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10대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燕山君)의 묘역이다.
조선왕릉의 진입공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묘의 관리소가 그 입구에 있다.
관리소와 그 주변은 조선 사대부의 묘역의 진입공간보다도 협소하고 초라하다.
왕위에서 밀려난 폐주(廢主) 연산군이다. 그 묘 앞에는 사적 제362호임을 알리는 푯돌이 자리하고 있다.
땅에도 혼(魂)이 있다. 땅에서는 기(氣)도 나온다. 그 땅은 기질과 지령(地靈)도 갖는다.
사람은 땅의 기질을 닮는다. 땅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성질을 그래도 이어간다고 했다.
들어서면서 탁 트인 시원한 느낌이 없다.
조선왕릉은 비산비야(非山非野),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사초지(沙草地) 자연의 언덕 강(岡)에
자리하고 있다. 물론 좌청룡 우백호의 든든한 풍수조건을 갖춘 양명한 땅에 조성된 조선왕릉이다.
경기도 지역의 사대부 묘도 건실한 사초지를 늠름하게 올라타고 있다.
이곳은 사초지도 아니다. 평범한 산자락 밑이다. 좌청룡도 우백호도 보이지 않는다.
이 묘역을 감싸고 있는 곡장(曲墻)을 넘어 내려다 본 모습니다.
좋은 묘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잉(孕)도 보이지 않는다. 곡장이 눌러 앉은 탓일까?
앞에서 보았을 때보다 뒤에서 내려다 본 지세는 아파트로 앞을 가려 더 답답해 보였다.
방학동 일대는 뒤로는 도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앞쪽으로는 중랑천이 흐르고 있다.
도봉산은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과 연접해 있는 산으로 지기가 풍부하다.
이곳 묘의 앞에 은행나무가 있다. 그 자리는 도봉산과 북한산이 마주치는 지점이다.
거대한 두 산의 기운이 서로 마주치며 소용돌이가 곁들여져 편안한 양기가 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기존의 마을 정도를 부양할 수 있는 지기의 땅이다. 은행나무 근처에 연산군 묘가 있다.
이곳은 도봉산 줄기가 뒤쪽의 조그마한 개천에 의해 끊어진 자리이다.
맥이 잘리는 것은 물론 풍수비수(風水悲愁)의 자리라서 바람이 몹시 불거나 비가 내릴 경우
쓸 만한 땅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연산군의 험난한 삶처럼 이곳 땅의 기질도 그저 답답하고 거칠게 느껴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쌍분(雙墳)으로 조성된 연산군 묘이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왼쪽 바로 서쪽이 연산군묘이다.
그 옆 오른쪽 동쪽 무덤은 거창군부인묘이다.
연산군묘는 곡장을 둘렀다. 묘 앞에 상석이 각각 놓였다.
그리고 장명등이 두 개 향로석 1개 망주석 1쌍 문인석 2쌍
표석 2기가 배치되어 있다.
표석에는 燕 山 君 之 墓 한자 다섯 글자가 쓰여있다.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연산군 묘 바로 아래에 있다.
의정궁주 조씨는 본관이 한양인 조뢰의 딸로 태어나 세종 4년(1422)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다.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빈으로 책봉되지 못했다.
궁주의 작호를 받았다.
세종의 넷 째아들 임영대군은 후사가 없던 의정궁주의 봉사손으로 들어갔다.
세종은 효심이 유난히 깊은 임영대군에게 이곳 땅을 사패지로 내렸다.
임영대군은 의정궁주의 묘를 이곳에 조성한 것이다.
임영대군은 딸을 영의정 신승선에게 시집을 보냈다.
신승선의 딸이 연산군의 부인이 된다. 거창군부인 신씨가 임영대군의 외손녀이다.
거창군부인 신씨가 요청해서 의정궁주 묘 뒤에 연산군묘를 이장한 것이다.
묘역 아래쪽에 들어선 연산군의 사위 능양위 구문경 (왼쪽)과 연산군 딸 휘순공주의 묘(오른쪽)가 들어섰다.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는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장녀로 태어나, 휘순공주에 봉작되었다. 1501년(연산 7)에
구문경과 결혼했다.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작호가 삭탈되었다. 연산군의 사위 능양위 구문경은
본관이 능성인 구수영과 길안현주(세종 여덟째 아들 영응대군 딸)의 아들로 태어나, 1501년에 능양위가 되었다.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작호가 삭탈되었다.
반정 이후 구수영이 중종에게 구문경과 휘순공주의 이혼을 주청했다.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성종의 큰 아들 이융(李㦕)이다. 어머니는 폐비 윤씨이다.
