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이야기 5
떠나오는 정
김재희
짐 정리를 끝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시로 드나들던 곳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발걸음이다. 남편이 무주로 발령을 받은 지 만 3년 만에 다시 떠나게 되었다.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그동안 꽤 깊은 정이 들었나 보다. 사람들과의 인연보다 산과 들의 정취에 더 취해 있었으니 그것들과의 이별이 더 아쉽다.
뒷산은 나물을 뜯으러 오르내리던 곳이다. 굵직한 먹고사리며 향긋한 취나물, 쌉싸름한 두릅 등 온갖 나물이 다 있다. 그런 날의 저녁상은 진수성찬이었다. 그중에서도 고사리 꺾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많이 꺾어서가 아니라 이 고사리가 사람 눈을 놀리는 것이다. 앞서가는 사람의 발밑에서도 꺾을 수 있고, 뒤에 오는 사람의 코앞에서도 꺾을 수 있다. 그처럼 사람 눈을 피한다는 고사리는 술래잡기하는 나물이다. 참으로 희한한 고사리 꺾기였다. 하찮은 나물을 소유하는 것도 다 제 몫이 있구나 싶었다.
언덕배기에 있는 소나무 그늘은 저수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풍경 좋은 자리다. 솔잎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와 구름 그림자의 속살거림을 듣기도 하고 나뭇잎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햇살과 펼쳐 놓은 책 사이에서 눈씨름을 하기도 했다. 막연한 그리움이 나풀거리고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도지는 날엔 하모니카를 불기도 하던 곳이다.
저수지 따라 이어진 오솔길의 물안개 자욱한 아침 산책은 아련함에 빠져 꿈꾸는 듯한 걸음이었고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 산책은 물오리들의 장난을 훔쳐보느라 뒤뚱거리는 걸음이었다. 물가에 지어진 정자 '청류정'에서는 난간에 턱을 고이고 앉아 한낮의 풍경을 즐기기도 했다. 안으로 깊고 겉으로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언제나 속 깊은 인간이기를 염원하곤 했다.
앞산의 폭포(송대폭포) 밑에서 물방울의 존재를 실감하기도 하고 산골짝 골짝을 헤매고 다니다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거대한 물건도 아주 미세한 입자로 존재하는 것임을, 징검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고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이치를 재인식하던 날은 자연에서 얻은 큰 보람이었다. 적상산, 덕유산, 민주지산의 사철 경치는 해마다 다른 느낌으로 나를 유혹했다. 온산을 벌겋게 물들인 진달래와 노란 산동백(생강나무), 하얀 싸리꽃(조팝나무꽃) 따라 나비처럼 쏠려 다녔다. 잎눈 트는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녹음 짙은 그늘에 묻히고 화려한 단풍이 눈망울을 채색하는 사이 낙엽으로 자리바꿈하면 어느새 하얀 눈꽃이 별세계였다.
4계절씩 3년, 12계절의 정이 참으로 깊게 들었다. 처음 발 들여놓을 때 심란했던 마음이 언제 이렇게 뒤바뀌게 되었는지, 정이란 발붙인 곳이 어디든 쌓이게 마련인가 보다. 내 생의 어느 때보다도 정서가 풍요한 삶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쩌면 남편보다도 내가 더 덕을 본 것 같다. 도심 한가운데서 살 때는 왠지 모를 경쟁의식이나 조바심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무주에 있는 날은 항상 여유가 있었다. 몇십 킬로,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이건만 이처럼 상념의 세계가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뭐든 비워진 상태가 좋았고 자꾸만 더 비위 내고 싶었다. 뒤떨어진 지식의 대열에서 허겁지겁 따라가기 힘들었던 나약함이었던가, 풍요로운 물질만능의 세상에서 밀려나는 도피였던가, 그런 대열에서 벗어 난 듯한 가벼움이 마냥 좋았다. 날로 말끔해지고 가벼워지는 몸과 마음은 건강을 되찾고 마음을 살찌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이것이 무주에서의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자투리땅의 반 농부가 되어 흙과 거름의 소중함을 체험한 것은 두 번째의 얻음이다. 결혼하기 전엔 농사라는 걸 몰랐고 결혼해서 일 년 동안 큰집에 함께 살 동안에도 논밭 농사와는 상관없이 집안일만 했었다. 그래서 직접 농사를 지어보지는 못했다. 그러다 이곳에서 작은 땅이나마 직접 씨 뿌리고 거둬들이는 맛을 알았다. 메마른 땅보다는 비료가 있어야 하고 비료보다는 거름이 더 좋은 걸 안 다음, 쾨쾨한 거름 냄새가 싫지 않았다. 남의 밭에 깔려 있는 거무튀튀한 거름덩이들이 욕심날 정도로 농사꾼이 되었다. 퇴비와 거름이 섞이고 지렁이와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흙이 살아 있는 흙이라는 것을 알면서 아침저녁 쑥쑥 자라는 채소를 바라보는 재미가 좋았다. 약 한번 하진 않았던 무공해 채소들은 내 식구가 먹는 양보다 전주에 있는 이웃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 더 많았다. 나눔의 재미도 더불어 느꼈다.
