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정>
이이의 선견지명에 관한 전설이 담겨있는 정자다. 십만양병설로 임란을 대비하자는 예지로도 모자라, 선조가 몽진할 거까지 예견하고 미리 화석정에 피란방법을 예비했다는 전설이 담겨 있어 민중이 이이에 대한 신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려준다.
물좋고 정자좋은 곳 없다는 말이 있다. 다 좋은 것은 없다는 말인데, 아래로 임진강을 굽어볼 수 있는 천혜경관에 정자가 세워져 이곳은 그야말로 물 좋고 정자좋은 곳이다.
1. 얼개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화석정로 152-72
방문일 : 2021.6.2.
화석정 아래로 U자로 흐르는 임진강이 보인다. 인근 10키로 지점에 있는 이이유적지와 함께 관람하면 좋다.
2. 소개
1) 화석정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의 유학자인 길재(吉再)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는데 사후 그를 추모하여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폐허가 되었다가 율곡 이이의 5대조인 강평공 이명신(康平公 李明晨)이 세종 25년(1443년)에 정자를 세우고 1478년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중수하였다.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명명하였으며, 이이 때에 이르러 다시 중수된 유서깊은 곳이다. 정자 주변에는 느티나무가 울창하고 그 아래 임진강에는 밤낮으로 배들이 오락가락 하였으며 밤에는 고기잡는 등불이 호화찬란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임진강을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고 느티나무 몇 그루만이 그 시절을 증명해주고 있어 쓸쓸하다.
율곡 선생은 평소 정자에 제자들과 함께 기둥과 서까래 등에 들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먹여 두었다고 하는데, 훗날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년)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당시(4월 29일 밤) 억수같은 폭포속에서 강을 건널 때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무사히 배가 강을 건넜다고 전한다.
율곡선생은 국사의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여생을 이 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면서 시와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때 불 타 없어져 80여년간 터만 남아있는 것을 현종(顯宗) 14년(1673)에 율곡선생의 증손 이후지(李厚地) . 이후방(李厚坊)이 다시 세웠으나 한국전쟁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한 것으로 건축양식은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初翼工)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건물의 정면 중앙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 뒷면에는 율곡선생이 8세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八歲賦詩)가 걸려있다.
임진강이 휘돌아 흐르는 언덕에 세워진 화석정의 전망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八歲賦詩>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숲속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이밖에도 서기정, 권남, 정철, 송시열 등 많은 문인들이 여기서 시조를 읊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전재)
2) 화석정 설화
율곡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임진강 나루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화석정이라 하고 기름에 젖은 걸레로 정자 마루를 닦도록 하였다. 그리고 임종 때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 보라고 하며 봉투를 남겼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의 어가가 몽진차 임진 나루에 도착하였을 때, 날이 궂고 밤이 되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이 때 대신 중 한 사람이 율곡이 남긴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씌어 있었다. 화석정에 불이 붙자 나루 근처가 대낮 같이 밝아서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八歲賦詩>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숲속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4. 돌아본 후
파주는 이이의 고장이다. 자운서원과 가묘를 포함한 이이의 유적지 단지에 가면 많은 유적을 볼 수 있다.(이곳은 별도의 장에서 살펴본다.) 화석정에서 10키로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 화석정은 이이의 유적이기도 하지만 임진왜란과 민중의 유적이기도 하다.
화석정은 단순 정자가 아니라 별서원림이라고 한다. 1926년 사진만 봐도 기화요초와 괴석 속의 소쇄원과 같은 정원이었다는데, 단순한 정자만 복원되어 원형을 훼손하였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하지 않은 거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어디에 가서 화석정의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겠는가. 이런 비판도 오히려 이런 복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이제 더 보완하고 고치면 되지 않겠는가.
오히려 문제는 특정 정치인의 현판 글씨다. 관련된 인사가 아닌 정치인의 글씨를 왕조시대처럼 여기서까지 계속해서 봐야 하는 것이 마음 편할 수 없다. 현판 글씨 복원할 생각은 못했나.
요즘은 어떤 대통령도 저런 글씨를 남기지 않아 다행스럽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민중의 희생이 참 컸다. 이런 글씨를 봐야 하는 것도 아직도 계속되는 희생인지도 모른다. 아니 벌써 옛말하게 된 그 시절을 추억하는 계기로 삼기에 좋은 자료라고 긍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자. 물좋고 정자좋은 곳, 풍광좋고 역사적 함의마저 깊은 곳, 거기다 남북을 갈라놓는 임진강을 내려다 보는 현재적 정치적 함의를 더듬어 보자. 다행히 이곳은 강북도 남한의 땅이다.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 오두산전망대 인근 오금리에서부터는 강북은 북한이다.
율곡은 통일을 위하여는 어떤 대비를 하고 있을까. 그가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 지혜를 어떻게 이어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