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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81. [역경의 열매] 박래창 (1-20) 40년 교회학교 봉사 ‘평생의 자산’
“군대 제대하고 하도 취직이 안 되니까 하나님께 ‘뭐든지 시켜 주시면 죽을힘을 다해 하겠습니다’라고 서원 기도를 올렸는데 그 직후 주신 일이 생업이 아니고 교회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때부터 65세까지 40년간 교회학교에서 봉사했습니다. 교사들과 신앙의 교제를 하고, 아이들 가르치기 위해 설교 열심히 들은 것이 신앙생활의 기반이 됐습니다. 그 가운데 사업은 위기마다 하나님께서 손잡아 주셔서 신나게 해왔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일을 앞에 두고 살아 보십시오. 세상의 성공은 자연히 따라옵니다.”
2007년 한일장신대 채플 시간에 특강을 했다. 처음 특강 제안이 왔을 때 “학생들 앞에서 할 만한 이야기가 없다”고 거절하니 그저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며칠을 두고 지난날들을 떠올리다 보니 70 평생을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구나 싶었다.
나에겐 날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평생 있었다. 어릴 때는 외할머니께서, 좀 자라서는 전도사셨던 외숙모께서, 결혼해서는 장모님께서, 그리고 또 여태껏 교회와 교단의 수많은 분들이 기도해 주셨다.
네 살에 어머니를,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읜 뒤로 배곯고 잘 곳 걱정하는 날 많았지만 바로 그 기도 덕에 결국은 크리스천으로서 잘살게 됐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요 14:18)고 하신 말씀대로 나를 버려두지 않고 부모 역할을 대신해 주신 것이다.
그런 뭉클함을 느끼며 특강을 무사히 마쳤다. 그런데 그날부터 마음에 부담이 느껴졌다. 마치 개학이 코앞인데 방학 숙제를 못 마친 학생 같은 기분이었다. 곰곰이 짚어보니 장로직 은퇴(2009년 12월27일) 전까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자고 마음먹은 일이 떠올랐다. 갈수록 그 결심이 물 위에 기름 떠오르듯 또렷해졌다. 몇 달 후 시간을 내 한일장신대 정장복 총장을 찾아갔다.
“총장님, 혹시 학교에 어려운 일이 있으십니까?”
“왜 그러시지요?”
“제가 지난 번 특강 이후로 뭔가 학교에 도움 되는 일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아서요.”
“도움 될 일이라면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수도 없이 있지요.”
그렇게 말하고는 정 총장도 말이 떨어지지 않는지 입을 다물었다. 나도 구체적으로 마음먹은 것은 없는지라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니 잠깐 침묵이 흘렀다. 정 총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희가 도서관을 다 지어놓고 헌정을 못하고 있습니다. 10억원을 기부하시면 장로님 성함으로 헌정을 하겠습니다.”
속으로 ‘어이쿠’ 싶었다. 사업을 하며 많은 돈을 벌어 봤고 교회와 교단에서 수십, 수백억 단위 사업을 책임져 본 적도 있지만 역시 10억원은 큰 액수였다. 그러나 가진 것들을 잘 정리하면 안 될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내(이미순 소망교회 권사) 동의도 없이 내 맘대로 우선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집에 가 아내에게 말하니 역시 그 자리에서 좋다고 했다. 그때 바로 기부해도 될 것을 2009년 4월에 하기로 약속하고 이미 할 일을 마친 양 홀가분한 기분으로 지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2008년 말 금융 위기로 자산 가치가 폭락한 것이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역경의 열매] 박래창 (1) 40년 교회학교 봉사 '평생의 자산'
* [역경의 열매] 박래창 (2) 금융위기 속에도 기부약속 지켜
* [역경의 열매] 박래창 (3) 교계 도움으로 대전신학대학교 설립
* [역경의 열매] 박래창 (4) 1996년 중국 선교 중책 맡아 당혹
* [역경의 열매] 박래창 (5) 1996년 힘들게 베이징 부흥회 참석했지만…
* [역경의 열매] 박래창 (6) 뜻밖 인민대회당 행사 참석… 특강 통해 놀라운 성과
* [역경의 열매] 박래창 (7) ‘행사’ 참석자 헌금 쇄도… 북방선교 기틀 마련
* [역경의 열매] 박래창 (8) 보람찼던 교회 학교 봉사… 교단 활동으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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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39년 전북 임실 출생/연세대 경제대학원 최고경제인과정 수료/한일장신대 명예박사/전국장로회연합회장, 한국장로교복지재단 대표이사, 소망교회 장로 역임/현 한국장로신문사장, ㈜보창상사 대표이사
***[역경의 열매] 박래창 (2) 금융위기 속에도 기부약속 지켜
2009년 4월 한일장신대 도서관에 10억원을 기부키로 한 날은 다가오는데 2008년 말 불어닥친 금융위기로 자산이 반토막났다. 기부를 약속했을 때 몇몇 자산을 정리하면 무리 없이 마련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 모두 꼬여버렸다.
머릿속이 복잡한 가운데 아내에게 “어떻게 할까”라고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출장 갔다 비행기에서 사다주는 기념품 말고는 아내에게 변변한 선물 한번 해본 적 없다는 생각에 새삼 미안해졌다.
그러나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검소하고 남 섬기는 청교도적 가치관 아래 평생 살아온 아내는 역시 달랐다. “다른 일도 아니고 하나님께 약속한 일인데 어떻게든 해 보세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재산을 정리해 2009년 4월 17일 한일장신대 후원 계좌로 10억원을 입금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어려운 논문이 통과되면 이런 기분일까.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고 칭찬해 주고 싶었다.
며칠 후인 21일 한일장신대에서 도서관 봉헌예식이 열렸다. 굳이 내 이름을 딸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정장복 총장은 아내(이미순 소망교회 권사) 이름에서 ‘미(美)’자를 따고 내 이름에서 ‘래(來)’를 따 ‘미래도서관’이라고 이름을 지어두었다. 그렇게 해서 ‘아름다운 내일을 소망하는 도서관’이라는 뜻이 되고, 또 미래는 내 손녀의 이름이기도 해서 반가웠다.
봉헌식 날 예기치 못한 선물이 있었다. 영국에 유학하던 딸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임신한 몸에다 석사논문 마지막 과정으로 한창 바쁠 때라 일부러 연락을 안 했는데 제 오빠에게 듣고 열일 제쳐놓고 날아왔다는 것이다. ‘깜짝쇼라는 게 왜 있나 했더니 이런 즐거움 때문이구나’ 싶었다. 그 외에도 아내와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사위가 모두 기쁜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봉헌식이 치러졌다.
그러고 보니 이 일은 한일장신대보다는 나에게 보탬 되는 일이었다. 자녀들에게 아버지로서 본을 보일 수 있었고, 어떻게 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뜻을 전할 수 있는 산교육이 됐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정 총장에게 기부를 제안한 그 시기가 한일장신대에는 중대한 고비였다고 한다. 도서관과 예배당을 다 지어놓고 공사 대금을 지급 못해 쩔쩔매던 때였다. 정 총장이 “이 고비만 넘으면 될 텐데”하고 한탄하던 차에 내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후로 내가 기부한 금액보다 몇 배 많은 미지급금이 순조롭게 마련됐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나도 모르게 나를 사용하시는 일이 많았다.
또 내 능력과 관계없이 나를 사용하시는 일도 많았다. 특히 교회와 교단에서 맡은 직분 대부분은 자신 있어 맡은 것이 아니라 한사코 거절해도 억지로 떠맡겨진 것이었다. 솔직히 ‘누가 해도 안 될 일이라 나한테 돌아왔구나’ 한 적이 많았다.
2002년 대전신학교(현 대전신학대학교) 건축위원장을 맡았던 일도 그랬다. 어떤 인연으로 그 학교 이사를 몇 년간 맡고 있었는데 내가 참석 못한 이사회에서 나를 건축위원장으로 뽑았다. 학교가 1950년대 설립되고도 건물이 정부 기준을 통과 못해 4년제 대학 인가를 못 받고 있는 점은 나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재정적으로 전혀 건축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연락 받았을 때 ‘또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건축위원회가 열려 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건축 비용은 70억원으로 추산되는데 가용 기금은 말 그대로 ‘제로’였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3) 교계 도움으로 대전신학대학교 설립
2002년 1월 대전신학교 본관 건축을 위한 첫 건축위원회가 열렸다. “지난 2년간 학생, 교직원들과 함께 눈물로 특별 새벽기도회를 해 왔습니다. 어떻게든 올해 안에 건축을 시작해 2년 후인 2004년에 완공하고, 그 안에 기금을 모으겠습니다.” 문성모 총장이 열성적으로 설명했지만 건축위원을 맡은 다른 이사들은 내 얼굴만 바라봤다.
