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을 끄고 자려하니/ 휘영청 창문이 밝으오/ 문을 열고 내어다 보니/ 달은 어여쁜 선녀 같이/ 내 뜰 위에 찾아 온다/ 달아 내사랑아/ 나 그대와 함께 이 한밤을/ 얘기하고 싶구나.”
작곡자 나운영은 1945년 모교인 중앙중학교 음악교사로 취직이 됐고, 6월 4일 소프라노 유경손과 명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의 인연은 5년 전으로 되돌아 간다.
서울에서 성악을 공부하던 유경손은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백조합창단 지휘자로 있던 박태현 선생을 찾아가 의논을 드린다. 선생은 일본에 가면 자신의 제자인 나운영을 찾으라고 소개장을 써 주었으나 유경손은 다른 이의 도움으로 일본고등음악학교 본과 성악과에 입학한다.
어릴 적부터 예수를 믿던 그녀는 동경 신주쿠에 한국 사람만 다니는 교회인 신주쿠 쓰노하즈교회를 찾아가 거기서 알토 독창자로 활약한다. 그러던 중 유경손은 크리스마스 축하예배 때 부를 특별찬양을 준비했고 교회반주자는 찬송가 반주 정도 실력이어서 반주를 맡아줄 사람을 찾게 된다.
마침 당시 성가대 지휘자인 김진하 선생이 “우리 학교에 작곡과 학생으로 피아노도 아주 잘 치는 나운영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반주를 부탁해 보겠다”고 한 후, 그를 교회로 데리고 온다. 유경손은 “박태현 선생님이 소개하신 바로 그 사람이구나”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중히 오른손으로 고동색 중절모를 벗어 왼쪽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이며 “제가 나운영입니다”라는 인사말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반주만 편안하게 해주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1943년 둘 다 귀국하게 되고 유경손이 신인음악회에 출연하였는데, 연주가 끝난 후 나운영이 무대 뒤로 찾아와 잘했다고 칭찬하며 앞으로 자기 곡도 많이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1944년 경성후생악단의 단원이 돼 앨토로 활약하던 유경손은 첼로 주자로 새로 입단한 나운영을 다시 만난다.
세 번째 만남을 통해 가까워진 둘은 연습이 끝나면 안국동 유경손의 집까지 걸으며 음악이야기를 나눈다.
결국 나운영은 프로포즈를 하게 되고, 이를 흔쾌히 승낙한 유경손은 개신교 신자였음에도 영세까지 받으며 1945년 6월 4일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나운영이 가곡 ‘달밤(김태오 시)’을 작곡한 것은 1945년 8월 16일. 중앙여자전문학교 부학장인 시인 김태오에게서 시집 ‘초원’을 받아 보고 구상 끝에 완성해 사흘만에 JODK(경성중앙방송국)의 방송을 통해 첫선을 보인다.
독창자는 아내인 유경손이었고, 피아노 반주는 나운영 자신이 했다.
김태오는 홍난파에게 바이올린 레슨까지 받았던 터라 음악을 깊이 이해했던 인물이었다.
이후 나운영과 김태오는 서로 합작하여 제일 처음 쓴 것이 ‘건국의 노래’요, 두 번째 쓴 것이 ‘달밤’이요, 세 번째 쓴 것이‘중앙대 교가’였다.
힘든 세상 달과 얘기하면 속이 좀 편해지려나? <끝>
<한일장신대 음악학부 교수>
출처 : 전북중앙(http://www.jj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