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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12)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 14:1~17
I. 서론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살펴 보았습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예수님을 더욱 더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 12장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시면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아마도 그 때 예수님을 향한 제자들의 기대는 최고조에 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13장에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드시면서 제자들이 근심할 만한 말씀을 세 가지나 하셨습니다. 첫째, 내가 너희를 떠나갈 것이다. 둘째,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신할 것이다. 셋째, 베드로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마음에 큰 근심에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마음에 근심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3가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첫째, 아버지 집에 너희를 위한 거처가 있다. 둘째,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셋째,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겠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1. 첫째, 아버지 집에 우리를 위한 거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1~3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제자들은 말할 수 없는 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마 26:21~22,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1절, “그들이 먹을 때”란 최후의 만찬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서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몹시 근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팔리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배신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팔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에는 가룟 유다가 돈의 유혹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을 보겠습니다.
마 26:33~35,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여기서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말은 베드로만 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다같이 했던 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35절에서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베드로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두려워서 모두 도망을 갔기 때문입니다. 마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그러니까 베드로는 그나마 용기를 내어 대제사장의 뜰까지 예수님을 따라갔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말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제자들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근심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 집에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늘 나라에 너희를 위한 거처가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구약 시대에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조상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늘 나라에 자신들을 위한 거처가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 11:13, 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성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하늘 나라의 거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한 거처를 예비하셨다는 믿음으로 세상에서의 모든 유혹과 박해를 이기고 믿음을 끝까지 지켰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요즘에 어떤 근심을 가지고 있으십니까? 우리가 아무리 큰 근심을 가지고 있더라도, 나를 위해 하늘 나라에 거처가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모든 근심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유혹과 두려움을 이기고, 어떤 근심 중에서도 기뻐하고 감사는 우리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흥미로운 내용이 나옵니다.
4~6절,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말씀은 교회를 다니는 분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말씀일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4절,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가시는 목적지와 그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5절에서 도마가 무엇이라고 질문했습니까?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저는 개인적으로 도마를 제2의 베드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도마는 단순하고도 솔직한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 스타일이었고, 믿지 못하겠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마의 솔직함은 요한복음 20장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 20:24~25,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았다고 말하자, 도마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도마는 솔직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모르면 모른다, 믿지 못하겠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도마의 솔직함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도 신앙에 있어서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은 길, 진리, 생명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님께서 진리가 아니시라면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일 수 없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나오는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 보혜사란 성령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7절, “그는 진리의 영이라.” “길의 영이라” “생명의 영이라”가 아니라,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길과 진리와 생명 중에서 진리가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리가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이 시간 두 교수님의 글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 교수인 우종학 교수님입니다.
“진리에 관해 묻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진리의 상징이던 대학도 더는 진리를 다루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는지 모릅니다. 진리라는 말은 현대인들에게는 구시대적이고 고리타분하고 실효성이 없는 말이 되었습니다. 상대주의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진리를 주장하는 것 자체를 심지어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학마다 그 대학이 추구하는 상징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인 하버드 대학의 상징은 Verista인데, 그 뜻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대학이 얼마나 진리를 찾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진리를 찾는 구도자가 되기를 바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가 있다는 확신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Vern Poythress라는 교수님의 말입니다. 이분은 경력이 특이한데, 하버드에서 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교 교수가 된 분입니다. 이 분이 진리에 대해서 두 가지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은 특이한 주장이지만,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와 회의론자와 신비주의자들에게서 이런 주장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참이다. 그러면 참인 것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은 자멸적이다. / 진리의 구체적 사례인 2+2=4를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주의 모든 곳에서 참이다. 항상 참이다. 이 진리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진리는 세 가지 핵심 속성, 즉 편재성(omnipresence, 어디에나 존재함), 영원성(everlastingness, 항상), 불변성(unchangeability, 불역성)을 지닌다. 불변성은 단순히 변하지 않음보다 더 강한 개념이다. 진리가 변하지 않음만이 아니라 변할 수 없음을 말한다. 진리의 이 세 가지 특징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편재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다.” (Let us consider the claim that truth does not exist. This is an unusual claim, but something like it can be heard from some postmodernists, skeptics, and mystics. But if truth does not exist, then it is true that truth does not exist. So, there is something that is true. Hence, the assumption that truth does not exist is self-refuting. Truth exits. Not believing that it exists is self-defeating. / Let us consider a particular example of a truth: 2+2=4. This is true everywhere, throughout the universe. It is true at all time. Its truth does not change over time. So truth has three key attributes: omnipresence (everywhere present), everlastingness (through all times), and unchangeability (immutability). Unchangeability is actually stronger than the mere fact of no change. We are saying not only that truth does not change but that it could not change. These three features of truth are attributes of God. God is omnipresent, everlasting, and unchangeable.)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원래 편재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분이십니다. 나중에 성육신 하심으로 편재성이 제한 받기는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진리로 믿는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도 진리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아버지께서 계신 천국에 가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2. 둘째,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7~11절,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아버지의 연관성을 계속 말씀해 주셨습니다. 