당시는 IMF 경제위기 후유증으로 모금이 잘 될 때가 아니었다. 충청도를 비롯한 중부권 교계의 온건한 분위기로 볼 때도 2년 만에 70억을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 번 해 보십시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말하자 총장 얼굴은 밝아지고 이사들 얼굴엔 걱정이 떠올랐다. “저 자신은 건축에 문외한이지만 교회 건축부장을 오래 해서 그 분야 전문가인 장로 집사님들을 좀 압니다. 당장 설계를 시작하고 비용을 정확히 내 봅시다.”
그리고 내가 먼저 건축비를 얼마간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그제야 이사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문 총장은 그 날부터 전국을 다니며 모금 운동을 벌였다.
한편 충청권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 목회자들과 장로회, 남녀 선교회 등 대표들을 허름한 본관 건물로 불러 기도회를 열기로 했다. 모금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 가기 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문제는 될 일도 지레 안 된다고 여길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어떻게 바꾸느냐였다. 사실 지역 교계가 똘똘 뭉치고 교단 전체가 도와주면 50년 역사의 신학교 본관 하나 못 지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부터가 ‘당연히 될 일이다’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그리고 참가자들에게 나눠줄 기념품을 준비했다.
사실 형님이 하시는 공장에서 얻어온 스카프를 포장한 것이라 비용은 안 들었지만 어쨌든 선물상자를 가득 안고 기도회에 들어갔다. 총장이 “서울에서 섬유사업을 크게 하시는 소망교회 박래창 장로십니다”라고 소개했을 때 굳이 겸양 떨지 않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그랬더니 ‘과연 될까’였던 표정들이 서서히 ‘되긴 되려나보다’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곧 단체별, 교회별로 3000만원, 5000만원씩 기부 금액을 작정했다.
그 후로는 순풍에 돛 단 듯이 일이 되어갔다. 건축비용은 80억여 원으로 늘었지만 완공까지 80% 모금됐고 지금은 거의 해결됐다고 들었다. 이후 학교는 건물이 교육과학기술부 기준에 합격해 4년제 대학으로 인가받고 올해 초 대전신학대학교라는 이름으로 새출발했다. 발이 닳도록 전국을 뛴 문 총장의 공로가 대부분이지만 나도 중요한 순간에 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뿌듯함이 있다.
소망교회에서 장로로 28년 일하다 보니 교단 총회와 범 기독교 사업들에서 귀한 직분을 많이 맡았다. 대부분은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일들이었지만 거의 성공리에 마쳐졌다. 내 능력은 별로 들어가지 않았다. 거절 못하는 성격 탓으로 일단 맡아 놓고 쩔쩔 매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진짜 전문가들을 속속 내주셨다. 그리고 나보다 더 열성적으로 일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쓰신 각본과 그분이 캐스팅한 배우로 모든 일이 되어지도록 나는 연출을 하기만 하면 됐다.
그 중 지금 돌아봐도 기막힌 한 편의 연극이다 싶은 일이 있다. 1996년 정근모 당시 과학기술부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오면서 시작된다. 나야 정 장관을 알지만 그분은 나를 알 리가 없는데 대뜸 나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4) 1996년 중국 선교 중책 맡아 당혹
1996년 2월쯤, 회사 사무실에 있는데 정근모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중국에서 부흥회를 열고자 하는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일이 반쯤 되었는데 나머지 일을 소망교회가 맡아줬으면 해서 그러니 저와 한번 만나 이야기를 하시지요.”
당시는 중국과 수교한 지 4년밖에 안 돼 중국에 출장 가기도 힘들 때였다. 하물며 부흥회라니? 또 정 장관이 개인적으로 만난 일도 없는 나에게 직접 전화한 것도 의아했다. 당시 내가 소망교회 북방선교부장을 맡고 있긴 했지만 그런 일이면 곽선희 목사님과 직접 상의해야 할 터였다.
여하튼 만나자는 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그분이 인도하시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로 찾아갔다. 장로 동기이면서 당시 고려여행사 사장이었던 유민철 장로와 함께 갔다. 전문가와 동석해야 거절하기 쉬울 것 같아서였다.
기도회 후에 셋이 만나 설명을 들은 즉, 중국과 인맥이 닿는 재미교포 이혜자 선교사라는 분이 중국 정부 부처 중 한 곳과 접촉, 베이징에서 4박5일간 부흥회를 열기로 계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산의 어느 교회 여성 집사님들이 몇 년간 북방 선교를 위해 기도하며 모은 5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쪽에서는 1만여 명의 인원을 모아주고, 우리는 400여명을 인솔하고 가서 베이징에서 숙식하고 행사 개최 비용으로 총 40만 달러를 주는 조건이라고 했다. 계약서에 따르면 앞으로 40여일 안에 부흥회를 열어야 했다.
내가 바로 판단해 봐도 성사될 리 만무한 일이었다. 유 장로 쪽을 바라보니 눈을 감고 고개를 슬쩍 흔들었다.
“장관님, 그런 이야기를 왜 저에게 하시는 겁니까?”
“이 선교사가 대형 교회들과 기독실업인 등 찾아가볼 만한 데는 다 가 봤는데 모두가 중국은 믿을 수 없다, 사기 당한 것이 아니냐 하면서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랬겠지요’ 하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겨우 삼켰다.
“모자라는 35만 달러를 마련하고 400명의 방중단을 꾸리는 일을 누군가 해줘야 하는데, 소망교회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장로님이 곽 목사님께 말씀을 좀 전해 주시지요.”
이렇게 말하는데 그 자리에서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어 일단 말을 전해는 보겠다며 일어났다. 곽 목사님 얘기를 듣고 다시 와서
“저희로서도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라고 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곽 목사님께 말을 꺼내자 “중국 선교는 최고위층 엘리트와 접촉해서 돌파구를 찾는 게 중요하다”면서 “한번 해보지” 하고 선뜻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는 훌쩍 해외 선교를 떠나버리셨다.
유 장로와 나는 손을 맞잡고 “큰일났다”고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불가능한 임무’가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우리 교회에는 국제회의 전문가 등 중국 사정에 밝은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고개를 가로젓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얻은 정보는 당시 중국의 정부 부처들이 산하에 여행사를 두고 이런 식으로 대규모 방중단을 유치한 뒤 거기서 받은 돈을 부처 비용으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님 말씀대로 이 기회를 이용해서 중국에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전해보자.’ 이렇게 생각한 나는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들이 계속 생겼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5) 1996년 힘들게 베이징 부흥회 참석했지만…
1996년 중국 베이징 중심부에 1만여 명을 모아놓고 역사적 부흥회를 여는 중차대한 임무가 나에게 떨어졌다. 소망교회 북방선교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긴 했어도 그런 일을 맡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행히 한 차례 날짜가 연기됐지만 7월로 예정된 방중 날짜는 숨이 차도록 닥쳐왔다.
고비는 수도 없이 찾아왔다. 일단 교회의 당회가 반대해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 또 중도금 명목으로 1억원을 송금해야 했다. 그런데 중국에 돈을 송금하는 일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일반적 경로로는 한 달도 더 걸린다고 했다.
교회 내 장로와 집사 중 은행원을 수소문하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침 중국 은행에 파견 나간 이가 있었다. 그에게 전화하니 “제가 여기서 전달하겠으니 저희 은행 본점으로 돈을 보내주십시오”라고 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그제야 생각하니 돈도 마련돼 있지 않았다. 송금일까지 5일 남은 시점이었다.
집에 들어가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아내가 “무슨 일이세요?” 했다.
“당신 돈 좀 가진 것 있소?”
“글쎄요. 참, 모레 만기가 되는 적금이 있는데 1억원이에요.”
‘하나님께서 역시 길을 만들어 놓으셨구나!’ 싶었다. 아내가 오랜 기간 애면글면 부어 온 적금인 것을 알았지만 다짜고짜 “그 돈을 좀 씁시다”고 했다. 아내는 사정을 듣더니 고맙게도 선뜻 “그러세요” 했다.
그렇게 중도금은 해결됐는데, 또 일이 터졌다. 순조롭게 모집돼 한때 600명에 이르렀던 방중단 중 무려 400여 명이 갑자기 취소를 한 것이다. 중국 현지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퍼진 것이 원인이었다. 나와 유민철 장로 등 실무자들은 백방으로 뛰어 어찌어찌 412명까지 다시 채웠다.
1996년 7월 10일, 정근모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을 비롯해 정인용 홍재형 전 부총리, 김선홍 당시 기아 회장, 최성규 인천순복음교회 목사 등 쟁쟁한 인사들이 포함된 방북단은 겨우 베이징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3시간여 비행 동안 든 생각은 “만일 아무도 마중 나와 있지 않으면 이 인원을 끌고 어디로 갈지 전혀 모른다”는 것과 “나머지 1억8000만원을 현지에서 전달해야 하는데 현재까지 아무 대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둘 다 기막힐 노릇이었지만 나로서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알아서 해 주시겠지 하며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공항에 도착하니 입이 떡 벌어질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벤츠 5대와 고급 관광버스 10여 대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타자 공안 오토바이가 에스코트하는 가운데 베이징 주요 도로를 달렸다. 창밖을 보니 도로를 통제했는지 다른 차들이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베이징에서 최고급이라는 쉐라톤 호텔로 모셔졌다. 공식 일정은 다음 날 시작이라 했다. 아직까지 장소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쳐 현지 진행자에게 물어보니 “내일 가 보시면 압니다”라고만 했다.
