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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하만물,영상.음악.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천하만물
이는 [다시 생각하는 음악교육 제16호](서울:전국음악교과모임, 2002.6.21 발행)에 실린 글의 초고임.
근대 판소리의 양대산맥-이동백과 송만갑 명창(제1편)
좌청룡 우백호! 이동백과 송만갑
글,자료 제공/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명창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목을 잘 타고 나야 한다. 기름진 땅에서 곡식이 잘 자라 듯, 좋은 목을 지녀야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통있는 대가의 소리를 제대로 물려 받아야 한다. 소리의 법도도 모르고 무작정 혼자 연습하는 것은 미로 속에서 같은 곳을 계속 헤매는 것과 같으니 올바른 소릿길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
또한 스승으로 부터 물려 받은 소리를 수없이 되풀이 하여 자신에게 맞는 개성있는 소리를 찾아내야 한다. 이리하여 판소리를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능력(공력)과 원하는 소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득음)을 겸비해야만 이른바 명창으로 행세할 수 있다.
구한말부터 일제 때까지 활동한 판소리 명창 가운데 명성을 날린 명창으로 박기홍, 김채만, 이동백, 송만갑,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 전도성, 유공렬, 이선유, 유성준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기량이 가장 뛰어난 다섯 명을 가리켜 판소리 5명창이라 이른다. 사람의 취향에 따라 각기 달리 5명창을 선정하는데 오늘날에는 대체로 녹음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이동백, 송만갑,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을 판소리 5명창으로 꼽는다.
오늘날 5명창은 판소리 역사상 가장 중요하게 언급된다. 그 이유는 오늘날 판소리 인간문화재들의 스승이 바로 5명창이며 판소리 녹음이 5명창 시대부터 이루어졌고 따라서 오늘날 실제 녹음으로 접할 수 있는 가장 오래 전의 판소리가 5명창의 육성이기 때문이다.
5명창 시대에는 중고제, 동편제, 서편제가 뚜렷하게 공존했기 때문에 판소리 유파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5명창에 대한 이해는 필수라 하겠다. 또한 5명창 이전의 판소리와 5명창 이후 인간문화재들의 판소리가 어떻게 전승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5명창의 판소리에 대한 이해는 필수라 하겠다.
이동백(李東伯, 1866∼1950)은 최상중, 김정근, 김세종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이동백은 녹음이 남아있는 5명창 가운데 가장 즉흥성이 강하고 가장 독창성이 있는 판소리를 했다. 그는 판소리를 주로 독공으로 터득했는데 자기다운 모습을 찾기 위한 나름대로의 수련을 통해서 김정근의 중고제나 김세종의 동편제에 얽매이지 않고 이동백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제를 구축했다.
그는 단가 하나를 가지고도 소리판의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인 편곡을 통해서 다양한 선율과 여러 성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는 고운 목을 지닌데다 통성을 바탕으로 한 호령조 성음을 위주로 판소리를 하기 때문에 시원한 느낌을 준다. 미리 정해 놓은 각본 없이 청중의 분위기를 파악하여 즉흥적으로 판소리를 엮어 나간다. 하늘 찌르듯 질러대는 고음과 땅 꺼지듯 내는 저음을 자유롭게 오르내리며 숨가쁘게 몰아가는 창법은 그의 특기이다.
좌청룡, 우백호! 좌(左) 동백, 우(右) 만갑이라 할 만큼 이동백과 일제 때 쌍벽을 이룬 명창 송만갑!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은 아버지 송우룡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송만갑은 이동백과 당대에 어깨를 겨룬 명창으로서 이들은 가히 근대 판소리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옛 문헌 기록에 의하면 이동백이 젊어서 몇몇 명창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국악학자 이혜구 박사가 일제 때 경성방송국에 출연한 이동백한테 직접 들은 말에 의하면 이동백은 판소리를 거의 자득했다고 한다.
이동백이 아마 몇몇 명창들에게 배우려고 한 적은 있으나 예전 대부분의 명창들은 웬만해선 잘 안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학습이 쉽지가 않았을 것이고 그런 까닭에 이동백은 아마도 독공에 많은 힘을 쏟았을 것이다.
송만갑이 유서깊은 동편제 가문에서 태어나 조부와 부친한테 많은 가르침, 엄청난 소리 유산을 물려받은 것에 비하면 이동백은 물려받은 유산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동백은 잘 타고난 목 하나만 믿고 맨주먹으로 출발하였고 법통있는 소리 재산을 왕창 물려받은 갑부 송만갑, 김창룡과 같은 명창들과 겨루어야 했기에 종종 비교가 되어 비판도 받았다. 목은 좋으나 소리에 격조가 떨어진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1940년 판소리 사전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창극사}를 남긴 정노식은 이동백의 소리를 극찬하면서도 조격이 고아하지 못하여 야비한 데 흐르는 흠이 없지 않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판소리 인간문화재 박동진 명창이 이동백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이동백과 김석창 두 명창이 충청도 해미읍성에 들어가서 소리를 했는데 사례금으로 김석창은 100냥, 이동백은 15냥을 받게 되어 이동백이 화가 나서 그릇을 깨고 돈을 받지 않았다 한다.
