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이종문 (李宗文)
1566년(명종 21) ~ 1638년(인조 16), 본관은 전의(全義)로 자는 학가(學可)이고 호는 낙포(洛浦)로 고려 개국의 공신인 태사(太師) 도(棹)의 17세손으로 대대로 대관(大官)을 지냈다.
고조부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지낸 세분(世芬)이며, 증조는 형조정랑(刑曹正郎)을 역임한 광원(光元)이다. 조부는 예산 현감(禮山縣監)을 지낸 필(佖)이며, 조부 필(佖)에 이르러 하빈(河濱)에 정착했다.
부친은 병절교위(秉節校尉) 경두(慶斗)로, 임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증직(贈職)되었다. 모친은 선교랑(宣敎郎) 윤황(尹滉)의 따님으로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지평 전경창(全慶昌)의 따님으로 옥산 전씨(玉山全氏)이다. 슬하에 딸이 한 명 있었는데, 사위는 판관(判官) 윤좌벽(尹佐辟)이다. 큰아들은 현령(縣令) 지영(之英)이고, 작은 아들은 찰방(察訪) 지화(之華)이다. 두 번째 부인은 이분(李芬)의 따님으로 완산 이씨(完山李氏)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지발(之發), 지시(之蒔)이다.
1588년(선조 21)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여 제용감 직장(直長)·사헌부 감찰(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총관(摠管) 박충후(朴忠後) 등과 함께 팔공산(八公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서면 대장(西面大將)이 되어 활약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창녕(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적을 막아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1604년(선조 37)에 하빈현(河濱縣) 하산리에 하목정(霞鶩亭)을 지어 우거(寓居)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삼가 현감(三嘉縣監)으로 제수되고 1612년(광해군 4) 11월 비안 현감(比安縣監)으로 도임하여 1617년(광해군 9) 12월에 과체(瓜遞)되었다. 1620년(광해군 12)에 군위 현감(軍威縣監)을 지내고 관직에서 물러나, 대구(大丘) 달성(達城)에 하목정(霞鶩亭)을 짓고 노년을 보냈는데, 하목정은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 곳에 머무른 적이 있어 종문의 장자(長子)에게 하목정이라는 정호(亭號)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1638년(인조 16) 6월 병환(病患)으로 졸(卒)하니 향년 73세였다.
사후에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다. 후손들이 종문의 유문을 수습(收拾)하여 문집인 『낙포집(洛浦集)』을 편찬하고 1897년 『전성세고(全城世稿)』에 다른 이들의 문집과 함께 엮어서 간행하였다.
하목정(霞鶩亭)
하목정은 낙포(洛浦) 이종문이 노후에 지은 정자로 고한직을 퇴임한 후 여생을 보냈다. 정호(亭號)는 당나라 시인 왕발의 ‘등왕각서 滕王閣序’ 중에서 따왔다고 한다. 현판(懸板)은 인조의 어필인데, 왜 화목정 현판 글씨를 썼을까? 인조가 능양군 시절 광해군 때의 일로, 동생 능창군이 반역죄의 죽어. 광해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일까. 상주에서 배를 타고 하목정 나루터에 내려 아름다운 풍광이 눈에 들었을 것이다.
인조가 ‘하목정’기억을 떠올린 것은 이종문의 아들 지영(之英)이 벼슬에 올라 경연관일 때 지영을 알아보고 옛 일을 회상하며 물었다. “너의 집 하목정은 풍광이 아름다운 정자인데 왜 부연(附椽)을 달지 않았느냐?” 지영은 “사서인(士庶人)의 사가(私家)에는 달 수 없도록 돼 있습니다.” 인조는 “이 같은 경치가 좋은 정자는 사가(私家)와는 다르니 지붕을 고쳐 다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지영이 “ 부연을 달겠지만 임금이 유숙한 곳이니 출입을 금하고 사용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엎드려 말했다. 인조가 말했다. “그럴 것 까지는 없고 유숙했다는 표적을 남기면 되지 않겠느냐”며 친필로 하목정 편액을 내렸다.
軍威縣監李公墓碣銘
今上之戊寅六月十五日。全義李公以疾考終于家。其二孤以書走京師。請銘于史官權濤。濤與二孤俱同年。又重以潘揚之好。義不敢辭。謹按太師棹佐麗朝開國。墓在全義。全義之爲李籍始此。其後有諱秀英,諱允寬,諱仟,諱子華,諱丘直。承休趾美。世登三事。令望華聞。史不絶書。同盟之世。蓋不能逮焉。高祖諱世芬司僕寺正。曾祖諱允光刑曹正郞。祖諱佖禮山縣監。考諱慶斗贈兵曹參判。娶宣敎郞尹滉女。以嘉靖丙寅生公。諱宗文字學可。以戊子司馬。在場屋幾二十年。秉匀者惜其才。薦補禁火司別坐。歷濟用監直長。陞拜司憲府監察。庚戌例授三嘉縣。丁憂未下車。壬子又出比安。及苽而代。庚申以陽城換軍威。所至有治蹟。公天性周詳溫謹。犯而不較。與人不苟同。亦不立崖岸。居家處事。情義懇到。自然無罅漏。蓋其適用之才。不克大施於世。斂而有裕於家。惜也。其配玉山全氏。持平慶昌之女。有一女判官尹左辟其婿也。長男曰之英縣令。次曰之華察訪。兄弟以同年及第。蹭蹬郡縣。前路未可量也。側室有二男二女。曰之發,之蘤。女婿朴崇賢,金鼎昌。判官有一女。適正字曺時亮。縣令娶參奉金致三女。生三男三女。男長曰璡次曰瑜次曰琥。皆業儒。女長適鄭昌基。次適李志遜,李敏卿。皆士人也。察訪娶及第李覮女。生一男五女。男曰玧。業儒。女長適生員崔衛國。次適李德素。次適曺時遠。次適崔震望。次適洪濈。亦士人。諸孫男女六十餘人。公之蓄德蘊美。以遺其後。蓋有待也。銘曰。恭惟太師。同德茂勳。不替引之。繼繼令聞。及公之世。克紹家聲。弱冠鸎遷。終遭鵬程。蹉跎末路。位不稱才。專而不咸。百里遲回。蓄德裕後。二子簪紳。百年優遊。樂爾朋親。考終全歸。五福之一。縣曰河濱。地維基谷。面陽有原。寔公之藏。詔我後人。勿毁勿傷 <東溪先生文集卷之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