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교회 생활을 하지 못하는 장로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교회를 어머니와 같다고 했습니다. 한 생명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생명을 잉태하고, 어머니의 손길에 의해 자라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교회에서 신앙을 갖고,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신앙이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평생 교회와 함께 살아갑니다. 교회를 떠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교회 생활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큰 비극입니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신바람이 나야 하고, 구원받은 자로서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 봐야 짜증만 나고, 마주치기 싫은 사람을 보아야 한다면 그 신앙생활은 거짓되고 잘못된 것입니다. 이 장로님도 그런 유형의 신앙생활을 하던 분입니다. 장로님이 그렇게 된 원인은 두 가지로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이 장로님은 본래 어머님의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교회에 출석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이 축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을 받고,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어머니의 일상생활은 그렇게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되었기 때문에 이웃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고, 그릇된 말과 행동으로 주변에서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신앙생활의 뼈대를 잡았기 때문에 장로님의 신앙생활도 올바르지를 못했습니다. 말씀에 따라 신앙생활을 돈독히 할만한 성숙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둘째, 이 장로님은 마음 속에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그 분이 장성하여 어머니의 재산을 관리하게 되면서 발생했습니다. 이 어머니는 굉장히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어머니와 의논하지도 않고 어머니의 상당한 재산을 빼돌렸습니다. 그 일로 마음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는 열심히 나갑니다. 이러한 교회생활이 행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장로님은 불만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보다는 교회에 떠넘겼습니다. 자신에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미웠습니다.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려고 하는 목사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교회 생활이 점점 나빠진다고 불평했습니다. 결국 장로님은 결론 내리기를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는 교회를 하나 세워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개척교회를 세우기로 작정했습니다. 재산이 많으니까 먼저 교회 건물부터 지었습니다. 교인을 모으기 전에 교회부터 번듯하게 지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집 옆에 세웠습니다.
집 옆에 교회가 있으니까 마음 내킬 때 예배를 드릴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목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 생활을 했던 것을 되돌아볼 때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잘 아는 사람을 목사로 세우는 것이 편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 아들 가운데 한 명이 성경도 좀 알고 기도도 잘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목사로 임명했습니다.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훌륭하게 지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늘 자기와 아들 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제대로 된 목사가 있어야 교인이 늘겠다는 판단이 서자 장로님은 목사 한 사람을 구했습니다. 장로님이 택한 목사님은 소속도 없이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는 방랑자였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죽이 잘 맞았습니다. 서로 불편하지 않은 관계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장로님은 장로님대로 목사를 부려먹을 생각을 했고,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그저 장로님 비위만 잘 맞추면 편하게 먹고 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교회의 면모를 갖추자 교인도 한두 사람 생기고 예배도 활기가 넘쳤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동기로 시작한 교회가 잘될 리가 없습니다. 교회 생활이 재미가 있어지는데 문제가 터졌습니다. 좀 더 큰 규모의 교회에서 이 목사님을 청빙하였습니다. 원래 떠돌이 기질이 있던 목사님은 어느 날 밤 장로님과 의논도 하지 않고 그 교회의 기구와 문서, 재산 일체를 다 가지고 다른 교회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결국 장로님이 세운 교회는 문을 닫았습니다.
