨가 부럽습니다. 축하드리고 어머님의 남은 생이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