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연경 시집 <독수리의 날들> 천년의 시작 시인선. 2016년 1월

❚신간 소개 / 보도 자료 / 출판사 서평❚
‘천년의시 0053’ 석연경 시인의 첫 시집 『독수리의 날들』이 (주)천년의시작에서 발간되었다.
석연경의 시에는 초목들이 자주 등장한다. 초목들로 대표되는 자연과 그 자연 안에 내재해 있는 생명의 힘이 석연경 시인 시들의 중요한 소재고 또 주제이다. 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생태시들의 자연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생태시들은 자연을 이상화하고 신비화한다. 이상화된 자연은 세상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원리가 되어 관념화되어 자연은 결국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달리 석연경 시인의 시들에 등장하는 자연은 구체적이다. 그의 시들은 자연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말하게 만든다.
그의 시에서 인간과 자연은 한 세상에 함께 있으며 서로 소통하는 존재이다. 끊임없이 자연을 타자화하여 인간과 자연으로 세상을 이분하지 않고 자연에 초월적인 지위를 부여하여 인간을 자연에 복속시키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인간과 자연이 관계 맺는 방식 그 자체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도 아니다. “가천 산방 앞뜰에/ 빽빽하게 올라오는 다육이들/ 물 없이도 살고/ 사랑받지 못해도 당찬 꽃이니”라는 구절처럼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생명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 속에는 항상 슬픔이 내재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성이라는 존재의 근본 조건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슬픔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 것일까? 석연경 시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 같다. 첫째는 바로 그 슬픔의 근원인 생명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죽음과 소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방식은 내적 성찰을 행하는 것이다.
이 시집은 바로 이 두 방식을 통해 깨달음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의 결과이다. 언어 실험을 통한 모험을 감행하고 있지 않지만 정제되고 정직한 표현들이 단단한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추천사❚
구린내 나는 예토를 훔쳐 서랍에 넣은 자가 하루 이틀 지난 다음 냄새가 나지 않으니 제가 훔친 게 아니며 맛있는 된장이라고 우기는 뻔뻔하고 수상한 세월. 단지 시학의 앰비규이티를 위해 허겁지겁 동원한 비문 투성이의 난해하고 애매모호한 언술을 시적 진술이라고 내미는 시풍이 여기저기 뜨거운 유행을 타는 이즈음. 말초적 감각이 아닌 체험에서 우려낸 감각과 순수 본연의 진정성을 지닌 남도적 서정을 석연경의 시집에서 본다. ‘옴마니밧메훔’의 티베트 밀교적 사유로 출발한 영혼의 기원은 도저한 우주 공간으로까지 확대되어 이제 현실의 복사꽃 환한 도원경을 다비의 ‘불 들어간다’고 외치는 저 경지에 오늘 시인의 자아가 서 있다. 눈부신 죽음 너머를 응시하는 저 예리한 ‘독수리’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시인의 다짐과 그의 내일을 기대해도 좋으리라.―강인한(시인)
시인이라면 대개 그러하겠지만 석연경 또한 우주의 먼별에서 전생을 겪고 지상에 내린 ‘별 사람’의 모습과 향기를 지녔다. 천상의 생이 “진한 획 그으며 내려와” 나지막이 지상에 엎드린 “둥근 영혼”으로 현신되었다면, 가슴 깊숙이 간직하는 것은 “사람아 네가 오는 깊은 밤 억만 리” “생살 찢어 가시 틔워 견디고/ 네가 오는 길목에서 숱한 손짓의 시간으로/ 번지고 번지던 붉은 손바닥들의 파닥임”(「부겐빌레아」)의 갈증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석연경의 시집 『독수리의 날들』 을 읽을 때, 독자들은 대지모大地母의 배꼽 언저리로 떨어지는 환한 빛에 감싸이기도 하지만, 못 다한 전생의 그리움으로 “아직 절벽 끝에서 한 계절의 울음을 쏟는” 꽃들에게 사랑을 나눠주고 날개를 달아매려(「부겐빌레아」) 애쓰는 시인의 우주적 충동에 더 이끌리는 것이다. 그렇다. 독자인 나도 그녀의 ‘매화’처럼 비에 “젖어 있을 때라야 사랑이라는 것을” (「밤 순천만」) 깨우치는 까닭에 “내 한생”의 무게(「매화에 내리는 비』)를 견디지 못해서가 아니라, 폭우에 휩쓸리지 않으려 안간힘쓰면서 지상의 봄을 전별餞別해 보내고 있다. ―김명인(시인)
❚저자 약력❚
석 연 경
1968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 동인 활동을 했다. 건축과 문예창작과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2013년 『시와문화』 에 시, 2015년 『시와세계』 에 평론이 당선되었다. 현재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인문학 강의와 시 창작 교육을 한다. ‘연경인문문화예술연구소’ 소장이다.
