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44
ㅡ 고구려 전기 왕들과 고국천왕 '진대법' 실시 ㅡ
고구려 건국초기 정치-사회 구조는 절대왕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다섯 개 주요 부족(씨족)
들로 이루어진 귀족 연맹체였다.
각각의 부족은 독립적인 정치적, 사회적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부족들은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며 고구려 초기 국가형성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구려의 5부족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1. 계루부(桂婁部) - 왕족이 속한 부족으로, 고구려 주요 지배계층 이었다. 왕위는 주로 계루부 출신이 계승했다.
2. 절노부(絶奴部) - 군사와 관련된 부족으로, 고구려의 초기 군사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왕비가 주로 배출된 왕비족으로도 알려져 있다.
3. 순노부(順奴部) - 행정과 관련된 부족으로, 고구려의 정치적 행정체계를 운영하는 데 기여했다.
4. 관노부(灌奴部) - 제사와 관련된 부족으로, 종교적 의식과 제례를 주관했다.
5. 소노부(消奴部) - 농업과 경제 활동을 담당한 부족으로, 고구려 경제적기반을 지원 했다.
이 5부족 귀족 연맹체는 고구려가 점차 중앙집권화되면서 통합되어 갔다.
특히 제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때 5부족 지배체제에서 관료제로 변화하면서 고구려 통치 구조도 더 조직화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고구려가 더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구려 초기 왕들 업적에 대해서 간략히 정리해 보자. 우리가 이름이라도 기억하는 왕은 몇 안 된다.
1. 동명성왕 (주몽) - 재위: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고구려의 건국자. 부여 출신으로, 기원전 37년에 고구려 건국했다.
2. 유리명왕 - 재위: 기원전 19년 ~ 기원후 18년
주몽 아들. 고구려의 기틀을 다졌으며, 수도를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겼습니다. '황조가'와 '주몽설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3. 대무신왕 (무휼) - 재위: 18년 ~ 44년
유리명왕의 아들. 고구려 세력을 확장하고, 국가의 체제를 강화한 왕이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 주인공인 호동왕자 아버지 이다. 호동왕자 역할로 최씨낙랑 을 복속시켰다
4. 민중왕 - 재위: 44년 ~ 48년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삼국유사에는 대무신왕의 아들로 기록.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한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5. 모본왕 - 재위: 48년 ~ 53년
대무신왕의 또 다른 아들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 혼란이 있었던 시기이다.
6. 태조대왕 - 재위: 53년 ~ 146년
고구려의 중흥을 이끈 왕으로, 영토 확장과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었다. 태조왕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고구려를 강력한 국가로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맥족과 부여를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그의 치세는 고구려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후 왕조의 번영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태조(太祖)'라는 명칭은 역사적 으로 많은 나라에서 국가기초를 닦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군주 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이는 해당 군주가 그 국가나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고 중요한 토대를 닦았음을 의미한다.
태조왕 이전에는 '고'씨와 '해'씨가 번갈아 가면서 왕위에 올랐는데 태조왕 때부터 '계류부' 즉 '고'씨에서 왕이 계속 나왔기에 고구려 중시조로 여겨서 태조란 존칭을 쓰지 않았나 하는 추정도 한다.
태조왕에대해 가장 헷갈리는 것은
'삼국사기'의 계산을 그대로 따른다면 태조왕은 7세에 즉위하여 93년이나 왕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장수왕'이 가상 오래 살고 오래 재위한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고 중국기록과도 다르다. 삼국사기를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의 좋은 공격거리가 되고 있다. 당시 김부식이 이런 논란이 일 거라는 것을 모를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조왕 재위를 현실적으로 바꾸면 뒤에 이어지는 왕계보가 흩트러질 수밖에 없으니 기록을 믿고 그대로 썼으리라 추정된다. 또 인간수명으로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7. 차대왕 - 재위: 146년 ~ 165년
삼국사기에는 태조왕의 동모 형제로, 후한서에는 장자로 기록. 형제들과 권력 다툼이 있었던 왕이다.
8. 신대왕 - 재위: 165년 ~ 179년
차대왕의 동생. 차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드디어 고구려 전기 가장 유명한 왕 제 9대 '고국천왕'이다. 고국천왕은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고, <을파소 진대법>과 함께 한국사 시험에 단골출제 되기도 한다. 그런만큼 자세히 알아 보자.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년~197년)은 고구려의 9대 왕으로, 그의 치세동안 여러 개혁 정책을 시행하여 고구려 사회 구조를 강화하고 백성들 생활을 안정시켰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개혁 중 하나는 그 유명한 <을파소 '진대법'(賑貸法)> 이다.
'진대법'은 고국천왕이 무명 '을파소'를 파격적으로 고구려 최고관료인 '국상'(현 총리급)으로 임명하여 을파소가 주도적으로 시행한 일종 사회복지제도이다.
이 법은 고구려에서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봄에 국가가 농민들 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수확한 뒤 이를 갚도록 하는 제도였다.
'진대법' 실시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일으켰다.
1. 빈민 구제: 가난한 농민들이 봄에 식량이 부족해 굶주리는 것을 방지하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2. 농업 생산성 증대: 봄에 곡식을 빌려줌으로써 농민들이 농사에 집중할 수 있게 하여 농업생산성 을 높였다.
3. 사회 안정화: 경제적 어려움 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불안과 혼란을 줄이고, 백성들 생활을 안정화했다.
4. 진대법은 고국천왕 이후에도 고구려의 중요한 사회적제도로 자리잡아 지속되었으며, 고구려가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 역할을 했다.
이처럼 진대법 도입배경에는 당시 고구려기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인해 농민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고구려 귀족들이 가난한 농민들에게 비싼 고리로 먹을 게 없던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못 갚으면 노비로 삼아 귀족들 힘을 키워 갔다. 이에 고국천왕은 귀족들이 농민들을 노비로 삼는 것을 막고 귀족들 힘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실시했던 것이 큰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진대법'에 대한 귀족들 불만이 엄청 컸고 반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어쨌든 이러한 고국천왕 개혁은 고구려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데 고국천왕이 너무 젋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고국천왕 급작스런 사망으로 우리 역사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사태가 발생한다.
고국천왕 부인이자 황후였던 '우씨황후'가 두 번이나 황후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즉 '우씨황후"는 고국천왕이 후손도 못 남기고 죽어 버리자 고국천왕 친동생 중 한 명을 왕으로 추대 하고, 그와 다시 결혼하여 또 다시 왕후가 된 것이다.
지금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지만 당시 고구려 사회에서는 이러한 게 가능했다.
바로 '형사취수제'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사취수제'는 설명하자면 길어지니 이 내용은 다음 편에서 자세히 정리하겠다.
이어서<'우씨황후' 두 번 황후자리에 오르다>가 계속 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