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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덕이(조나단) 이야기--잡초인생 중에서, 그리고 이후의 일들.hwp
잡초인생(배정규, 김연수, 2013)에서 조나단(강호덕)이 등장하는 부분만 순서대로 발췌해서 엮어 봤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1년 6개월 간의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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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덕이(조나단) 이야기
- 잡초인생 중에서, 그리고 이후의 일들 -
1. 무지가 병보다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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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덕이는 실명이다. 형제가 3남 5녀인데 그 중 5명이 조현증이다. 2008년 여름에 KBS1 TV의 ‘열린 채널’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호덕이 얘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방송한 적이 있다. 제목이 ‘로드무비’고 30분 분량이다. 호덕이는 자신의 얼굴을 TV에 공개한 걸 늘 자랑스러워한다. 정신장애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편견 해소에 앞장서고 있다. 스스로 당사자 리더라 자부한다. 호덕이의 별칭은 조나단이다. 중학교 다닐 때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읽었는데, 그게 엄청 감동이었단다. 그래서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이름을 땄다. 마르티노 얘기를 읽고 호덕이가 말한다. “저도 조나단이라고 해주세요.” 그래서 조나단이라 하고 글을 썼더니 영 어색하다. 아내의 의견. “호덕이가 훨씬 나아요. 이름이 촌스럽고 그래서 정이 가요.” 그래서 말했다. “너는 그냥 호덕이라 할게.” 두말도 않고 “예. 그렇게 하세요.”한다.
‘무지가 병보다 더 무섭다.’
이 말은 호덕이가 즐겨 하는 말이다. 다른 누가 했던 말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낸 말이라나? 아무튼 맞는 말이다. 병에 대한 무지. 병으로 인해 어떤 일들이 초래되는지를 알 지 못하는 무지. 한 인간의 시련과 성장과정에 대한 무지. 이러한 무지들이 합하여 엄청난 오해와 편견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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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환청 땜에 죽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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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마르티노가 묻는다. “교수님 환청이 왜 오는 거죠?” 마르티나가 낀다. “재미있잖아. 환청이랑 대화하면서 시간 보내면 시간도 잘 가고.” “환청이 친구네.” “예. 제가 대화할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할 수 없이 환청이랑 대화하는 거죠.” 엄청 중요한 얘기다. 정곡을 찔렀다. 호덕이가 맞장구친다. “맞아요. 그래서 제가 아내한테 친구 사귈 수 있게 해주려 하는데 동네에 마땅한 또래가 없어요. 아내도 하루 종일 혼자만 지내는 게 문제인 거 같아요. 외로우면 환청이 오는 거 같아요.” 귀에 쏙 들어온다. 맞다. 환청은 외로워서 온다. 친구가 없을 때 환청이 친구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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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고정지 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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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덕이는 증상의 종합백화점이다. 증상만 없애자면 평생 병원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도 불가능이다. 그런데 증상이 심해도 문제없다. 생활만 잘하면 된다. 삶의 목적의식이 있으면 증상이 심해도 생활을 잘 할 수 있다. 다만 애를 써야하기에 본인이 많이 힘들다. 그건 잘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면 된다. 호덕이는 얼마 전까지 ‘사고정지’ 증상이 매우 심했다.
커피 타겠다고 부엌에 가서 한참을 가만히 서있고 설거지하다가도 동작이 멈춘 채 한참 있곤 했다. 밥 먹을 때 수저를 들다가도 가만있고 운동화를 신다가도 멈추고 현관문 앞에서도 멍하니 서 있곤 했다. 내 아내는 “행동이 왜 저렇게 느리지? 답답해서 못 보겠어요.” 하곤 했다. “너 지금 왜 그러고 있는데?” 물으면 멍하니 있다가 깜짝 정신이 돌아온 듯 “내가 지금 여기 뭐 하러 왔었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한다. 순간순간 생각이 정지되는 현상이다. 잠시 머리가 텅 비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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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했던 일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이 되지 않는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야 하는데 그냥 덤덤히 가만히 있곤 한다. 인사하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혼자서 앞만 보고 그냥 간다. 기다렸다가 같이 가야지 하는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이 가자 말하면 그냥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선다. 이렇듯 심한 경우는 사고정지나 사고빈곤이란 용어로도 부족하다. 기억삭제라고 해야 할까? 그런 용어가 없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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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두려움이다. 이러한 증상이 생기면 대다수 당사자는 집안에 틀어박히게 된다.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이 이해를 못하고 나무라거나 한심해하면 당사자는 더더욱 위축되고 자신감을 상실한다. 이렇게 위축된 자신감은 기억이 돌아와서 ‘사고정지’나 ‘사고빈곤’ 증상이 없어진 다음에도 저절로 회복되지는 않는다. 용기를 주고 꾸준히 위로하고 격려해야만 회복된다. 따라서 처음부터 가족과 주변사람들이 잘 이해해주고 위로해주고 격려해줘야 한다. 특히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게 필요하다.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라고 말해줘야 한다.
그런 점에서 호덕이는 대단하다. 호덕이는 그러한 시기에도 꿋꿋이 여기저기 다녔다. 호덕이는 부딪혀서 이겨내야 한다는 확고한 정신력이 있고 뻔뻔한 면도 있다. 그게 강점이다. 남들이 뭐라 하면 “잠깐만요. 내가 지금 생각이 안 나서요.” 한다. 종종 “내가 잠깐 뭘 깊이 생각하느라고요.”라고 둘러대기도 한다. 한 번은 호덕이가 겸연쩍은 듯 농담을 한다. “보통사람은 분별력이 좋은데, 저는 반대예요. 분실력이 엄청 좋아요.” 자신의 증상을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 호덕이는 성격도 좋고 넉살도 좋다. 호덕이는 아직도 ‘사고정지’를 종종 보인다. 꿋꿋한 호덕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옆에서 눈치를 주면 ‘사고정지’가 심해진다. 마음이 불편해도 심해진다. 눈치주지 말고 구박하지 말고 편안하게 대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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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환시인가 귀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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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신이 본 것을 귀신이라고 믿는 경우도 있다. 호덕이는 한동안 나를 산신령이라 부르곤 했다. “내가 왜 산신령인데?” 하면 “제가 어릴 때 산신령 본 적 있어요. 실제로 산신령 있어요. 평생소원이 산신령 만나는 거였어요. 교수님이 산신령 같아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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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덕이 얘기다. “이 집에 이사 오고 하루는 집에 있는데 안방 모서리에서 엄청나게 밝은 불빛이 번쩍이는 거예요. 축구공만한데 엄청나게 밝아서 볼 수가 없었어요. 윙하고 계속 도는데 소리가 엄청 컸어요. 기운에 눌려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어요. 꼼짝도 못하고 엎어져 있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간신히 일어나서 텔레비전 볼륨을 끝까지 높여놓고 집에서 도망 나왔어요. 그 길로 병원에 자의입원 했어요. 며칠 뒤에 집에 텔레비전 소리 엄청 크게 해놓고 온 게 생각나서 외출 허락받고 집에 왔어요. 불빛은 보이지 않았어요. 텔레비전 끄고 병원에 다시 갔어요. 엄청나게 기운 센 귀신인 것 같아요.”
과학이 귀신이 없다는 걸 증명한 건 아니다. 다만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니 귀신 얘기는 빼고 눈에 보이는 것만 갖고 말하자는 거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환시, 대다수 사람들 귀에는 들리지 않으니 환청이라 한다. 하지만 때로 당사자는 자신의 경험을 귀신이라 믿는다. 이때는 “귀신일 수도 있겠네요.”라고 동의하면서 대화하는 게 낫다. 귀신이 아니라고 하면 당사자는 혼란스럽다. 자신의 경험을 부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분명 봤는데 헛것이라 하고, 분명 들었는데 헛소리라 한다. 헷갈린다.