공식 일정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문제가 생겼다. 행사 첫날 정 장관이 한국을 대표하는 축사를 하고 곽선희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기로 했는데, 그 원고를 미리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곽 목사님의 설교 원고 곳곳에 빨간 줄이 그어져서 돌아왔다.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교회, 은총 등 기독교적 단어들을 모두 종교색이 없는 두루뭉술한 것으로 바꾸라고 했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6) 뜻밖 인민대회당 행사 참석… 특강 통해 놀라운 성과
중국 베이징에서 역사적인 부흥회가 열릴 예정이었던 1996년 7월 11일, 우리 일행을 태운 차량이 행사 장소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다름 아닌 인민대회당이었다. TV에서 봤던 전국인민대표대회 회의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중국중서부투자합담연토회’, ‘중한경제기술교류회’. 낯선 행사명에 일행은 어리둥절했다. 나는 ‘악’ 소리와 함께 내 안에 커져가고 있었던, ‘뭔가 이상하다’는 찜찜함의 실체를 깨달았다. 이 행사는 부흥회가 아니고 중국 중서부 내륙지역 개발을 위해 정부가 주최하는 것이고 우리는 방문단이자 발표자 신분이었던 것이다.
무릎이 후들거리는 한편 비로소 모든 정황이 이해됐다. 그동안 행사 협의를 위해 한국에 왔던 이들이 하나같이 고위 공무원이었던 것도, 방문단 명찰을 ‘목사’ ‘장로’ ‘집사’가 아닌 ‘사장’ ‘박사’ ‘교수’ 등 직업에 따른 직함으로 달게 한 것도 그래서였다.
‘중국에서 부흥회를 연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은 우리가 잘못이구나’ 하며 이마를 쳤지만 이미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를 비롯해 정근모 전 과기처 장관과 곽선희 목사님 등 12명은 인민대표대회 때 주석이 자리하는 단상 위로 안내됐다. 자리에 앉자 각 성 대표, 당 서기, 개발 책임자 등 중국 정부 측 인사 7000여명이 좌석을 가득 메운 것이 보였다.
곧 곽 목사님의 축사 순서가 됐다. 나는 또다시 마음이 불편해졌다. 전날 밤 늦게까지 중국 측 진행자의 ‘설교 원고를 기독교 용어를 모두 뺀 일반 축사로 바꾸라’는 압력에 시달리다 결국 곽 목사님 허락 하에 수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목사님은 분명 수정된 원고를 읽으셨다. 어찌 된 일인지 통역사가 읽은 것은 수정 이전의 원고였다. 7000여명의 중국 고위층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공산당 역사에 전무후무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주최 측은 당혹해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우리는 불안함을 버릴 수 있었다.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진행하고 계신다는 것이 믿어졌기 때문이다. 남은 일정에서 우리는 중국 측 요구대로 움직여야 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나타났다. 우리는 그저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대하며 즐기면 됐다.
오후 순서에는 ‘한국의 경제 발전’이라는 특강이 잡혀 있었다. 류태영 장로가 강사로 나섰다. 원고도 없이 단상에 오른 류 장로는 새마을운동을 입안한 계기를 설명하며 자연스레 가난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놨다. 그런데 이 내용이 참석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눈물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8개 부스에서 열린 투자유치 설명회에서도 우리 방문단 중 건설 전자 섬유 무역 등 각 분야 종사자들이 적당히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도 호응이 굉장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됐다.
당시 참가자 중 중국 최고위 인사 한 명은 지금도 해마다 교회로 카드를 보내온다. 이때부터 예수를 믿게 됐다는 것이다.
또 이 행사를 계기로 중국 과학기술협회와 소망교회가 함께 ‘농촌치부학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중국 각 지역을 찾아가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을 찾은 중국 고위층이 수백 명이고 이들 전원은 돌아가기 전 마지막 코스로 소망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께서 중국의 철옹성 같은 장벽을 뚫고 복음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기막힌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7) ‘행사’ 참석자 헌금 쇄도… 북방선교 기틀 마련
1996년 7월 중국에서의 ‘부흥회 아닌 부흥회’는 그 후 중국 선교의 소중한 발판이 됐다. 지금 돌아보면 그곳에서의 사건 하나하나가 의미 있었고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놀랍게 진행됐다. 내가 특별히 감사하는 것은 그렇게 중대한 역사가 이뤄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은 내 개인적 고충도 굽어살피셨다는 것이다.
4박5일 일정 동안 우리 일행은 새벽마다 호텔의 한 공간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하루는 예배가 끝난 후 류태영 장로가 “여러분, 박래창 장로가 이번 행사의 계약 중도금으로 1억원을 내서 우리가 여기 올 수 있었던 것을 아십니까?”라고 광고했다. 나조차도 그 사실은커녕 행사가 끝남과 동시에 중국 측에 전달해야 했던 1억8000만원에 대해서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터라 깜짝 놀랐다.
그런데 이 말에 참석자들이 하나 둘씩 가져온 돈을 내놓고 또 앞으로 헌금하겠노라 작정하기 시작했다. 그 액수가 필요한 금액을 채우고도 1억원이 남을 만큼이었다. 남은 1억원은 이후 소망교회가 수년간 진행한 중국 통신학교 사역의 기반이 됐다. 중국 오지의 가정교회들에 중국어로 번역된 목회 자료를 우편으로 보내줘서 교육시키는 사역이었다.
행사를 다 마치고 인민대회당을 나올 때 한 집사님이 나에게 “장로님, 대단하십니다”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 순간 뿌듯하면서도 면구한 심정이었다. 정말 내가 대단하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이 일을 맡기지 않으셨으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소망교회 북방선교부장으로서 본격적으로 북방선교에 매진했다. 류태영 장로, 옥수수 품종을 개량한 김순권 박사, 감자 품종을 개량한 정혁 박사와 함께 96년부터 7년간 중국 오지 20여 곳을 구석구석 다니며 빈농들을 도왔다. 북한 고아원 건립을 도운 적도 있었다. 그에 앞서 90년쯤에 고려여행사 사장이었던 유민철 장로와 함께 선교 미개척지였던 몽골에 처음 가봤던 일은 나중에 돌아보니 몽골 선교의 첫 돌파구가 됐다. 당시 동행했던 안교석 목사로 인해 몽골 선교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이런 일들에 관계할 수 있었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 내가 큰일을 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이 하시는 큰일에 내가 알뜰하게 사용된 셈이다.
모든 일이 맡을 당시에는 내 능력에 당치 않을 만큼 버거웠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교회 내 전문가들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하면 다들 열정적으로 도와줬다. 아는 것이 좀 있다고 위에서 지시부터 하려 했으면 잘된 일보다 잘못된 일이 더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해왔지만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아무래도 24년간 교사로, 16년간 부장으로 섬겼던 교회학교 사역이었다.
아이들에게 말씀을 잘 전하기 위해 79년 소망교회에 나가면서부터 꼬박 21년간 새벽기도와 수요예배에 거의 빠지지 않았다. 곽선희 목사님이 7년에 걸쳐 성경 전체를 강해하는 것을 빠트리지 않고 듣기 위해서인데 그렇게 세 차례 강해를 들어놓은 것이 지금도 내 신앙생활의 큰 기반이다.
교회학교 사역은 또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이 장성한 뒤 다시 그들을 만나는 보람도 준다. 학생이 소망교회 부목사가 돼 돌아왔던 일도 2번이나 있었다. 이렇게 교사로 일하는 기쁨을 처음 알게 해준 것은 청년 시절 신촌장로교회에서 만났던 한 초등학생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8) 보람찼던 교회 학교 봉사… 교단 활동으로 이어져
신촌장로교회에서 아동부 교사를 하던 1967년쯤으로 기억한다. 6학년 반을 처음 맡은 날 아이들에게 돌아가며 성경을 읽도록 했다. 그런데 제 순서에도 우물쭈물 읽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혹시 한글을 못 읽나 유심히 보니 책을 눈에 바짝 대고 읽었다. “너 안경을 써야겠구나” 하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날로부터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이는 안경을 쓰고 오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짐작됐지만 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공과 수업이 끝난 후 아이 손을 잡고 “너희 집에 같이 가 보자”고 했다.
반쯤은 곤란해 하고 반쯤은 기대를 품은 채 앞서가는 아이를 따라간 곳은 아니나 다를까 판자촌이었다. 손수레로 채소 장사를 한다는 부모는 갑작스런 나의 방문에 당황스러워했다. “아드님이 눈이 안 좋은 것을 아셨습니까?” 하니 전혀 모르는 듯했다. 내 말을 듣고도 ‘어쩌겠느냐’는 반응이었다.
