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剩餘翁(命德) 遺詩《잉여옹(명덕) 유시》
잉여옹 휘 명덕(命德․1683~1755)은 운곡공(雲谷公) 휘 세설(世卨)의 장남으로 자는 윤보(潤甫) 호는 잉여옹이다.
공은 5세 때 아버지를 여위고 외조부 임척옥(林滌玉)의 보살핌으로 취학하면서 당대의 문장으로 성장, 흥양에서 서방을 경영했다.
그러나 문집이 모두 소실되어 보첩면주에 적힌 시가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다.
다만 간암공(艮庵公)문집에 俯溪堂謹次族姪剩餘翁(命德)韻(詩), 答富山剩餘翁書 2首, 祭富山剩餘翁文과 영이재(詠而齋)가 쓴 시집의 서문(序文)과
존재공(存齋公)의 잉여집발(剩餘集跋) 그리고 간암공(艮庵公)이 공을 회상해서 지은 글이 장천재(長川齋)에 남아있을 뿐이다. (대동보 2권 p. 395, 지장록 p. 1028)
■ 好手吾天 (호수오천)
正幅完材推好手 정폭이나 완재는 솜씨 좋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殘編破段任吾天 나머지 자잘한 부스러기는 우리가 맡아야지
■ 剩餘翁 詩集序 (잉여옹 시집서)
「竊覵朱夫子嘗以爲詩三百篇後近古者惟淵明一人自魏晉以下作者凡幾家而朱夫子獨許此一人則豈以其人之遺世獨立而神遊於羲葛之前故其出於性情者有以自得於葩正之義也哉余觀剩餘翁之詩余懵於詩者雖不知翁之詩之到頭權衡爲如何而盖翁之天品實栗里境上人若使世復有知音君子安知其不復曰翁之詩則淵明後一人也云噫寂寞豊城半夜斗牛殘虹」
〈해설〉그윽이 보건대 朱夫子가 일찍이 시 3백편을 만든 뒤로 근세까지 오직 연명 1인이라고 하였다. 위나라와 진나라로부터 이하로 작자가 무릇 몇 분이나 있었지만 주부자 혼자만이 이 1인을 허여하였다.
어찌 그 사람의 유세독립(遺世獨立)함이 복희씨나 갈천(葛天)씨가 신선과 놀았을 이전부터 나왔을 것이므로 시전의 올바른 뜻 때문에 스스로 얻음이 있었다고 하겠는가?
내가 시에 어리석지만 잉여옹(剩餘翁)의 시를 보면 옹의 천품이 실지로 율리(栗里)에서 살았던 연명과 같은 분이다.
만약 세상에 다시 지음하는 군자가 있다면 어찌 옹의 시가 곧 연명 뒤의 1인이라고 이르지 아니할 것인가. 아! 적막한 풍성의 밤중에 두우(斗牛)의 쇠잔한 무지개라 할 것이다.
□ 艮庵公(世鈺) 遺作《간암공(세옥) 유작》
간암공 휘 세옥(世鈺․1689~1766)은 남해군수공 휘 동전(東峑)과 금성(錦城) 나씨(羅氏)의 아들로 1689년(己巳․肅宗15년) 서울 주자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백온(伯溫), 호는 도천(陶泉) 또는 간암(艮庵)이다. 그는 청학(靑鶴)이 어머니의 품으로 날아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태어난 주인공이다.
얼굴이 백옥처럼 빛나고 명석했으며, 중용과 결단력까지 지닌 드문 인재였다. 문학․고금비적(秘籍)․복서(卜筮)․의학(醫學)․천문지리에도 정통했다.
공은 좋은 환경에서 수학했다. 아버지와의 인연에 따라 진안현감을 역임한 민승수(閔承洙)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민대헌(閔大憲)과 민우수(閔遇洙) 등도 친구들이다.
그러나 부모를 여윈 후인 1721년(景宗2․辛丑)에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하향했다. 방촌에서 살다 초당으로 이사, 서재를 「艮庵」이라 하고 경서를 읽으며 사약(社約)을 제정, 향촌교화에 힘쓰다 1766년(英祖 42년․丙戌) 77세로 타계했다.
공이 서울에서 살고 있을 때도 그랬지만 하향한 이듬해부터도 재해와 역병이 그치지 않았다. 거의 매년 가뭄이 들고, 해안지방에는 왜구까지 침입해 주민들의 재산을 수탈해 가고, 설상가상으로 도적까지 들끓어 백성들을 괴롭히는 등 살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여기다 이인좌(李麟左)의 난까지 겹쳐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굶어 죽은 사람의 시체가 널렸고,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사태가 계속됐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견문이 넓은 공은 무언가 현실을 극복해보고자 했다.
그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방관서에 요즘으로 보면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 재해의 피해가 너무 심하자 1734년 6조7실의 상소문을 왕에게 직접 올렸다.
영조는 승지에게 "근래 초야의 상소 가운데 위세봉(옥) 것이 나은 편이다" (영조실록 권37 1월 15일 壬辰條)며 관심을 나타내고, 비답을 내린바 있다.
상소문을 올린 이후에도 공은 당국에 일종의 정책건의서를 많이 올렸다. 그 중 平日․山日․金塘․折爾 등 사도설진(四島設鎭) 방략과 1752년(영조 28) 고금도관왕묘수호(古今島關王廟修護)를 위해 균역청에 상서문(上書文)을 제출했다.