나는 그럴 때 “예. 귀신일 수도 있죠. 그런데 귀신은 맺힌 게 있어서 오는 거고 인연 따라 오는 거죠. 잘못한 게 있으면 마음에서 용서를 빌어야 하고, 내 맘에도 맺힌 게 있으면 풀어야 하죠. 원망, 미움, 분노, 죄책감 이런 게 있으면 풀어야 해요. 마음을 밝고 선하게 가지면 되죠. 귀신은 밝고 선한 곳에는 못 오죠. 귀신은 어둡고 부정적인 곳을 좋아해요. 그러니 마음을 밝고 긍정적으로 가져야 해요.”라고 설명한다.
“사람이 허하고 기가 약하면 헛것이나 귀신이 보일 수 있어요. 그러니 기를 세게 해야 해요. 푹 자고, 잘 먹고, 운동하고, 마음을 밝게 가지면 기가 강해져요.”라고도 말해준다. “약이 뇌에 작용하죠. 그런데 약이 나쁜 기운을 눌러서 작용을 못하게 막기도 해요. 약을 먹으면 귀신도 힘을 못 써요.”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설명이 당사자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가 좀 더 쉽다. 굳이 귀신이 아니라고 입씨름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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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보야, 사랑해 : 호덕이와 착한바보
호덕이는 자기 아내에게 “여보야, 사랑해”라는 말을 수시로 한다. 호덕이도 잉꼬부부다. 호덕이도 아내와 다닐 때 늘 손을 꼭 잡고 다닌다. 매일 동네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고 같이 산책한다. 아내가 7살 연상이다. 3년 전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만났다. 둘 다 재혼이다. 결혼식도 못 올렸고 혼인신고도 안했으니 법적으로는 동거다. 둘 다 외롭게 살다 만난만큼 서로 잘하려고 노력한다.
호덕이 아내는 환청과 우울이 심하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우울하다. 그래서 잠이 많다. 처음에는 살림을 전혀 안했다. 같이 산지 3년째인데 처음 2년은 호덕이가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다했다. 아내를 가만히 모셔두고 살았다. 호덕이는 늘 “세상에서 제일 큰 도둑은 사람 마음 훔치는 도둑이에요. 저는 아내 마음을 훔칠 거예요.”라고 했다. 그런데 한계가 왔나 보다. 그전에는 늘 “같이 살아줘서 고마워.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돼. 내가 다 할게.” 했는데 얼마 전부터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자가 남편 밥 안차려 준다고 불만, 생활비 안 보탠다고 불만. 그래서 호덕이 아내도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살림을 살기 시작했다. 생활비도 전혀 안 대다가 매월 10만원씩 대기 시작했다. 하긴 그래봐야 둘이 매월 55만원 남짓으로 생활하는 건데 살아가는 게 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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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바보’는 늘 웃는다. 이래도 웃고 저래도 웃는다. 30년 세월 정신병을 앓으면서 도통했다.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 남들에게는 언제나 호인이다. 내게도 참 잘한다. 기초생활수급으로 사는 어려운 형편에도 “오늘 집에 놀러가요.” 하면 나를 위해 시장을 봐둔다. 음료수도 사놓고 커피도 사놓고 고기도 구워준다. 그리고 차비하라고 굳이 만 원짜리 한 장을 손에 쥐어준다.
그런데도 남편한테만큼은 그게 안 되나보다. “둘이 싸우지 말고 사세요.” 해도 잘 안 된다. 착한바보는 남편이 재발할까봐 걱정한다. 약 때문에 싸우고, 채팅 많이 하지 말라고 싸우고, “망상이다. 환시다. 인정해라.” 싸운다. 각자 자기 문제만큼은 아직 어쩌지 못하나보다. 아내는 남편이 재발할까 두려워 간섭하고, 남편은 간섭 받으면 자존심 상해한다. 아내의 ‘불안’과 남편의 ‘자존심’ 그게 건드려지면 싸운다. 우리네 보통의 부부들과 똑같다. 불안과 자존심 때문에 싸운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되는데 서로가 서로를 바꾸려 한다. 그러면서 아내는 남편에게 “고집 세다.” 하고 남편도 아내에게 “고집 세다.” 한다. 싸우면 아내는 환청이 심해지고 남편은 자살충동이 생긴다. ‘재발’이 두려워서 싸우는데, 그게 오히려 ‘재발’을 부추긴다. 이 간단한 사실을 왜 못 깨달을까?
6. 불안과 자존심 (1) : “환시다. 아니다.”로 싸우다.
전화가 왔다. “교수님 혹시 집에 들러주실 수 있나요?” 호덕이 아내 목소리다. “왜요?” “호덕씨가 지금 자살한다고 뛰어내리려 하고 난리가 났어요.” “예. 지금 바로는 안 되고 이따가 저녁에 갈게요. 좀 바꿔주세요.” “예. 전데요.” “호덕아 뭐가 속상했나? 저녁에 갈 테니까 그때 얘기하자. 속상한 맘 가라앉히고 일단 한숨자라.” 저녁에 집에 갔더니 베란다 방충망이 찢어져 있다. 뛰어내리겠다고 방충망에 머리를 박았단다.
“그래 왜 죽으려 했는데?” “아내가 제 말을 안 믿어주잖아요.” 호덕이가 채팅을 하다가 급하게 아내를 불렀단다. “여보야 빨리 와봐라. 여기 컴퓨터 화면에 애들이 나타났어. 애들이 철봉도 하고 운동장에서 뛰어놀아. 애들이 엄청 많아.” 아내가 가보니 컴퓨터 화면에 아무 것도 없고 그냥 채팅방 화면만 있었다. 그래서 아내는 환시라 하고 호덕이는 조금 전까지 분명히 있었다하고 둘이 한참을 싸웠단다.
“당장 입원시켜야 할 것 같아요. 요즈음 들어서 자꾸 깜빡깜빡하고 환시도 심하고 엉뚱한 말을 많이 해요. 제가 아니라 하면 엄청 화를 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재발한 것 같아요.” “제 보기에는 입원까지는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혹시 컴퓨터 채팅을 얼마나 했나요?” 밤새도록 했단다. “정신장애인들은 밤에 잠 안자면 다음날 바로 안 좋아요. 제 생각에는 밤에 잠 안자서 상태가 안 좋아진 것 같아요. 일단 오늘 하루 푹 재우고 내일 다시 의논하시죠. 그리고 다음에 또 그러면 환시니까 인정해라 망상이니까 인정해라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러면 인정 안 해요. 싸움만 되요.” 덧붙여서 “상태가 안 좋네. 뭔가 힘든 모양이네.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안정시켜야겠다. 생각하시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는데 주력하세요. 그러면 괜찮아져요.”라고 했다.
호덕이가 “교수님 제 생각에도 입원해야 할 것 같은데요. 자살충동이 자꾸 일어나요.” 한다. “그래? 왜 죽고 싶은데?” “아내가 제 말을 안 믿어주잖아요. 그래서 죽고 싶어요.” “입원하면 좋아질 것 같나?” “잘 모르겠어요. 입원한다고 해결될 것 같진 않아요.” “내 생각에는 아내가 너를 안 예뻐해 주고 네 말을 무시해서 네가 속이 많이 상한 것 같은데, 일단 오늘 하루 푹 자고 내일 의논하면 어떨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저 라면 하나 끓여주세요.” 하니 “내꺼도.” 한다. 같이 라면 먹고 다시 얘기를 나누었다. 두어 시간 지났다. “교수님이 좋아요.” “그래 네가 나 좋아하는 건 내가 잘 알지.” “이제 마음이 편해졌어요. 좋아요.” 그러고는 “여보야. 사랑해. 아까 내가 화 부려서 미안해.” 한다. “실없는 놈. 그럴 걸 죽는다고 난리쳐?” 하니 웃는다.