별 소득 없이 집을 나서는데 배웅하는 아이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안되겠다 싶어 돌아오는 길에 고민해 보니 교회에 연세대 신학대학원에 다니는 부목사가 떠올랐다. 그분에게 부탁하니 아이가 세브란스 안과에서 진찰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줬다.
아이의 시력검사를 한 뒤 안경을 맞추던 날, 안경을 쓰고 주위를 둘러본 아이는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니 ‘예수님이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구나. 우리 시대에도 작게나마 이룰 수 있는 기적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늘 주눅 들어 있었다는 아이는 그 뒤로 몰라보게 명랑해졌다.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날 그 아이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안경을 선물받은 이후로 한 번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잘 살아왔고 지금은 서울 강남 어느 교회에서 성가대 대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또 한번은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고 접수대에 있는데 한 여의사가 “선생님!” 하고 불렀다. 자세히 보니 20여년 전 제자였다. 어려운 형편에도 동생들 손을 이끌고 예배에 나오던, 의젓하고 기특한 여학생의 모습이 겹쳐져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24년간 직접 아이들을 가르친 뒤 부장을 아동부와 중등부에서 2번씩, 고등부에서 4번을 지내고 나니 16년이 훌쩍 갔다. 그 40년 동안 이미 얘기한 북방선교부장을 비롯해 건축부장, 성가대 대장, 서기 등도 교회에서 맡아 했고 그와 관련된 교단(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일에도 참여해 왔다. 4∼5년 전부터는 총회 회계, 장로회연합회장, 사회봉사부 부장, 한국장로교복지재단 대표이사, 한국장로신문사 사장 등 중책을 맡겨 주셔서 일하고 있다. 알고 보면 여기에도 교사 경력이 관련이 있다. 초임 교사 시절 교단 아동부 서울지역 회장과 전국연합회 서기를 맡은 뒤로 자연스레 교단과 범 교계로 활동 범위가 넓어졌던 것이다.
사실 이 기간 동안 나는 사업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바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교회 안팎의 사역을 무리 없이 할 수 있도록 고비마다 사업을 책임져 주셨다.
그야말로 입에 풀칠할 길 없어 막막하던 20대 중반에 드린 “아무 일이나 좋으니 주십시오”라는 기도에 교회학교 일부터 덜컥 맡기셨던 하나님께서는 내가 전혀 생각도 못했던 방향에서 나에게 딱 맞는 생업을 준비하고 계셨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9) 섬유업계 최고 김교석 회장에게 동업 제안 받아
나는 평생 사업을 해왔지만 실은 장사를 할 만한 기질이 아니다. 계산이 빠르지도 않고,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친해지는 성격도 아니다. 집안에서나 주위에서 장사하는 사람과 가깝게 지낸 일도 없었다. 그러나 공군에서 제대하고 일자리를 찾던 20대 후반에 나는 ‘장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친척이었던 외삼촌께서 나와 형님에게 입버릇처럼 “너희는 남의 월급쟁이로 살 생각 말고 네 장사를 하라”고 권하셨기 때문이다. 공무원이셨던 외삼촌은 5·16 때 갑작스레 해직돼 많은 고생을 하셨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무슨 장사를 해야 할지, 어떻게 시작할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귀가 솔깃한 얘기를 듣게 됐다. 당시 나는 형님의 신혼집에 얹혀 살고 있었는데 형수님 친구의 남편 이야기였다.
“본래 청주에서 교사를 하던 분인데, 이번에 형님 사업을 돕겠다고 교사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지 뭐예요.”
그 말을 듣자 ‘어떤 일이기에 안정적인 교사직을 그만두고 뛰어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짜고짜 형수님께 “그분을 좀 만나게 해 주세요”라고 졸랐다.
그렇게 해서 얼마 후 김교찬이라는 분을 다방에서 만났다. 설명을 들어보니 그분 형인 김교석 회장은 섬유업계에서 이미 최고로 떠오른 사업가였다. 그분은 직접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직물을 개발해 여러 공장에 하청을 주고, 완성품을 받아 도매상들에 파는 일만 했다. 섬유산업에 무지했지만 ‘꽤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염치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저도 같이 일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하니 “저도 아직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펄쩍 뛰었다. “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 허드렛일이어도 좋습니다. 그냥 일만 하게 해 주세요”라고 막무가내로 매달렸다.
그렇게 해서 김 회장 소유인 동대문 광장시장의 한 점포에서 일을 하게 됐다. 아침 7시에 나가서 밤 9시가 넘도록 일했다. 가게 청소하고 원단을 손님 차에 실어주거나 창고에 넣고 빼고 하는 일이었다. 정말 월급도 받지 못했지만 성실하게 일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
가게에 나온 김 회장이 나를 불렀다. 그동안은 가게에서 만나도 목례조차 나눌 기회를 갖지 못한 터라 깜짝 놀랐다.
“그동안 보니 성실하게 일을 잘 하더군. 내가 여기 점포를 하나 더 낼 생각이 있는데, 나와 동업을 해볼 생각 있나?”
나보다 연배가 열 살 정도 위일 뿐이지만 하늘처럼 우러러 보이던 분의 제안이라 잠시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새 점포에 대해서 50대 50 지분으로 동등하게 일하자는 것이었다.
“예, 꼭 하고 싶습니다!” 당차게 대답을 했지만 문제는 50% 지분에 해당하는 돈 200만원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모아둔 자금은커녕 차비도 모자란 형편이었다.
형님과 외삼촌 등 가족들 사정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었고,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내봤지만 그만한 돈을 가진 이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꼭 돈을 구하고 말리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당장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교회 아동부에 나가 교사 모임을 하고 있는데 ‘아, 저분이라면?’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되돌아보면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었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10) 사업 자금 빌리러 갔다 평생의 반려자 만나
스물아홉 나이에 인생을 걸고픈 일을 발견했다. 원단을 개발해 판매하는 섬유업이었다. 그 첫 발을 떼려면 광장시장의 점포 지분 절반인 200만원이 필요했다.
교회 아동부 교사회의에 나가서도 그 돈을 구할 방도를 생각하다가 문득 동료 교사인 김성환 권사님에게 눈길이 갔다. 당시 예순쯤이셨던 권사님은 열아홉에 교회학교 교사를 시작, 일흔까지 하셨던 분이다. 교사들을 집에 초대한 적이 여러 번이라 그분 생활이 넉넉한 것을 알고 있었다. 한동안 주저하다 결국 댁으로 찾아갔다.
설명을 드리니 권사님은 그 자리에서 선뜻 돈을 빌려주셨다. 마지막 희망을 걸긴 했지만 ‘내 어디를 보고 그 큰돈을 빌려주시겠나’ 했던 나는 깜짝 놀랐다. ‘나를 무척 성실하게 봐 주셨나 보다’ 하고 이해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얼마 후 나는 형님의 권고로 선을 보러 나가기로 돼 있었는데 아동부 교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 얘기를 했더니 권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박 선생, 오늘 선 보러 나가지 말게.” “네? 왜 그러세요?” “내 외손녀 미순이를 알지? 선 보는 대신 미순이를 정식으로 만나보게.”
그분 외손녀라면 댁에 초대됐을 때 본 일이 있었다. 나보다 대여섯 살 아래인, 신앙심 깊고 귀염성 있는 처녀였다. 그러나 그때 나는 당장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선도 형님 성화에 하는 수 없이 본다 했을 뿐이지 돈 벌어 기반을 잡은 뒤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기댈 곳 없고 당장 밥벌이도 어려운 처지인 것을 잘 아시는데 그토록 믿어주시는 마음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아내(소망교회 이미순 권사)와 만났다. 교회학교 교사로 함께 봉사하다 1년쯤 후 결혼했다. 아내를 만난 것이 내가 지금껏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다. 4~5대째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아내는 늦게 믿기 시작한 사람처럼 활활 타오르는 열정은 없어도 평생 꾸준하게 하나님을 믿으며 검소하게 살아 왔고 나의 가장 좋은 동역자이자 조력자였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가족이 된 김 권사님의 도움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빌린 돈은 오래지 않아 이자까지 쳐서 갚아 드렸다.
나에게 동업을 제안한 김교섭 회장은 지금 내 회사 이름이기도 한 ‘보창’이라는 회사를 운영했고 그 밑에 대림, 메트로 등 회사를 뒀는데 내가 처음 맡은 것이 메트로였다. 원단을 연구해 하청 공장에 주문하고, 완성품을 도매로 전국에 팔거나 의류 회사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
김 회장은 일본에서 공부해 일본의 발달된 섬유산업에 밝았다. 나를 만나기 전 이미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 뒤 섬유업계 최고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새 생산 설비를 들인 방적회사들은 대부분 김 회장을 찾아와 신제품 개발 논의를 했다.
