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세이(8) - 1907년 대한제국의 상반된 모습
1. 1897년 시작된 ‘대한제국’은 1910년 한일병합을 통해 사라진다. 불과 13년의 짧은 기간 동안 대한제국은 국가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지만, 식민지를 분할했던 열강 세력 음모에 의해 결국은 멸망하게 된 것이다. 대한제국은 1910년 사라졌지만 실제적으로는 1907년 국가의 위상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고종의 마지막 시도가 물거품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2.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소위 ‘고문정치’를 통해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된 일제에 대항하여 고종은 최후의 카드를 꺼낸다. 외교고문이었던 헐버트의 조언에 따른 선택이기도 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 일본과의 조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되었고 왕의 승인도 받지 않은 무효임을 밝힘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지키려는 최후의 계획이 실행된 것이다. 이때까지 고종은 러시아의 호의를 의심치 않았고 실제적으로도 러시아는 회의에 참석하도록 한국을 부추켰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과 러시아의 비밀협정을 통해 만주지역을 러시아가 갖는 대신에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약속함으로써 러시아의 한국의 이용가치는 사라졌고 이후 러시아는 철저하게 한국의 요구를 무시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러시아가 적극 후원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의해 무산되었다는 학설과는 달리 헤이그 밀사 사건은 대한제국과 만주,몽골를 맞바꿔친 러시아의 냉혹한 국제외교의 부산물 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3. 천신만고 끝에 헤이그에 도착한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의 밀사는 회의 참석이 거부되었고 어쩔 수 없이 겨우 기자들 앞에서만 한국의 억울함과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당시 참석한 기자들에게 밝혔던 이위종의 연설은 상당한 호응을 이끌었고 한국에 대한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당시 세계의 흐름은 철저하게 밀약을 통해 서로의 이익을 관철하던 시대였다. 한반도와 관련해서도 러시아와 일본의 밀약이 이루어졌고, 미국과 일본과의 협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는 서구 열강에 의해 확약을 받는 단계였던 것이다.
4. 철저하게 서구 열강에 의해 버림받은 밀사들은 울분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준은 그러한 울분의 결과로 병사하게 된다. 고종의 최후의 카드는 실패하게 되었고 밀사 파견의 책임을 물어 강제로 퇴위하게 된다. 고종의 퇴위와 함께 일본은 정미7조약(한일제2협약)을 통해 한국군을 해산하였고 일본인 차관을 지명하여 ‘차관정치’를 통해 완전하게 한국의 내정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한국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의병을 결성하고 일본에게 저항했지만 여전히 양반과 상민이라는 계급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의병활동은 지지부진하게 끝나고 만다. 대한제국, 500년 조선의 운명은 끝이 나고 있는 것이다.
5. 하지만 이 시기에 어쩌면 이상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국가의 멸망을 앞둔 위기의 순간에 ‘개인의 죄’를 고백하며 내면적 정화를 강조하는 부흥운동이 개신교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일명 ‘평양대부흥운동’이라 불리는 전국적인 종교운동이 1907년에 일어난 것이다. 평양의 길선주 장로(후일 목사)의 개인적 죄에 대한 고백으로 촉발된 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개신교도들은 교회에 모여 ‘통성기도’를 통해 죄를 고백하면서 신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약속하였다. 이때 새롭게 교인이 된 사람들은 기존의 교인수를 능가하였고 한국 개신교의 특징인 통성기도와 새벽기독회, 금요철야기독회 등이 확립되었다.
6. ‘대부흥운동’은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개신교 지도자들뿐 아니라 일본의 지원을 받은 하나의 움직임이었다. 선교사들은 일본의 지배를 ‘합법적인 통치자에 대한 복종’이라는 교리를 통해 합리화시켰고 일본은 민족적 저항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하에 개신교 부흥운동을 지원한 것이다. 대부흥운동이 거센 지역일수록 일본에 대한 저항이 약했다는 사실은 대부흥운동과 독립운동과의 관계가 상반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가 최대의 위기에 빠져있을 때, 위기에 대처하기보다는 개인적 죄를 고백하면서 공동체의 문제를 회피하게 한 것은 전혀 시의적절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민족적 좌절에서 도피하여 개인적, 종교적 방어망 속으로 숨어 들어가 사적 안정을 추구한 것은 인간의 욕망과 한계를 확인하는 슬픈 모습이었다.
7,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자 김정기는 대부흥운동을 “나라가 망해가는 판에 벌어진 죄의식과 사랑의 한마당은 일제 침략을 호도하며 동시에 조선 인민의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을 말살하려는 저의에서 자행”되었다고 혹평하고 있으며, 이만열 또한 대부흥운동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통회자복은 개인의 정서적 정화를 가져오게 하였으나, 그런만큼 현실의식, 역사의식은 마비되고 있었다. 즉 개인이 역사와 사회 앞에 져야 할 책임은 점차 회피하였고, 신의 섭리에 내맡겨 버렸다는 뜻이다.”
8. 고종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학자인 이태진의 견해처럼 대한제국 마지막 시기 ‘고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비록 국제외교에 대한 냉철한 혜안과 내부세력에 대한 통제에 실패했지만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외국의 정보를 취득하려고 노력했고 끊임없이 외국에 밀사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키려는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하지만 1907년 고종의 마지막 시도는 실패로 끝이나고 고종은 권력에서 쫓겨난다. 대한제국의 비극적 조종이 울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 한쪽에서는 국가의 멸망에 분노한 사람들의 의병 활동이 일어나고 있었던 반면, 조국의 운명에는 무관심한 채 개인적 죄를 고백하고 정서적 정화를 얻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가의 멸망에 눈을 닫은 채 개인의 행복과 만족감을 추구했던 종교적 움직임은 그 시대 우리나라의 비극적인 풍경이 아니었을까?
첫댓글 - 역사적으로 종교는 정치와 손을 잡으면서 확장과 번영을 꿈꾼다. 그것이 인류 문명의 운명이라는 기이한 논리를 내세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