증상이 있을 땐 마음을 알아주고 달래주는 게 제일이다. 그런데 흔히들 마음은 봐줄 생각을 않고 약만 높이려 하고 입원만 시키려 한다. 호덕이는 아내가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을 때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난다. 화가 나면 증상이 심해진다. 호덕이 아내는 “환시다. 망상이다. 그걸 인정해라.” 한다. 호덕이는 더더욱 화가 난다. 그걸 인정하라 할 필요가 없다. ‘지금 상태가 안 좋구나.’ 생각하면 된다. ‘잠이 부족한가? 몸이 피곤한가? 마음이 불편한가?’ 생각해야 한다. 일단 다독여서 푹 재우고 휴식을 취하게 해야 한다. 심리적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그러면 대개는 증상이 가라앉는다.
7. 불안과 자존심 (2) : “약 먹었다. 안 먹었다.”로 싸우다.
호덕이가 시무룩하다. 아내가 입원했단다. “왜? 환청이 심해서?” 답이 없다. “둘이 싸웠나?” “그게 아니고요. 저보고 입원하라 하잖아요. 제가 백지를 내놓고 내가 입원해야 되는 이유와 입원 안 해도 되는 이유를 적으라 했는데요.” 말이 길다. “네가 또 아내를 고문했구나.” “그게 고문이라요?” “그래 고문이지. 아내가 왜 입원하라던데?” “제가 약 먹었는데 한 시간 뒤에 또 약 먹으라 하잖아요. 보는 앞에서 두 봉지 먹어버렸어요. 아내가 저보고 정신이 깜빡깜빡하고 온전치 못하다고 입원하라 했어요. 그래서 제가 ‘네가 나만큼 입원해 봤나?’ 하고, 입원에 대해서 설명해주려 했어요. 근데 제 말을 안 들으려 하잖아요.”
또 약이다. 벌써 6개월도 넘었다. 며칠에 한 번씩 약 때문에 싸운다. 호덕이는 “약 먹었다.” 하고 아내는 “안 먹었다.” 한다. 호덕이 아내는 호덕이가 유일한 희망이다. ‘혹시 재발이라도 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한다. 그리고 약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약 빠트리면 재발할 거라 확신한다. 호덕이는 자기가 지금까지 20년 세월 혼자서 약 잘 챙겨먹어 왔고, 치료와 재활, 재기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신에게 배워야 하는데 아내가 자기를 가르치려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약 빠트렸다. 먹어라.” 하면 자존심 상해하고, 심하게 화를 낸다. 하루는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매직 사와라.” 한 달분 약봉지에 매직으로 모두 날짜를 쓰게 했다. 그러고는 한동안 싸움이 없었다. 그런데 싸웠단다.
“약봉지에 날짜 다 써놨잖아. 봉지 보면 알 텐데 왜 싸웠나?” 뭐라 뭐라 하는데 못 알아듣겠다. “그래 병원에는 데려다 줬나?” “자는 척 누웠는데 입원한다 하고 이것저것 챙기데요. 모른 척 했어요. 학교에 전화하더니 보름쯤 쉰다 하데요.” 옆에서 마르티노가 낀다. “형수님 아침에 전화 와서 환청이 심해서 입원한다 하시데요.” 집에 와서 아내에게 말했다. “호덕이 부인 입원했대.” “왜요?” “둘이 싸워서 아내 환청이 심해졌나봐.” “그런다고 입원해요?” “환청이 심하면 괴롭지. 그래 입원한 거지.” “어유 무서워서 부부싸움도 마음대로 못하겠네.”
맞다. 부부싸움도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 가급적 싸우지 말아야 하고, 싸우더라도 요령껏 싸워야 한다. 싸우면 팔다리가 저리고 호흡이 얕아지고 숨이 멎을 것 같아서 응급실 가는 경우도 있고, 속상하다고 울어서 비염과 천식이 심해져 응급실 가는 경우도 있다. 여기저기 실핏줄이 저절로 터져서 온몸에 멍이 드는 수도 있다. 호덕이 아내처럼 환청이 심해져서 입원하는 경우도 있고, 망상이 심해지는 경우도 있고, 정신이 혼란해지는 경우도 있다. 자살충동이 생기는 경우, 폭력적으로 되는 경우, 술을 왕창 먹는 경우, 바람을 피우는 경우, 돈을 막 써버리는 경우 등 싸움을 감당 못해서 뒤탈이 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따라서 함부로 싸우면 안 된다. 요령껏 싸워야 한다.
호덕이는 아내의 불안한 심정을 알아주면 된다. “약 빠트렸다. 먹어라.”하면 ‘불안해하는군. 내가 잘못될까봐 걱정하는군. 어떻게 하면 불안을 가라앉혀줄 수 있을까?’에 생각이 미쳐야 한다. 그리고 ‘약 때문에 걱정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를 궁리해야 한다. 그런데 자존심 상해하고 화를 낸다. 자존심 세우기에 바빠서 아내의 마음이 보이질 않는다.
호덕이 아내는 남편이 화를 내면 ‘자존심 상했구나.’에 생각이 미쳐야 한다. 그리고 ‘약 빠트리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궁리해야 한다. 사실 오늘 하루 약 안 먹는 건 아무 문제없다. 그렇다고 바로 재발하지는 않는다. 잘 궁리해서 내일부터 안 빠트리게 하면 된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 어떻게든 오늘 약을 먹이려 한다. 불안한 마음에 휩싸여 남편의 자존심에 마음이 미치질 못한다.
8. 싸움의 후유증 : 아내 입원으로 힘들어하다.
며칠 후, 아내를 입원시켜 놓고 호덕이가 얼마나 심란해할까 싶어 집에 갔다. 가족이 입원하면 남아 있는 가족은 우울하다. 첫 입원의 경우 가족들은 심한 심리적 충격과 죄책감을 경험한다. 이후 강도는 많이 약해지지만 매번 입원 때마다 가족들은 심리적 충격과 죄책감을 느끼며 우울해한다.
방에 불도 켜지 않고 깜깜하다. 저녁도 안 먹었단다. 엄청 우울하고 힘든 모양이다. 두 사람 있던 집에 혼자 있는 걸 보니 내 느낌도 썰렁하다. “너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우리 집에 가자.” 억지로 집에 데려왔다. 아내가 고맙게도 밥을 새로 하고 불고기도 구워냈다. 밥 먹이고 같이 마르티노 집에 갔다. 마르티노가 호덕에게 “많이 힘들죠?”하며 자기도 아내가 병원 입원했을 때 엄청 우울했다 한다. 그래서 아는 형이 한 달인가 두 달. 아내가 퇴원할 때까지 자기 집에 와서 생활해 줬단다. 그 형 덕분에 힘든 시기를 견뎠다 한다.
“마르티노는 8년차 부부지? 마르티노도 예전에는 험악하게 싸웠지? 내가 알기로 둘이 싸워서 입원도 많이 한 걸로 아는데.”하니 아내 마르티나가 “말도 마세요. 시댁하고 친정에 다 전화해서 이혼한다 하고 난리 났었어요. 진짜 험악하게 많이 싸웠어요.” 한다. 마르티노가 “5년 6년쯤 됐을 때 정말 많이 싸웠어요. 이젠 안 싸워요.” 한다. 둘이 정말 많이 싸웠다. 그래서 둘이 번갈아가며 입원도 많이 했다. “호덕이는 이제 3년차니 이제부터 싸움 시작이네. 앞으로 많이 싸워야겠네.” 하고 웃으니, “안 싸울 거예요.” 하고 쑥스러워 한다.