❚차례❚
1부독수리의 날들 13환생 14검은 산 16나는 아침에게 젖을 물린다 18흔적 20검단산성 22두드림 24금목서의 집 26부겐빌레아 27화인火印 29고독한 기와 31컴퍼스, 웜홀worm hole 33방금 편 나비 날개 35혓바닥에게 37오월 묘지에서 38사오월 밤 39툭, 질주 42황금성전 아래서 44돌쩌귀 45옛거리에서 47
2부51 반닫이와 반지53 늙은 화가55 사브레 56 봉화산 무릇58 공재 자화상59 石然景60 가천 산방62 낮달맞이꽃64 녹턴65 사랑, 허벅지라는 말66 라다크 소녀의 뒷모습을 보네67 복숭아 성전68 순천만 안개69 밤 순천만71 고운동孤雲洞에서72 곡비哭婢74 짙푸른 양귀비75 자귀꽃 피는 오후76 정구지꽃 섬77 마늘 말리기
3부노각나무 길 81빗소리를 본다는 것 82죽음에 대한 연기 같은 농담 83탬버린을 든 집시 85참나리가 필 때 87녹우당 미인도 88오늘밤 팽목항에서는 무슨 일이 있을까 89암담에 대하여 90백양사 고불매에게 가다 91피파개구리 93청매실이 있는 풍경 95코뚜레 96삼천 원 98구례 산수유 시목 99어떤 봄날의 윤슬 100간절곶에서 102매화에 내리는 비 103척 104꽃무릇 105모네의 냄비 106
해설황정산 생명 있는 것들은 모두 슬픔을 안다 107
❚시인의 말❚
침묵이 왔다. 죽도록 사랑하리라.
첫 시집을 가장 오래된 성전인 봄날의 고향 언덕에 바친다.
❚시집 속의 시 두 편❚
부겐빌레아
가파른 절벽뿐이랴 세상은
꽝꽝 언 강 디딤돌 삼고
부르튼 발 타박타박 산정에 올라
고독한 나목으로 한생 견디자 했는데
눈 덮인 티베트 어디쯤일까
태허에서 막 건너온 듯
누가 불렀을까 아슬아슬한 절벽 너머
어렴풋한 꽃길
얼음벽 뚫고 첫새벽을 달려온 사람아
찬바람 지친 옷 벗고
절벽 좁은 바위틈 지나 꽃길로 오려무나
부겐빌레아, 내 꽃그늘에서 쉬려무나
이제 서러움에 퉁퉁 불은 뜨거운 내 젖가슴
환한 꽃불로 너를 품으리니
사람아 네가 오는 깊은 밤 억만 리
생살 찢어 가시 틔워 견디고
네가 오는 길목에서 숱한 손짓의 시간으로
번지고 번지던 붉은 손바닥들의 파닥임
이제 너를 향한 숫한 마음은
웅숭깊고 그윽한 길 찬란한 축제라
아직 절벽 끝에서 한 계절 울음을 쏟는 이 있을 터
사랑은 품에 안고 날개를 달아주는 일
지난날 절벽에 말라붙은 네 날개 깃털
햇살 즙 붉은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
앙상한 등에도 날개 돋으리니
새 하늘이 온다
이제 붉게 타오르던 것마저 버리고
나는 너 너는 나
나도 없이 너도 없이
날려무나 날자꾸나
지친 이 쉬다 가는 큰 날개 그림자
복숭아 성전
불 들어갑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불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제 것 아니라고
봄날을 활활 탄다
비우다 투명하게 사라진
분홍 분홍 복숭아꽃잎
바람의 머릿결이
불의 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데
아무것도 아닌 풍경의 절벽
생의 바깥이란 없어서
안개비 자욱한 저녁
시간의 숨소리 따라
설레는 복숭아나무가
불꽃의 심장을 식히고 있었다
분홍 분홍 볼이 발갛다
다시 봄이다
봄의 새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