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수필 퇴고본.hwp
다단계 텔레비전
32151696 문예창작과
박서영
여전히 우리 집 한가운데에 자리한 텔레비전에는 복잡한 역사가 있다. 아직 어리다는 이유 하나로 나와 언니, 오빠는 어른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통제당해왔다. 컴퓨터, 핸드폰 등 전자기기에 대한 중독성이 한창 대두되는 시기였기에 텔레비전과도 자연히 먼 삶을 살았다. 우리 집은 그 정도가 남달랐고, 조금 경우가 다르기도 했다. 특히 텔레비전은 거의 아버지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그 독재의 역사는 유구하게 이어진 터라,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들은 지금도 텔레비전의 존재를 어색해한다.
초등학교 때 처음 이사 간 새 아파트에 난생 처음 벽걸이 텔레비전을 들였다. 한창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엘지 사의 50인치 엑스캔버스 HD 텔레비전이었다. 거실 중앙에서 버티고 있던 텔레비전의 존재감은 새집에 입주한 가구들 중 가장 컸다. 매끈하고 날렵한 몸체는 보다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했고, HD를 표방한 최신 액정 속에선 이전 컬러 티브이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고해상도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러나 그 텔레비전의 핵심적인 기능은 따로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의 영상 등을 녹화하기 위해선 따로 CD를 굽거나 비디오 혹은 블루레이 DVD가 필수였지만, 이 텔레비전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시간대에 맞추어 미리 녹화를 예약해둘 수도 있었다. 자체적으로 탑재되었다는 방송 녹화 기능의 존재만으로도 그 벽걸이 티브이를 경외할 이유는 충분했다. 텔레비전이 벽에 설치될 때까지만 해도 우리 삼 남매는 당연하게 그 문명의 이기를 영위하게 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 기대는 무참했다. 특히 아버지는 자식들이 전자기기에 눈독을 들이는 걸 참지 못했다. 예전 전세 아파트에 있던 낡고 뚱뚱한 삼성 브라운관 텔레비전도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는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들키는 순간 바로 공부나 하러 가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이사 온 뒤로 새집에선 텔레비전을 둘러싼 새로운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 아침마당 예고가 흘러나오면, 안방에서 출근 준비를 마친 아버지가 걸어 나왔다. 가족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숨을 죽였다. 아버지가 든 리모콘의 행방이 어딜 향하는지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리모컨을 든 아버지는 항상 연례행사처럼 그날의 방송 편성 목록을 살폈다. 아버지는 다큐멘터리면 모조리 녹화 목록에 넣으셨다. 특히 자연과 산, 여행이 테마인 다큐멘터리는 몇 번이고 닳도록 돌려볼 정도로 좋아하셨다. 그날 편성 목록에 아버지가 예약 녹화를 지정한 프로그램에 다섯 개 이상이면, 사실상 우리가 티브이를 볼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부지런하게 리모콘을 놀릴수록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녹화한 프로그램 하나라도 건들기만 해봐라. 아버지는 우리를 향해 으름장을 놓고 바로 출근하셨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불퉁스러운 표정이 교과서에서 완장을 차고 이쪽을 노려보던 히틀러랑 하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이 녹화 기능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같은 시간대에 방영하는 타 채널의 프로그램과 녹화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시간대가 겹치면 한쪽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포기하는 쪽이 누가 되었겠는가. 텔레비전과 컴퓨터, 하다못해 우리가 살고 있던 집도 전부 부모님 명의였고 아버지 통장에서 매달 지출이 나가는 마당에 권력은 자연히 한쪽 추로 기울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먼저 오빠랑 언니가 선택한 길은 모험이었다. 아버지가 지상파 채널 각지에서 녹화하는 프로그램이 날이 갈수록 가짓수가 늘었다. 그들 중 한두 개쯤은 삭제해도 모르지 않을까? 싶은 치기 어린 마음에서 시작된 공작이었다.
