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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그리스도인 시리즈 (8)
하나님의 입양과 성령님의 사역
(참고: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
마 5:16
I. 서론
한국 뉴스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정인이 사건에 대해서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정인이는 생후 8일째 되는 날, 입양기관에 위탁되어 8개월 간 위탁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생후 8개월이 되던 작년 2월 초에, 딸이 있는 한 가정에 입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작년 10월 13일에 정인이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밝힌 정확한 사망 원인은 췌장 절단과 복강 내 출혈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정인이의 몸에서 머리뼈 골절, 좌측 어깨뼈 골절, 갈비뼈 골절 등이 각기 다른 시기에 발생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옆구리, 배, 다리 등에 멍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인이는 장기간에 걸친 양부모의 폭행으로 인해서 사망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정인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양부모를 향해서 온갖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8개월 밖에 안 된 영아를 입양해서 폭행으로 죽일 것이면, 왜 입양을 했냐는 비난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바로 “입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참고하는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패커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약성경의 전체 메시지를 세 단어로 집약해 달라고 요청 받는다면, 저는 ‘화목을 통한 양자됨’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풍성하거나 더 함축적인 표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롭다 함이 복음의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복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칭의가 복음이 가져다주는 최고의 복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양자됨이 복음이 제시하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그것은 의롭다 함보다 더 높습니다. 칭의는 율법의 관점에서 나왔으며, 하나님을 심판자로 보는 법정 개념입니다. 하지만, 양자됨은 사랑의 관점에서 나왔으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는 가족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양자됨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과 그 안에서의 친교라는 세계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칭의에는 인격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양자됨에는 인격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과 달리 인격적인 관계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자됨이 바로, 입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시는 것은 정인이 양부모가 정인이를 입양하는 것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정인이 양부모도 처음에는 선한 마음을 정인이 입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낳은 첫째 딸과는 다르게 입양한 딸에게는 정이 붙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계속되자, 어린 영아가 누는 대변 냄새도 맡기 싫어서 정상적인 음식을 주지 않고, 분유와 이유식만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입양될 당시에는 몸무게가 8.9kg이었지만, 약 8개월이 지난 사망할 무렵에는 8.5kg으로 몸무게가 오히려 줄어 있었다고 합니다. 양부모는 정인이를 입양하고 얼마나 후회를 했겠습니까? 파양을 하자니, 주변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그렇게 하지도 못한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 1:17~18,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지만, 입양을 받은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생을 살다가 환란이나 어려움을 당하면,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잘 아시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입양과 성령님의 사역”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가운데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실까요? 오늘은 이 주제를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첫째, 성령님께서 확신을 주십니다.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영은 성령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입양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성령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확신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아빠”라는 단어는 아람어로 “Abba”라는 단어인데, 성경에 오직 세 번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처음 사용하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나머지 두 번은 우리에게 사용되었습니다. 막 14: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가정에 입양될 때, 우리는 예수님과 똑 같은 신분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짓지 않았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에덴동산에서 고생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을 텐데 하고 말입니다. 우리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죄가 없는 상태인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나 하와로 태어나시겠습니까? 아니면,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겠습니까?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신분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이 더 높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비록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지만, 결코 하나님과 단절될 수 없는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과 ‘아빠와 자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계는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조금 더 현실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천국 갈 확률이 높을까요? 아니면, 현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천국 갈 확률이 높을까요?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자녀됨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요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아버지 집”이 바로 “우리 아버지 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은 아버지의 집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진리를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음에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2. 둘째,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성령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입양하신 후, “그냥 알아서 살아라”고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요 14:17~18,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같이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게 하시고, 우리 마음 속에 거하도록 하시면서 우리를 친히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 주실까요? 