마르티노가 묻는다. “형수님 언제쯤 퇴원할까요?” “자의입원이니 언제든 퇴원할 수 있지. 내 생각에는 열흘이나 보름쯤 입원하고 퇴원할 거 같은데. 본인이 입원할 때 학교에 전화해서 그 정도 쉰다고 했고. 증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편하고 싸워서 속상해서 입원한 거니까.” 호덕이가 “저 버릇 고치려고요?” 한다. “그래. 네 화내는 버릇 고치려고. 그러니 집에 있으면서 우울해 하지 말고 둘 중에 하나를 해. 같이 입원하든지. 아니면 아내 없는 동안 집안 대청소하고 이불빨래하고 그릇 다 꺼내서 닦고, 집안을 반짝반짝하게 만들어서 아내가 집에 와서 깜짝 놀라게 만들어.” “두 가지 다 생각해 봤어요. 집안청소 할게요.” “하루에 한 가지씩만 해. 청소도 한 번에 하려 하지 마. 그러면 엄두가 안 나서 못해. 내일은 화장실 청소만 반짝반짝하게 해. 물청소하고 구석구석 닦아. 그리고 모레는 안방. 그런 식으로 해.”
한 마디 덧붙였다. “네가 정신장애 2급 되겠다는 생각을 버려. 그것 때문에 작년보다 네가 엄청 못해졌어. 약에 절어서 힘들어하는 모습만 보이니 네 아내가 희망이 없어서 힘들어하는 거야. 환청도 그래서 심해진 거고.” “그래요? 아내가 학교 다니느라 힘들어서 그런 거 아니고요?” “아내가 보기에 작년까지는 네가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의욕도 있고 해서 믿음이 갔는데, 2급 되겠다고 약 높이고 벌써 6개월째 네가 빌빌대니 아내가 무슨 희망이 있겠어? 너를 의지하고 살았는데 오히려 너를 챙겨줘야 할 판이 됐는데. 그러니 2급 되려 하지 마. 옛날의 맑은 정신 되찾으면 아내도 희망이 생기잖아.”
호덕이가 “오늘 아내한테서 전화 왔었는데요. 자기가 입원한지 며칠 됐는지 물어요. 2박 3일 됐다 하니, 내가 그만큼이나 잤나? 해요. 주사로 약을 엄청 세게 놨나 봐요.” 한다. 응급입원하면 일단 약을 써서 푹 재운다. 며칠 재우고 나면 상태가 많이 호전된다. 그런데 약을 쓰지 않더라도 마음을 안정시키면 잠을 잘 수 있다. “이번에 퇴원하면 제발 싸우지 말고 잘해라.” “잘할 거예요.” 진작 잘하지. 호덕이는 아내 입원시켜놓고 상태가 안 좋다. 카드며 각종 신분증을 분실하더니, 핸드폰도 분실했다 찾았다. 계속 환시가 보이고 안 좋은 생각이 자꾸 든단다. 많이 우울해한다. 잠도 푹 못자는 것 같다.
일반인도 부부화목 해야 하지만 정신장애인은 특히 더 그래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안정시켜줘야 한다. 그런데 아내의 ‘불안’과 호덕이의 ‘자존심’ 때문에 그게 잘 안 된다. 자주 싸운다. 이때는 좋은 이웃이 있어야 한다. 가족이든 친구든, 편하게 의논하고 필요할 땐 중재를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급하면 전화로라도 의논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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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자녀를 향한 당사자들의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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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덕이는 갓난 애기 때 헤어진 딸을 그리워한다. 항상 “내 딸 이젠 대학생이에요. 잘 자랐을 거예요.” 한다. 호덕이 아내 착한바보도 초등학생 때 헤어진 아들과 딸을 그리워한다. 오랜 세월 매월 10만원도 안 되는 돈만 쓰면서 어떻게 생계가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기초생활수급비를 거의 전액 저축하다시피하며 살았다. 애들 만나면 줄 거라고. 애들한테 너무 못해줘서 미안하단다. 애들 초등학생 때 양치질을 못하게 했단다. 양치질하면 이가 상한다고. 홍합껍질 먹으면 몸에 좋다고 애들에게 강제로 홍합껍질을 씹어 먹게 했단다. 병의 증상이다. 그리고 애들이 말 안 들으면 화내고 심하게 때렸다 한다. 밥도 안 해 줬다 한다. 애들이 엄마만 보면 무서워서 벌벌 떨었단다. 환청이 너무 심해서 제발 떨어지게 해달라고 매일 부처님께 3천배를 했다 한다. 그랬더니 병이 낫는 게 아니라 더 심해졌단다.
그때 생각을 하면 애들에게 너무 미안하단다. 호덕이는 “저하고 아내 애하고 다 우리 애들이에요. 아내하고 저하고 항상 세 명 이름 외우며 건강하고 행복하라고 기도해요.” 한다. 애들이 나이가 들면 이해해 줄까? 용서해줄까? 옛날의 무서웠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혹시라도 연락해올까? 부부는 혹시나 하는 마음을 아직도 실낱같이 잡고 있다.
내 생각에는 자녀가 없는 경우보다 있는 경우가 낫다. 노후에 덜 외롭다. 젊은 시절 결혼해서 이혼했다 할지라도 자녀를 두고 이혼한 경우가 낫다. 설혹 자녀가 성장할 때 어디 사는지 조차 몰랐던 경우에도 자녀가 어른이 되고 철이 들면 부모를 찾아오기도 한다. 자신을 버리고 간 배우자를 탓할 필요가 없다. 자녀를 두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평생 자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에도 자녀를 둔 경우가 낫다. 왜냐하면 “잘 커서 지금쯤 어디선가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하는 생각과 느낌만으로도 심리적으로 큰 위로가 된다.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글을 읽고 이의를 제기하신 분들이 있다. 자녀의 입장과 심정을 생각해 봤느냐고.
10. 발병과 첫 입원 : 낯설고 혼란스러운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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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덕이는 발병 전에 신문배달, 자장면 배달, 선원생활, 막노동 등을 했다. 막노동 하면서 보니까 도배사가 일당을 많이 받는 것 같아서 도배기술을 배워서 10년간 죽어라고 일했다. 돈 많이 버는 게 삶의 목적이었다. 주식에 투자해서도 돈을 벌었다. 20대 후반에 아파트 전세 얻고 결혼도 하고 딸도 낳았다. 저축도 몇 천 만원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흰줄기가 등으로 타고 올라오는 거예요. 다음날부터 각 종교단체를 다 찾아 다녔어요. 단학선원에서 제일 친절하게 대해줘서 그때부터 단학선원 다녔어요. 일주일 다녔더니 몸이 흔들리면서 눈물, 기쁨, 슬픔, 희열 온갖 감정이 엄청나게 올라와요. 버스 타니까 귀에서 톱니바퀴 가는 소리, 폭포수 소리, 관중들 함성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려요. 그리고 또 한 열흘 지나니까 배의 근육이 저절로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거예요. 그때부터 기에 빠졌어요. 처갓집 가서도 말 한마디 안하고 마음속으로 기를 모아야 된다는 생각만 계속하면서 집중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증상 있었는데?” “망상, 환시, 환청 모든 증상이 다 있었어요. 신이 될 수 있다. 정성의 에너지가 사랑, 우정, 긍정적인 단어들과 같이 운명을 좌우한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어요. 아내가 집에 연락해서 강제입원 당했는데 의사를 딱 보니 기가 쫙 오는 거예요. 의사에게 ‘기 안 보내주셔도 됩니다.’ 하고는 제 발로 병동 올라갔어요.”
