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선교지 분할 협정(Commity Agreements)
한국선교는 경쟁이 아니라 연합이라는 대원칙하에 선교지 분할은 지역의 권한에 관한 점유가 아니라 효율적인 선교공동체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를 비롯하여 세계각국 선교사들이 진출한 조선에서의 원활한 복음선교를 위해서는 상호협력적 기능을 갖는 지혜가 필요하였습니다. 또한 경쟁으로 인한 불필요한 재정 지출과 그로 인한 낭비를 막는 것은 본국 선교기금을 악화시키지 않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낯선 조선인에 비춰진 과도한 경쟁은 자칫 선교본연의 역할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하거나 위축될수 있으므로 적합한 선교지 분할을 통하여 원할한 선교가 진행될 필요성을 공감하게 된 것입니다.
1888년,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선교의 효과적 진척을 위해 장로교와 북감리교의 선교지 분할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1892년 1월, “장로교선교지 분할위원회”가 결성되어 북장로교와 남장로교는 선교지 분할협정이 체결되었고, 6월11일, 장로교 감리교 대표 협의회를 통하여 선교지 분할협정 초안이 작성되었습니다.
5천명 미만의 소도시와 읍은 한 개의 선교구로 한정하되 6개월 이상의 공백기간이 지속될 경우 다른 선교회가 선교구로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5천명 이상의 소도시에서는 상호 구역이 필요하고 협의가 필요하였습니다. 사역확장을 하려는 선교회는 미점유지역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불필요한 마찰과 경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의 신도들은 타 교단으로 옮겨갈수 있는 권한이 각자에게 있으나 중직자의 경우에는 반드시 이명서가 필요하도록 하였습니다.
1893년, 장로교회는 감리교회와 선교지 분할협정을 논의하기 위해 기포드, 스왈른, 무어를 선교지분할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하였습니다. 그러나 감리교 본국 선교부는 선교지 분할정책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05년, 장감연합공회가 결성되면서 분할협정은 본궤도에 오르며 가속도를 내었습니다. 1909년 9월17일, 서울 YMCA회관에서 선교지 분할협정은 공식적으로 조인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기독교 선교는 경쟁이 아니라 상호 보완과 상호협력 관계로 발전하였습니다.
북장로교는 서울, 평안남북도, 황해도를 중심으로 서울과 서북지역, 경상북도를 주요거점지역으로 하였습니다. 캐나다선교회는 함경남북도, 호주선교회는 경상남도, 남장로교는 전라남북도, 북감리교는 서울과 경기, 충청남북도 일부와 평안남북도 일부지역, 남감리교는 서울과 개성, 강원도, 원산지역, 영국성공회는 인천과 서울, 침례교는 강원도, 성결교는 서울과 평안도, 구세군은 서울을 선교구역으로 정하고 전도와 교육, 의료와 구제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지 분할정책은 지역적 이데올로기를 가져오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진보성향의 캐나다선교회 관할구역은 이념적 카테고리가 고착화하면서 비타협 배타적 성향을 나타내었습니다. 반면 북장로교 선교지역과 남장로교와 호주장로교지역은 보수성향이 강한 집단으로 고착화되어 갔습니다. 하나의 신학사상을 장기간에 걸쳐 교육하면서 그 신학사상이 그 지역을 지배하는 신학적 이데올로기가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선교지 분할정책은 지역색을 가속화하였습니다. 영남과 호남, 충청과 강원, 서울과 지방 등으로 지역적 특징이 강화하면서 상호 배타적, 상호 경쟁적 관계가 심화되었습니다. 선교지 분할정책은 장로교와 감리교간에 이루어진 대형교단의 독식형태가 되어 침례교와 성결교 등 군소교단을 협의과정에서 배제하는 모순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침례교는 충청도를 기반으로 생존하였지만 구세군과 영국성공회, 정교회와 같은 교단은 100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크게 성장하지 못하는 한계점을 가져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