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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7일은 한산이씨 부산화수회 추계총회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많은 일가분들이 부산이나 주위에서 오셨다
물론 대종회에서도 백옥헌 휘 개 사육신 유고집을 기증해 주셔서 열심히 필독 중이다 고마울 따름이다
21세기에 청소년을 둔 부모님이나 요즈음 정치권의 논쟁은 바로 국정교과서의 역사책이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였다
다들 아시는 이야기지만 살기에 바쁜 직장인들은 글 읽을 시간이 없어 큰제목만 보고 넘겨버린다
또한 화수회 모임이나 선조 선양 및 기타 모임보다도 가족 부양에 어쩌면 더 바빠서 잊어버리고 사는것이 한두가지가 아니 넘쳐나서 이렇게 글을 게시하는 사람은 어떤 팔자이기에 저렇게 편할까 바라볼 수도 있다
사실 모든 현실은 어쩌면 생각의 차이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라질 수도 있다라고 나름 답을 내려본다
서양과 동양의 가장 큰 이념 논쟁중 서양은 합리론과 경험론이 큰 주류었고 우리나라는 이와 기에 지친 논쟁이 예로 가버렸지만 그래도 유학이라고 말하는 이야기 속에 마지막까지 이와 기를 파악하고 깊이를 끝까지 해부하여 타인이 미쳤다고 할 정도로 선조의 정신을 끝까지 미친 순진한 바보처럼 지킨 유일한 가문이 있다
바로 한산이씨 수은 공파 일명 소호문중이다
한국사 국정 역사교과서와 관련하여 자주 언론에 비추는 인물이 우당 이회영의 후손 새천년 이종걸 원내대표이다
우당 이회영의 선조이신 백사 이항복 <오성>부터 9대에 걸쳐 정승 9명을 배출하고 우당의 기념회 및 각종 행사가 열린다
어떤 수식어로도 우당 이회영 선생의 업적을 말로 다 기록하기에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요즈음 온라인 및 서점에서 문중 성씨로 연안이씨 월사가문 광산김씨 사계가문 대구서씨 약봉가문등 찬하는 기록들은 수없이 올라와 있고 3대 대제학이니 등등 논한다
1909년 본적이 도입되고 모든 국민이 일제의 민적법에 따라 양반이 된 이야기는 수없이 많이 하였다
지금 글을 작하는 저로써도 위 가문이 대단하다 그만큼 명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가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혹시 무슨 파 세보이며 혹시 경주이씨 백사파이신가요 등등 물으면 대답하지 못한다 위 가문이 유명해진되는 가문의 내력도 있겠지만 문중의 인원수도 한 몫하였다
그래도 위 가문의 내력 연수는 불과 400년정도 이다
그 위대로 파로 가면 관직이 몇백년간 없는 경우가 많은 경우들이다
즉 700년이상 전통 중 임진왜란과 인조반정등 나라가 어지려운 시기를 제외하고 관직이 세대를 이어나가고 몇 세대를 제외하고 정 3품이상 벼슬을 고려말에서 조선말까지 이어온 파세보는 한산이문이 유일할 것이다고 나름 성씨 연구결과물을 통하여 논해볼 수 있다
절대로 타성씨 편하이며 한산이씨 자하자찬의 말이 아닌 사실의 기록이다라는 점을 이야기 하고 싶다
몇주전 해운대 동백섬에서는 고운 <해운 > 최치원 다례제가 있었던것으로 안다
당나라에서 장원하고 토왕소격문을 지어 당나라도 구하고 6두품에서 신분상승한 고운의 이야기이다
중국의 주석 시진핑도 이야기하는 양국 화해의 인물이다 그로부터 대략 450년쯤 지나서 세계제일의 강대국 원나라때 가정 휘 곡과 목은 휘 색 부자가 연이어 장원<실제 장원>한것은 나라의 큰 업적인데 우리는 왜 등한시까지는 아니지만 고은 최치원만큼 역사책에 나오지 않을까 ?
몽골이 지금 세계 강대국 이라면 위 두분은 중국 주석이 말한 내용보다 더 많이 이야기 되지 않을까?