7절,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9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1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11절,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러니까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아버지의 말씀이고,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거하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근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저는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내가 너희의 근심에 관심이 있듯이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근심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늘 나라에 너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는 것은 나의 뜻이기도 하지만 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과 아버지의 하나됨은 예수님과 우리의 하나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근심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요한복음 15장에 무슨 내용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이 표현은 오늘 본문 11절에 나오는 표현과 똑 같은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러니까 예수님과 아버지께서 하나인 것과 같이 예수님과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근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살 수 있듯이 우리도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근심을 극복할 수 있고, 열매도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서로 하나될 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세상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요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서로 하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됨을 강조하는 복음서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하나이시고, 예수님과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야 하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끼리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21절,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만약 교회가 서로 싸우고 갈라진다면, 세상은 그러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믿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성도들이 하나가 될 것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서 무슨 교회를 섬기시든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것을 믿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성령님을 보내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2~17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께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16절,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또 다른 보혜사”는 성령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가고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시는 것이 실상은 제자들에게 더 유익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 16:6~7,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6절에 “이 말”이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서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유혹과 박해가 심할지라도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면,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떠나가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떠나가시는 것이 실상은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가시고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할까요? 제자들은 이 말씀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두 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은 오셨다가 세상에서의 사역을 완수하시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하늘 나라에서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시고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계속 계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오시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성령님께서 제자들 속에 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17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거하셨지만 성령님께서는 제자들 속에 거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실 때 우리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12절부터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부분만 설명해 드리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게 되는데,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2절,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더 큰 일”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사역의 범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범위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실 때,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두 번 연속 말씀해 주셨습니다. 13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대로 기도한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끝맺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자아를 내려 놓고,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예수님께서 직접 그 일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3절, “내가 행하리니” 14절, “내가 행하리라”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을 구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 일을 실행해 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아주 거창한 것을 놓고 기도해야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작게는 우리가 근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크게는 우리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뜻이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놓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지난 주일에 읽은 성경 구절을 하나 읽어 보겠습니다.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서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율법 십계명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구원자 예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게 되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결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구원받는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많은 분들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Sam Storms 목사님은 조금 다른 관점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왜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고요?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세상 그 누구보다 가장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제 뜻은 그분은 스스로 여러 속성들을 완전히 구현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아름다움, 조화로움, 겸손, 기쁨, 능력, 희생을 말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 이 모든 속성들이 놀랍도록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죠. / 둘째로는, 제가 그분을 얻었다는 겁니다. 구원이란, 제가 그분을 얻는 것이죠. 내가 그분과의 교제로 인도되며 그가 놀라운 은혜를 베푸사 정죄받아 마땅한 저를 구원하려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는 겁니다. / 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가장 근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은 그분 자체입니다. 그분이 저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든 관계없이 그분은 온 우주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Why do I love Jesus? Simple, because he is preeminently lovable. And what I mean by that is he is, in himself, the perfect embodiment of beauty, harmony, humility, joy, power, and sacrifice. You see in Jesus this incredible harmony of attributes. / Then, secondarily, I love Jesus because I get him. Salvation means that I obtain him, I am brought in to fellowship with him. When I realize that he in his incredible grace died to deliver me from my own well-deserved condemnation, I love him even more. / But before this, I think the first foundation for my love for Jesus is the simple fact that he is, in himself, without regard to anything that he may have done for me, the most glorious, beautiful, and lovable person in the entire universe.)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사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이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계명도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계명들을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지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계명이 있겠습니까?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3가지 증거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하게 되고 그 보다 더 큰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2절)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뜻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13~14절) 셋째, 예수님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도 기쁜 마음으로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15절) 이 세 가지 모습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