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골라의 내전/230131/박찬석
앙골라는 포르투갈 식민지였다. 500년간 지배를 했다. 그리고 2백 만 명 포르투갈 인이 앙골라에 거주했다. 앙골라의 공식 언어는 포르투갈어, 주민은 75%가 포르투갈 종교 가톨릭교도이다. 종교가 같고 같이 살면 같은 민족이다. 완전히 포르투갈 화 된 해외 영토였다. 백인 포르투갈인과 흑인 앙골라 인 간에 엄연한 차별이 존재했다. 포르투갈 인은 상전이고 앙골라 인은 그 아래이다. 포르투갈 인은 농토의 지주이고, 군대의 장교이고, 정부 고위 공무원, 경찰 간부, 회사 사장이었다. 앙골라인은 소작인, 군대 사병, 정부 하급 공무원과 하급 경찰이었다. 일제 36년 동안 일본인과 조선인 관계와 같다.
포르투갈은 서양에서 가장 먼저 식민지 제국을 건설한 나라이다. 서부 유럽국가들 처럼 잘 살지는 못한다. 포르투갈은 방대한 해외 식민지를 갖고 있었다.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상투메프린스페, 고아, 마카오이다. 브라질도 한때 식민지였다. 식민지에 독립 운동이 일어나면, 포르투갈은 군대를 보내 진압했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는 일찍 식민지를 포기했다. 포르투갈 군인들이 불만이 높아갔다. 스피놀라 장군은 공개적으로 식민지 전쟁을 반대했다.
1970년대는 전 세계 국가 통치 이념이 사회주의가 지배적이었다.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은 월남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반전운동이 극렬하게 일어났다. 전 세계 후진 국가들을 수박이라 했다. 겉은 자본주의이지만, 속은 공산주의란 뜻이다. 포르투갈도 다르지 않았다. 우파가 정권을 잡고 있었지만, 공산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포르투갈 좌파는 국내는 산업화이고 해외 식민지에서 군대 철수와 식민지 독립을 주장했다. 우파는 해외 식민지가 경제 토대이다. 식민지는 오래된 전통이고, 지주와 가톨릭의 중심이다. 1974년 쿠데타가 일어났다. 좌파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었다. 장기 집권을 한 우파 독재자 토마스(Thomas)는 브라질로 달아났다. 1975년 포르투갈 식민지들은 독립 했다.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이다.
앙골라 독립운동은 좌파와 우파가 있었다. 소련과 쿠바는 공산당 MPLA(앙골라인민해뱅전선)을 지원했다. UNITA(앙골라독립연맹전선), FLN(앙골라민족해방전선)등은 우파이다. 앙골라는 1975년 독립과 동시에 내전이 시작되어 2002년까지 계속되었다. 가장 오래한 내전이다. 130만 명이 죽고 국토는 초토화되었다. 아무것도 얻은 것 없는 전쟁이었다. 사람만 죽고, 집은 불타고 농토는 황폐화되었다. 아직도 농촌은 지뢰밭이다. 다리 잘린 야생동물이 많고, 팔 다리를 잃은 어린이가 많다. 지뢰 희생자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결국 공산권의 적극적 지원이 많았던 MPLA 당이 승리했다. 공산당으로 출발한 MPLA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다당제를 거쳐 변신했다. 아직도 MPLA 당이 집권하고 있다.
앙골라의 내전은 미/소 냉전의 대리전 양상이다. 미국은 월남전에 빠져 있었다. 앙골라까지 돌아 볼 겨를이 없었다. 지지한다는 말만 했다.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이 적극 지원했다. 포르투갈 좌파 정권도 앙골라 좌파를 응원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쿠바는 3만 명, 대군을 파병했다. 탱크와 대포를 지원했다. 루마니아는 항공기, 유고슬라비아는 군함, 우크라이나에서도 탱크를 보냈다. 러시아는 군사고문과 군사원조를 했다. 중국도 지원했다. 앙골라 인은 오랜 식민지 모국, 서방국가의 지원을 꺼렸다. 우파는 미국과 남아공이 했지만 소극적이었다.
앙골라의 내전은 미국 포드, 클린턴, 리간, 부시 대통령까지 지속 되었다. 소련이 1989년 붕괴되었다. 우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미국, 남아공, 이스라엘이 지원했다. MPLA당은 정책을 바꾸어 석유와 다이아몬드 광산에 해외자본의 투자를 허용했다. 아직도 공산당 전신 MPLA 당이 집권하고 있다 사회주의 정책은 아니다. 시장경제를 지향하고 있다. 다당제이다.
한반도에서도 항일 독립운동은 크게 2개 주류가 있었다.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이다. 노선은 달랐다. 민족주의 항일운동은 무장 투쟁보다는 교육을 통한 민족 계몽과 근대화였다. 공산주의는 무장 투쟁이었다. 미군정 하에서도 좌파 우파의 갈등은 치열했다. 대구 10.1사건(1946), 제주 4.3사건(1948), 여수순천 사건(1948), 지리산 빨치산(1947-1956), 6.25전쟁이다. 학자들은 한반도 내전을 얄타 회담 탓으로 돌린다. 그런 점도 인정된다. 더 심각한 것은 항일독립운동 당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반도에 미/소가 진주하지 않고, 패전한 일본만 철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앙골라와 달랐을까. 가난한 나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이다. 한반도의 좌파와 우파가 이데올로기를 접고 평화롭게 타협하여 지도자를 뽑았을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앙골라 내전이 앙골라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보편성이 있다.
그림 포르투갈, 아조레스(Ajores), 마데이라(Madeira), 카보베르데(CarboBerde), 상투메프린스페(Sao Tome Principe), 앙골라, 모잠비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