당시 일부 귀명창들의 평가와 사례금 구분은 이동백을 낮게 보기도 했고 이동백은 가끔 이런 점에 분개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동백은 송만갑이나 김창룡 만큼 소리 재산을 많이 물려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었던 명창이라고 난 보고 싶다. 그래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깊이와 높이, 넓이를 알 수 없는 큰 판소리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송만갑과 김창룡도 매우 뛰어난 명창이었으나 이들은 가문의 유서깊은 소리 재산을 지키기에도 사실 벅찼다. 김창룡의 경우는 죽을 때까지 가문의 중고제 판소리를 충실히 지키는 쪽으로 자신의 길을 설정하였고 송만갑은 처음엔 가문의 소리를 따르다가 나중엔 이를 떨쳐 버리고 부친과 등을 돌려 버리면서까지, 집에서 쫓겨 나면서까지 그 소리 갑부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조선 제일의 소리 재산을 물려받은 송만갑의 중압감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아마도 그 어깨가 무거운 자리에서는 도저히 부친을 능가하는 소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재산을 다 버려야만 자신만의 소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송만갑은 결국 그 무수한 소리 재산을 거의 다 버리고 밑바닥부터 한, 두푼 모아 결국 나중엔 자기 스스로 거부가 되었다. 송만갑은 그 쾌감을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물려받은 재산에 의한 왕자가 아닌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왕자 자리에 오르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너무 많이 물려받은 자식들이 그 재물 지키느라 앞가림 제대로 못하고 그 재산 관리하다가 자기 볼 일은 정작 못보는 경우와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이동백이 비록 선배 명창들의 가르침과 도움을 많이 받지 못하여, 물려받은 소리 재산이 별로 없이 춥고 배고프게 소리를 터득하다 보니 이따금 소리에 천박스러운 점이 약간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허나 그가 독공을 통해 결국 이루어낸 그 큰 판소리 금자탑에 비하면 그런 흠집은 오히려 눈물이 날 정도로 사실 애정이 가는 부분이다. 그 작은 흠집 때문에 이동백을 비하한다면 그건 너무 잔인하고 냉정한 처사다. 아니 그건 아마도 한강물에 담배불 하나 떨어졌다고 소방서에 걸려온 상식밖의 신고 전화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동백의 성장과정을 보면 그의 판소리에 흠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작은 흠으로 인하여 나머지 큰 부분이 더욱 빛난다
이는 [다시 생각하는 음악교육 제17호](서울:전국음악교과모임, 2002.10.2 발행)에 실린 글의 초고임.
근대 판소리의 양대산맥-이동백과 송만갑 명창(제2편)
장대한 기골, 위풍당당한 기백, 우람한 소리 이동백 명창
글,자료 제공/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이동백(李東伯, 음력 1866.2.3∼양력 1950.6.6)은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13세 무렵부터 이규석, 최상중, 김정근, 김세종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그는 젊어서 고향에서 토굴 안에 살면서 독공에 많은 힘을 쏟았는데 굳이 어둡고 환기가 잘 안되는 굴속에서 소리를 연마한 까닭은 어느 장소보다도 자신의 소리를 가장 정확하고 선명하게 감지하면서 잘된 점과 잘못된 점, 장단점을 파악하고 고쳐 나가며 공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동백뿐 아니라 예전 명창들이 바로 그러한 적절한 음향 구조 때문에 토굴 안에서 소리 독공을 많이 하였다.
이동백은 1891년 무렵부터 공연 활동을 했다. 처음에 경기도로 상경했다가 진주, 창원 등 주로 경상도 지역을 주요 무대로 삼아 약 10년간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후 그의 나이 1902년 무렵에 서울로 상경하여 원각사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이때 그의 소리에 탄복한 고종이 그에게 통정대부(正三品)의 직함을 주었고 순종은 그가 원각사에서 소리할 때면 전화통을 귀에 대고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동백의 판소리는 남녀노소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고 5명창 가운데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입은 명창이었다.
이동백은 많은 녹음을 남겼는데 <새타령>, <죽장망혜>, <백발가>, <사랑가>, <이별가>, <박석티>, <심청이 부친과 이별하는 데>, <범피중류>, <방아타령>, <동남풍 비는 데>, <군사 설움타령>, <물고기들이 토끼를 구해 오겠다는 데>, <제비 후리러 나가는 데>가 명녹음으로 꼽힌다. 특히 새소리를 그대로 묘사해 내는 그의 <새타령>은 신비로움과 경이로움 그 자체로서 그의 대표곡이다.
<죽장망혜>는 이동백이 1928년에 일본 빅타음반회사에서 판소리 심청가 중 <심봉사 눈 뜨는 데>와 함께 유성기음반 앞뒷면에 짝을 이루어 취입했다.
이 음반에 담겨있는 <죽장망혜>(Victor 49036-B)는 빠른 중모리에 우조-평조로 불리며 중고제 특성이 매우 진하게 나타난다. 이 녹음은 흔히 들을 수 있는 <죽장망혜>와 곡조가 많이 다르고 사설도 상당 부분 차이가 있다. 장단 속도도 요즘보다 훨씬 빠르다.
이 단가는 전체적으로 김성옥-김정근-김창룡으로 이어진 중고제 가문의 소리와 매우 유사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장작을 패는 듯한 소리 돌을 깨치는 듯한’김창룡의 창법, 정가풍 발성에다 하늘을 찌르는 상성과 땅이 툭 꺼지게 떨어뜨리는 하성을 자유롭게 누비고 다니는 이동백의 장기가 골고루 결합된 느낌이다.