서두가 또 길어졌다 그만큼 긴 세월 700년이상 연이은 현달의 종착역에 바로 휘 돈우 긍암선조님이 계셨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돈우(李敦禹)의 당호이자 그의 호는 '선조의 사업을 계승하여 성취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 긍암이다
호에 700년이상의 선조님 가업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
아마 서두에 말한 부산화수회 추계총회에 보이는 목은 휘 색의 유훈 충효입신 시예전가의 말을 연상하게 한다
대산 이상정의 현손으로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이며 고종 때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저서에《긍암집》이 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시능(始能), 호는 긍암(肯庵). 아버지는 이수응(李秀應),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생원 권의도(權義度)의 따님이다.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 소호리(蘇湖里,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가정세제(柯亭世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남다른 재질과 기골이 빼어났는데, 하루는 증숙조(曾叔祖)인 면암(俛庵) 이우(李禹)가 손금을 보고는 “이 아이는 반드시 문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10세 때 『소학(小學)』을 배우고, 12세 때 『대학(大學)』을 배웠으며,
14세 때 『맹자(孟子)』를 통독하는 등 사대부 집안의 교육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갔다.
24세 때 정시 대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여 이듬해 할아버지의 명으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하에 들어갔다.
30세 때 소암(小庵) 이석균(李鉐均)을 배알하러 한양으로 가서 스승을 공경히 삼가면서 교유하였으며 먼지가 일고 어지러운 도성에 거처하면서 유자(儒者)의 고아한 본색을 잃지 않아 지우(知友)들이 모두 공경하고 각별하게 생각하였다.
41세 때 고산서원(高山書院)에서 『대산선생실기(大山先生實紀)』 간행을 감독하였다.
44세 때인 1850년(철종 1) 2월 증광시에 급제하여 5월에 가주서(假注書)가 되었고 8월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48세에는 『주자연보(朱子年譜)』를 가려 뽑았고 『가학집요(家學輯要)』를 편찬하였다. 이듬해에는 류치명을 배알하러 유배지인 지도(智島)를 방문하였다.
50세 때 봄 호계서원(虎溪書院)에서 강회를 베풀었다.
52세 때 류치명에게 올리는 편지에서 『중용(中庸)』 27장의 의심난 부분을 논하기도 하였다.
55세 때
행홍문관부교리지제교겸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에 제수되었다.
75세 때 성재(性齋) 허전(許傳)에게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시장(諡狀)을 청하였으며, 이듬해 1864년(고종 1) 사헌부지평과 사간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63세 때 사복시정에 제수되고 이어서 춘추관을 겸하여 태백산에 들어가 사각(史閣)을 감수하였으며 곧 사헌부집의에 제수되었다. 그 후에도 남학교수(南學敎授), 형조참의,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거쳐
76세 때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이돈우는 후학 양성에도 관심을 가져 73세 때는 고산서당,
74세 때는 고운사(孤雲寺),
75세 때는 임천(臨川) 등 여러 곳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75세 때 용담사(龍潭寺)에서 『정재집(定齋集)』 간행을 지켜보았다.
이듬해 귀담서당(龜潭書堂)에서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강론하였으며 여름에 병이 나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긍암집(肯庵集)』 20권 1책, 부록 2권 1책이 전한다. 문집 중 58세 무렵 쓴 편지 「여강란형서(與姜蘭馨書)」는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성(性) 가운데에서 나온다는 의심을 논한 것이고, 「답윤사선최식(答尹士善最植)」은 태극의 의심난 뜻을 논한 것이다.
59세에 『태극도설(太極圖說)』,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칠동이변(四七同異辨) 등에 관련하여 『호상문답(湖上問答)』을 저술하였다.
기타 『용학이동조변(庸學異同條辨)』, 『예의변답(禮疑辨答)』, 『이기무한량설(理氣無限量說)』, 『이기체용설(理氣體用說)』 등의 저술이 있다.
1934년 『긍암집』이 완성되었다.
묘소 묘소는 본래 의성현(義城縣) 북쪽에 있는 화곡(禾谷) 간좌(艮坐)의 언덕에 있다가 1902년 고암호미(高巖虎尾) 임좌(壬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931년 이돈우의 태실에 만회정(晩晦亭)을 중건하였다.
참고문헌 『긍암집(肯庵集)』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 기록을 추가하면
철종 1년(1850년) > 철종 1년 2월 > 철종 1년 2월 28일
철종 2권, 1년(1850 경술 / 청 도광(道光) 30년) 2월 28일(신묘) 1번째기사 춘당대에 나아가 윤차를 행하다
춘당대에 나아가 윤차(輪次)를 행하여 부(賦)로 유학(幼學) 이돈우(李敦禹)를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장 A면 【영인본】 48책 555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哲宗實錄 > 哲宗實錄 元年(1850年) > 元年 二月 > 哲宗 元年 2月 28日
哲宗 2卷, 1年(1850 庚戌 / 청 도광(道光) 30年) 2月 28日(辛卯) 1번째기사 춘당대에 나아가 윤차를 행하다 ○辛卯/御春塘臺, 行輪次, 賦幼學李敦禹, 直赴殿試。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장 A면 【영인본】 48책 555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고종 6년(1869년) > 고종 6년 5월 > 고종 6년 5월 4일
고종 6권, 6년(1869 기사 / 청 동치(同治) 8년) 5월 4일(을해) 2번째기사 봉화현의 선원각, 실록각을 보수하도록 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의 장계에, ‘봉화현(奉化縣)에 있는 선원각(璿源閣), 실록각(實錄閣)의 뒤쪽 봉우리의 바위가 무너져 내려 서까래가 부러졌습니다.
