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일탈
서영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봄 이었다. 사춘기 소녀에게 절이니 스님이니 거북했겠지만 내색 없이 마주 앉았다. 엄마가 이혼문제를 상의하러 오면서 딸을 데려온 사연이 이상했다. 생계는 나 몰라라 하는 남편의 험담을 하자니 엄마 편에서 고개를 끄덕여 주는 딸의 응원을 바랐던 것 같다.
부부간 신뢰가 무너진 상태여서 이혼 사유는 충분했다. 그러나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딸을 둔 부모더러 가정법원으로 가라 이를 수는 없었다. 20살 터울 오라비가 있었으나 타관에서 직장을 얻어 독립생활을 하고 있었다. 딸의 장래를 위해 이혼은 조금 더 미루어 두자 타일렀다. 부부는 일정한 수입이 없어 정부 지원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었다. 주거비 외에도 고등학생 자녀의 학비, 학용품비, 인터넷 사용료, 소모품비 등 일반인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복지보다 도타운 혜택을 받고 있었다.
온 김에 딸 진학 문제나 이야기해보자며 대화 방향을 바꾸었다. 환경에 짓눌려 대학은 꿈밖의 이야기인 듯 보였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아니지만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자격증임을 강조하였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모녀가 함께 어리둥절 해 하는 눈치여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에 설명을 부언하였다. 머리가 좋아 의과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다고 명리 풀이를 들려주었다. 특히 타고난 손 솜씨가 있어서 훌륭한 외과의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머리가 좋다는 말과 손 솜씨가 좋다는 말에 모녀가 함께 공감하였다. 그 덕에 실오라기 같은 믿음을 나눌 수 있었고 설득에 도움이 되었다.
여의사가 손재주를 발휘하여 잘할 수 있는 전공은 산부인과다. 여군이 늘어나는 추세다. 군의관은 국방부 공무원이다. 국가 공무원 되기가 어렵다고는 하나 의사가 군의관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기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놀라는 것이 인생이다. 의과대학을 목표로 한번 뛰어보자며 독려하였다. 수학은 독학으로도 쫓아가겠는데 어학은 자신이 없다며 머뭇거렸다. 공부방도 따로 없었다. 오빠가 학원비를 지원하기로 하고 엄마가 독서실을 끊기로 하여 일단 입시작전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술주정을 피해 근처에 사는 이모 댁으로 책이며 이부자리를 옮겼다.
처음에는 가능성보다 꿈이 컸다. 몰두를 해보니 진학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서는가 보았다. 1학년 성적이 너무 안 좋아 내신에 자신이 없다 하였다. 그러면 방향 전환을 할 수밖에. 간호학도 적성에 맞는 전공이고 지금 성적이면 그다지 힘들지 않게 진학할 수 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진로를 간호학과로 바꾸었다. 요즘은 응시시스템이 옛날과 달리 복잡하다. 수능을 치루기 전에 희망대학에 서류전형으로 타진을 할 수 있다. 수시전형이다. 고등학교 성적을 기준으로 우열을 가늠하여 상위부터 합격자를 결정한다. 평균성적이 높은 학교 학생들에게는 불리한 전형방식이다. 서영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진학률이 높아 명문에 속하는 사립이었다.
서영이는 간호학과가 있는 대학 3곳에 지원했다. 대학의 수준을 알 길 없고 취업률 등 정보는 정확을 기하기 어려웠다. 코비드19 사태로 학교에 못 간지가 반년이 넘었으니 담임도, 진학지도 교사도 만날 수 없었다. 판단기준은 오로지 인터넷에 의존하였다.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고 면접시험을 치렀다. 면접관 질문에 응답한다는 게 아이들에게 생소한 일이었다. 예상 질문을 간추려 답변 원고를 작성한 후 표정관리, 걸음걸이, 차림새 까지 연습을 했다. 어깨 아래까지 자란 두발을 자르기 어려워했지만 헤어스타일도 단정하게 다듬었다. 합격자 발표날짜가 대학마다 다르다. 늦게 발표되는 대학이 마음에 들면 먼저 합격한 대학을 취소하고 옮길 수 있다. 그렇게 생기는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대학에서는 예비합격자를 10여 명씩 추가로 발표한다. 합격선 이하지만 상위 합격자가 입학을 취소하면 대기 순서에 따라 입학기회가 부여된다.
두 곳에는 일찍이 합격하였다. 처음부터 희망했던 CH 보건대학은 예비 11번으로 아슬아슬하게 통지를 받았다. 작년 기준이라면 대기 11번까지 입학이 되었으니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합격한 D 간호대학도 전통 있는 대학이었으나 서영이는 내켜 하지 않았다. 기대를 걸고 등록 마감일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CH 보건대 최종 합격자 발표를 사흘 앞두고 주말과 공휴일이 겹쳤다. 그동안 10명이 입학을 취소했으니 한 명만 더 입학을 취소하면 서영이가 합격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기다림이 이어졌다. 본인은 물론 바라보는 사람도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탔다.
월요일. 최종 발표일이 되었다. 오후 5시 반을 가리키는 아날로그 벽시계. 시침에서 분침으로 분침에서 초침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드디어 전화기가 울리고 “예”, “예”, “예” 하며 단답형 응대를 몇 차례 하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쉬님 데써예” 눈물범벅이 된 눈가에 미소를 띠었으나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한테 전화해라.” 의과대학을 접고 간호대학에 대기 번호로 입학하게 되었으니 얼싸안고 폴짝거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축하는 해 주어야겠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욕봤다.” “스님이 오래 살아계셔야 제가 힘을 내서 살낀데예.” 기숙사가 꼭 필요한 아이지만 그것도 배정이 보장되지 않은 경쟁이다. 입학금, 등록금은 정부 지원이 되더라도 숙식비와 도서 구입비가 부담이 될 터였다. 모녀는 1년 넘게 지극정성 하루도 빠짐없이 독경과 사경과 오체투지로 열성을 다해 기도하였다. 빈촌에서 토굴을 찾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대학진학은 남의 일이다. 어떻게 인연이 닿아 부처님 가피를 입고 진학의 꿈을 다듬어 성공을 이루어 냈다. 스님이 저지르는 즐거운 일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