사택이 학교 안에 있어서 동네 사람들과의 내왕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정도 잊을 수 없다. 추수 때마다 이것저것 조금씩 정을 나누어주던 이들의 마음을 어디서 살까. 지난번엔 고춧가루며 기름이며 깨 등을 조금씩 담아 문 앞에 두고 갔는데 누군지 몰라 고마움을 전하지 못했다. ‘떠나는 정이 싫어서 학교 사람들하고는 정 나누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던가. 아줌마 한 분이 찹쌀 담은 봉지를 내밀며 동네 사람들의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다. 땅에 묻은 김치 몇 쪽을 주며 '잘 가라!' 인사하는 뒷집 할머니의 정에도 코끝이 찡하다.
대충 인사를 나누었는데 뭔가 허전했다. 들고양이와의 이별 인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한 마리의 고양이가 집 주변을 돌며 음씩 찌꺼기를 먹곤 했다. 난 원래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날카로운 눈빛이 싫어서다. 그럼에도 그 고양이와 때때로 음식 찌꺼기를 놓고 감정을 나누었다. 많을 땐 한꺼번에 버리지 않고 조금씩 양을 나누어 주었고 없을 땐 밥상에서 조금씩 남겨 두는 버릇이 생겼다. 그 고양이 덕분에 시골인데도 별로 쥐를 보지 못했다. 어느 사이 부부연을 맺은 듯한 두 마리가 내 눈을 바라보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는 어린 고양이들도 엉금엉금 나들이를 나왔다. 식구가 많아지자 먹을 것이 궁했던지 잠깐 문을 열어 놓은 사이에 방까지 들어와서 내 눈을 쳐다볼 정도로 대범함을 보이기도 했다. 예전에 싫어했던 고양이의 눈빛에서 어떤 정을 느꼈다는 건 그만큼 내 스스로 내면에 삶의 충만함을 쌓았다는 뜻이리라. 아무리 미물이라지만 그동안 나눈 정을 어찌 모른 체하고 갈까. 항상 다니던 곳에 생선 몇 토막을 놓아주었다.
서로 정을 나눈다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아름다움이다. 살아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좋은 감정이든 싫은 감정이든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음이 증명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서로에게 정신적인 성숙을 도와주는 것이리라. 정의 대상이 설혹 무생물일지라도 주는 쪽에서의 감정이입이고 보면 언제든 주는 쪽이 얻는 게 아닐까. 이곳에 와서 순박한 인정과 풍요로운 마음을 얻어가니 참으로 소중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고두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으리라.
교문을 빠져나와 좌회전 신호를 넣고 앞산을 올려다보니 바윗돌에 얼음이 아직 그대로이다. 저 얼음은 아직 봄을 예측 못 했나 보다. 어느 날 ‘쩡!’하니 얼음 갈라져 내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것이다. 몸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예전의 그 여음(餘音)이 심연 깊숙이 박혀있으므로······
무주 생활 마지막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