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1. 1987년 발간된 이진경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은 80년대 사회과학 이론적 논쟁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서구 마르크스 이론의 도입과 그것의 한국적 현실에 대한 적용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은 특히 ‘사회구성체론’이라는 주제로 통해 전개되었다. 사회구성체는 ‘지배적인 경제적 기초와 그 상부구조를 갖는 사회’라는 뜻으로, “사회구성체로서 한 사회를 인식한다는 것은 개개의 특정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그 사회의 제 변화를 합법칙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구성체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핵심적인 경제적 형식인 생산양식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며 이것을 바탕으로 상부구조와의 조응을 살펴보아야 한다. 논쟁의 대상은 ‘식민지 조선’이었다. 저자는 이 시기를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라고 정의하며, 그러한 정의가 가능한 논거를 ‘주변부자본주의론’이나 ‘식민지반봉건사회구성체’와 같은 반대 견해에 대한 비판과 ‘생산력과 생산관계, 기본 모순, 본원적 축적’ 등과 같은 마르크스의 핵심 개념을 동원하여 제시한다.
2. 저자는 우선 ‘사회구성체’ 연구에 활용되는 과학적 사회과학 방법론을 정리한다. 과학적 방법은 철학이나 사상적 원칙이 어떻게 이론 속에서 관철되는가에 대한 문제이며, 제반 현상의 근저에 있는 본질을 명확히 함으로써 다양한 현상을 전체적 연관 속에서 합법칙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현상을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이론은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목표로 한다. 이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정세에 대한 계급적 분석을 의미하며, 또한 특정한 구체적 시기와 구체적 정세하에서 어떠한 계급의 운동이 다가오는 진보의 주요한 원동력이 될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3. 과학적 방법의 핵심적인 범주는 크게 네 가지(계급성, 객관성, 총체성, 특수성)이다. 먼저, 계급성은 철학이나 사상은 특정 계급의 세계관이며 그 자체가 계급적 존재의 반영이라는 전제이다. 본질은 파악한다는 것은 이러한 계급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 객관성은 ‘존재와 의식’의 문제로 인식이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과정의 외부에 존재하는 즉 물질적인 것(자연과 사회)과의 관계이다. 객관성은 ‘개념과 실재의 통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관념만을 강조하는 주관주의와 실천을 통해서만 검증하는 실용주의는 오류를 안고 있다. 셋째, ‘총체성(전체성)은 가장 핵심적인 범주이다.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되기 위해서는 전체의 한 계기로서 파악되어야 하며 다른 관련 대상과의 연관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상은 본질이 현상화 한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며, 법칙이란 이러한 현상의 법칙일 뿐이기 때문이다.” 넷째, ’특수성‘은 보편성과 개별성의 통일으로서 본질적 관계 속에서 포착된 구체적이고 총체론적인 현상으로서의 현실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핵심 범주를 적용했을 때, “사회구성체론은 역사를 현실적으로 즉 본질과 현상의 통일로서 파악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며, 대상을 총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론이 된다.”
4. 저자는 사회구성체론을 파악하기 위한 근본개념에 대한 정리에 들어간다. 사회적 관계를 결정짓는 핵심은 경제적 관계이다. 경제적 관계는 생산양식으로 표현되며, 생산양식은 내용으로서의 생산력과 형식으로서의 생산관계의 통일체라 할 수 있다. 생산양식은 고정되고 완성된 정태적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사적 동태적 방식으로 파악해야 한다. 생산양식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직접 생산자인 노동자와 생산수단 간의 관계’와 ‘직접적 생산자와 생산수단 소유자 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핵심이다. 봉건제적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전환되는 ‘본원적 축적’의 핵심은 노동자의 생산수단에서 분리와 비노동자의 생산수단의 전유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러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본관계를 창조하는 과정은 노동자를 그의 노동 제 조건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과정-한편으로는 사회적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전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자를 임노동자로 전화시키는 과정-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5.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시작)은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실질적으로는 토지로부터 쫓겨남)와 신분적 예속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이중적 자유를 얻게 되고 노동력을 자유의사에 의해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게 되는 즉 노동력과 생산수단이 화폐자본과 교환되어 생산자본으로 전화될 때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단계에서는 봉건적 요소와 자본주의적 요소가 혼잡하게 뒤섞이지만 점차 ‘자본주의적 전일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본주의로 변모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전일화는 대공업적 생산수단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전자본주의적인 제요소를 이용하면서 또한 동시에 그것을 파괴해 나가는 과정이었으며 따라서 이는 잡다한 과도적 제형태와 뒤섞인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변화 속에서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기본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제 현상의 근저에서 작용하는 운동법칙으로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든 모순들의 원천인 것이다.