무작정 뛰어들었지만 나에게 잘 맞는 일이었다. 남이 만든 것을 받아 파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좋았다. 한번 정신을 쏟기 시작하니 머릿속에는 ‘어떤 원단을 만들까’라는 생각이 가득 찼고, 눈은 길 가는 사람들이 입은 옷을 살피는 데만 쏠렸다.
사업의 중요한 부분이 방적회사들이 들고 오는 ‘미션’, 즉 개발 의뢰를 잘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야 신뢰를 이어갈 수 있었다. 1970년대 중반, 당시 최대 방적회사였던 방림방적에서 나에게 어려운 일 하나를 맡겼다. 정리=
***[역경의 열매] 박래창 (11) 불량 원사로 ‘월남치마’ 원단 개발… 사업 대성공
1976년쯤이었다. 당시 최대 방적회사였던 방림방적에서 불러 갔더니 빈터에 광목 원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묘한 무늬가 찍혀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천에 나염을 할 때 염료가 번지지 않도록 밑에 받치는 속지로 사용된 천이었다. 본래 나염 기계는 이런 속지가 필요 없는데 설비가 국내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기술 부족으로 한동안 속지를 썼던 것이다.
광목은 다섯 번 정도 사용된 후라 이 무늬, 저 무늬가 어지럽게 겹쳐 찍혀 도저히 상품이 될 수 없는 상태였다. 진한 색으로 염색을 해도 무늬를 다 가릴 수가 없고, 버리려면 오히려 큰 돈이 들었다.
방림방적에서는 이 원단을 우리가 처리해 주기를 원했다.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일단 당차게 말은 하고 돌아왔는데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원단 사업을 시작한 이래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을 살펴보는 버릇이 있었다. 독특한 색깔이나 직조의 옷을 보면 집까지 따라가 안감 조금을 샘플로 얻어오곤 했다.
그때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을 무심히 바라보는데 별안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불규칙하고 어지러운 무늬 때문에 상품이 안 된다면 규칙적인 무늬를 위에 찍으면 어떨까?”
당장 공장으로 가서 원단을 가성소다(양잿물)에 한 차례 빨아 무늬를 어느 정도 흐릿하게 한 뒤 그 위에 동그라미나 별, 꽃 등 일정하게 반복되는 무늬를 찍었다. 이는 염료가 원단 위에 얹히듯 찍히는 것이기 때문에 배경 무늬보다 확연하게 선명했다.
그러자 두 가지 무늬가 대비되면서 세상에 다시 없을 독특한 원단이 만들어졌다. 그때는 광목으로 만든 블라우스나 바지 등이 단순한 디자인의 캐주얼 의류로 만들어져 저렴하게 잘 팔리곤 했다. 이 원단은 이런 의류용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그 일이 계기가 됐다. ‘저 회사에 맡기면 뭐든 잘된다’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비슷한 시기에 이런 일도 있었다. 여성 양장용 원단을 짤 원사를 찾고 있었는데 당시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폴리에스테르 원사(실)는 거의 수출용이고 국내에서 사용할 원사 얻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그런데 누군가 부산의 한 공장에 가면 원사가 많다고 했다.
가 보니 과연 원사가 쌓여 있었다. 그런데 전부 불량품이었다. 굵기가 일정치 않았던 것이다. 실은 굵기가 일정치 않으면 천을 짠 뒤 염색했을 때 얼룩덜룩해진다.
그냥 돌아가려다가 생각해 보니 ‘염색이 안 된다면 나염을 하면 어떨까’ 싶었다. 내가 본래 생산하려고 했던 여성 양장용 원단은 안 되겠지만 다른 용도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염가로 구입한 그 실로 폴리에스테르 니트(저지) 원단을 만들어 꽃무늬 등을 나염해 시장에 내놨다. 그랬더니 또 내놓자마자 다 팔렸다. 바로 ‘월남치마’라고 불렸던, 주부들이 편하게 입는 통치마를 만드는 데 사용됐다. 이 원단으로 만든 치마는 기존의 것보다 신축성이 좋고 무늬가 선명해 집집마다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사업은 첫 10년 동안 신나게 진행됐다. 그때쯤 나는 교회를 옮겨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상가에 문을 연 지 얼마 안 됐던 소망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그때 소망교회는 첫 건축을 시작하려 할 때였다. 사업이 순조로웠던 나는 1년 안에 500만원을 내겠노라고 호기롭게 작정을 했다. 그 직후 사업의 첫 고비가 찾아왔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12) 보증섰던 회사 부도로 닥친 고난 앞선 기술로 타개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 그 직후 사회 전반이 술렁였고 그 가운데 김교석 회장의 회사 중 두 개가 부도났다. 그 전까지 아무 문제 없던 회사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김 회장은 잠적했고 나도 주변에서 “빨리 있는 것 챙겨 도망가라”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운영을 맡고 있던 메트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내가 지불보증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우리 회사로 채권자들이 몰려왔던 것이다.
당시 우리 같은 회사들은 은행 대출은 생각도 못 했고 거의 사채를 썼다. 연 36%의 고리지만 2∼3개월 현금을 당겨 쓰기 위해 사채업자에게 넘기곤 했던 어음들이 한꺼번에 돌아와 내 목을 칼날처럼 겨누었다.
나로서도 갚을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 2∼3일은 숨어 지냈다. 그래도 교회에는 나갔다. 그 직전에 소망교회 1기 장로로 피택되고, 고등부 부장으로 임명됐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얄궂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살려주겠다’는 사인을 보내놓은신 게 아닐까 생각됐다.
머릿속이 새카맣게 된 채로 새벽 예배에 나가 ‘내가 만일 도망간다면 신앙생활도 망가질 것 아닌가’하는 생각에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러자 ‘알거지가 될지언정 당당하게 나서자’는 결심이 섰다.
다음날 바로 사무실로 나갔다. 예상한 대로 채권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제가 가진 재고 상품과 외상 매출, 집까지 다 내놓겠습니다. 빚잔치하려면 하십시오. 그 이상은 드리려야 드릴 게 없습니다.”
이렇게 밝히자 채권자들이 수군수군하며 한참 상의를 했다. 그리고는 대표로 한 사람이 말했다.
“박 사장은 아직 가능성이 있으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어음을 순차적으로 돌릴 테니 장사해서 버는 대로 갚으십시오.”
이렇게 해서 일단 사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속으로는 ‘매일같이 돌아올 어음을 김 회장도 없이 나 혼자 막아나갈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1980년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뒤 컬러 TV가 보급되고 교복이 자율화됐다. 이 두 가지 사건이 나에게는 돌파구가 됐다.
갑자기 사회에 ‘패션’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르면서 패션 의류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때 우리나라는 원단 수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의류 회사들은 좋으나 싫으나 국산 원단을 써야 했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당시 패션 의류에 쓰일 원단을 만들 만한 곳은 대한민국에서 우리 회사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너무 앞서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기치 못한 ‘때’를 만나자 창고에 쌓여 있던 원단들까지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후부터는 어음 막는 게 어렵지 않았다. 얼마 안 돼 부채를 다 정리하고 다시 매출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즈음 교회에 건축헌금 드리는 날이 돌아왔다. 하루도 날짜를 어기지 않고 1년 전 작정한 대로 500만원을 낼 수 있었다. 헌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쏟아졌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쓰시는구나.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 잘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연단이구나.” 매일 전쟁터에 나가는 심정으로 출근했던 지난 1년을 반성하게 됐다.
이때부터 내 사업은 전환기를 맞았다. 패션을 제대로 선도하기 위해 해외로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이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13) 해외 원단 분석해 한국 기술·취향에 접목
1980년부터 패션 의류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나는 본격적으로 해외에 나가 원단 샘플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에 앞서 1979년 다른 회사 사람들과 단체로 유럽을 돌아본 일이 있긴 했지만 혈혈단신 외국에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믿었던 것은 겨우 ‘7개국 회화’라는 제목의 조악한 책 한 권이었다. 여권을 발급받는 것도 무척 어려웠다. 교회 분들의 도움으로 겨우 낸 것도 단수여권이라 한 번 나가면 런던 파리 밀라노 프랑크푸르트 뒤셀도르프 뉴욕까지 주요 도시를 다 돌고 와야 했다.
그때 내 전략은 이랬다. 일단 목적지인 도시 공항에 도착하면 택시를 탔다. 그리고 택시 기사가 가지고 있는 관광 안내 책자를 뒤져 태극기 표시를 찾았다. 그 장소는 거의 한국 대사관 아니면 한국 식당이었다. 그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한 뒤 거기서 도움을 받아 도시의 정보를 파악했다. 또는 도심 관광안내소로 찾아간 뒤 투어 버스를 타고 주요 관광지를 돌다 보면 ‘아, 저기가 패션 중심지구나’ 하는 감이 왔다.
