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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에는 하얀 눈꽃송이가 하나 둘씩 날리고 있었고 온 세상
이 그 하얀 빛으로 뒤덮혀 가고 있을 때 오늘도 백호는 어김없이 강
운과 그의 사부가 떠나버린 텅빈 초가집 앞에서 눈보다 더 하얀 자신
의 털을 핥으며 떨어져 내리는 눈꽃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강운이 이상한 노인을 따라간지 4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백호는 그때 강운을 따라가지 않은 것이 무척 후회가 됐는지 하루에
거의 모든 시간을 초가집 앞에서 강운이 다시 나타나기만을 눈이 빠져
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도 하루가 다 저물어 가고 있건만 강운은 전혀 나타날 기
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기에 백호는 발바닥에 쌓여 있는 눈이 다 날아
갈 정도로 긴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운이는 오지 않는 건가? 휴.. 그때 같이 따라갔어야 했는데..
영감탱이 나타나면 무슨 말을 하지.. ]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한숨만 푹푹 쉬어대던 백호가 이내 체념을 했는
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동굴을 향해 터벅터벅 힘없이 걸어갔다.
-쿵!
눈 오는 하늘에 벼락이라도 친 것일까?
갑자기 들려온 충격음에 의아해진 백호가 소리가 난 곳으로 다시 발
걸음을 돌렸다.
“아이구.. 운이 죽네! 이거 처음 해봐서 그런지 잘 안되네. “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들릴 수 없는 거리였지만 백호는 저 멀리 보이
지도 않는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주인이 강운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눈을 휘날리며 쏜살같이 달려갔다.
과연 그곳에는 허리를 부여잡고 낑낑 거리고 있는 강운이 있었고
백호는 더 볼 것도 없이 강운을 향해 달려가 오래간만에 만난 강운의
볼을 핥아줬다.
“어엇? 백호구나? 아.. 하하! 간지러워 그만해.. 에엑? “
백호는 강운이 허리를 붙잡고 있는 것을 보고 강운이 크게 다친 줄
알고는 핥는 것을 그만두고 강운의 옷을 물어 초가집을 향해 달려갔다.
백호의 입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강운은 백호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하다가 이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즐거운 웃음을 흘렸다.
강운의 입장으로 봤을 때는 백호의 행동이 좀 돌발적인 행동이긴 했지
만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기에 그냥 즐겁게 웃을 수 있었지만
만약 지나가던 사냥꾼이나 약초꾼이 이 모습을 봤다면 아마도 호랑이
가 아이를 물고 잡아가는 줄 알고 경악을 했을 일이었다.
다행히 강운과 그의 사부가 사는 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한적한
곳이었기에 백호가 오해받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강운을 초가집 앞까지 물고온 백호는 조심스럽게 강운을 내려
주었고 땅에 내려온 강운은 가볍게 허리를 좌우로 돌리며 백호를
향해 장난스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백호야! 그 동안 잘 지냈지? “
백호는 강운이 다친 줄 알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강운을 쳐다보고 있
다가 강운이 허리를 움직이며 전혀 아프지 않은 듯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눈을 끔뻑거리며 의아스런 모습을 보였다.
[운아 너 어디 다친 것 아니었어? ]
“내가 다치긴 왜 다쳐? 그냥 저 하늘에서 떨어져서 허리가 조금 뻐근
했을 뿐이야..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봐봐! 멀쩡하잖아.. 헤헤 “
백호는 귀엽게 웃고 있는 강운을 쳐다보며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방으로 들어가고 있는 강운을 뒤따라 들어갔다.
[근데 운아!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거야? 혹시 천계에는 시간이
여기보다 훨씬 빨리 가는 거야? ]
“글쎄.. 내가 천계에서 4개월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서는 얼마나
시간이 흘렀나 모르겠는데. “
[그럼 천계나 여기나 시간은 똑 같은 모양이네. 그래.. 영감탱이는
어디 있는지 알아낸 거야? ]
백호 역시 겉으로야 항상 강운의 사부를 망할 영감이라면서 욕을 하
고 다녔지만 속으로는 강운만큼이나 사부를 좋아했던 것이다.
백호가 오늘에 이르기 까지는 사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백호는 강운에게 질문을 하고나서도 혹시 일이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을 애써 감추며 강운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
렸다.