시작은 첫째였던 오빠였다. 가족 사이에서도 저마다 좋아하는 프로그램의 기호가 달랐다. 오빠는 아버지가 녹화 예약한 프로그램 두어 개를 지우고, 본인이 애청하는 스포츠와 예능 프로그램을 예약한 뒤 아버지랑 똑같이 언니랑 나를 불러 으름장을 놓았다. 내 꺼 지우면 죽는다. 그럼 나와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빠가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숨을 죽였다. 다음 차례는 언니었다. 언니는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오는 드라마라면 사족을 못 썼다. 수목 드라마라 하루는 아버지와 오빠를 피해 재방송을 보면 되지만,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날이 있었다. 하필이면 오빠가 즐겨보는 예능 프로그램이랑 시간이 겹쳤기 때문에 언니도 모험을 감행했다. 너 내 꺼 건들면 가만 안 놔둔다. 언니도 마찬가지로 나한테 엄포를 놓고 모른 척 학교를 갔다.
그렇게 세 가족의 녹화 목록만 해도 벌써 내 자리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없던 룰도 생겨서, 언니나 오빠는 서로 시간대를 협상하기까지 이르렀다.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프로그램을 지웠다는 허물을 감춘다는 전제하에서였다. 아버지는 퇴근하면 하루 종일 녹화한 프로그램을 보셨지만, 대개 전부 못 보고 소파에 쓰러져 잠들다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는 그 작태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벌써부터 나이순으로 밀려 내 의사는 휴지 조각이나 다를 게 없는 것이 서운하지 않을 리가. 그래서 하루는 대형사고를 쳤다. 누가 녹화한 프로그램이던 상관없이 지우고,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들만 한가득 예약 목록에 채워 넣은 것이다. 모두가 출근에, 학교에, 학원 등으로 집을 비웠을 때 벌인 공작이었다. 고작 리모콘을 손에 넣은 것뿐인데, 잠시나마 손에 쥐었던 그 권력의 맛이 그렇게 짜릿할 수 없었다.
당연히 일은 그날 밤에 터졌다. 퇴근하고 모두가 집에 모여 있던 밤에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며 우리 삼 남매를 부르셨다. 감히 아버지가 보는 것에 손을 대다니. 아버지가 화를 내는 요체는 대부분이 그 이유였다. 아버지가 겨우 화를 삭이고 물러가면, 오빠가 나랑 언니한테 아버지처럼 화를 냈다. 그리고 오빠가 들어가면 언니가 나한테 마구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말로만 듣던 군대식 ‘내리 갈굼’이 따로 없었다. 그날 난 무엇이 그렇게 억울했는지 혼자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흥건해지도록 하염없이 울분만 토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모순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해오던 텔레비전이 우리 가족의 대화를 더 극단적으로 단절시킨 것이다. 차라리 텔레비전을 없앴다면 그 풍경이 덜 바랬을까. 확신할 순 없었다. 내게도 스마트폰이란 통신 단말기가 생긴 뒤로 더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우리 가족을 포함한 현대인들은 이미 개인주의로 분열된 문명의 노예가 되었다.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을 비롯한 첨단 기기들이 현상을 더욱 가속화 하고, 더 좋은 것, 첨단 과학 기술과 문명을 향한 갈망은 인간관계의 사막화를 더 심화시킬 뿐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독점하고, 나랑 언니랑 오빠, 그리고 엄마마저 각자 방에서 휴대폰 DMB로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누구 하나 마찰하거나 간섭받을 일 없이, 각자 원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다. 거실에서 큰 화면으로 보는 생동감은 얻을 수 없었지만, 스마트폰이 그은 휴전선은 집안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자연히 텔레비전에서 멀어졌다. 그만큼 나이가 찼고, 시대가 흘러간 이유도 있었지만 텔레비전은 내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낯선 물건이 되었다. 아마 아버지를 제외한 모두가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론, 누구도 텔레비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거실에는 아버지 혼자 버티고 앉아 텔레비전을 봤고, 가끔 방마다 쿡쿡 웃음소리가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아득하게 울려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