그리고 바로 내려서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거기서 샘플이 될 의류들을 구입했다. 예산이 한정돼 있으므로 신중을 기해야 했지만 예닐곱 도시를 돌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커다란 여행가방 3개가 꽉 차고도 넘칠 정도의 분량이 됐다.
이렇게 가져온 의류들은 바로 거래처인 의류회사, 방적회사와 함께 분석에 들어갔다. 그대로 모방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국의 생산 기술과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춰야 했다.
우리가 주로 만드는 원단은 봄·여름 시즌의 여성복용이었는데 제때 유행에 맞는 옷을 내놓으려면 우리는 적어도 1년반에서 2년 앞서 트렌드를 읽어야 했다. 이 분석이 잘 되면 상품이 잘 팔리고, 안 그러면 재고로 남는다. 그러나 적중률은 거의 70∼80%였다. 그래서 반도패션 코오롱 제일모직 등 까다로운 대기업들에 성공적으로 납품해 큰 마진을 남길 수 있었다. 또 좋은 점은 나머지 20∼30%의 재고도 품질은 좋았기 때문에 평화시장이나 남대문시장에 내놓으면 다 팔 수 있었다.
우리 회사는 직원이 많아야 십수 명이었지만 수백 개의 하청 공장에서는 우리 물건이 밤낮 없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아이디어와 자료, 납품할 거래처만 있으면 당시 관행이었던 선급금 없이도 공장과 계약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1990년대 중반까지 열심히 해외 출장을 다녔다. 그러던 중 외국의 어느 거리를 헤매다 어떤 깨달음이 왔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운이 좋아 알음알음으로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설명하곤 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은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패션 도시들을 다니다 보니 나에게는 새로운 것, 감각적인 것,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비록 돈 계산은 빠르지 않았지만 이런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사업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청소년 시절 막연하게 법관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어봤을 뿐 단 한번도 내가 미적 감각이 있다는 생각은 못 해봤고, 이런 산업이 있다는 것 자체도 몰랐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묻혀 있는 내 능력을 미리 보시고 적절히 쓰일 곳으로 나를 인도해 주신 것이다. 출장 에피소드 중에는 ‘나를 이렇게도 쓰시는구나’하고 신기해한 일이 한 가지 있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14) 해외 출장때 지인 여학생 음악 콩쿠르 입상 도와
사업상 한창 해외 출장을 다니던 1991년이었다. 스위스 취리히의 한 호텔 로비에서 아는 얼굴을 만났다. 소망교회 고등부에서 가르쳤던 양고운이라는 여학생으로 지금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가 됐다. 그 때는 서울대 음대 1학년이었다.
세계적 명성의 파가니니 콩쿠르에 나가려고 어머니와 둘이 이탈리아 제노바로 향하는 중이었다. 반갑게 인사한 뒤 헤어졌는데 마침 콩쿠르 예선이 열리던 날 나도 이탈리아에 있었고, 저녁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시간이 있어 새벽 기차를 타고 제노바로 향했다.
극장에 도착해 보니 예선이 오후부터라고 해서 주변을 둘러보다 고운이 어머니를 만났다.
“왜 혼자 나오셨어요?” “네, 콩쿠르 전에는 한창 예민하니까요. 그런데요, 장로님!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고운이 어머니는 호텔로 같이 가서 고운이를 위해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순수 국내파로 국내에서만 공부한 고운이가 해외에 나와 얼마나 긴장이 될지 짐작이 갔다. 호텔에 가 안수기도를 해 주니 고운이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뭐가 그리 걱정되니?” “선생님! 낯선 무대에 올라가서 실수하면 어쩌죠? 제 실력대로 연주도 못 해보고 떨어질까 봐 자꾸 걱정이 돼요.” “그러면 네 순서 전에 가서 좀 보지 그러니?” “그럴 수가 없어요. 연주자들은 징크스가 있거든요. 다른 사람이 지정곡을 연주하다 틀리는 것을 보면 저도 똑같은 자리에서 틀리게 돼요.”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다고 연주 전 준비를 도와야 할 고운이 어머니가 왔다 갔다 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내가 봐 주면 되겠구나!” “정말요? 선생님께서요?”
그렇게 해서 오후 내내 다른 연주자들을 관찰했다. 곧 공통점이 보였다. 다들 낯선 무대이기는 마찬가지지만 무대에 올라 마침 심사위원 쪽으로 서고, 두 연주곡 사이에도 박수가 나오지 않게 미리 제스처를 취하면 연주가 물 흐르듯 진행되고 심사위원들 반응도 좋았다. 그렇지 않고 서는 방향을 잘못 잡거나 중간에 머뭇거린 연주자는 눈에 띄게 연주가 흔들리고 때로는 틀어진 분위기를 못 이기고 중도에 무대를 내려오기도 했다.
호텔로 돌아와 이런 이야기를 해 주니 고운이는 “선생님께서는 이런 무대를 처음 보신다면서 어떻게 그리 잘 아세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로서도 이유를 몰랐지만 사업을 해 왔기 때문에 그런 파악이 빨랐던 것 같다.
아쉽게도 비행기 시간 때문에 고운이의 연주를 못 보고 제노바를 떠나야 했다. 한국에 와 있는데 고운이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본선에 진출했어요. 선생님 덕분입니다!” 물론 고운이의 실력에 따른 결과였지만 내 덕분에 긴장이 풀려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는 덕담이었다.
본선은 며칠 후 한국 시간으로 자정이었다. 나는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전화해서 그 시간에 자지 말고 모두 고운이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결과적으로 고운이는 그 콩쿠르에서 5위로 입상했다. 한국 국적 바이올리니스트가 그 같은 규모의 콩쿠르에서 입상한 것은 처음이라고 들었다. 고운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으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 나에게 작은 역할을 맡겨 주신 것을 생각하면 빙그레 웃음이 난다.
그 때는 그렇게 사업과 교회 사역이 모두 잘 진행되던 때였다. 그런데 얼마 후 나도 깨닫지 못한 사이 사업에 중대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15) 실수로 만든 원단이 ‘불티’… 위기 무사히 넘겨
1990년대 중반 국내 섬유업계에는 큰 위기가 닥쳤다. 외국 원단 수입이 시작돼 의류회사로의 판로가 서서히 막힌 것이다. 그런데 이에 앞서 우리 회사에는 한 사건이 있었다.
1992년쯤이었다. 원피스 감으로 면 100% 목공단을 생산했는데 표면에 반짝이는 느낌을 내려면 일종의 다리미 원리로 원단을 가열하는 롤러가 필요했다. 하도급 공장으로 하여금 이 롤러를 일본에서 수입하도록 해서 7만m의 원단을 생산했다. ‘영국 로열풍’이라고 불렸던, 큼직한 장미꽃 무늬가 들어간 최고급 원단이었다.
그런데 안 쓰던 기계를 처음 사용하다 보니 첫 생산분에 불량이 났다. 열 조절이 잘못돼 뻣뻣해져버린 것이다. 원피스 감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총 3억원어치로 큰 타격은 아니었지만 이 원단을 어떻게 처리할지 난감했다.
1년쯤 창고에 넣어두다 혹시나 싶어 주로 재고 물건이 덤핑으로 팔리는 동대문 종합시장 점포에 내다놨다. 그런데 순식간에 동이 났다. 알고 보니 침장, 즉 이불보를 생산하는 회사에서 전량을 사간 것이었다.
당시는 주택에서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이사를 계기로 침대를 마련하고 서양식 침장, 즉 침대보와 이불을 구입했다. 그 전까지의 이불 호청으로 흰 천만 사용됐던 것과 달리 다양한 색과 무늬의 나염 원단이 필요해진 것이다.
마침 우리가 실수로 만든 원단이 국산 침장 회사의 눈에 띄는 바람에 그쪽 판로가 뚫렸다. 이쪽 수요는 워낙 폭발적이어서 기존에 주력했던 양장용 원단의 10배가 넘었다. 자연히 이쪽으로 사업 방향을 틀게 됐다.
그 덕에 얼마 후 수입 자유화로 다른 회사가 고생할 때도 우리는 거의 영향이 없었다. 침장 원단은 가격경쟁력 문제로 외국 원단이 지금까지도 국산을 대체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내 살 길을 미리 열어주신 것이다. 물론 그만큼 내게 맡길 일이 있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때쯤 이미 교회와 교계 사업들에 시간과 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사업의 멘토였던 김교석 회장은 안타깝지만 1979년 부도 이후로 재기하지 못하고 해외에서 사시다 돌아오셔서 1980년대 중반 지병인 당뇨가 악화돼 세상을 떠나셨다. 60대의 아까운 나이였다.
그분이 운영하던 회사 ‘보창’은 이후에 내가 인수했다. 지금도 내가 사장 직함을 걸어 둔 회사가 보창이다. 몇 년 전 직원들에게 사업 파트를 나눠 물려주고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다.