이런 장로님, 이런 교회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제가 한 이야기는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각색한 것입니다. 장로님이라고 한 사람은 오늘 본문의 미가입니다. 미가는 사사가 아닙니다. 사사 시대의 평범한 보통 사람입니다. 사사기 저자는 그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신앙인을 통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 구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 어떻게 저란 사람이 장로가 되었을까 의아해 하며 분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냐고 속으로 되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공부하면서 미가가 추구했던 종교적 신앙과 오늘 우리들의 신앙을 한 번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실 본문을 대하면서 미가의 신앙의 모습이 오늘 우리들과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참된 신앙생활이 아니라 거짓된 종교생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아침에 우리는 본문의 미가를 통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요인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미가뿐만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잘못된 신앙으로 이끄는 요인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실용주의의 일차적인 관심은 진리가 무엇인가에 있지 않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실용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어떤 일을 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에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장로님은 교회를 자기 집 앞마당에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정당한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자격이 없는 아들을 목사로 세우는 일이 정당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신당을 교회로 바꿔서 읽을 수 있습니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는 신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신당에 드라빔이라는 신을 만들어놓은 것으로 보아서 다른 신을 예배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하나님이 지정하신 예배 장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18장 31절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그 당시 하나님의 집은 실로에 있었습니다. 실로는 미가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렇게 먼 곳이 아닙니다. 미가는 에브라임 산지에 살았는데, 실로는 에브라임 지파의 지역에 있었습니다. 미가는 가까운 곳에 하나님의 집을 두고도 더 가까운 곳을 찾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 마당에 신당을 세웠습니다.
사람이 게을러지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처음에 신앙의 감격이 끓어오를 때는 모든 예배에 다 참석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격합니다. 교회에 오는 것이 즐겁고, 예배 시간이 은혜롭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열정이 식어가면서 일주일에 세 번, 일주일에 두 번, 나중에는 일주일에 한 번 주일 아침에 얼굴만 내밉니다.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을 귀찮아합니다. 미가는 신앙생활을 자기 편리 중심으로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올바른 것인지를 묻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에게 편리하고 유익한 것만 염두에 둡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본주의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철학이 바로 실용주의 철학입니다. 자본주의와 실용주의가 일맥상통하는 이유는 그 근본에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편리주의입니다. 거기에는 개인의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미가가 비뚤어진 신앙생활을 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는 결국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십니까? 혹여 당신은 유익만 챙기려고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는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혹시 그런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인가의 행복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남을 돕기 위한 참된 사랑을 할 때 행복은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행복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간음 현장에서 붙잡혔던 여인,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인, 남편을 다섯이나 가졌던 사마리아 여인, 세려였던 삭개오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행복한 존재가 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잘못 이끄는 요인이 무엇입니까? 둘째는, 기복주의적 신앙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정당한 축복을 약속하고 그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또 받은 축복을 세상에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삶의 특권입니다.
우리가 오해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물질적인 축복을 말합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그것은 해와 달을 숭배하고 성황당에서 복을 비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다가도 물질의 복이 없거나 자신의 재산에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신앙을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의 신앙은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하는 것과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의 의식 구조에는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는 무속 신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도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하나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가 오로지 복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미가의 신앙이 기복신앙이었습니다. 미가가 어머니의 재산 일부를 빼돌렸던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미가는 은 천백 세겔을 훔쳤습니다. 그 액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10절의 말씀과 비교해 보면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가가 제사장 한 사람을 고용했는데 그 고용 조건이 본문 10절의 말씀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은 열 세겔이 제사장이 받은 1년의 연봉이었다고 한다면, 천백 세겔은 제사장이 110년을 봉사해서 받을 수 있는 돈입니다. 얼마나 어마어마한 액수인지를 감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큰 돈이 없어진 사실을 알았던 미가의 어머니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입맛도 사라지고 상심하여 삶의 의욕을 잃었을는지도 모릅니다. 본문 2절을 근거로 판단해 보면, 하나님께 돈을 찾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겠지만 그것도 저주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미가는 자신의 잘못이 마음에 걸리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이 돈을 훔친 사실을 실토하게 됩니다.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이때 미가 어머니의 반응을 보십시오. 아들의 잘못을 나무라고 야단을 쳐야 할 어머니는 잃었던 은을 찾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영영 못 찾을 줄 알았는데 아들이 간직하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면서 오히려 아들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그 은으로 아들을 위해 신상을 만들고 또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본문 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지금 미가의 어머니는 은을 훔친 아들을 엄하게 징계하고 올바른 삶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도둑질한 아들을 칭찬하며 그를 위해 신상까지 만들어줍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 복까지 빌어줍니다. 성경에 보면, 자식에게 훈계와 채찍을 싫어하는 자는 자식을 미워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가의 어머니는 자식을 훈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칭찬하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망하게 하는 부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4절의 말씀은 더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4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은을 여호와께 바치겠다고 해 놓고서는 겨우 은 이백만 썼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 바치겠다고 서원을 하고서는 천백 세겔 가운데 이백 세겔만 드렸습니다. 어머니의 신앙과 그 됨됨이가 어떠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의 재산을 훔친 것처럼 어머니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셈인 것입니다.