이 가운데 “노자 젊어 놀아”∼“그 뉘 이를 어쩔꺼나” 부분에서 이동백이 잘 사용하는 특유의 붙임새가 돋보인다. 그리고 “과연 허언이 아니로구나”에서는 기백있는 덜렁제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 물에 유두하야 진금 씻은 후”, “어옹은 어이하야 양의 갗옷을 떨어입고 벗을 줄을 모르느냐”, “두목지를 보이랴고 백락천변을 내려가니” 부분에서는 옛 어전광대의 진중한 고제 성음을 들려준다.
이 <죽장망혜> 녹음은 재판 제작시 ‘강할난풍’이라는 곡명으로도 기록되어 음반화된 바 있다.
이 녹음에서 반주는 당시 이동백의 수행고수로 알려져 있는 지동근이 맡았는데 그가 이동백의 녹음에 고수로 참여한 것은 바로 이 <죽장망혜> 녹음을 비롯한 1928년 일본 빅타음반회사 취입 때뿐이다.
이동백이 1900년대 후반 미국 빅타음반회사에서 취입할 때 반주한 고수는 누구인지 음반엔 ‘북남자’라고만 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동백이 1925년 일본축음기회사에서 취입할 때는 심정순이, 1929년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 취입 때는 이흥원이, 1935년 일본 폴리도르음반회사에서 녹음할 때는 한성준이 반주를 맡았다.
이와 같이 이동백의 음반에 참가한 고수는 충청도 출신의 심정순, 지동근, 한성준과 황해도,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이흥원으로서 모두 중고제 음악문화권 지역의 국악인들이다. 그리고 이동백의 음반에서 주목되는 것은 북이 아닌 장고로도 상당히 많이 녹음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특징은 비단 이동백의 음반뿐 아니라 송만갑, 김창룡 등 동시대 명창들의 녹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같이 장고 반주로 된 판소리 녹음은 1920년대 중반까지 제작된 초창기 기계식 취입방식의 음반일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동백이 단가 <죽장망혜>를 취입한 1928년이면 그가 상당히 많이 중고제에서 동편제 쪽으로, 신제 지향적으로 소리를 바꾼 상황인데 이 곡 만큼은 같은 시기에 취입된 다른 소리에 비해 중고제 특성을 많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이와 같은 시기에 녹음된 <백발가>(Victor 49033-B)에 비해서도 상당히 고제로 소리를 했는데 이런 차이는 <죽장망혜>가 오래된 고제 단가이고 <백발가>는 이동백 녹음 당시 새로 작곡된 단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죽장망혜>는 옛부터 근래까지 흔하게 불리던 단가이다. 그런 만큼 이동백이 녹음으로 남긴 여러 단가 중에서도 특히 이 <죽장망혜>는 다른 것에 비해서 이동백의 제자 가운데 누군가 녹음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 녹음이 있으면 이동백의 소리가 과연 어떻게 전승되었는지 그 비교치가 되기 때문에 매우 궁금해지는 귀중한 자료라 할 것이다. 그래서 옛 녹음자료들을 찾아본 결과 현재로선 이동백의 제자 중에 강장원이 유일하게 <죽장망혜>를 녹음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동백의 소리를 이어받은 제자는 아주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에게 소리를 배운 사람으로는 정응민, 강장원, 정광수, 김석구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김석구는 녹음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정응민, 강장원, 정광수는 모두 옛 창법으로 소리를 했고 스승인 이동백과 일부 유사한 음악 특징을 들려주었다.
이는 [다시 생각하는 음악교육 제18호](서울:전국음악교과모임, 2002.12.23 발행)에 실린 글의 초고임.
근대 판소리의 양대산맥-이동백과 송만갑 명창(제3편)
송만갑 명창과 그의 후예들
글,자료 제공/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송만갑이 길러낸 제자는 셀 수 없이 많다. 그 중에서 수제자를 꼽자면 아마도 장판개, 김정문, 박봉래, 박중근, 송기덕, 김록주(김해), 이화중선, 김연수(여자), 박록주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이 가운데 현재 남아있는 음반자료로 비교 검토해 본다면 남자로는 장판개, 여자로는 김록주가 가장 탁월한 기량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장판개는 어떤 면에선 스승 송만갑을 능가하는 부분이 있을 정도이고(일부 목구성과 창법) 김록주는 여자 송만갑이라고 할 만큼, 송만갑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할 만큼 열악한 음질의 유성기음반으로도 그 절륜한 기예를 확인할 수 있다.
장판개와 함께 산 배설향은 유성기음반을 통해서 비교 판단해 보면 장판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배설향도 남자 못지 않은 매우 기백있는 동편제 소리를 구사하였다. 장판개와 그 아들 장영찬은 구성진 목 성음이 거의 똑같다. 장영찬이 부친 장판개한테 직접 소리를 배우지는 못했으나 녹음을 서로 비교해 보면 닮은 점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김록주는 지금까지 유성기음반 단 한 장(단가 소상팔경과 심청가 중 중타령, 1926년 녹음)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박봉래는 송만갑이 무척 아낀 수제자였다고 하는데 아쉽지만 음반을 남기지 못했고 그의 동생 박봉술(적벽가 인간문화재)의 소리로서 그 음색과 성량, 창법 등을 추측, 가늠해 볼 수가 있다. 박록주, 김여란 등의 증언에 따르면 박봉술 또한 목이 손상되기 이전인 아주 젊어서는 송만갑처럼 목이 잘 나오고 기가 막히게 소리를 잘했다고 한다.