돌아보면 새록새록 신기하다. 40년 가까이 사업하는 동안 매일 새로운 상품과 수요를 개발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영업을 위해 남에게 굽실거리거나 부정한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남에게 멸시당한 일도 없었고 단 한 번도 남과 주먹을 쥐고 싸워 본 일도 없었다. 반대 논리에 부닥친 일도 없었다. 물론 매일 출근하면 불량품이 나오고, 거래처가 문을 닫는 등 새로운 일이 터져 있었다. 그렇지만 살펴보면 늘 한쪽에 비상구가 뚫려 있었다.
이렇게 큰 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곰곰 생각할 때가 많다. 일찍이 하나님을 믿고 사역에 몸담으셨던 조상들 덕이 아닐까. 하나님 뜻대로 살면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 그 복을 내가 받은 것이리라. 그러고 보면 절망 끝까지 내몰렸던 어린 시절의 고난도 다 약속이 이뤄지는 과정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16) 선대가 남긴 믿음유산… 신앙생활 이끌어준 밑거름
20대 중반에 교회학교 교사를 맡으며 내 의지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 하나님의 뜻하심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 우리 할아버지 대에 이미 나타나 있었다.
고향인 전북 임실군 덕치면은 지리산에 바짝 붙어 있지만 전주에서 순창을 거쳐 광주로 가는 신작로가 일제 때 마을 옆으로 뚫린 덕에 일찍 개화된 편이었다. 우리 집은 논을 꽤 가진 부자였고 할아버지께서는 이미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 아니면 출타를 안 하셨을 만큼 앞서가는 분이었다.
서울에서 배재학당에 다니셨던 영향으로 할아버지는 기독교를 접하신 듯하다. 종교로 믿으신 것인지 신학문의 일종으로 생각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외아들인 내 아버지를 구세군 사관학교에 보내 사관(목사)이 되도록 하셨다.
아버지는 같은 고향 출신인 어머니와 결혼해 20대 초반 서울 이화여고 옆의 구세군 사관학교에 함께 다니셨고 거기서 나보다 세 살 위인 형님을 낳으셨다. 사관 임직 후 경북 상주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셨는데 어떤 연유인지 내가 태어났을 때는 다시 임실에 와 계셨다. 두 분은 고향 주민들이 이질적으로 느낄 정도로 ‘신세대’이셨다고 한다. 내게 어머니는 하이힐을 신고 찍은 사진 속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내가 네 살 때쯤 동생을 낳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목회를 하시지는 않았지만 동네 문맹자들을 모아 공부를 시키는가 하면 청년회 등 활동들로 집을 비우실 때가 많았다. 아버지 방에는 책이 굉장히 많았고 테니스 라켓도 있었다.
그런 기억들 속 나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책보를 메고 맨발이나 다름없이 다닐 때 가죽 책가방에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녔다. 길에 나서면 마을 어른들 누구나 반겨주었고 귀한 집 자손 대접을 받았다.
그 생활은 열두 살까지였다. 혼란하던 시절에 그만큼 유복하게 자란 것도 행운이겠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 이후의 고생이 더욱 힘들었다.
전쟁 전에 일본군 노역에 끌려가셨던 아버지는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도리어 집에 계셨는데 9·28 수복 후 지리산 일대가 퇴각 못한 인민군의 소굴이 된 즈음에 빨치산에 붙들리셨고 반동으로 몰려 돌아가셨다.
하루아침에 ‘반동 가족’이 된 우리는 재산을 몰수당했다. 소달구지에 가구며 생활집기, 책들이 가득 실린 위에 덩그러니 아버지의 테니스 라켓이 놓여 있었다. 그렇게 멀어져간 소달구지의 영상만 뇌리에 선명히 남긴 채 내 유복한 유년 시절은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몇 달간 집안에 격리됐다. 그 때부터 우리는 ‘반동 가족’일 뿐이었다. 인민군이 어디서 끌고 온 소를 잡아 마을 잔치를 벌여도 우리 집만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한밤중에 먼 친척 아주머니가 대문 안으로 슬그머니 고깃국 한 대접을 밀어 넣어주고 갔지만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 때는 ‘한동안 밥을 못 먹어서 그런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불평할 수가 없었다. 마을에서 군인과 경찰, 면장 등의 가족 중 청년들은 모두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한두 살만 많았어도 형님과 나는 그때 죽었을 것이다. 본격적인 고생은 1·4후퇴 때 피란을 가면서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17) 서러운 ‘반동가족’ 피란길… 외삼촌 의지 서울 생활 시작
1951년 1월 지리산 일대에서 국군과 전투경찰의 빨치산 토벌작전이 시작되고서야 우리 마을 사람들은 피란을 떠났다. ‘반동 가족’으로 격리돼 오래 소외돼 있던 우리 가족은 자세한 사정도 모르는 채 귀중품만 챙겨 집을 나섰다.
한 고개 지나서 어느 폐가에 들어서 보니 마을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들은 가마솥과 식량을 잔뜩 지고 와 있었다. 우리도 쌀은 조금 가져왔지만 솥이 없으면 밥을 지을 수 없었다. 물론 새어머니와 열다섯 살 형, 열 두 살이었던 나, 젖먹이 이복동생이 전부인 우리가 그런 짐을 지고 올 수 없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을 폐가 한 귀퉁이에서 먹고 잤다. 배고픔이 한계에 달하고 동생의 울음소리가 귀를 찢는데도 우리는 사람들에게 밥을 얻으러 가지 못했다. 다들 안면이 있는 사이인데도 먼저 나서는 이가 없었다. 무서운 세상이라고, 그때 처음 생각했다.
그런 중 형이 벌떡 일어섰다. “제가 가서 먹을 것을 구해 올게요. 집에 가면 뭐라도 있을 거예요.” 사람들이 말렸지만 형은 막무가내였다. “걱정 마세요. 금방 올게요.”
형은 그렇게 뛰쳐나갔다. 그대로 영영 못 볼 것 같아 몸이 떨려왔지만 차마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영원처럼 긴 밤이 흐르고, 간밤의 포탄 소리에 도망가지도 않았는지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할 때 형은 돌아왔다. 등에 짊어진 통을 내려놓는데 뜨거운 밥이 가득 들어 있었다.
눈물이 왈칵 나왔다. 집까지 무사히 간 것도 그렇지만 밥을 해 왔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나도 그렇듯이 형은 한번도 밥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어두운 부엌에서 어떻게 밥을 지었는지 신기했다. 다행히 날이 추워서 그 밥으로 3∼4일 연명하면서 첫 고비를 넘겼다.
그 뒤로도 순창 등지에서 몇 달간 지냈던 피란 시절은 어떻게 지나왔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고생이 심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했다.
형이 먼저 서울로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냥 있으면 남아 있는 빨치산에 끌려가 노역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외가 쪽 친척들이 살고 있을 터였지만 연락처를 몰랐다. 형은 “서울에서 구세군을 찾아가면 아버지 친구가 있을지 몰라”라고 하면서 무작정 서울로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연락이 왔다. 외삼촌을 찾았고 그 댁에 신세를 지기로 했으니 함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자는 것이다. 그렇게 내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외삼촌은 서울 신길동에 살고 계셨다. 공무원으로 그나마 안정된 살림이었기 때문에 우리 형제를 잠시나마 맡아주셨다. 이때 외삼촌을 만난 것도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다. 외삼촌께서 우리에게 “너희 부모님은 훌륭한 사역자이셨다”고 강조하시며 주일 예배에 참석하도록 강권하셨기 때문이다. 전도사였던 외숙모님도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축복은 부모님 대에서 끊겼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외삼촌께 언제까지 신세질 수는 없어 형님은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나는 신문팔이 잡지팔이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때로는 형님과 둘이, 때로는 나 혼자 살며 매일 다음 끼니 걱정을 했다. 그러던 중 중학교 때 귀중한 경험을 했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18) 시련 연속 구두닦이 경험… 훗날 소중한 사업 밑천
중·고교 시절 내내 나는 신문배달과 잡지팔이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이 일들은 당시 고학생의 일거리로 인식돼 있어서 교복 차림으로 해도 제지를 받지 않았다. 잡지팔이는 청량리에서 떼어온 헌 잡지들을 기차 안에서 파는 것이었는데 차장들은 교모에 경례를 올려붙이며 열차에 올라타는 잡지팔이 학생들을 보면 고갯짓을 하며 무임승차를 용인해 주곤 했다.