수리할 때 책들을 옮겼다가 다시 봉안하는 의식을 응당 춘추관(春秋館)과 종친부(宗親府) 관리가 내려와서 거행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한 것에 대해 내린 전교에서, ‘이때는 농사철이므로 사관(史官)과 종친부의 낭청들이 내려간다면 접대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관청의 관원들이 내려가지 않아도 일을 제대로 집행할 수 방도가 있다면 실로 다행한 일일 것이다.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서 제일 편리한 방도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가장 바람직한 것을 따라 품처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전 정(前正) 이돈우(李敦禹)가 바로 그 이웃 고을에 살고 있으니,
종친부 정(宗親府正)의 가설(加設)로 단부(單付)하는 동시에 겸춘추(兼春秋)를 그대로 차임하여 그로 하여금 거행하게 한 다음에 문건을 갖추어 보고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원본】 10책 6권 14장 B면 【영인본】 1책 316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역사(歷史) / *정론-정론(政I)
고종 7년(1870년) > 고종 7년 윤10월 > 고종 7년 윤10월 19일
고종 7권, 7년(1870 경오 / 청 동치(同治) 9년) 윤10월 19일(신사) 2번째기사 수찬 이돈우에게 가자하라고 명하다
수찬(修撰) 이돈우(李敦禹)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원본】 11책 7권 31장 A면 【영인본】 1책 344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고종 14년(1877년) > 고종 14년 3월 > 고종 14년 3월 4일 고종 14권, 14년(1877 정축 / 청 광서(光緖) 3년) 3월 4일(경신) 3번째기사 학문을 부흥시킬 것 등에 관하여 이돈우가 상소하다
부호군(副護軍) 이돈우(李敦禹)가 상소를 올려, 뜻을 세우고 공경스런 자세로 거처하며,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백성을 사랑하며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공평한 마음을 크게 가지며
기강을 세우고 사학(邪學)을 물리치며 학문을 부흥시킬 것 등의 9가지 조항을 진술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원본】 18책 14권 13장 A면 【영인본】 1책 551면 【분류】 *사상-유학(儒學) /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高宗實錄 > 高宗實錄 十四年(1877年) > 十四年 三月 > 高宗 14年 3月 4日
高宗 14卷, 14年(1877 丁丑 / 청 광서(光緖) 3年) 3月 4日(庚申) 3번째기사 학문을 부흥시킬 것 등에 관하여 이돈우가 상소하다 副護軍李敦禹疏, 陳立志、居敬、納諫、愛民、崇儉、恢公、立綱、斥邪、興學九條。 賜批嘉納。 【원본】 18책 14권 13장 A면 【영인본】 1책 551면 【분류】 *사상-유학(儒學) /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고종 19년(1882년) > 고종 19년 8월 > 고종 19년 8월 3일
고종 19권, 19년(1882 임오 / 청 광서(光緖) 8년) 8월 3일(병진) 1번째기사 이돈우를 이조 참판에, 박종현을 동부승지에 임명하다
특별히 이돈우(李敦禹)를 발탁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고, 특별히 박종현(朴宗鉉)을 제수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다.
【원본】 23책 19권 50장 A면 【영인본】 2책 5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高宗實錄 > 高宗實錄 十九年(1882年) > 十九年 八月 > 高宗 19年 8月 3日
高宗 19卷, 19年(1882 壬午 / 청 광서(光緖) 8年) 8月 3日(丙辰) 1번째기사 이돈우를 이조 참판에, 박종현을 동부승지에 임명하다 初三日。 特擢李敦禹爲吏曹參判, 特除朴宗鉉爲承政院同副承旨。 【원본】 23책 19권 50장 A면 【영인본】 2책 5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위에서 서술한 이분이 바로 안동의 당시 가장 큰 위인이며 독립운동의 정신의 초석이신 긍암 휘 돈우선조님 이였으며 안동권씨 성대 휘 세연 에게 영향을 주었다
권세연(權世淵) 본관(本貫) 은 안동(安東)1836(헌종 2)∼1899
의병장. 본관은 안동. 자(字) 조원(祖源), 호(號) 성대(星臺) 경상북도 봉화출신. 참봉을 지냈으며, 안동 병진의 정신적 지주 구실을 하였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안동지역 의병들은 안동관찰부를 점령하고, 유지호(柳止浩)·김흥락(金興洛) 등 참모진은 그를 안동의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그는 격문을 발표하여, 각지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민심을 크게 격려, 고무시켰다. 이 격문에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자에 대한 증오심이 설득력 있게 표현되어 있어, 의병규합에 큰 몫을 하였다.