첫 발병에 대한 당사자 기억은 전문가들의 견해와 조금 다르다. 첫 발병 때의 주요증상에 대한 생각도 다르고 발병원인에 대한 생각도 다르다. 당사자들은 실연, 왕따, 군대에서의 선임병의 괴롭힘, 남편과의 불화, 고부갈등, 또는 심리적 충격 등을 발병원인으로 언급하곤 한다. 당사자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본다.
11. 약이 줄지 않는 이유
호덕이가 때때로 묻는다. “교수님 저 입원해야 돼요?” 그때마다 대답한다. “아니. 입원 안 해도 돼. 대신에 약만 줄여.” 호덕이는 약에 절었다. 작년까지는 정신이 맑았다. 통닭집 호객행위 아르바이트도 3개월하고 목욕탕 시다 아르바이트도 1개월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수님 저 억울해요. 남들은 저보다 더 말짱한 데 다들 정신장애 2급이에요. 저만 3급이에요. 저도 2급 돼야 되겠어요.” 한다. 기초생활수급자에 장애 2급이면 1인당 월 50~60만원 정부보조금이 나오는데, 장애 3급은 그보다 10만원쯤 적다. 호덕이도 생활에 많이 쪼들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날부터 병원에 가서 일부러 미친 척했다. 사소한 증상을 과장해서 말하고. 그랬더니 2급으로 올라간 게 아니라, 약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터미널에서 서울 가려고 고속버스 기다리는 데 전화가 온다. “호덕인데요. 중국 도착하셨어요?”, “뭔 소리가? 웬 중국?”, “교수님 중국 가신다고 안 하셨어요?”, “너 지금 정신 휘황하다. 중국은 무슨 중국. 서울 간다 했지.”, “아~ 그래요?” 내가 서울 다녀올게 했더니, 멀리 간다 싶었던 모양이다. 나하고 떨어지는 게 싫었던 가보다. 그래 서울 간다는 말이 아주 멀리 가는 느낌으로 와 닿았던 것 같다. “너 휘황한 소리하는 건 약이 세서 그런 것 같아. 주치의 샘께 약 줄여 달라 해라.” 그런데 주치의는 약을 줄여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리기만 한다.
점점 문제가 심각해진다. 어느 날 초인종이 울려 인터폰을 받았다. “호덕인데요.” “웬 일이고?” “교수님께서 오라 안 하셨어요?” “너 지금 또 정신없다. 내가 언제 오라 했나?” “예... 저 갈게요.” 여기까지 왔는데 싶어 “괜찮다. 이왕 온 김에 올라와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라.” 하고 불러들였다. 하루는 “아내는 오늘 학교에서 소풍 갔어요. 고기도 구워먹고 과일도 먹고 올 거예요.” 한다. 다음날 호덕이 아내와 통화할 일이 있어 “소풍 잘 다녀오셨어요?” 하니 “웬 소풍이요? 6월 달에 가요.” 한다. 호덕이가 또 착각했나 보다.
약이 세지면서부터 착각이 심해졌다. 기억도 뒤죽박죽이다. 어제 일을 일주일 전 일이라 하고, 일주일 전 일을 어제 일이라 한다. 그래서 스토리가 이상해진다. 없던 일도 있었다 하고, 있었던 일도 그런 일 없었다 한다. 그래서 맨 날 “잠 푹 자라.” “쓸 데 없이 사람들 만나러 다니지 마라.” “집에서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해라.” “마음 안정시켜야 한다.”고 당부한다. 주치의 샘께 말씀드려서 약을 줄이라고 해도 안 된다. “착각이 심하다.”하면 주치의는 자꾸만 약을 높이는 것 같다.
호덕이한테 물었다. “너는 도대체 왜 약이 안 줄어드는데? 의사한테 약 줄여 달라 했나?” 하니 “약은 의사가 전문가예요. 환자가 이 약 써 달라 저 약 써 달라 하면 안돼요. 약을 늘려 달라 줄여 달라 해도 안돼요. 환자는 단지 요즈음 제가 이래요 하고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말하는데서 그쳐야 해요. 의사가 판단하고 처방하면 거기에 따라야 해요.” 한다. 정신장애인 리더라고 자처하면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의사가 약에 대한 전문가이긴 하지만 면담시간이 짧아서 환자를 제대로 파악 못한다. 환자 자신이 자신의 상태를 가장 잘 안다. 약을 먹었더니 어떻더라 하는 것도 환자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약이 세면 세다 해야 하고, 약하면 약하다 해야 한다. 그래야 의사가 알아듣는다. 의사가 그랬단다. “이대로 참고 1년만 먹읍시다. 그러면 정신장애 2급 판정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둘 다 생각이 굳어있다. 호덕이도 의사도 2급에 꽂혀 있다. 차라리 2급 안되고 평생 3급으로 사는 게 낫다. 매월 10만원씩 적게 받더라도, 약물부작용이 없고 정신만 맑다면 어떤 일이든 해서 매월 몇 십만 원 정도는 벌수도 있다. 마르티노가 “형은 2급 안돼요. 처음 장애등급 받을 때 잘 받았어야 되요. 한 번 3급 받으면 웬만해선 2급 안돼요. 계속 3급이에요.” 한다.
호덕이는 작년보다 자신감을 많이 상실했다. 가끔 “저는 영원한 정신장애인이에요.”라고 한다. 나는 “호덕아 나는 그 말이 듣기 싫어. 요즈음 제가 상태가 안 좋아요. 그렇게 말하면 좋겠다. 매일 매일 기복이 있는 건데 그렇게 단정 짓는 말은 안하면 좋겠다.”고 대꾸하곤 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좀 더 얘기해 보고 그래도 말 안 들으면 주치의를 바꾸라고 권해야겠다. 내가 의사가 아니라도 약에 절어서 헤매는 건 눈에 보인다. 그런데도 답답하다. 호덕이도 그 아내도 “약은 의사가 전문가예요. 주치의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되요.” 한다.
호덕이는 약이 세서 사고정지, 빈번한 착각, 주의집중 결함 등을 심하게 보이고, 호덕이 아내는 약이 세서 잠에 취하고 몸이 처지고 힘이 없고 만사가 귀찮다. 호덕이는 ‘정신장애 2급 될 욕심’과 ‘약은 의사가 전문가라는 신념’ 때문에, 호덕이 아내는 ‘환청이 심해질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약을 못 줄이고 있다. 둘 다 세상살이에 대한 자신감을 많이 상실했다. 세상살이에 대한 의욕과 자신감을 어떻게 되찾게 할 수 있을까?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터득하면 약을 줄여도 충분히 잘해 나갈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 방법을 익히고 그 이치를 터득하게 할 수 있을까?
12. 쓰러지면 다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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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덕이는 지금까지 29번 입원했다. 우리는 “한 번 더 입원해서 30번 채우지 그래.” 하고 놀리곤 한다. 호덕이는 “실제 재발해서 입원한 건 3~4번이에요. 나머지는 재발조짐 오면 제 발로 병원 가서 ‘며칠 쉬었다 갈게요.’ 하고 예방차원에서 입원한 거예요. 때로는 겨울에 집에 있으면 추워서 겨울 따뜻하게 나려고 입원하기도 했어요.” 한다. 호덕이는 대구에 있는 사회복귀시설을 10년 이상 이용했다. 사회복귀시설 터줏대감인 셈이다. 요즈음에는 파란마음쉼터만 이용한다. 마르티노도 호덕이도 이제는 사회복귀시설을 졸업한 셈이다.
