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가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약본이라고 불립니다. 전체 내용이 들어있는 것을 원본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광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야심경 광본 중에서 가장 주요한 내용인 정종분만을 독송하고 있습니다. 260자의 짧은 경입니다.
이 경은 부처님이 증명하시고, 관자재보살이 설법하고, 사리불이 질문하는 형식입니다. 장소는 마가다국 왕사성 또는 라자그라하의 기사굴산 또는 그리드라쿠타 또는 영축산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청중은 대비구와 보살들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대비구는 소승 수행자를 말하고 보살은 대승 수행자를 말합니다. 이 경은 대승 경전이지만 소승을 포함해서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출가 수행자와 재가 수행자를 통틀어 법문 듣는 청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승 사상을 설명하고, 대승 사상의 입장에서 소승 사상을 비판하고, 대승의 위대함을 정리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 가지 내용이 앞으로 배울 경전의 내용입니다.
▪반야의 세 가지 의미
반야는 앞뒤 문맥에 따라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실상(實相) 반야입니다. 모든 존재의 실제 모습을 뜻합니다. 둘째, 관조(觀照) 반야입니다. 그 실제의 모습을 내가 확연히 아는 지혜를 뜻해요. 관조란 확연히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방편(方便) 반야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이 났을 때 어떤 병이든 다 고칠 수 있는 능력을 뜻해요.
부처님을 지혜와 방편이 구족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병이든지 그 병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가 있고, 그 병을 치료하는 방편을 안다는 뜻이에요. 부처님은 반야를 증득했기 때문에 관조 반야와 방편 반야를 모두 다 갖추고 있는 겁니다. 병을 아는 능력과 병을 고치는 능력 둘 다 반야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으로 말하는 반야는 관조반야를 뜻합니다. 실상을 확연히 파악하는 능력을 말해요. 지혜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에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뜻
반야심경의 정식 명칭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입니다. 반야만 해도 완전한 지혜라고 할 수 있는데, 한량없이 크다는 뜻의 마하까지 붙여서 강조한 거예요. 핵심은 마하가 아니라 반야입니다. 마하가 반야를 수식해서 ‘한없이 큰 반야’를 뜻하는 거예요.
‘바라밀다’란 깨달음의 언덕에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이 언덕이 괴로움이라면 저 언덕은 괴로움이 없는 세상을 말합니다. 이 언덕이 속박이라면 저 언덕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을 의미합니다. 무엇으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요? 믿어서도 아니고 지식을 많이 쌓아서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어서도 아니고 지위가 높아져서도 아니에요. 바로 지혜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으로써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거예요. 실제를 알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깨달으면 어둠에서 밝음으로, 무지에서 지혜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입니다. 깨달아서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정리하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란 한량없이 큰 깨달음의 지혜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요긴한 부처님의 말씀이란 뜻입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하여 오온이 공(空)한 것을 깨달으니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는 얘기입니다. 보살은 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닙니다. 중생으로부터 출발해서 아직 부처에 이르지 못한 사람, 부처가 되는 과정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보살은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요? 중생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부처 쪽으로 가려고 해도 항상 중생의 그림자가 보살에게 비쳐요. 그래서 보살이 부처를 이루려면 중생계를 다 구제해서 중생이 없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는 식으로 물들지 않기 위해 세속을 떠나는 게 아니라 중생을 구제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중생에게 물들지 않고 중생을 정화할 때마다 부처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보살은 중생구제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습니다.
지장보살은 지옥 중생을 구제하러 지옥으로 가는 분이고, 관세음보살은 사바세계 중생을 구제하러 사바세계로 가는 분입니다. 그러나 소승불교는 세속에 있으면 오염된다고 봅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고 하듯이 가정생활하고 사업하고 권력 잡으면 욕망에 물들게 되니까 세속을 다 떠나서 물들지 않는 곳에 가서 수행 정진하여 해탈하겠다는 것이 소승불교예요.
반면에 대승불교는 오히려 중생 속으로 들어가서 수행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범부중생은 물드는 사람이고, 현인은 물들지 않기 위해 자신을 중생과 분리하는 사람이고, 보살은 연잎이 흙탕물 속에서도 물들지 않듯이 중생 속에 있으면서도 중생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비유하자면 범부중생은 술꾼 하고 있으면 같이 술꾼이 되는 사람이고, 현인은 술꾼이 안 되려고 술 먹는 친구하고 안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술꾼 하고 같이 살아도 술을 안 먹습니다. 그런데 보살과 같이 살다 보면 그 술꾼이 술을 안 먹게 됩니다. 보살은 거짓말하는 사람하고 같이 살아도 거짓말에 오염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 그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안 하게 되는 거예요. 때가 묻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걸레가 되어서 오히려 때를 닦아내는 사람이 보살입니다.
대승불교의 보살은 세상을 혐오하거나 세상을 떠나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정화합니다. 소승불교에서는 출가수행자인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식차마나라는 출가 5중이 승단을 구성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를 이루겠다고 발심을 해서 수행하면 출가자인지 재가자인지를 논하지 않고, 그가 어디 있는지 어떤 모양인지 따지지 않습니다. 마음과 행실이 어떠한지만 따져서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 식차마나[式叉摩那] 미성년으로 출가한 여자가 성년이 되면 정식 비구니가 되기 위해 2년간 수행을 하는데, 그 기간 동안의 여자를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