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탈환과 가련한 할머니
서한종 용사가 서귀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는 서한욱 형님과 함께 해병 제4기로 8월 30일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입대하였다. 입대 시에는 형제가 제1대대 제2중대에 함께 있었는데 부산에서 형제가 같은 부대에 있는 것은 부자유스럽다고 하여 형은 제2중대로 서한종 수병은 중화기중대로 배치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졌고 승승장구하던 해병 제1대대는 9월21일 방화리에서 LVY(수륙양용차)를 타고 행주나루에 올라섰다. 물론 미해병 제5연대 제3대대와의 합동작전이었다. 다행이 제1대대는 과거 고길훈 부대와 김성은 부대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병사들이 많아서 전투에는 자신이 있었고 사기도 왕성했다. 그러한 제1대대는 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행군하여 수색에 당도했다. 그때 이곳을 방어하던 북한군 1개 대대는 예상외로 신속히 해병대가 들이닥치자 혼비백산하여 산산이 흩어져 도망치기 바빴다. 그들을 따돌리고 제1대대는 서울의 서북각 요충지에 솟아있는 104고지를 공격했다.
이 고지는 수도서울의 서북쪽으로 통하는 관문이므로 적도 중화기를 거치하고 완강하게 버티었다. 아군은 북가좌동 쪽으로 진격을 개시하자 적의 총탄이 빗발치듯이 날아와 이곳저곳에 박혔고 아군들은 하나 둘 희생되어 갔다. 서 수병도 총열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적을 향해 쏘고 또 쏘았다. 이렇게 1시간여의 격전 끝에 아군은 전우의 시체를 넘으며 오후 6시30분에 드디어 104고지를 탈환했다. 첫 번째로 얻은 해병의 빛난 승리였다. 다음은 9월22일 오전 7시20분에 연희고지를 공격하게 되었다. 그 전투는 제1중대와 제2중대를 주공으로 삼아 고지로 접근하는데 적은 대병력으로 120밀리 박격포와 기관총 등 중화기로 맹렬히 저항하자 아군의 진격은 곤경에 처했다. 그리고 104고지에서 연희고지로 가려면 개활지를 통과해야하는데 그곳으로 진격하던 아군 여러 명이 사살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제1대대는 104고지로 철수하였다. 서 수병도 그 탄우 속에서 간신히 살아났다. 이렇게 연희고지는 미해병 제5연대 제2대대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9월25일 점령했다. 그와 더불어 서 수병이 속한 제1대대는 서대문을 거쳐 9월 26일 시가전에 돌입하였고 9월 27일 서울시 일원을 장악했다.
그 후 서 수병은 당시 경무대(청와대)입구에서 보초를 서게 되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바로 북쪽은 돌바위들이 여기저기 솟아난 북악산이 지척에 보이고, 서쪽으로는 인왕산이 감싸 안았다. 그리고 전쟁으로 파괴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고층건물은 여기저기 남아있어 500년 도읍지를 실감케 하고 있었다. 어느덧 하루가 마감되고 빨간 노을이 찬란히 비춰왔다. 전쟁 중에도 한때 이런 고요가 있었다. 바로 이때 효자동 쪽에서 등이 굽고,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남루한 옷차림의 할머니가 어정거리며 접근해왔다. 그 걸음걸이도 무척 무거운 듯해서 보기에도 애처로웠다. 그래서 한참을 주시하고 있는데, 그 할머니가 서 수병에게 다가와 모기소리만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군인양반, 나 배고파 죽겠어, 먹을 거 있으면 좀 나누어 주시오.”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참으로 딱했다. 자녀들은 어디론지 피난을 가버리고 식량은 떨어지고 영락없이 굶어죽을 판이었다. 그 할머니를 본 서 수병은 출전할 때 병석에 누워계신 어머니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 할머니가 꼭 어머니 같은 환각에 사로잡혔다. 서 수병은 주머니를 뒤져 차곡차곡 접어둔 지폐를 꺼내어 할머니 손에 넣어 드렸다. “할머니, 이거라도 가지고 가서 식량을 사서 끼니를 때우십시오. 저도 가진 게 이것뿐이랍니다.” “아이고, 군인양반 고맙기도 해라.” 그것을 받아든 할머니의 손이 파르르 떨리며 어느새 눈물이 주름진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할머니 어서 가보십시오.” 그 할머니는 너무나 감격했는지 “고맙습니다.”를 연신 반복하며 뒤돌아서 효자동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서 수병은 마음속으로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서산에 노을이 지고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도 동북쪽 삼각산 너머에서는 계속 포성이 들려왔다. 아마도 의정부 방면에서 밤에도 전투가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 원산 철수
1950년12월7일 원산에서 해병 제3대대가 철수하자 제1대대는 홀로 남은 최후의 원산 수비대였다. 간헐적이지만 포탄 터지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고, 피난민 대열은 원산으로 계속 밀려들고 있었다. 이런 때 서 수병은 부사수, 탄약수, 포열수와 함께 원산 동해중교 뒷산에 중기관총을 거치하고 발사태세를 갖추고 기다렸다. 살을 에는 칼바람을 맞으며 하룻밤을 보내니 전황은 더욱 악화되어 가는지 12월8일 10시경 갈마반도로 이동을 개시했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원산시 서북각 일원에 중공군과 북한군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해병 제1대대는 갈마반도로 들어오는 길목에 진지를 구축하고 중기관총과 경기관총 등을 거치하고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갈마반도 내 명사십리에 붙어 있는 비행장을 철통같이 경비했다. 그와 동시에 비행장 내에 있는 주요 물자를 해변으로 반출하기 시작했다. 12월9일 LST 2척이 명사십리에 정박하여 아군 철수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피난민들이 마지막 철수선인 LST 근방에 몰려들어 태워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그러다가 이 배에 못타면 죽는다고 한사코 배에 오르려고 발버둥을 쳤다. 결국 트럭과 군수물자를 실지 못하면서도 발 디딜 틈 없이 피난민을 잔뜩 승선시켰다. 그런데도 노인이나 부녀자들은 배에 오르지 못하여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엄동설한에 군중에 밀려 바닷물에 떨어진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남겨진 주민들의 처절한 통곡소리를 뒤로 한 채 LST 898호는 눈물을 머금고 명사십리를 빠져나왔다. 서 수병은 이를 보면서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다. 그러는 사이 함재기 1대가 날아와 육상에 쌓아둔 아군 군수물자에 소이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팡! 팡!’ 하는 굉음과 함께 불꽃과 연기가 솟아올랐다. 서한종 용사는 지금도 그 명사십리에서 울부짖던 주민들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고 한다.
<발췌> 정수현, [한라의 젊은 영웅들], 제주특별자치도재향군인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