생모인 윤씨가 폐위되자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다.
성종 14년(1483) 왕세자로 책봉되었고,1494년 성종이 승하하자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 성종이 이룩한 태평성대의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성종 말기에 만연한 향락 퇴폐풍조를 일소하고 부패한 관리들을 척결했다.
또 민생을 돌보고 국방에도 강한 의지를 보였다. 또 사가독서제도를 확충하고
<국조보감>도 편찬하는 등 즉위 10년간은 선정을 베플었다.
연산군은 성종의 능지문에서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게 된다.
1504년 갑자년이다. 임사홍이 연산군 가슴에 불을 질렀다.
임사홍은 연산군과 그 외할머니의 만남을 주선했다.
외할머니는 폐비 윤씨의 피묻은 저고리를 연산군에게 보여주었다.
연산군은 억울하게 죽어간 어머니의 피묻은 적삼 '금삼(錦衫)의 피'를 보고 피눈물을 쏟았다.
임사홍은 윤씨의 폐비에 앞장섰던 인물의 명단을 연산군에 그대로 고자질했다.
그 잔혹한 갑자사화는 처절하게 진행됐다.
폐비에 직접 관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 뜰에서 참하고
정씨의 안양군과 봉안군을 귀양보내 사사했다. 폐비를 주도한 할머니 인수대비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성을 내어 엄숙의와 정숙의를 때려죽이니, 소혜왕후는 병들어 자리에 누웠다가 갑자기 일어나
바로 앉으면서 "이 사람들이 모두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니, 폐주가 자신의 머리로
몸을 들이받았다. 이에 왕후는 "흉악하구나." 하며 자리에 눕고 말하지 아니했다.
인수대비는 그 후 몇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의 최측근 한명회도 부관참시했다.
사화 이후 연산군은 국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치와 향락에 국가재정은 바닥이 났다.
성균관과 원각사를 기생 집합소와 유흥장으로 만들었다.
연산군의 폭정은 갈수록 심했다. 상선내시(차관급)까지 오른 김처선이 직언을 했다.
연산군은 그 김처선도 죽였다. 그로부터 김처선의 처(處)자는 절대 쓰지못하게 했다.
절기 중 하나인 처서(處暑)를 '조서(徂暑)'라고 바꿨다.
결국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두 달만에 유배지에서 죽었다.
연산군은 문장에 능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든 시 소회(所懷)는 유명하다.
"어제 사묘에 나아가 어머니를 뵙고(昨趨思廟拜慈親)
술잔 올리며 눈물로 흠뻑 적셨네(奠爵難收淚滿茵)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으니(懇迫情懷難紀極)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라(英靈應有顧誠眞)"
서울 동대문 회기동(回基洞)이란 지명은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는 깊은 인연이 있다.
폐비 윤씨의 묘는 지금의 경희의료원과 경희여중고 일대에 조성된다. 폐비 윤씨가 묻히고 난 뒤
이 일대는 ‘회묘(懷墓)’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릉으로 승격되어
‘회릉(懷陵)’으로 바뀌었다.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다시 ‘회묘’로 돌아온다.
그렇게 몇 백 년이 흐른 20세기 초 ‘회묘’란 지명이 좋지 않다고 하여 회묘 대신 회기(回基)로 바뀌었다.
1967년 윤씨 무덤이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지면서 회기동과 폐비 윤씨의 인연은 완전히 끝이 난다.
연산군 묘 앞쪽에 있는 노거수 방학동 은행나무이다.
높이 24m, 둘레 9.6m로 수령이 800년에서 1000년 사이로 추정된다.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그 모습이 고상하고 아름다워 오래 전부터 신성시했다고 한다.
이 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변이 생겼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일 년 전에도 화재가
나서 소방차가 출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은행나무 옆엔 `원당샘(元堂泉)` 터가 남아있다.
600년 전 파평 윤씨 일가가 이 곳에 자연부락을 형성한 이래 수백 년간 생활용수를 공급했다.
이 마을 이름을 따 `원당샘` 혹은 `피앙우물`로 불렸다. 일정한 수량과 수온을 늘 유지해 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혹한에도 얼어붙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방학동 은행나무`의 장수 원인을 이 곳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무속행위 금지` 문구와 `식수 사용 불가` 안내문이 눈길을 끈다.
연산군묘 재실이다.
재실은 묘를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이 상주하던 곳이다.
제향을 지낼 때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던 곳이다.
연산군묘 제향은 매년 4월 2일(양력) 청명제로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