그리고 1754년에는 대흥면방약성후상서(大興面坊約成後上書) 등 개인의 이익보다는 위국위민을 위해 남다른 활동을 했다. 공의 이런 활동은 국토의 극변인 장흥을 중앙에 인식하게 했다.
특히 공은 벽촌 장흥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해 출세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유학을 주선한 점이다. 존재공(存齋公)을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에게 주선한 것은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또 다른 친구 도암(陶庵) 이재(李縡)에게 위도원(魏道源)․위상언(魏相彦)․위영찬(魏榮纘)을 지도해 주도록 주선한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공은 후손들을 중앙의 명망 있는 선비의 제자로 입문하게 해서 입신양명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지역주민이나 후손들은 공이 지역과 문중을 위해 헌신한 공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 묘소는 처연하고 해마다 한 번씩 치르는 시제는 초라하고 가엽기까지 하다.
생전에 공의 나라와 지역사회 그리고 후손의 영달을 위한 헌신적 봉사를 아예 대단찮은 것으로 치부한 결과리라. 공은 수성 최씨 사이에 1남 4녀, 밀양박씨와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영조실록의 「위세봉(魏世鳳)」은 세옥(世鈺)의 오기(誤記)임이 분명하다.
(144-041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40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40일차에는 '잉여옹(명덕) 유시' 와 '간암공(세옥)의 유작'이 동시에 밴드에 게재됩니다.
※ 주) 41-46일차에는 간암공의 유작 중 '임계탄'이 계속이어집니다.
[본문내용- 선조님들의 유시 등 계속]/ 무곡
'선집'을 밴드에 게재하다보니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느낍니다. 아울러 기록 작성 못지 않게 보존의 중요성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찍이 현대판 왕조실록 보관장소인 국가기록원(봉화사고의 태백산본 보존)에서도 근무를 했었습니다만, 민원을 담당하면서 일제시대 선대들의 판결문을 찾지 못해(6.25 등으로 소실된 자료도 많음) 독립유공자신청에 애를 먹는 민원인 등 다양한 종류의 민원인을 접하면서 기록의 중요성에 대하여 느낀바가 적지 않았습니다.
상기글에서도 잉여옹 할아버지의 문집이 소실되어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무곡
간암선생의 종보특집편을 편집한 적이 있었는데 간암선생의 타계로 제문이 수십편에 이르는 것을 보고 확실히 사람이란 관속에 들어가봐야 그 사람의 진가가 나타나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당시 장흥사회는 간암공 천하였다고나 할까요"/ 무곡
"잉여",
남은 부스러기,
제가 본 가장 의미 깊은 아호입니다.
야운(이환) 작호가의 평이 기대됩니다
그리고
전문가를 인정하는~~,
"호수오천"도 멋지고 지적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해봅니다./ 벽천
사실 흔치 않은 아호 같습니다만 ᆢ
손창섭의 '잉여인간',
IMF때 '잉여인간 처리대책반' 같은 조직도 있었어요. 위의 '잉여'의 진정한 의미와 그 숨은 뜻이 분명 있을것 같습니다만 ᆢ/ 무곡
잉여옹 호에 뜻풀이는 이종묵 서울대교수가 평한 글로 대신합니다.
https://m.cafe.daum.net/y0ujin1387/ZNyY/69?svc=cafeapp
위백규(魏伯珪)는 이렇게 말하였다. “잉여라고 하는 말은 소용이 없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베는 잉여가 없으면 옷을 지을 수 없고 재목은 잉여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다. 게다가 솜씨 좋은 부인이나 기술자가 잉여를 활용하여 쓰임새 있게 만들어 그 솜씨가 더욱 드러나게 하지 않던가!” 옷을 지을 때도 온전한 베뿐만 아니라 남은 자투리가 있어야 하며 집을 지을 때도 큰 재목뿐만 아니라 자투리 목재가 있어야 하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이렇듯 잉여도 작지만 가치가 있다. 하략/ 야운
야운 위이환 님
역시나 예리하십니다. 야운대부님의 글을 정독하니 제가 공자선생처럼 득도한 기분입니다.
朝聞道夕死可矣/ 벽천
위의 글귀를 보니
사실 우리 각자가 머리 속에서 생각하는 '잉여'라는 의미는 비슷한것 같네요.
다만 '잉여'의 가치를 아는 사람을 만나면 '잉여인간'도 어느정도는 나름 가치를 인정 받고 행복할것 같네요.
그런데 그 반대의 사람을 만나면, 완전 부가적이고 가외적인 '잉여 인간'으로 취급받기 십상일것 같네요
그런데 좀은 다행인것이 손창섭 작가의 '잉여인간'은 나름 긍정적인 것으로 소설에서 평가가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항상 가외적인 여유가 필요한 것 같네요.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단 하루도 제대로 숨쉬고 살수가 없을것 같아요.
실제로 조직과 예산도 평상시의 10%정도는 여유가 있어야, 비상시등을 대비할 수가 있다는 법칙이 있습니다./ 무곡
잉여옹 관련 좋은 자료를 검색해주시고, 또 전문가적인 견해를 곁들여 천년세고선집에 대한 홍보대사를 자임해주고 있는 여러 종친분들에게 게재자가 대신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연재가 끝날때까지 지속적인 관심과 전파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무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