호덕이와 마르티노를 보고 내 제자가 묻는다. “저 정도면 멀쩡한 것 같은데, 취업만 하면 될 것 같네요.”, “아니. 정식취업해서 하루 8~9시간 일하면 못견뎌내. 하루 2~3시간 정도 일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있으면 딱 좋지. 그렇게 시작해서 하루 4~5시간 정도 일하는 데까지 늘리면 되지. 그리고 일하다가 재발조짐 느끼면 ‘제가 몸이 안 좋아서요. 며칠만 쉴게요.’ 하면 자유롭게 쉴 수 있는 직장이어야 해. 그런데 우리나라에 그런 직장이 없어. 그래서 일 못하는 거야.” 마르티노와 호덕이는 자기 증상이 뭔지 잘 알고 있다. 재발조짐도 안다. 그래서 재발조짐을 느끼면 하루, 이틀, 또는 사흘 푹 자고 푹 쉰다. 그러면 괜찮아진다.
13. 다시 일어서는데 도움이 된 방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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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료 또는 작문치료라 해도 좋은 방법을 사용하는 당사자도 꽤 있다. 이종찬은 시인이 되겠다는 꿈이 있고, 호덕이는 수필을 쓰고 있다. 또한 정식 시집을 출판한 당사자도 있다.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며 힘든 시기를 이겨낸 당사자도 있다. 산책을 거론하는 당사자들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무엇이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답은 당사자마다 다른 것 같다. 산책, 운동, 등산, 노래, 영화, 시, 수필, 그림, 인터넷 채팅, 독서, 운전, 영어공부, 수학공부, 정신보건센터, 사회복귀시설, 공동작업장, 아르바이트 등이 흔히 거론되는 방법들이지만, 무엇이 도움이 될지는 당사자의 취향에 달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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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잡초인생
호덕이는 지금껏 300편이 넘는 수필을 썼다. 물론 습작이다. 호덕이의 글은 인터넷 다음의 ‘파란마음 하얀마음’ 카페의 ‘조나단의 문학세계’라는 게시판에 수록되어 있다. 그 중 한 편을 소개한다. 제목은 ‘잡초인생’이다.
벌써 나뭇잎이 눈치 없이 떨어집니다. 열정의 마음도 고개를 숙이며 자연의 본연 앞에 숙연해집니다. 고독한 중년, 가을남자의 마음도 함께 고개 숙입니다. 외로움이 가슴 가득 인생의 파도 되어 고독한 나를 깎아 내립니다. 처~얼썩, 처~얼썩 파도 되어 씻기고 씻깁니다. 병든 몸 끌고 여기까지 와서 뒤돌아보지 않음은 계절의 이탈이겠지요. 유년기 자연과 일치했던 동심에 물들어서 잊혀지지 않는 본연의 나는 어디로 갔는지?
아내와 손잡고 가까운 운동장을 돌다가 한쪽 구석에 초라하게 핀 흔한 잡초를 보면서 인간 본연으로 되돌아갑니다.
'잡초야 외롭지?'
'겨울은 어떡할래?'
'우리 집에 함께 살래?'
장단지가 아프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외로움도 고독도 묵묵히 이겨내는 너의 삶, 침묵은 내가 가야 할 미래의 길이었습니다. 주어진 여건에 충실 하는 미물에 부끄러워 잠이 안 옵니다. 생김새 하나하나 잊혀지지 않고 생생한 흑백 사진되어 내가 됩니다. 어두운 곳 외로움마저 이겨내는 힘이 생겨야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인생 졸업관문을 정식 통과한 것이리라 짐작합니다.
내일 뿌리가 뽑혀도 밤을 지키는 이 시대 그늘의 많은 소수들의 고독은 언제나 잡초처럼 침묵으로 자신의 자리에 있습니다. 미련스러울 정도의 우직함이 사회를 지탱하는 참 아름다움일 것 입니다.
'잡초야 내일은 수필 강의 가니까 모레 보자.'
'겨울엔 우리 집에 가자.'
이틀 후 또 잡초를 보러 갔습니다. 두 포기가 짓밟혀 있었습니다. 축구하는 애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발자국 선명합니다. 저 많은 것을 다 옮기자니 자리도 없고 지나치게 선(善)한 마음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잡초의 인생 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닐까? 그렇게 위로도 합니다.
나는 어디에 피어 어떠한 꽃인지? 향기는? 생김새는? 자신의 마음을 채찍질합니다. 절대 선(善)의 뚜렷한 관념, 가장 큰 화두로 남을 선(善), 그래도 버리지 못함의 절대 선(善), 저는 그래서 넘지 못할 운동장 담 너머 세상을 갈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운동장 한 켠에 있어도, 뿌리가 뽑혀도, 묵묵히 살아가는 비참한 이유 없는 최후라도...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음지의 인생도 잡초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아침 해가 뜹니다.
본래 풀은 모두 동등했고 잡스러운 풀은 없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잡초가 되었고 하찮은 잡초가 없으면 인간도 살아 갈수 없음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삽니다. 잡초가 점점 사라져갑니다.
과거 인간에게도 등급을 매기던 세상도 있었습니다.
벌써 이른 아침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자신도 잡초가 될 수 있음을 화두로 던집니다. 마음의 회초리가 새벽하늘을 날아 곡선을 그리는 망상. 그리고 환청이 엄습합니다. 회초리의 소리가 마음에 문신으로 새겨집니다.
호덕이는 우리 모두가 ‘인생대학 일상심리학’ 전공자라고 말하곤 한다. 그럴 듯한 표현이다. 지난 5월말에 이 책의 초고를 완성하고 원고를 던져뒀었다. 지금이 10월말이니 그새 5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호덕이는 많이 좋아졌다. 사고정지 증상도 없어졌고 쉽게 흥분하고 화내던 습관도 거의 없어졌다. 잠도 잘 잔다. 내 생각에 좋아진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병원을 바꾸고 약을 대폭 줄인 덕이다. 매일 클로프프로마찐 250mg을 먹었는데 100mg으로 줄인 게 벌써 3개월이 지났다. 또 하나는 마음이 안정된 덕이다. 병원에 입원했던 호덕이 아내가 퇴원해서 전보다 호덕이를 따뜻하게 대해준 게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호덕이가 세차장 출근을 시작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한다. 출근 첫 날 내가 너무 기뻐서 호덕이 내외에게 저녁을 한 턱 내며 당부했다. “호덕아, 잘하려고 너무 무리하지 마. 반짝 잘하는 건 소용없어. 꾸준히 지속하는 게 중요해.” 호덕이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준 당사자가 한 마디 거든다. “제 경우에는 한 번씩 고비가 찾아오던 데 그 시기를 잘 넘기는 게 중요해요.” “그게 언제쯤이지?” “제 경우에는 일 시작하고 2달이나 3달째가 고비예요. 그 시기 넘기면 괜찮아요.” 호덕에게 “1주일 지나면 또 한 턱 낼게. 그리고 1달 지나면 또 한 턱 낼게.” 약속했다. 1주일 지났다. 고기 파티를 벌였다. 파란마음쉼터 회원들 십여 명이 참석해서 다 함께 기뻐했다.
호덕이가 출근을 시작하고부터 호덕이 아내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요즈음 아침밥 해주신다면서요? 호덕이가 너무 좋아하대요.” 하니, “당연하죠. 같이 노력해야죠. 일하려면 아침 먹어야 해요. 많이 힘든 일이라서 배가 든든해야 해요.” 한다. 호덕이 아내 착한 바보도 지난번 입·퇴원 후에 많이 좋아졌다. 3개월 입원치료 하느라 다니던 학교는 휴학했다. 입원기간 중에 클로자핀으로 약을 바꿨다. 그 때문인지 그토록 심하던 환청이 떨어졌다. 퇴원 후에도 계속 잠이 많았는데, 호덕이가 출근하면서부터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호덕이 아침밥을 챙겨주고 부족한 잠은 낮잠으로 보충한다. 늘 우울한 표정이었는데 웃음이 많아지고 얼굴에 화색이 돈다. 희망이 생긴 모양이다.