우리는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패커 교수님의 설명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선포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진지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잘못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기본적인 잘못은, 인도를 본질적으로 기록된 말씀과는 별개로, 성령이 주시는 내적 충동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인도자로 존중하는 참된 방법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수단인 성경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초월해서가 아니라 그 말씀이 정하는 한도 내에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고린도전서 7:39과 제7계명이 있는 한, 불신자와 결혼하거나, 결혼한 사람과 눈이 맞는 것을 합리화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 두 가지 행동 모두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마음은 분명 그리로 기울었지만,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올바른 인도를 받으면 이후로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평탄한 길을 걷게 되어 그 인도 자체가 옳다고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당혹해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면, 환난을 만난다는 진리에 대한 최종적인 예와 증거로 주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어떤 인간도 그처럼 완벽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감동하셔서 쓰신 책입니다. 성령님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는 자신이 쓰신 성경과 반대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이미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아무런 환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역사 상, 예수님만큼 성령님의 인도를 완벽하게 받으신 분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은 온 인류를 위한 고난의 삶이셨습니다. No Cross, No Crown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셋째, 성령님께서 합당하게 살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신 세 번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문에 합당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패커 교수님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입양은, 보통 자식이 없고 유복한 사람들만이 행하던 관습이었습니다. 그 대상은 오늘날과 같이 어린 아이들이 아니라, 가문의 이름을 합당하게 이어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 준 청년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입양을 하는 이유는 가문의 이름을 합당하게 이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입양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성경을 한 구절 보겠습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런데, 우리가 악한 행실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가문에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 초두에 정인이 사건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정인이를 입양한 양부모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상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아십니까? 양부모 모두,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 집안의 자녀들이었고, 그들의 출신 대학은 기독교 대학인 한동대였다는 것입니다. 양모는 어릴 때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다녀온 사람이고, 양부는 기독교 방송국 CBS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믿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이 영아를 학대하고 죽인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지금 누구를 비난하고 있을까요? 양부모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부모도 함께 비난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도대체 어떻게 키웠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도 욕하고 있습니다.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상당히 명예로운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당히 무서운 말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를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실 수도 있고, 비난을 받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부분만 말씀 드리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는 많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두 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1) 첫째,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매일 기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구절에 대한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 교수님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기도에서 ‘호칭’에 대한 부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볍게 여기거나 감히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누군가에게 말할 때,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과 구별하여 그 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 ‘특별히 그 사람’과 말하려는 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름은 또한 상대와의 관계에서, 나의 신분을 나타내 줍니다. 이것은 친밀한 관계에 거의 언제나 적용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아들을 ‘사랑하는 아들’, 딸을 ‘귀여운 공주’, 아내를 ‘여보’라고 부릅니다. 저 외에는 아무도 우리 가족을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들이 저를 ‘아빠’, 아내가 ‘여보’라 부를 때, 그것은 우리의 관계의 틀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강철보다 더 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을 드릴 때, 그분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실체의 틀이며, 우리는 그 틀 안에서 기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대해 느끼는 큰 어려움들은 바로 이 틀을 은혜로 받아, 스스로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이 관계는 강철보다 더 강한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이 관계를 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우리의 신분을 기억하고 그 신분에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의 법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법을 따라 삽니다. 이것이 그들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족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 일부분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마 5:39~47,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부분을 읽으시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한 분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은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 뺨도 대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옷을 다 빼앗겨서 알몸으로 나무에 매달린 분이십니다. 그분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원수를 사랑하셨고,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저는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것이 우리 가정의 계명이란다. 내 맏아들 예수는 우리 가정의 계명을 따라 살았단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네 형이자, 네 구주와 주님인 예수를 따라가지 살지 않겠니. 네 힘만으로 힘들 거야. 그래서 네 마음 가운데 성령을 보냈단다. 매일 매 순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거라. 그리할 때, 우리 가문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야.”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패커 교수님의 조언을 한 목소리로 읽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하늘 나라가 나의 집이다. 나는 매일 거기에 가까이 간다. 나의 구세주는 나의 형제다. 모든 그리스도인 역시 나의 형제다. 이 말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밤에 잠자리에 들 때, 버스를 기다릴 때, 마음이 한가할 때 등 언제나 되풀이 해서 스스로에게 말하세요. 그리고 이것이 전적으로 완전히 사실임을 아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하세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살면서 이 진리를 매일 선포합시다. 그리고, 이 진리를 확신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또한 그렇게 살아 가도록 노력합시다. 주님께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