이래서 가정 교육이 중요합니다. 미가는 가정에서 정직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올바른 신앙을 지도 받지도 못했습니다. 도둑질을 하고도 칭찬과 축복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의 삶에서도 계속 그릇된 길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가는 자신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우기도 하고, 떠돌이 레위인을 자기 집 제사장으로 고용하기도 하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미가의 속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미가는 교회의 겉모습만 갖추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신당을 짓고 제사장을 두었습니다. 진정한 신앙생활로 그 영혼이 복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리기보다는 자신의 생활에 유익을 얻고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주위에 이런 미가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올려놓고 날마다 비난할 것입니다. 저게 무슨 장로라고, 저게 무슨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러나 여러분, 미가의 모습을 보고 비판하기 이전에 당신의 신앙자세가 어떠한지 먼저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어떤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신앙의 동기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크기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 분이 누구신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소중한 지식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이 우리의 꿈과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가치관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크기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만남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결단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믿으십시오. 미가처럼 기복주의적인 신앙은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요인이 무엇입니까? 셋째로,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 건물이 있고, 그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하는 것은 신앙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입니다. 문제는 내용은 없이 형식만 있다면 그 형식은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형식만을 중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하셔야 합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형식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화려한 교회, 엄숙한 의식, 장엄한 예배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내용이 빠져버린 믿음은 위선입니다. 거짓입니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는 형식을 갖추는 데는 신경을 썼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믿음은 소홀히 했습니다. 신당을 짓고, 아름다운 신상을 세우고, 제사장을 두는 것이 그들의 주안점이었습니다. 삶 가운데서 어떻게 바른 신앙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그들의 고민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신앙의 내용을 상실하면 그 교회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복음의 감격이 있고, 신앙을 추구하는 열정이 있고, 선교에 대한 비전이 있고, 자손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을 때 비로소 형식이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미가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추구하지 못하고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신당과 신상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우리는 아들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던 미가의 어머니와 같은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신앙의 본을 보여 자녀들이 대대손손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아 알게 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직분이 그의 신앙을 증명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저는 의식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내용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가는 것으로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미신의 차원입니다. 가게를 개업할 때 목사님이 와서 예배를 드렸으니까 장사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복 받을 만한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일하고, 이웃을 섬기는 자세로 진지하게 사업을 경영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목사님과 예배를 드렸다고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우상숭배에 불과합니다.
미가의 잘못된 신앙의 종말을 보십시오. 18장 18절과 19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지고 나오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하니,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단 지파 사람들이 미가의 제사장을 자기네 지파의 제사장으로 데리고 가려고 설득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결국 그 레위인은 미가의 신당에 있던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가지고 단 지파 사람들에게로 갔습니다.
기독교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가지 못할 때 우상 종교로 전락하게 됩니다. 우상 종교의 중심은 인간 자신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신상들을 만들고 섬깁니다. 때문에 우상 종교는 삶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그 역경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복 받기만을 바라던 사람에게 축복이 아닌 고통이 찾아올 때, 그 빈 껍데기뿐인 신앙이 드러납니다. 신앙의 내용 없이 자기의 유익만을 추구하고 복 받기만을 바라서 종교 형식을 지키는 사람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가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껍데기뿐인 신앙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을 갖춘 신앙인으로 서십시오. 그리고 바른 믿음, 바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