15.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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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는다는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병이 있다고 장애가 있다고 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가? 물론 그들이 종종 도움을 필요로 하긴 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들이 우리를 도와주기도 한다. 도움이란 일방적인 게 아니다. 주고받는 거다.
나는 호덕이가 참 고맙다. 내가 달리 뭘 해주는 건 없다. 그냥 얼굴 보면 반가워하고 힘들어하면 옆에 같이 있어주고 어리광부리면 받아줄 뿐이다. 그런데 호덕이는 전화하면 항상 “교수님 식사하셨어요?” 묻는다. 잠시 짬나면 쉼터에 와서 자기 손으로 밥하고 밥 차려 준다. 청소도 해준다. 가끔은 안마도 해준다. 나는 손 하나 까딱 안한다. 그냥 웃어주고 말만 예쁘게 한다. 이래 따지면 누가 누구를 돕고 있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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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책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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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한 인물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 중에서도 호덕이와 착한 바보, 마르티노와 마르티나, 이종찬에게 특히 각별한 고마움을 전한다. 그들은 자칫 부끄러울 수 있는 경험담을 만천하에 공개하도록 허락해줬다. 쉽지 않은 일이다. 고통 중에 있는 당사자와 그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애정과 헌신에 찬사를 보낸다. 특히 ‘잡초인생’이라는 책 제목을 제안해 준 호덕에게는 거듭 감사 인사를 보낸다.
책을 마치기 전에 파란마음이란 단어에 대해 잠깐 설명하고자 한다. 이전에 인터넷카페 ‘파란마음 하얀마음’의 카페지기를 했던 무소유에 따르면, 파란마음이란 단어는 파란하늘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퍼렇게 멍든 가슴을 연상시키기도 한단다. 그래서 어떤 당사자가 인터넷카페 이름으로 제안했다 한다. 호덕이는 자기가 초등학생 때 조현증을 앓던 큰누나가 우물가에서 ‘파란마음 하얀마음’ 동요를 부르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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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후의 일들 (2015. 5. 8 작성)
위의 이야기는 잡초인생(2103. 12. 6 편집)에 실린 내용으로서, 2011년 말~2013년 말까지의 2년간의 일화이다. 잡초인생을 쓴 지 1년 6개월이 지났다. 그간에 호덕이(조나단)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2014년 3월에 호덕이 아내 착한바보는 심한 부부싸움 후에 호덕이를 떠났다. (부부싸움 후 내게 상담을 청해와서, 여성 주거시설로 옮기도록 내가 주선해줬다.) 이 시기에 호덕이는 많이 힘들어했다. 다행히 내가 대명동 파란마음쉼터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내 곁에서 1~2달 정도 숙식하며 함께 지내며 힘든 시기를 견뎌냈다.
2014년 5월에 내가 파란마음쉼터를 향기/캠벌 부부에게 넘겨주고 (이때부터 행복나눔쉼터로 이름이 바뀌었다.) 침산동 제자의 상담실로 거처를 옮겼다. (초롱이 문제로 옆 사무실에서 항의가 심해서 거처를 옮겼다.) 호덕이는 향기/캠벌 부부와 매우 친했지만, 본인 입장에서는 내가 쉼터를 운영할 때만큼 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호덕이는 이전부터 자신이 살던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지내기가 힘들다고 호소했었다. 양쪽 옆집이 둘 다 가족들 간 싸움이 심했는데, 호덕이는 옆집들에 대해 화가 많이 나 있었고, 옆집들과 관련된 환청과 망상을 호소하곤 했다. 그나마 아내 착한바보와 함께 살 때는 견뎌냈는데, 아내가 떠나고 나서는 집에 들어가기를 엄청 싫어했고 이사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했다.
2014년 8월에 향기/캠벌이 파란마음쉼터 운영을 포기했을 때, 호덕이가 자신이 맡아서 해보겠다고 나섰다. 영구임대아파트 계약을 해지하고 보증금 220만원을 찾아서 쉼터 보증금의 일부로 넣었다. (쉼터는 보증금과 밀린 월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목돈 400~500만 원 정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월세와 유지비를 합하면 매달 50만 원 정도씩 돈이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8~10월까지 조나단은 쉼터운영에 적극적이었다. 쉼터 운영과 관련된 돈 걱정을 많이 했지만, 내가 카페후원회를 만들어서 어떻게든 해결해줄 테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고 있었다.
2014년 9월에 내가 침산동 사무실을 떠나서 청주 꽃동네치료공동체로 거처를 옮겼다. (초롱이 문제로 제자의 상담실에서 지내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거처를 옮긴 일은 그때까지 나를 믿고 따르던 당사자들에게 사회적 지지의 상실이라는 부정적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단감, 키위, 그리고 호덕이에게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다행히 단감은 어머님이 계셨기에, 키위는 아내가 있었기에, 내가 떠난 부정적 영향이 많이 완화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호덕이에게는 내가 떠난 빈자리를 메워줄 사회적 지지망이 없었다.
2014년 11월은 모두에게 끔찍한 시기였다. 기대했던 카페후원회는 결성되지 않았다. 나는 청주의 꽃동네치료공동체를 떠나서 2주간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초롱이 문제로 꽃동네치료공동체에서도 지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나는 결국 초롱이 문제를 사과하고 12월부터 다시 꽃동네 치료공동체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키위는 10월초에 있었던 사촌동생의 자살로 매우 힘들어했다. 호덕이는 돈 문제를 해결해내지 못하는 내게 실망했고, 나를 불신하게 되었다. 생계유지에 대한 엄청난 불안감과 압박감을 느꼈고, 많이 힘들어했다. 쉼터 앞 도로에서 약 2주 정도 사과 장사를 시작했지만, 경제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쉼터관리와 사과장사의 두 가지 일이 겹치면서 무리가 따랐다. 이때부터 호덕이는 쉼터운영과 관련된 제반 규정을 독단적으로 정하기 시작했고, 쉼터이용회원들이 모두 다 쉼터에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2014년 11월말에 키위와 조나단은 거의 동시에 나를 맹비난하는 글을 카페에 올렸다. 내가 발끈했고, 이후 키위는 카페를 떠났고, 호덕이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2015년 12월 말에 호덕이는 정신병원을 임의 퇴원했고, 1월에 쉼터에서 1차 자살시도(약물복용)를 했다. 이때 전기온돌에 화상을 입어서 화상병원에 입원했다. 호덕이의 친형님은 내가 호덕이를 정신병원에서 퇴원시켰다고 오해하여, 병원측에 요청하여 나를 비롯한 파란마음식구들의 면회를 금지시켰다.
2015년 2월말에 호덕이는 새로 영구임대아파트로 이사했다. 보증금 220만원은 내가 마련해서 줬다. 본인은 화상병원에 입원해 있는 가운데, 나와 불쏘시개, 향기 등이 쉼터에 있던 호덕이 짐을 옮겨줬다.
2015년 3월 중순에는 대명동 쉼터를 정리했다. (나는 대구에서 새로 시작된 바우처사업의 시작을 지원하기 위해서 2월초부터 4월말까지 대구에서 지냈는데, 3월 중순까지는 대명동 쉼터에서, 이후에는 연세심리상담클리닉에서 지냈다.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는 연세심리상담클리닉에서 방 1칸을 사용했고, 4월 중순부터는 40평 사무실 공간 전체를 바우처사무실 겸 쉼터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 사업은 타잔/옥다리/불쏘시개/무소유/단감/정석경이 수행하고 있다.) 대명동 쉼터를 정리할 무렵, 호덕이는 화상병원에서 임의퇴원하여 2주일 정도 밖에서 떠돌았다. 며칠 정도는 자신의 새 아파트에서 지냈고, 일주일 정도는 연세심리상담클리닉에서 내 옆에서 함께 숙식했다. (하지만 이 무렵에는 쉼터로서의 제반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여서 내가 호덕이에게 편안하게 숙식을 제공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호덕이는 화상후유증이 남지 않게 엉덩이 수술을 받고 싶어 했고, 형님과 여동생에게 수술비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내 생각에는 그 수술은 단지 미용 목적의 수술일 뿐이었지만 호덕이는 수술을 받지 않으면 자칫하면 생명이나 건강에 심각한 후유증이 올 수도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의사가 수술을 권유할 때 “만일 수술을 받지 않으면... 만에 하나...”라는 식으로 설명한 것이 호덕이에게는 큰 불안감을 줬던 것 같다.)