또한,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6년에는 예안의 이만도(李晩燾), 영양의 조승기(趙承基), 문경의 이강년(李康#연05)·유시연(柳時淵)·김도화(金道和)·김도현(金道鉉) 등 각지의 의병장들과도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1월 28일 안동으로부터 도망쳤던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이 많은 관군을 끌고 공격하여 의병들이 패배하였다.
그는 최후까지 싸워서 한 몸을 바치고자 하였으나, 참모들의 간곡한 권고에 못이겨 피신하였다. 1983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倡義見聞錄(李正奎) 續陰晴史(金允植) 從義錄(李正奎)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石洲遺稿(李相龍, 1973) 義兵抗爭史(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84). 〈朴成壽〉 선세(先世)의 약전(略傳) 증(贈) 영의정(領議政) 휘(諱) 사빈(士彬) 계(系) 안동권씨진작문중안(東權氏眞勺門中) 청암공(靑巖公) 휘(諱) 권동보(權東輔)의 후손 권세연(權世淵 : 32세)
1) 군중(君重) 재화(載華)의 손자이고 진하(鎭夏)의 장자로 헌종(憲宗) 병신(丙申)에 출생하였음.
2) 자는 조원(祖源)이며 호는 성대(星臺)로 유고(遺稿)가 있음.
3) 고종(高宗) 7년 경오(庚午)년인 1870년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음.
4) 관작(官爵)은 고종(高宗) 을미(乙未)에 의병대장(義兵大將), 경인(庚寅)에 참봉(參奉)이었음.
5) 기해(己亥) 졸로 묘소는 원당리(元塘里) 동북(東北) 다악산(多樂山) 절정(絶頂) 정좌(丁坐)에 있음.
6) 배위는 한산이씨(韓山李氏)
감역(監役) 문직(文稷)의 따님 이며 갑오(甲午) 생이고 경신(庚申) 졸로
가계보 > 대산 휘 상정 ~ 휘 완 ~셋째 자 휘 병원의 손자 휘 문직의 3남 1여의 사위 휘 세연 독립운동가입니다
7) 재배위는 상산김씨(商山金氏) 성모(聖模)의 딸이며 갑진(甲辰) 생이고 을해(乙亥) 졸로 묘소는 소천(小川) 황평양수합금내(黃坪兩水合襟內) 강서리(講書里) 뒷산 계좌(癸坐)에 있음.
권상규(權相圭) (1874~1961, 고종11~) 안동인(安東人), 자(字) 치삼(致三), 호(號) 인암(忍庵), 채산(蔡山), 거(居) 봉화(奉化) 유곡(酉谷) 권충재(權沖齋)의 후손으로 독립운동가인 세연(世淵)의 자(子)이다.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며 경학(經學)과 성리학(性里學), 예학(禮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경제사의(經濟私議)란 저술(著述)은 경제와 교육제도 전반에 소신을 밝힌 것으로 공업(工業)을 국가적 시책으로 육성하고 상업을 적성하게 배치하여 물가를 안정토록하고 마을에 학교(學校)를 세워 영재로써 가난한 학생(學生)은 국가에서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하였다.
구폐만록(救弊漫錄), 한거만필(閑居漫筆)?은 현대정치의 정당제도의 모순을 지적하고 공산주의(共産主義)를 비판하는 글로 문집(文集) 24권12책에 전한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문양공 판중추공 해산공 수은공으로 이어진 세보는 마지막까지 고종에게 학문의 부흥을 이야기하셨으며
그 바탕이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몇 주 전 서울 서대문 형무소를 가본적이 있다 프랑스 개선문을 모형한 독립 문을 지날때 꼭 한산이문이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말과 조국을 위해 몸바친 선비의 표상인 대유방가 후손 이다는 자긍심을 꼭 심어 주기를 바라면서 삼가 글을 게시하다
다음 편을 이어가기 위해 광복후 25년후에 제작된 독립운동 책자를 게시합니다 김도화 위인을 주목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저작권은 출판사의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많은 양해를 바라며 삭제요청시 바로 삭제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