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힘 빼고 천천히 해, 왜 그렇게 서둘러?!”
또라이버 삑사리 내고 ‘으이~ 쒸’ 한 마디 뱉고 티 박스에서 내려와서는 맞지도
않는 4번 우드와 5번 아이언 들고 카트도 못 타고 머리에서 김 뿜어 대며
씩씩거리고 걸어가는 나의 뒤통수에 아내의 염장인지 충고인지가 떨어진다.
“분질러 버린다던 우드는 또 왜 들고 가?”
이쯤 되면 아무리 라이가 좋아도 우드 샷은 보나마나 뒤 땅이나 대가리다.
굿 샷이나 나이스 퍼팅으로 하이 파이브를 하며 함박 웃음으로 서로를
격려하기도 하지만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아내의 실력이 일취월장 할수록
그녀의 맨트 하나하나에 내 기분이 잡치는 일이 많아진다.
“나 아이언이 문제야. 자기가 나 시작할 때 사 준 저 마루망 나한테 안 맞는
거 같아. 그리고 여자는 우드를 많이 치니까 7번, 3번, 그리고 고구마도 하나
있어야겠고……”
이제 겨우 백순이 깨고 들락날락 하는 주제에 채 탓을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가 여러 번 개비한 드라이버와 아이언 피팅에 이것 저것 좋다는 우드 바꾼
숫자를 생각하며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야, 80대 한 번 만 쳐라. 내가 혼마 4스타로 바꿔줄 테니…..ㅋㅋ”
“정말이지? 정말이야? 나중에 딴 말하기 없기다? 아~싸!”
지가 언제 80대를 치겠나 싶어 객기로 한 마디 했지만 은근히 걱정이 된다.
저 마누라 미친 척하고 80대 치는 날은 내 비상금 완죤히 거덜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상황은 골프적 사고를 강요(?)하는 아내의 압력이 나를
압박한다는 사실이다.
“신사도와 매너, 배려가 어우러지는 골프를 한다는 사람이 왜 그래?
속은 밴댕이 같아가지고 왜 그렇게 이해심이 없어?”
골프 가르쳐 놨더니 사사건건 나의 흐트러진 맨탈과 도덕심, 인내심을 골퍼의
양심 운운하며 공격해 오는데 때로는 대답이 궁해서 “시꺼!” 한 마디 뱉고는
담배 챙겨 들고 휙 연습장으로 도망을 치기도 한다.
골프적 사고와 그 행동양식을 실생활에서도 강요(?) 받고 있기도 하지만
우리 부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골프가 집안 세팅을 바꿔
버렸다. 골프채널에 골프잡지에 퍼팅매트에 굴러다녀 발에 채이는 골프 공에……
남들이 보면 집안에 누구를 골프선수로 키우는 줄 알 거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예문으로 채크를 해 보니,
나…… 골프홀릭 맞는 것 같다. ㅋㅋ
1. 누가 거리 많이 나가고 손에 쫘악~ 붙는다고 칭찬하는 골프클럽을 보면
당장 그 채로 바꾼다.
2. 냉장고 맨 위칸에 있는 달걀을 보면 이 공은 타이틀일까 나이키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3. 골프 스케줄 때문에 다른 핑계를 대고 집안 대소사에 빠진 적이 있다.
4. 배우자는 없어도 골프 없이는 못 살 것만 같다.
5. 저녁에 마누라랑 산책하러 나가는데 골프채 들고 나가 으슥한 곳에서
스윙연습 한 적이 있다.
6. 집안에서 채 휘두르다가 전등이나 천정 등 집안 기물을 훼손한 적이 있다.
7. 길 가다가도 가끔 라이를 살핀다.
8. 해외 출장을 갈 때면 제일 먼저 골프채부터 챙긴다.
9. 야심한 밤에 아파트 놀이터에서 벙커샷 연습을 한 적이 있다.
10. 비올 때 우산으로 스윙 연습을 하기도 한다.
11. 아이들 성적보다 내 골프 스코어에 더 민감하다.
12. 이번 주에 골프 스케줄이 없으면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다.
13. 큰 집 옮기는 거 보다 골프장 회원권에 더 관심이 많다.
14. 그린 피 때문에 애들 학원 과외 한 과목 끊은 적이 있다.
15. 골프가 잘 된 주말은 다음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이 즐겁고 산뜻하다.
16. 일찍 라운딩이 끝나고 아쉬워서 골프장에 9홀 추가해 달라고 떼를 쓴
적이 있다.
17. 라운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잘 되지 않은 샷 때문에 연습장으로
직행하기도 한다.
18. 백화점에 가면 골프 복 매장에 머무는 시간이 제일 많다.
19. 어느새 주변의 친구들은 거의 다 골프 치는 사람들이다. 안 치는 친구와는
자꾸만 멀어진다.
20. 잔디가 파란 공원에라도 가면 어프로치 연습하고 싶어 미치겠고 어디쯤에다
벙커를 파면 좋을 지 연구한다.
여러분은 몇 개나 해당이 되시는지요?
10개 이상이면 골프홀릭, 15개 이상이면 이미 ‘회생불가’입니다. ㅎㅎ
골프홀릭
이버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