號 三 皇, 居 上 世。 호 삼 황 거 상 세 Hao sān huang jǖ shang 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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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복희(伏羲)씨와 신농(神農)씨부터 황제(黃帝)에 이르기까지를 삼황(三皇)이라 하는데 상고시대에 살았다." 이곳에서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임금으로 알려진 삼황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주석]
1. 自자: 스스로, ~에서부터.
2. 羲農희농:"羲"는 복희씨(伏羲氏)를 가리키며 "農"은 신농씨(神農氏)를 가리킨다.
3. 至도:이르다, ~까지.
4. 黃帝황제:중화민족의 공동 조상으로 알려진 인물.
5. 居거:살다.
6. 上世상세:아주 먼 옛날. 상고시대.
염황자손(炎黃子孫)의 유래
우리나라 역사를 말하자면 檀君王儉단군왕검부터 시작하듯 중국의 역사를 언급하면 중국인들은 늘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말한다. 삼황오제란 세 분의 "황(皇)"과 다섯 분의 "제(帝)"를 일컫는 의미이다. "황"과 "제"는 원래 구별해서 사용했지만 나중에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두 가지를 합해 "황제(皇帝)"란 호칭을 만들었고 이후 중국의 통치자를 황제라고 불렀다.
삼황이라고 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복희씨, 신농씨, 황제를 꼽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복희씨, 신농씨, 수인씨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을 언급하기도 한다. 엄밀하게 말해 이분들의 행적을 보면 일개 사람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사명을 띠고 인간들에게 문명을 전해주기 위해 천상에서 내려온 신(神)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삼황 중에서 복희씨는 팔괘(八卦)를 만들었고, 그물을 만들어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준 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포희(包羲)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신농씨는 화덕(火德)으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염제(炎帝)라고도 하는데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외에 음악과 한약(漢藥)을 전해준 신이자 상업을 창시한 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편, 일반적으로 삼황의 하나로 꼽히는 수인(燧人)씨는 복희씨 이전의 원시적인 신으로 인간들에게 불의 사용법을 가르쳐준 신이다. 서양신화의 프로메테우스와 유사한 인물이다.
황제(黃帝)는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제왕이다. 세계 최고의 역사서로 꼽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도 중국의 역사를 황제부터 기술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사마천은 황제를 삼황의 일원이 아닌 오제의 일원으로 보았으며 삼황까지는 神話時代신화시대로 간주해 역사서술에서 제외하고 황제부터 본격적인 역사 기록이 시작된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황제의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이 헌원(軒轅)으로 백성들에게 곡식을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하며 이외에 문자와 음악, 한의학, 도량형 등을 창조했다고 전해진다.
황제에게는 25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황제의 후손 중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이 차례로 제위에 올랐다. 보통 이들 5명을 합해 오제(五帝)라고 하는데 하(夏), 상(商), 주(周) 역대 왕조의 조상들도 모두 황제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황제를 일컬어 "인문초조(人文初祖)"라 하며 화하(華夏)민족의 시조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중국인들은 자신을 황제의 자손 또는 헌원의 후예라고 부른다.
반면, 황제와는 달리 신농씨는 황하 남쪽 지방에 거주하던 부락의 수령이자 수호신이었다. 나중에 신농씨의 세력이 약해지자 주변 부족들이 그의 통치를 따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농씨 세력은 황제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나중에 황제의 부족과 연합해 중원지방을 평정하게 된다.
이처럼 황제의 부족과 염제의 부족이 서로 연맹을 결성해 함께 중원을 통치했기 때문에 때로는 이들을 중화민족의 공동시조로 보기도 한다. 炎黃子孫염황자손이란 용어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쉽게 말해 염제 신농씨와 황제의 자손이란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단군의 후예"라는 말을 쓰는 것처럼 중국 사람들은 자신들을 지칭할 때 염황자손이란 명칭을 널리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