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은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노동자와 노동자를 통해서만 부를 확장할 수 있는 생산수단 소유자 사이의 모순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구성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본모순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6. 저자는 사회구성체의 핵심개념인 생산력과 생산관계, 기본모순, 본원적 축적을 활용하여 조선의 식민지 사회의 사회구성체 성격을 분석하고 다른 견해에 대한 신랄한 공격을 시도한다. 어쩌면 이러한 공격이 조금은 생경하고 편향되었지만 강력하고 분명한 사상적 논쟁의 현장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저자는 조선 식민지 사회가 비록 많은 봉건적제 요소를 아직도 청산하지 못했지만, 자본주의를 평가하는 기본적인 요소와 사회의 동태적 변화를 보았을 때,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이 이루어지고 있고, 점차 자본주의적 전일화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등과 같은 정책을 통해 토지 노동자들이 임노동자로 변화되었음을 강조하면서 당시의 사회를 ‘자본주의사회구성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7. 저자의 주장은 직접적인 방식보다는 반대 견해를 비판하면서 점차 정교화된다. 봉건제적 요소와 자본주의적 요소의 접합을 주장했던 장시원 교수의 <식민지반봉건사회구성체론>에 대해서는 “각 경제의 내적인 관계는 거의 얘기되지 않으며 제 경제의 연관이 각 경제의 내적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는 가도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즉 각 경제의 연간이 서로 외면적인 이라는 것이다.”라고 비판하며, ‘식민지반봉건사회이면서 자본주의사회구성체’라는 박현채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는 “경제법칙이 대체 어떻게 관철되며, 어떻게 그 지배적 지위를 정하는지 그것은 여타의 나열되는 제 부분(경제제도)과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그 경제법칙이 어떻게 지배적인 것인지도 알 수 없고 나아가 소위 ‘상대적 비중’이라는 양적인 지표 이외에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8. 박현채 교수의 ‘민족경제론’을 ‘이중구조론’이라고 비판한 정성진 교수에 대해서는 그의 관점을 ‘접합이론’이라는 기능주의적 주장이라고 규정하면서 “접합이론이라는 기능주의는 필요와 필연의 동일성이라는 주관적이고 사기적인 가정 위에 성립한 것이며, 이들은 이 시기의 정체가 폭로됨에 따라 필연성에 대해 경직선이라는 실용주의의 저주를 퍼붓는다.”고 공격한다. 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한 ‘주변부자본주의론’의 주창자 이대근 교수의 견해에는 “보편(일반)과 분리된 특수에 매달릴 때 그것이 새로운 일반을 만드는 것으로 될 것임은 명약관화하고 그결과 ‘특수적 일반성’, ‘특수한 보편법칙’에 매달린 채 전 지구상을 돌아다니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고 반대한다. 저자는 자국의 특수한 경험을 강조하는 이러한 학자들이 마르크스의 원칙을 중시하는 입장을 교조주의, 사대주의라고 공격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방어한다.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와 식민지 봉건사회를 통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 반봉건제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발전, 특히 자본주의적 제 산업의 발전과의 관계 속에서 포착되어야 하며 식민성과 맞물려서는 안 된다.”
9. 400페이지에 가까운 방대한 작업을 통해 완성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을 맺으면서 저자는 실제적인 사회적, 역사적 검토보다는 이론의 원칙적 문제에 초점을 맞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본질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적 제 원칙이 필요하며, 그 위에서 이제까지 보호색이 되어 준 제 이론의 대한 검토가 필요했던 것이다.” 저자의 저술이유를 들으면서 내가 갖고 있던 근본적 사고가 80년대 핵심사고였음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현상의 근저 속에 있는 본질의 중요성’, ‘각각의 현상을 통합할 수 있는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은 여전히 나의 사고를 지배하는 핵심개념이다. 이러한 본질과 전체를 중시하는 사고는 그 후 90년대 이후 프랑스 철학의 도입과 더불어 철저하게 공격받고 파괴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본질과 핵심에 대한 천착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믿고 있고, 이성의 가치를 존중한다. 분명 저자의 주장에서 발견되는 진실과 본질에 대한 지나친 ‘확신’에는 과도함을 인식하게 되지만, 모든 사상과 철학은 상황과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그것의 치열함을 이해하게 된다. 누구든 자신의 주장을 철저하게 실험할 기회는 많지 않고 그것을 이론적, 방법론적으로 표현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10. 저자는 그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증보판을 내면서 “혁명 자체가 언제나 혁명의 대상인 것이다. 혁명없는 혁명, 그것은 자기당착이고 형용모순이다.”라고 말하며 80년대의 시야를 넘어설 이론적, 실천적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작품은 현재의 사회를 바라보는 데는 분명 한계를 가지고 있고, 여기서 그렇게 논쟁했던 ‘사회구성체’가 왜 중요한가에 대하여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80년대 왜 우리가 ‘사회구성체’라는 논쟁을 통하여 한국사회의 변혁을 꿈꿨는가를 파악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80년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텍스트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기본적인 토대가 변하지 않는다면 상부구조는 언제나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은 현재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보았을 때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 준다.
첫댓글 - 본질과 핵심으로 향한 발걸음은 항상 시간 안에서의 움직임, 부분과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시간 밖에서의 움직임, 이 두 움직임을 함께 아우르는 방법론의 필요성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