김정문과 박중근은 유성기음반을 통해 판단해 보면 이들 모두 송만갑제 판소리를 하였는데 송만갑보다 더 통속화된 동편제를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김정문이 목구성, 단단한 학습이나 공력으로나 박중근보다는 한수 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기덕이 남긴 유성기음반을 들어보면 그의 부친 송만갑과 음색, 창법이 거의 똑같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송만갑이 송기덕에게 판소리를 직접 지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화중선은 송만갑의 화려한 기교를 똑같이 따라하지 않고 다소 건성이라고 할까, 명창들이 흔히 말하는 갈 데를 다 가지 않고 표현을 좀 수월하고 편안하게 가지고 나가는 편이다. 이화중선은 무수히 많은 유성기음반을 남겼다.
김연수(여자)는 송만갑 말년에 상당히 많은 시간 동안 송만갑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다. 이 김연수는 송만갑이 배출한 경상도 출신의 제자들 중에서 김록주, 박록주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수제자로 꼽힌다.
1939년 1월 3일자 {조선일보} {國唱 宋萬甲氏 宿 로 別世}라는 기사에 실린 朝鮮聲樂硏究會 金容承氏 談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송선생은 우리 성악회 뿐 아니라 우리 구악계의 원로로써 우리들의 의망(倚望)을 하는 바가 태산과 가헛는데 일조에 별세를 하시니 우리 회원으로서 애통한 바는 말할 것도 업고 일반 우리 구악계를 위해서도 여간 손실이 아닙니다 씨의 후진으로서는 박록주(朴綠珠) 김연수(金練守) 김광순(金光淳)과 가튼 명망잇는 가수들이 잇서 선생의 업적을 뒤 이을 만하고...>>
이로 보아 김연수(金練守)가 당시 송만갑의 수제자로 꼽혔음을 알 수 있다. 1939년 2월호 {實話 第二卷 第二號 二月號 通卷第六號}(京城:朝鮮鑛業時代社) 90∼92쪽 {國唱 宋萬甲 一代記}를 보면 이와 비슷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송만갑씨의 공적이 만타고 한다. 그가 가르킨 제자 수효는 千명 이상이며 권번 수효도 진주(晉州), 마산(馬山), 부산(釜山), 동래(東萊), 대구(大邱), 전주(全州), 광주(光州) 등 十여 처이며 박록주(朴綠珠), 김련수(金練洙), 김광순(金光淳)과 가튼 명창들이 그 밋테서 훈련바든 사람들이다.>>
두 문헌의 김연수 한자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데 金練守가 옳은 것이다. 김연수는 1911년 음력 11월 3일 경남 마산 출생으로 지난 40여년간 국악 안하고 평범하게 지내다가 금년 2002년 8월 28일 오전 8시 10분 92세로 별세하였다.
김연수는 몇 해 전에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국악 안한지가 오래돼서 판소리고 가야금이고 모두 다 잊어버렸다고 하였다. 김연수가 송만갑한테 배운 대표적인 단가 <진국명산> 조차도 내두름 몇 마디만 자신없게 더듬더듬 할 정도였다. 국악에 대한 사회의 냉대, 천시 풍조 때문에 그리된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박록주는 경상도 취향의 판소리 한 전형을 보여주는 명창이다. 박록주가 박기홍, 송만갑, 김창환, 정정렬, 유성준, 김정문 등 타지역 사람들에게 판소리를 많이 학습했지만 경상도의 억세고 강한 억양을 기반으로 한 본인 나름의 아니리와 음색, 창법이 상당 부분 가미되어 매우 독특한 소리를 구축했다. 이는 과거 이 경상도 지역에 귀명창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이고 경상도 출신을 소리꾼으로 많이 육성시킨 박기홍, 송만갑과 같은 명창들의 노력과 경험도 그 원동력이 되었다 할 것이다.
박록주는 단가 <대관강산> 녹음에서 박기홍제 동편소리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리고 춘향가 전반부와 흥보가 녹음에는 전형적인 송만갑제의 모습이 잘 담겨있다.
어려서 강도근한테 배운 안숙선은 나중에 박봉술한테 적벽가를 학습하는데 박봉술과 강도근의 창법, 시김새 표현이 유사하여 수월하게 배울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2002.6.30.안숙선 증언) 박봉술과 강도근은 함께 동문수학한 적도 있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송만갑, 김정문, 박록주, 박봉술, 강도근과 같은 동편제 명창들이 소리를 구사하는 방식, 그 공통된 면모는 다음과 같은 김소희 명창의 증언에서 어느 정도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편제의 특징은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대마디 대장단으로 소리를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서편제는 한 마디, 한 장단 안에서 변화가 많은 데 비하여 동편제는 한 마디, 한 장단 안에서는 변화가 별로 없지만 여러 마디와 장단이 모이면 결국 전체적으로는 큰 선율의 변화가 생기게 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소리를 끌고 나가다가 한번 씩 매두새(매듭)를 지어주는데, 이때 매두새 처리를 잘해야 소리가 듣기에 좋습니다. 왜냐하면 동편제는 담담하게 쭉 펴서 소리를 하는 이유가 매두새를 멋있게 지으려고 한 것이니, 이 매두새는 잔기교를 쓰는 다른 어떤 소리들보다도 잘 처리해야 하는 겁니다.>>
이는 필자가 1992년 8월 13일 김소희 명창 자택에서 가진 면담 내용들을 종합하여 얻어낸, 필자가 이해하고 받아들인 결론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다시 생각하는 음악교육 제19호](서울:전국음악교과모임, 2003.3 발행) 110-113쪽에 실린 글의 초고임.
