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元曉)
원효 대사는 신라 진평왕때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의 압량주 밤골에서 육두품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은 설(薛)이다. 그러나 출가한 이후에는 고선사와 분황사에서 수많은 불경을 저술해서 법명을 "분황"으로도 불렸다.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니“
이 노래는 시경에 나오는 빈풍벌가(豳風伐柯)를 흉내 낸 것이다. 벌가벌가 기칙불원(伐柯伐柯其則不遠) 도끼자루를 베고, 도끼자루를 벰이여, 그 법칙이 멀리 있지 않구나.
원효는 무열왕대(654-661)에 낡은 정치와 무질서한 사회현상을 바라보다가 권좌를 향해 의식의 혁명을 요구하며 알쏭달쏭한 노래를 불렀다.
원효가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를 노래 부르듯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으니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공개 구혼을 한 셈이다. 비록 고도의 함의(含意)가 깔린 비유로 표현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구도(求道)하는 승려의 신분으로서 그런 시도를 했다는 데서 예사롭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했다기보다 처음부터 구중궁궐에 살고 있는 요석공주를 향하여 노래를 불렀다. 요석공주는 출가한 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몸이었다. 원효가 '자루 없는 도끼(沒柯斧)'로 표현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왕실의 요석궁에 요석 공주가 있는데 요석 공주는 당시 과부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화랑 김흠운에게 시집갔으나 김흠운은 655년 ‘양산 전투’에서 백제군에 패하면서 전사합니다. 그래서 과부가 된 요석 공주는 요석 궁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원효는 워낙 박식하고 뛰어난 고승이라 자신이 자주 조언을 구하는 까닭에 인연도 있었고 공주 역시 그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한 번은 공주가 그를 위해 승복과 모란꽃을 선물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무열왕은 궁중의 관리를 시켜 원효를 불러 오라고 명하였다. 그 관리가 명을 받들어 그를 찾으려고 즉시 남산으로부터 문천교(월정교)에서 그를 만나니 짐짓 원효를 다리 아래로 떠밀어 옷을 적시었다. 관리가 원효를 대궐로 인도하여 옷을 갈아입히고 젖은 옷을 말리고자 하였다. 원효는 대궐에서 3일 동안 공주와 함께 지냈다. 요석공주와 만나 하룻밤 잠자리로 설총(薛聰)이 태어난다. 설총은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이두(吏讀)를 집대성⋅정리하였다. 또 설총의 아들 설중엄((薛仲業)은 일본 사신으로 활동하였다.
설총(薛聰)
원효대사는 한국 최고의 학승이며, 민중들을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한 최고의 승려이다. 요석공주는 원효대사를 파계시킨 사연 많은 여인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석공주는 당대 최고의 승려이자 최고 식자로 원효대사의 모든 굴레를 벗겨주었고, 원효대사가 민중 속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도와준 인도자였다. 물론 여인이었기에 오랜 그리움으로 사랑하는 임에 대한 원망과 설움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흔들림 없이 먼발치에서 원효대사를 지켰던 요석공주의 ‘바위 같은 사랑’은 지금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사실 원효는 그 누구보다 계율을 중시한 스님이었다. 그는 『보살계본지법요기』를 지을 정도로 계율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계는 작은 구절에 연연하는 소승의 계가 아니라 그 계 또한 많은 인연에 의탁해서 생겨난 유동적인 대상이었다. 욕망에 집착하면 그 사랑은 죄가 되지만, 고요한 마음으로 성찰하는 욕망은 진리로 가는 해탈문이 된다.
이 이야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것으로 뒷 구절의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는 글에 따라 아석장천주(我斫撑天柱)로 나오기도 한다. "떠받친다"는 의미로 지(支)자 대신에 탱(撑) 자를 쓴 것이다.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