그런데 이런 ‘고상한’ 일만으로는 아무래도 살기가 너무나 빠듯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등록금을 못 낸 학생은 시험을 치지 못하게 했다. 시험을 못 치면 학년 승급도, 졸업도 못했으므로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그런 와중이니 끼니를 제대로 챙길 리 없었다. 형님과 살건 혼자 자취하건 제대로 밥을 지어 먹는 날보다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그러던 중 중학교 때 한 친구가 솔깃한 제안을 해 왔다. 여름방학 때 구두닦이를 하자는 것이었다. 돈이 쏠쏠히 벌린다는 말에 선뜻 그러마고 대답했다. 함께 나무판자를 구해 구두통을 짜고, 구두약을 살 때까지만 해도 그저 잘되려니 하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 당황한 것은 구두닦이를 하려면 교복을 입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교복은 내가 이 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이라는 유일한 증명이었다. 그렇지만 교복을 입고 구두를 닦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군들이며 돈 많은 신사들이 드나드는 다방이 몇 개 있었던 영등포역 앞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미 경험이 있는 친구는 “헤이, 슈사인!” 하면서 지나가는 미군에게 달라붙어 금방 개시를 했다. 그러나 나는 엄두가 안 나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구두닦이란 자진해서 오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아주는 일이 아니라 별로 구두 닦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 “구두 닦으세요, 네?” 하며 귀찮게 해서 “어허, 이놈 참” 하며 마지못해 따라와 닦도록 하는 일이었다. 영등포역 앞에 진을 친 소년 구두닦이들만 수십 명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친구는 자기 일을 하는 중간 중간 “너, 저기 저 사람한테 붙어봐”라며 내 등을 떠밀었지만 쭈뼛거리는 사이 첫날은 결국 허탕을 쳤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며 ‘내 성격에는 도저히 안 맞는 일이 아닐까’ 하고 고민했다.
다행히 다음날부터 한 명 두 명 끌어와 구두를 닦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한 번에 1달러씩 알토란같은 돈이 주머니로 들어오자 점점 신이 나서 사람들에게 굽실굽실하고 아양 떠는 일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경찰이 일제 단속을 나와 구두닦이 소년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구두통을 빼앗은 것이다. 소년들은 거의가 학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은 야간 학교에 다니는 조건으로 구두닦이를 허용해 주곤 했다. 그런데 그 중 우리는 이미 학생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구두통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짧은 경험은 끝이 났다. 그 이후로는 다시 신문배달과 잡지팔이 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이 일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줬다. 그 전까지 장래 희망을 생각할 때 막연하지만 법관 등 안정되고 고상한 직업만 떠올렸던 나에게 “어떤 일이든 발 벗고 하면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훗날 사업에 뛰어드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19) 못 먹어 생긴 폐병 고치려 공군 자원입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국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 학교를 정할 때 학비가 비교적 싼지를 우선 고민한 기억이 난다. 그만큼 미래보다는 눈앞의 생계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그만뒀다. 누적된 영양부족으로 폐병에 걸린 것이다. 특히 기말고사 때 장학금을 타보겠다고 밤샘하며 공부하다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친구에게 업혀 학교를 나설 때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도 ‘그렇게 발버둥쳤건만 이렇게 대학 생활이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학교를 휴학하고 친구들이 알아봐준 인천 한 암자의 방 한 칸에 묵게 됐다. 거기서 지낸 반년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인 시기였다. 그 전까지는 아무리 힘들어도 일말의 긍정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넥타이를 매고 가는 사람을 보면 ‘나도 언젠가 저런 직업을 가질 수 있겠지’ 했다. 법관이 되겠다며 헌책방에서 법전을 구해 틈틈이 읽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는 그저 하루하루 결핵과 씨름하며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유일한 외출은 서울역 앞 병원에서 무상으로 나눠줬던 폐결핵 약을 받으러 나가는 것이었다. 두 가지 약을 받아다 매일 수십 알씩 꾸역꾸역 삼키며 ‘그래도 이렇게 끝은 아닐 거야’라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던 중 공군에 입대하게 됐다. 갑작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나로서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친구들이 말하기를 배고픈 청년들 사이에 “공군에 가면 국에 비계가 둥둥 뜬다”는 말이 돈다고 했다.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인 나는 “결핵은 잘 먹어야 낫는다는데 건강을 되찾으려면 꼭 입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참으로 모순적인 생각이다. 건강해야 입대할 수 있는 공군에 건강을 되찾기 위해 입대하겠다니. 뒷문으로 넣어줄 ‘빽’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신체검사에서 폐 엑스선 검사를 받는 날, 가슴을 졸이면서도 기계가 신통찮아 결핵을 못 잡아내기만 빌었다. 결과는 정상.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계가 오죽 안 좋으면’ 하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에겐 스스로도 몰랐던, 하나님이라는 ‘빽’이 있었던 것이다.
공군 생활은 과연 듣던 대로였다. 끼니마다 고깃국에 매일 저녁이면 간식으로 빵도 나왔다. 미제 매트리스가 깔린 침상에서 자고,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을 정도로 편히 지낼 수 있었다. 공군 3년은 내 젊은 시절의 유일한 휴식기였다.
전역할 때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다시 가난한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이 문제였다. 일단 복학을 했지만 나이는 이미 20대 중반에 접어들었는데 언제까지 학비 벌며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 하는 암담한 마음에 자퇴하고 말았다.
그 뒤 바로 작은 인력회사 사무실에 취직했지만 또 석 달 만에 그만뒀다. 당시는 월급쟁이라 해도 월급만으로 생활이 불가능했다. 내 한 몸 생계는 어찌어찌 꾸린다 해도 앞으로 가정을 꾸리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희망이 없었다.
갑갑한 심정이었다. 하루하루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쌓아도 언제 잘 살게 될지 모르는데 계속 바닥에서만 헤매는 것 같았다.
그때쯤이었다. 형님과 함께 어느 셋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날 처음 대면한 주인집 아주머니가 문 안쪽에서 우리를 보더니 맨발로 뛰쳐나왔다. “어머나, 어머나!”를 연발하며 우리 형제 등을 두드리며 반색을 했다.
***[역경의 열매] 박래창 (20·끝) 새로운 도전을 기도하는 지금이 가장 행복
직업도 없고 구체적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 생계에 허덕이던 20대 중반의 어느 날, 작은 변화의 조짐이 찾아왔다.
형님과 함께 셋집을 옮기던 날, 이사 간 집주인 아주머니가 뛰어나오며 반겼다. “어젯밤 꿈에 잘 생기고 훤칠한 청년 둘을 봤는데 바로 이 청년들이었나 보네. 주위에 맑은 샘물이 콸콸 넘치는 게, 이건 틀림없이 청년들이 나중에 크게 성공하고 부자 될 거라는 꿈이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미신 꽤나 좋아하시는 분이네’ 했다. 당시는 신앙심이 깊지 않았지만 명색이 목회자 자녀인데 그런 말을 믿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아주머니 역시 크리스천이었다. 기도를 굉장히 많이 하시고 때때로 예언의 은사를 받기도 하는 분이었다.
그 사실을 알자 꿈 이야기가 자꾸 생각났다. ‘하나님께서 아주머니를 통해 우리 형제에게 주신 메시지가 아닐까.’ 그때쯤부터 사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지녀왔던 불안을 끊어버리고 결국은 잘되고, 복 받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지난 10일 나는 소망교회 원로장로로 추대됐다. 소망교회의 초대 1기 장로로 피택된 지 28년 만에 새 직함을 받으니 감회가 컸다. 추대식에 참석하자 처음 소망교회를 찾았던 때가 떠올랐다. 1979년 신촌장로교회 아동부 교사 겸 남선교회 총무로 일할 때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숭의여전 학장으로 계시며 막 교회를 개척하셨던 곽선희 목사님을 초청 강사로 섭외하기 위해서였다.
아파트 상가 한 쪽에 성도 50여명이 모인 수요 저녁 예배에 참석했던 나는 곽 목사님의 사도행전 강해에 완전히 매료됐다.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는 말씀(마 13:44)이 떠오르며 ‘신앙생활을 알차게 해 줄 보화가 여기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 재산을 팔아서 밭을 사겠다는 결단으로 16년간 다니던 교회를 떠나 소망교회로 옮겼다. 워낙 중책들을 맡고 있던 터라 옮기는 데만 6개월이 걸렸지만 주저함은 없었다. 그 결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0여명 성도가 7만여명이 되는 동안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복이었다.
지난해 말 한국장로신문사 사장 취임식 때 취임사에서 내 인생의 말씀으로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요 14:18)는 구절을 소개했다. 어려서부터 장성하기까지 사업을 하고 교회와 교단 일을 하는 과정 과정마다 하나님은 나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셨다. 평생 내 의식주를 남에게 의탁한 일 없으나 대신 평생 수많은 분들에게 기도의 빚을 졌다. 그 덕에 숱한 고비 앞에서도 형통할 수 있었고 단 한 번도 남에게 멸시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겪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나님 슬하에서 살기만 하면 틀림없이 그분의 자녀로 대우해 주신다.
지난 15일 한 세미나에서 설교를 듣는 도중 하나님의 새로운 음성을 들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9) 살아오는 동안 시간마다 사건마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셨고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리고 앞으로도 새 일을 주실 것이고 기적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게 기대하는 지금 나는 최고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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