근대 판소리의 양대산맥-이동백과 송만갑 명창(제4편)
이동백 명창의 장기, 잡가 새타령
글,자료 제공/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이동백 명창이 가장 즐겨 불렀던 소리이다. 새소리를 거의 그대로 흉내내면서 사설 사이사이에 어색하지 않게 삽입시켜 불렀다.
자진모리로 불리는데도 빠른 속도로 부른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여유있어 보인다. 마치 이동백이 새들에게 둘러쌓여 새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다. 우조, 계면조가 섞여있고 목 전람회라 할 만큼 다채로운 목놀림, 매우 다양한 성음들을 맛볼 수 있다.
이 잡가 <새타령>은 전통사회에서 전문 소리꾼 외에도 농부들이 노동요로 부르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성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흥얼거렸다. 곡조도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어서 만만해 보이고 부르기 쉬울 것 같아도 이 소리로 대중의 심금을 진하게 울린 명창은 몇 명 되지가 않는다.
그 까닭은 누구나 흔히 아는 이 소리를 두드러지게 잘하려면 무엇보다 새소리 묘사가 특출나야 하고 웬만큼 목이 좋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리로 역대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이동백의 역량은 실로 대단한 것이고 이동백이 당대에 그 누구보다 이 소리의 왕으로 꼽혔다는 건 그가 당대 가장 목이 좋고 그런 성대 묘사 재주가 가장 탁월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통이 크고 웅장하게 소리를 가지고 나가는 점, 고음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저음도 그에 못지 않게 멋있다는 점도 그의 <새타령>을 더욱 빛나게 한다.
그런데 이 소리를 많이 듣다 보면 새소리 묘사보다 오히려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출중한 이동백의 저음에 더 마음이 끌린다. {어사부중 밤 들었다 울고 가는 까마귀}, {건너 앉어 우는 놈 굼벙지게 들리고} 같은 부분을 들어보라. 이런 성음이 이동백의 장기이자 우리나라 성악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새 중에는 봉황새 새 중에는 봉황새}에서는 지금은 사라지고 거의 연주되지 않는 봉장취 가락과 유사한 곡조를 들려준다. 참고로 그 봉장취 녹음으로는 강태홍(가야금).박종기(대금), 유동초(퉁소), 정해시(퉁소).심상건(가야금).김덕준=김덕진(해금).한성준(장고), 지영희(해금).성금연(아쟁), 콜럼비아고악단 등의 음반이 있다.
이동백이 1926년(일축), 1928년(빅타), 1935년(폴리도르)에 이 <새타령>을 녹음하였는데 서로 비교해 보면 사설이 약간씩 다르고 그의 빼어난 즉흥 편곡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또 고박한 쪽으로 소리를 짜나간다. 중고제 소리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이동백의 세가지 <새타령> 중에서도 1935년 녹음이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1928년 녹음은 가장 평이하게 정석대로 부른 것 같고 그 당시 막 도입된 전기식 녹음, 마이크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녹음시 다소 긴장한 듯하다.
반면에 1935년 녹음은 아주 제대로 소리에 몰입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35년 <새타령>은 같은 시기 일본 폴리도르음반회사에서 거대한 프로젝트인 이동백 일행의 창극 심청전과 적벽가를 녹음하면서 덤으로 녹음한 것이다.
그래서 매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창극과 이 <새타령> 음반이 녹음된 듯하고 이 녹음을 들어보면 이동백이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인다. 이 1935년 <새타령>은 판소리 명창들이 종종 얘기하는 소위 앵겼다는 의미, 소리를 참 신명나게 잘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는 녹음이다.
1935년 <새타령> 녹음은 당시 거대한 기획물 창극 전집과 함께 녹음돼서인지 당시로서는 아주 좋은 시설에서 녹음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동백이 소리하는 중간중간에 입을 쩝쩝거리는 미세한 음까지 들릴 정도로 소리가 생생하고 음질이 아주 좋다.
1926년 <새타령>은 이동백이 평소 관중이 지루해 하면 느닷없이 그의 장기인 이 소리를 불렀고 춘향가에 종종 삽입해서 불렀다고 하는 얘기를 그대로 증명해 주고 있는 매우 귀중한 녹음자료이다. 다른 어떤 춘향가에도 <새타령>은 나오지 않는데 오로지 이 1926년 이동백 도창 창극 춘향전 음반에만 <새타령>이 들어있다. 판소리를 자유자재로 짰던 이동백의 즉흥성을 확인할 수 있는 녹음이다.
세가지 <새타령>이 모두 대동소이하나 1926년 <새타령>이 가장 오래전 녹음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장 고풍스럽다. 다만 창극 춘향전에 보너스식으로 <새타령>이 삽입되어 녹음되어서인지 다소 무언가에 쫓기는 부르는 감이 없지 않다.
1926년 이동백 <새타령>이 담겨있는 창극 춘향전은 이동백, 김추월, 신금홍이 일본축음기상회(일축조선소리반)에서 유성기음반 18장에 약 2시간 가량 녹음한 것이다.
흔히 예전 명창들의 판소리를 듣고 부르는 속도가 너무 빠르니 유성기음반 속도가 잘못된 것 아니냐는 의문섞인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 답은 유성기음반 속도는 잘못되지 않았고 같은 대목, 같은 장단을 소리하더라도 일제시대 명창들이 대체로 요즘보다 빠르게 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동백이 요즘보다 훨씬 소리 진행 속도가 빠르고 같은 시대의 명창 정정렬보다 속도감 있게 소리를 가지고 나가는 것은 바로 소리를 꾸미고 화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차이 때문이다.