“아니.. 아직까지는 확실하게 못 알아냈어. 하지만 인간계에 사부의
행방을 알고 있는 놈이 있다고 하니까 지금부터 그놈을 찾아서 물어
볼 거야. “
[그래? 흥~! 그놈의 영감탱이는 갑자기 어디로 사라져서 이렇게
귀찮은 일만 만드는 거야! ]
“에휴.. 그러게 말이야. 어쨌든 조금 귀찮긴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사부이니 찾아 나서지 않으면 어쩌겠어? “
그렇게 시작된 강운과 백호의 투덜거림은 해가 저물어 밖이 어두컴컴
하게 변할 때 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사부를 걱정해주던 강운은 문득 백호를 요리조리
한참동안 살펴보기 시작했다.
[운아 왜 그러니? ]
“으응? 아.. 별건 아니고. 그냥 이번에 사부 찾으러 갈 때 백호 너랑
같이다니면 어떨까 생각하느라구.. 흠.. 아무래도 백호 너가 너무 커서
안 될 것 같아. 아! 맞다. 백호야! 너 혹시 둔갑술 같은 거 할 줄 알어? “
강운이 무슨 말을 하나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강운을 쳐다보던 백호는
강운이 자신과 함께 인간 세상에 내려간다는 말에 몹시 기뻐했다.
백호의 기억으로는 그 옛날 강운의 사부와 함께 인간 세상에 잠시 내
려 갔다 온일 말고는 지금껏 한 번도 밖으로 돌아다녀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백호는 그때 인간 세상에 잠시 다녀올 때 강운의 사부로부터
둔갑술을 익혀놓았기 때문에 강운에게 고개를 힘껏 끄덕거렸다.
[물론이지! 나 둔갑술 할 줄 알어. 근데 정말 나도 같이 가도 돼? ]
“응! “
강운은 별 기대도 없었지만 혹시 몰라서 물어본 한 마디에 백호가 둔
갑술을 할 수 있다고 하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와.. 대단하네. 백호야 근데 언제 그런 거 배운 거야? “
[옛날에 영감탱이랑 인간 세상에 잠깐 나갈 때 배워둔 거야. 그때는 몸
크기를 조금 줄였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할까? ]
“아.. 그랬구나.. 흠.. 잠깐만. “
막상 생각지도 않았던 백호가 시원스럽게 대답을 해 버리자 강운은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아! 그래! 백호야 강아지로 변할 수도 있어? “
백호는 강운의 입에서 흘러나온 강아지라는 말에 그만 얼굴 표정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백호가 혹시 몰라 우려하던 최악의 상황이 현실로 나타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백호는 옛날에 몸 크기를 줄였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때 역
시 협박에 못 이겨 강아지로 변해 인간 세상에 나갔던 것이다.
[운, 운아.. 강아지로? ]
“응. “
강운은 속으로 백호가 강아지로 변신했을 때 얼마나 귀여울까를 상상
하며 재미있겠다는 표정으로 백호를 기대감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
봤고 그런 시선을 마주 대한 백호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 물론 할 수야 있지만.. 운아 다른 걸로는 안 될까? ]
백호는 어떻게서든지 강아지 만큼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에 간절한
심정으로 강운을 애처롭게 바라봤고 강운 역시 백호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흠.. 백호 너가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 그럼 고양이는 어때? “
백호는 강운이 마음을 돌렸다는 생각에 안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가
갑자기 들려온 고양이라는 말에 얼굴빛이 사색이 되고 말았다.
백호로서는 강아지 보다 더욱 더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운아! 아니.. 차라리 강아지로 할래. ]
백호는 혹시나 강운이 끝까지 고양이를 주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을 끝냄과 동시에 둔갑술을 펼쳐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평소에 백호가 자주 들렀기 때문에 방은 밖에서 보기에는 상상할 수
도 없을 만큼 넓고 크게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크게 지어진
방임에도 불구하고 백호가 들어와 있으면 공간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백호는 거대한 모습의 호랑이었던 것이다.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백호의 모습이 하얀빛을 내며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얼마 후에는 강아지라고 보기에는 무척 커
보이는 눈보다 하얀빛을 뿜어내는 귀여운 모습의 강아지로 변신해
있었다.