호덕이는 화상치료가 덜 끝난 상태여서 입원치료 또는 통원치료가 필요했다. 바지를 벗겨보니 엉덩이의 화상부위를 절제해 내서 살이 움푹 패였고 그 자리에 살이 차오르고 있었는데 며칠 째 화상치료를 받지 못해서 고름이 차 있었다. 하지만 호덕이는 이전에 입원했던 화상병원에는 돌아가지 않으려고 했다. 식사가 너무 부실하고 하루하루 견디기가 너무 답답하고 힘들다고 했다. 호덕이는 형님 연락을 피했다. 연락되면 형님이 자신을 다시 그 병원에 강제입원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병원에 두고 나와놓고는 내게는 핸드폰을 없앴다고 말했다. 다른 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으려고 했지만 개인화상병원에서는 입원치료만 해줄 수 있고 통원치료는 해주지 않는다고 거절했고, 대학병원에서는 1회 외래통원치료에 5만원을 받았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인 호덕이로서는 이용이 불가능했다. 화상전문병원은 그 수가 몇 되지 않았기에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내가 인터넷검색으로 대구에 광개토병원이라는 화상전문병원이 있다는 걸 확인했다. 호덕이는 그 병원에 자신을 입원시켜달라고 나를 졸랐다. 그 병원에 바로 입원시킬까? 하다가, 이전에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퇴원수속을 마치고 개인짐도 찾아오는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호덕이를 설득해서 함께 이전에 입원해 있던 병원을 방문했다. 병원 원무부장이 호덕이를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며칠 전에 친형님이 오셔서 퇴원처리를 했다고 말해주었고, 입원하지 않아도 된다. 외래통원치료를 받아도 된다.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계획을 바꿨다. 내 옆에 있으면서 매일 외래통원치료를 다니기로 했다. 병원 원무부장이 내게 호덕이 형님에게 연락해서 서로 화해하고 호덕이 일을 의논하라고 권했지만, 나는 호덕이 형님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화가 단단히 나있었기 때문이다.
호덕이는 그렇게 내 옆에서 일주일 정도 같이 숙식하며 지냈다. 하지만 숙식이 불편했다. 내가 얹혀지내는 형편이니, 거기에 또 얹혀지내는 호덕이로서는 이런저런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호덕이는 몇날며칠을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그저 그러려니 했다. 하루는 "저 이제부터 정신과 약 안 먹을래요. 약 안먹기로 결정했어요." 했다. 나는 "알았다. 네 소신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하고 내버려뒀다. 그 며칠을 호덕이가 내 옆에 있었지만, 나는 몸만 같이 있었을 뿐, 마음은 다른 데(아마도 카페게시판 정리작업) 매달려 있었다.
3월 23일(월)에 호덕이는 파란마음 하얀마음 카페의 <조나단의 문학세계>에 올려져 있던 자신의 게시글을 모두 삭제했다. 그때 <사라의 열쇠>에 올려져 있던 자신의 글들도 삭제한 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24일(화)에 나는 서울에 일이 있어 다니러 갔고 25일(수)에 대구 숙소로 돌아왔다. 호덕이는 그날 아침에 숙소를 떠났다. 단감 얘기를 들어보니 그날 새벽에 호덕이가 동서남북을 향해서 번갈아가며 기도를 했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한다.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전에도 엉뚱한 행동을 많이 했고, 소식없이 잠적한 적도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내버려두면 연락이 오겠거니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날로 아무런 연고도 없는 부산 서면으로 가서 거기에서 몇날을 지냈다. (나중에 호덕이 소지품 속에서 그 곳에서의 매트 구입비, 식사비 등의 현금계산서가 나왔다.)
28일(토) 밤 12시쯤 부산 서면에 있는 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핸드폰에 나와 통화한 기록이 있어서 전화한다고, 가족들의 연락처를 알려달라 했다. 호덕이 형님과 여동생의 폰번호를 알려줬다. 곧바로 불쏘시개에게 전화했다. 불쏘시개가 운전해서 함께 부산 병원에 도착했다. 형님 내외와 여동생 내외도 도착해 있었다. 함께 중환자실에 들어가서 의식불명상태인 호덕이를 면회했고, 나와서 의사의 설명을 들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호덕이는 28일(토) 부산 서면에 있는 어떤 산책로 입구 도로변 가로수에 목을 매서 자살시도를 했는데, 6시 35분 경에 지나가는 행인이 발견하고 119에 신고했다고 한다. 심장박동과 호흡이 정지되어 있는 것을 119 차안에서 심폐소생술을 하고, 병원 응급실에서도 계속 심폐소생술을 해서 간신히 심폐기능은 살려놨는데, 뇌사상태라고 했다. 불쏘시개와 함께 그날 밤을 응급실에서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대구로 돌아왔다. 그렇게 의식불명상태이던 호덕이는 결국 5월 2일(토) 오후 3시 15분쯤 사망했다.
일련의 과정을 되돌아 볼 때, 나는 사회적 지지망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절감한다. 나를 믿고 따르던 당사자에게 나 자신의 거취와 행보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약속이행 여부를 비롯한 내 말과 행동 하나 하나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새삼 각성하게 된다. (변명하자면, 내 입장에서는 나 자신의 거취문제, 숙식문제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호덕이를 제대로 돌봐줄 수 없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내가 부도가 나서 길에 나앉는 바람에 자식을 얼려죽였다. 굶겨죽였다는 느낌이다. 또 한편으로는 초롱이와 호덕이를 맞바꾼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편안하게 잠잘 수 있는 공간, 밥 굶을 걱정이 없는 것, 세끼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 등과 같은 기본적인 숙식문제의 중요성도 깨닫게 된다. 아울러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의 중요성도 생각해보게 된다.
컴퓨터라도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기에는 규정상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었고, 임의퇴원해서 떠돌던 1주일 남짓의 기간 동안에도 컴퓨터는 없었다. 집에도 없었고, 내 옆에 있을 때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컴퓨터가 없었다. 이건 호덕이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는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활동과 카페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호덕이에게는 유일한 스트레스 배출구였을텐데...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본인의 절박한 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 나... 나는 옆에 있는 호덕이는 건성으로 대하면서 카페와 대구바우처사업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후회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비행기추락이나 건물붕괴 등의 대형사고는 한두 가지 실수나 결함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호덕이의 자살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막을 수 있었던 무수한 기회가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후회되는 점들도 많고 아쉬움도 많다.
하지만 호덕이 본인으로서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모든 악조건을 다 가진 상태에서, 호덕이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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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현병 모르는게 무지 ?? 알면서 입원과 약조절을 잘 못하는것에 대한 결과 조나단의 무지
환청 외로우면 온다 ?? 스트레스에서 가장 많이온다 심한우울에 온다
물론 외로움에서도 오는 경우가 간혹 있는 것으로 안다
당사자를 위해 무언가 해야한다는 강박 경제적 궁핍에서 오는 결과로 단기 기억상실증 이라고 표현해 본다
호덕님의 사망에 애동함을 금할수없고 우리모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봅니다 후회만이 남습니다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호덕님ᆢ하늘에서는 편히
쉬시길
일부러 찾아들어와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 깊이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