이동백은 화장을 별로 하지 않기 때문에 거뜬거뜬 진행이 되는 것이고 정정렬은 부족한 목을 표시나지 않도록 만회하기 위해 여러 기교로서 꾸미고 짙은 화장을 하다 보니 구석구석 음 하나하나 일일이 다 신경을 써야 하니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디 예쁜 사람은 특별히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나는 법. 목 자체가 좋은 사람은 붙임새나 복잡한 선율로 소리를 끌고 가지 않아도 빛이 난다. 목이 부족한 사람이 판소리 명창으로 성공하지 못하면 가야금 장식을 곁들여 병창인이 되거나 온갖 화장과 기교로 중무장하고 단점을 보완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명창 대열에 진입하는 경우가 있다.
이동백은 김창룡이나 정정렬 등 다른 5명창 만큼 기교가 화려하지 않다. 소리를 가지고 나갈 때 화장을 거의 하지 않고 양념을 별로 가미하지 않고 본모습, 원액 자체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그 만큼 이동백은 목 자체가 그 누구보다 뛰어난 것이고 그래서 이동백은 이 <새타령>과 같이 단순한 곡조에서 더욱 광채가 난다.
어떠한 최고급 화장품도 본래 자연적으로 곱게 타고난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본연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동백이 화장을 짙게 안하는 까닭은 그 본래의 멋진 성음, 지극히 잘 타고난 자연미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이화중선이 [갈 데를 다 가지 않고] [얼음에 박 밀 듯이] 힘 하나 안들이고 쉽게 쉽게, 마치 엉성하게 무성히 하게 부르는 것 같은, 집요하고 악착같이 기교를 화려하게 구사하지 않는 까닭도 바로 그녀의 목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음색 자체가 미려하니 그 이상의 치장은 별로 많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암튼 이동백의 <새타령>은 당대에 남녀노소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고 김자경 등 서양 클래식 성악을 했던 이들, 외국인들도 그의 <새타령>을 우연히 듣곤 감탄했다는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어느 시인은 그런 이동백을 가리켜 20세기 가장 멋진 한국 남자라고 하기도 했다.
이동백의 <새타령>은 그야말로 만인의 심금을 울린 소리였고 특히 이동백의 뻐꾸기 소리는 그 중에서도 가장 극찬을 받아 그의 입에 뻐꾸기 입을 붙여 놓은 것 같다고까지 얘기들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가 부민관에서 <새타령>을 부르면 새떼가 날아들어 유리창이 깨질 정도였다는 전설같은 얘기도 전해진다.
이동백 잡가 새타령 사설(1935년 녹음, 사설 채록:노재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 관리번호 MISP-0153
Polydor 19289-B(8802BF) 短歌 새타령 李東伯 鼓-韓成俊
(자진모리) 이때 마참 어느 때 녹음방초 좋은 때, 여러 비조가 날아든다 각새 떼새가 들온다. 남풍 조차 떨쳐나 구만장천에 대붕이, 문왕이 나겨시사 기산조양에 봉황이, 무한기우 깊은 회포 울고 남은 공작, 소선적벽시월야 알연쟁명 백학, 유보규인에 색기새 소식 전턴 앵무새, 생증장안에 수고란 어여울 새 채란새, 금자를 뉘가 전허리 가인생사 기럭이, 성성제혈염화지 귀촉도 뒤견이 귀촉도 뒤견이, 요서몽을 놀래 깨야 맥교지상에 꾀꼬리 루리루, 주공동정 돌아드니 관명우지 황새, 비엽심상백성가 왕사당년에 저 제비, 팔월변풍 높이 떠 백리 추호에 보라매, 양류지당 삽담풍 둥둥 떠 징경이, 출어연월타구사 열고 놓던 백항이, 월명추수 찬 모래 한 발 고인 해오리, 어사부중 밤 들었다 울고 가는 까마귀, 금차하민숙가무여 여천비연 소리개, 정위문전 깃들였다 작지강강 까치, 새 중에는 봉황이, 저 무신 새가 우느냐 저 무신 새가 우나, 저 뻐꾸기 울어. 뻑꾹도 아닌 듯 쑥꾹도 아닌 게, 저 뻐꾹새가 울음 운다. 먼 산에 앉어 우난 놈 아시랑허게 들리고, 건너 앉어 우는 놈 굼벙지게 들리는구나. 여러 날 울어 까르르 목이 잔뜩 쉬었네. 고개를 끄떡거리며, 이리로 가며 뻐꾹 저 산 가야 뻐꾹, 뻑뻑꾹 뻐꾹 으흐으으으흐어거려 울음 운다. 저 부두새가 울음 운다 저 부두새가 울음 운다. 초경 이경 삼사 오경 사람의 간장을 녹일라, 이리로 가며 부 저 산 가야 부, 어으이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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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다시 생각하는 음악교육 제20호](서울:전국음악교과모임, 2003.6 발행)에 실린 글의 초고임.
근대 판소리의 양대산맥-이동백과 송만갑 명창(제5편)
송만갑 명창의 판소리 특징
글,자료 제공/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은 선천적으로 잘 타고난 좋은 목, 가문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막대한 소리 유산, 오랜 독공으로 연마한 치밀한 공력으로 인해 음악적 완성도가 경이로울 만큼 완벽에 가깝다. 그래서 송만갑은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에 비유된다.