하지만 백호는 무사히 변신을 마치고 숨을 돌리기도 전에 눈앞이
핑핑 도는 어지러움을 맛보아야 했다.
“귀, 귀엽다앗!! “
그것은 바로 백호의 변신한 모습을 보고 달려든 강운 때문이었다.
[켁, 운아! 숨 막혀! ]
이제는 어지롭다 못해 호흡이 곤란할 지경에 이른 백호가 힘겹게
고통스러운 신음성을 내질렀지만 강운은 그로부터 한참 후에야
백호를 놓아주었다.
“히히.. 백호야! 너 강아지로 변하니까 정말 귀엽다. 앞으로도 그냥
강아지로 쭈~욱 있으면 안 될까? “
초롱초롱한 두 눈망울을 빛내며 귀여운 웃음을 흘리는 강운의 모습에
평소의 백호라면 두말없이 강운의 부탁을 무조건 들어줬을 터였지만
백호는 오늘만큼 강운의 귀여운 웃음이 무섭기는 처음이었다.
전에 비해 볼품없이 작아진 자신의 몸을 구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던
백호가 강운에게 최대한 불쌍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게 맺히게 한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운아!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줘. 운이 너가 원한다면 가끔씩
모습을 바꿔줄 수도 있겠지만.. 아! 그렇지! 내가 마을에 내려가서
나중에 강아지 한 마리 잡아다 줄게. 어때? 괜찮지? ]
백호 나름대로 엄청나게 머리를 굴려 생각해낸 것이라고는 하지만
만약 백호의 말대로 마을에 내려가서 강아지를 물고 온다면 그 마을
은 아마도 쑥대밭으로 변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집채만 한 호랑이가 마을로 내려온다면 누가 있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머지않아 마을사람들이 협동하여 백호를 잡기위해 사람들을
모집하여 산을 올라오거나 그 정도의 여력도 없는 마을이라면 아마도
그 마을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두 빠져나가 황량한 곳이 될 것이
분명했다.
강운이 만약 백호의 제안에 승낙을 한다면 멀쩡한 마을 한 곳이 없어
질 큰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지만 강운은 그 정도로 생각이 없는
아이는 아니였다.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백호를 보며
강운은 재밌다는 듯이 웃음을 지은 후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푸훗! 백호야 장난이니까 마을에는 내려가지 말어. 사실 지금 강아지
로 변한 모습보다 전에 모습이 훨씬 더 좋으니까 말이야. “
강운은 백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말을 했고 백호는 그런 강
운에게 감동을 했는지 혀로 강운의 손등을 날름날름 핥아줬다.
때는 12월 아직은 초겨울이라고 하지만 산의 겨울은 다른 곳보다
훨씬 일찍 찾아오기 때문에 지리산에는 몇몇 약초꾼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산을 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4개월 전의 그 사건이후 소문에 소문을 거듭해 지리산을 죽음의 산
내지는 저주받은 산이라 하여 한동안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 했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고 있는 실정
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외지에서는 지리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없었고 간혹
인근 지역에 살고 있는 사냥꾼들이라던가 약초꾼들 몇몇만이 산을 오
르고 있었는데 지금같이 춥고 눈이 많이 와서 미끄러운 상태라면 산을
오르던 그 소수의 인원들 마저도 반에 반 정도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동물에게는 늘상 예외라는 변수가 존재하는 법이라
고 했던가. 지금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지리산 자락 이곳저곳을
제집처럼 누비려 돌아다니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강운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백호가 강운의 옆에 바싹 달라붙어 달리고 있었다.
“후.. 오래간만에 이렇게 돌아다녀 보니까 정말 좋다. 그치? “
백호도 오래간만에 강운과 함께 다니는 것이 기분이 좋았던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과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산중 제왕인 백호가 맞을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 모습이 영락없이 강아지의 모습이었다.
백호가 펼친 둔갑술은 단지 외양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이
변함과 동시에 습성까지도 동시에 변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한 동안 어렸을적 백호와 함께 돌아다니던 이곳 저곳을 누비며 회상
에 잠겨있던 강운이 마침내 사부가 자주 수련을 위해 올랐던 절벽에
올라와서 사부가 했던 것처럼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겨보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