반면 이동백의 소리는 즉흥성이 강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백 넘치는 고음과 망망대해를 펼쳐 놓은 듯 아주 든든하고 진중하게 내려 놓는 저음이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기세등등한 일품이기에 이백(李白)의 호탕하고 자유자재한 시정(詩情)에 비견된다.
사진을 보면 생기기도 매섭고 단단하게 생긴 송만갑은 마치 쇠망치로 내려치듯 맺고 끊음이 확실 분명하지만 이동백은 소리 매듭이 정확치 않을 때가 있고 끝나는 듯하다가 어영부영 다음 부분으로 이어 가기도 하고 이어질 듯하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싱겁게 끝내 버리기도 한다. 이동백은 아니리 말인 듯 노래인 듯 주섬주섬 섬기며 흐느끼기도 한다.
이는 이동백의 출신지인 충청도 사투리와 같은 느낌이라 할 것이다. 뚝뚝 끊지 않고 흐지부지 말꼬리를 흐리기도 하고 부드럽게 다음 말로 이어지기도 하는 충청도 사투리의 구수함과 같은 것이다. 말과 음악이 전혀 다른 별개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영향 관계는 분명 있다고 하겠다.
어딘가 좀 모자란 듯 꽉 채우지 않은 상태, 조금 더 조금 더를 기대하게 만드는 소리가 이동백의 판소리이다. 건물 이곳저곳을 다 꾸미고 단청까지 화려하게 장식한, 어디 한군데 더 이상 손볼 곳이 없는 그런 소리가 아니라 커다란 기둥과 서까래만 박아가며 나아가는 형국이다. 비우므로 해서 오히려 다음을 더 기대하게 하고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소리, 그래서 마셔도 마셔도 질리지 않는 신선한 샘물 같은 소리가 바로 이동백의 판소리이다.
송만갑은 완벽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어느 정도 수치까지의 완성도가 있고 어느 정도 감지가 되는 화려한 기교를 많이 구사하기 때문에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어느 선까지는 사실 모방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동백은 매우 즉흥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기분에 따라서 소리가 아주 잘 될 수도 있고 기대 이하일 때도 있고 실수가 약간씩 있어 완벽하다고는 볼 수가 없으나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즉흥성이 매우 강하고 기량을 가늠하기가 사실 어렵다.
또 많은 기교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만큼 소리를 높이 확 질렀다가 갑자기 비행기 추락하듯이 뚝 떨어뜨린다든가, 엇박자나 붙임새를 약간 쓴다든가 하는 아주 단순하다 할 정도로 몇가지 기교 뿐이다.
그렇지만 굉장히 감정 조절이 좋아서 소리에 감정이 잘 실린다. 또 미세한 음색의 변화와 조절에는 많은 신경을 쏟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교로 달려들면 속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황당할 정도로 도저히 비슷하게라도 되지가 않는다. 아주 쉬울 것 같은데 모방해 보면 잘 안되는 정체를 알기가 어려운, 그 깊이와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송만갑은 비교적 제자가 많았지만 반면에 이동백은 성격이 괴팍하여 제자들이 그 밑에서 버텨내질 못한 게 아니라 추앙하는 사람도 많고 배우려 하는 이도 많았고 이동백 또한 열심히 제자를 가르치려고 노력했으나 어느 누구도 도저히 그 그림자 조차 따르지 못하여 변변한 제자를 남기지 못했고 그 독특한 소리는 결국 맥이 끊기고 말았다. 물론 공식 제자는 몇 명 있고 이동백 소리제를 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이동백과 유사하게 하지는 않았다.
약간의 실수는 타인에게 호감을 준다는 심리학자의 말에 필자는 전적으로 공감을 한다. 완벽하리 만큼 빈틈없는 명창 송만갑이 난 사실 무섭고 얄밉기까지 할 때가 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는가 싶다. 접신의 경지에서 날라 다니는 송만갑이 물론 경이롭지만 그래도 약간은 엉성한 이동백 쪽에 더 애정이 갈 때가 있다.
송만갑의 경우 경상도에서 많은 각광을 받았고 그 지역에서 제자를 굉장히 많이 배출했는데 그가 공들여 길러낸 여류 명창의 상당수가 경상도 출신이다. 그리고 송만갑은 이 지역에서 상당히 활발하게 공연 활동을 했는데 이런 까닭에 그의 소리 전반에 경상도 사투리와 같은 강한 억양의 창법, 곡조가 들어있다. 소리 도입부를 강한 성음으로서 내두름을 한다든지, 소리 끝매듭을 간결하면서도 쇠망치로 내려치듯 맺는다든지 하는 점들이 바로 그런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지지기반에 대한 답례이자 자연스러운 적응력, 생존 방법인데 그가 서울에서 활동을 많이 하면서는 경드름을 많이 사용했다고 하는 김명환의 증언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같은 경우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하겠다.
1913년에 송만갑 등이 일본축음기상회(NIPPONOPHONE)에서 판소리를 녹음하였고 그후 1915년 이동백, 김창환 등이 미국 빅타음반회사에서 판소리를 취입했다.
미국 빅타음반회사에서 1915년 한국 음악을 취입한 김창환, 이동백, 김봉이, 박팔괘, 엄계월 등은 거의 모두 같은 시기 조선구파배우조합 소속의 국악인들인데 김창환, 이동백은 각각 조선구파배우조합의 서열 1,2순위였다.
그리고 이 단체와는 거의 별개로 독립적인 성격으로 활동한 송만갑은 1913년 음반 취입 당시 자신의 이름을 단 협률사 생활을 했기에 아들 송기덕과 함께 단체 섭외가 아닌 스타 초빙 형태로 발탁되어 일축 녹음에 참여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5명창으로 꼽히는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이 당시 유성기음반을 녹음한 계기는 바로 이와 같이 소속 단체와 당시 활동 분위기의 영향이 컸던 것이라고 하겠다.
이 가운데 송만갑은 1913년 녹음 당시 굉장한 고음과 음량을 과시하지만 차츰 노인이 되면서 그 폭발력이 저하되고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1913년 녹음에 비해 상당히 노쇠한 성음을 들려주는데 이런 기력 저하에 따라 창법과 곡조도 조금씩 바뀌었음을 녹음자료로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송만갑의 녹음에서는 그가 1913년과 1926년에 취입한 기계식 유성기음반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쉰 저음과 상청 두가지 음을 동시에 내는 신비한 창법을 들려주기도 한다. 이런 점을 확인하려면 특히 송만갑이 1930년에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취입한 판소리 춘향가 중 <이별가>를 유심히 들어보라.
또 1913년, 1926년, 1930년, 1934년에 녹음을 남긴 송만갑의 판소리를 시대별로 분류, 그 흐름을 비교해 보면 조금씩 시대에 맞게 다소 통속화된 소리로 변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만갑의 판소리가 같은 동편제 계열인 이선유의 소리와 사뭇 다른데 이선유의 소리가 고(古)동편제라면 송만갑은 그 소리에 현대성을 가미하여 신(新)동편제를 만들어 냈다고 하겠다. 송만갑이 남긴 녹음 가운데 고(古)동편제에 가장 가까운 소리는 역시 송만갑이 맨처음 취입한 1913년 유성기음반들이다.
이선유가 1931년에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취입한 판소리 심청가 중 <곽씨부인 품팔이> 유성기음반(Columbia 40292-B)을 들어보면 {백산 과자에 신선로며} 등에서 일부분 씩씩한 덜렁제로 불러서 곽씨부인이 온갖 힘들고 짜증날 것 같은 고된 일들을 전혀 고단하게 생각하지 않고 즐겁게 일하는 느낌이 나게끔 하는데 이런 덜렁제 부분이 송만갑의 1930년대 녹음하고는 사뭇 다른, 고(古)동편제의 특징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점은 이선유가 1930년에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취입한 판소리 수궁가 중 <토끼 배 가르는 데> 유성기음반(Columbia 40263-B)에도 나타나는데 이 <토끼 배 가르는 데> 녹음에서는 후반부에 약간 덜렁제로 호기있게 불러서 진짜 뱃속에 간이 없다고 자신감 있게 말하는 토끼의 면모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선유가 1931년에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취입한 판소리 수궁가 중 <새타령> 유성기음반(Columbia 40268-A) 초반부에 덜렁제로 불러서 수궁으로부터 세상 밖에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토끼의 가슴 벅찬 기쁨을 표현하는데 이 또한 고(古)동편제의 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송만갑이 가문의 동편제 소리에 서편제 맛을 가미하여 소리를 변질시켰다고 집에서 쫓겨난 일화는 유명하다. 송만갑 외에 최승학도 처음에는 김정근에게 중고제를 배웠다가 나중에 서편제로 바꾼 것으로 짐작된다. 그 외에도 여러 중고제 명창들이 고제 소리를 하다가 나중에 신제 소리를 따랐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옛 소리는 도태되고 자꾸 새로운 소리가 나왔을 것이고 신식 소리를 따르지 않으면 외면당했을 것이다. 송만갑이 신 동편제를 내놓자 옛 동편제 소리가 도태되었고 정정렬이 신 서편제를 내놓자 옛 서편제 소리가 도태된 것처럼 고제 소리를 고수한 명창들의 소리는 전승이 끊어졌다.
그래서 김창룡도 가문의 중고제 소리를 배우다가 나중에 이날치에게 서편제를 배웠다. 그러나 김창룡의 경우는 잠시 이날치에게 서편제를 배운 일이 있지만 그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중고제이다. 김창룡은 서편제가 잘 맞지 않았던지 중고제를 고수했고 결국 그의 소리는 신식 소리에 밀려 전승이 끊어지고 말았다.
송만갑 세대 대부분의 명창들이 앞세대가 이룩한 업적, 몇 대에 걸쳐 대물림되면서 힘이 집약된 선배들의 소리제를 익히고 그 수준을 유지하는 것만도 벅차 사실상 더 이상 진보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안주하거나 혹은 고풍스러운 맛을 고집하여 새로운 시대에 맞는 소리를 개발하지 않았다.
송만갑은 이미 중년에 전통적인 동편제 창법 최고의 경지에 올랐지만 그 단계에서 만족하지 않고 한층 분발하여 초인적인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여 신동편제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그가 자유롭게 넘나든 성악의 영역은 가히 징기스칸의 세계 정복 면적 만큼이나 광활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송만갑이 왈 대명창으로 인정받는 것이며 이는 목을 잘 타고난 것에 자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한 결과였다.
고(古)동편제와 송만갑의 신(新)동편제 차이는 창법과 곡조, 음색 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마이크, 스피커, 녹음기술, 무대시설이 없었던 시절로 갈수록, 옛 소리일수록 인간의 힘만으로 멀리까지 소리가 들리게 해야 했으므로 창법은 우렁차게 지르는 데 많은 역점을 두었지만 현대에 올수록, 송만갑이 말년으로 갈수록 크고 높게 지르는 점은 약해지고 작은 음도 섬세하게 표현하는 쪽으로 발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