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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칠사(七祀)
정의
국가에서 사명(司命)·사호(司戶)·사조(司竈)·중류(中霤)·공려(公厲)·국문(國門)·국행(國行) 등 일곱 신을 대상으로 거행한 제사.
개설
칠사의 개념은 『예기(禮記)』 「제법(祭法)」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법」 편에 따르면 천자는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 칠사를 지내야 했는데, 칠사의 대상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사명, 출입을 관장하는 호와 국문, 음식을 주관하는 조, 도로에 통행하는 것을 주관하는 국행, 후사가 없는 천자의 귀신으로서 사형과 형벌을 관장하는 태려, 거처하는 건물을 주관하는 중류였다. 한편 제후는 오사를 지내도록 되어 있었는데, 사명과 국문, 국행, 중류, 그리고 후사가 없는 제후의 귀신인 공려가 그 대상이었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건국 초기부터 칠사를 국가 사전(祀典) 체제에 포함시켰는데, 중국의 제후국임에도 오사(五祀)가 아니라 칠사를 제사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사실 「제법」 편에서 규정하고 있는 신분에 따른 제사 대상의 수가 『예기』의 다른 편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오히려 천자가 오사를 지내도록 규정하는 등 그 신뢰성이 진한시대 주석가들에 의해 오래전부터 의심받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천자국인 명나라에서도 칠사가 아닌 오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이미 당대에 천자와 제후의 신분이 칠사와 오사로 구분된다는 의식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조선에서는 태려(泰厲)가 아닌 공려를 제사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제후국으로서의 위치를 드러냈다.
본래 칠사는 각 계절의 중간 달에 거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조선에서는 사시(四時)에 이루어지는 종묘 제향 때 함께 제향하였다. 봄에는 사명과 사호, 여름에는 사조, 가을에는 국행과 태려, 겨울에는 국문에게 제사를 지냈고, 중류의 경우 6월 말에 별도로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렇듯 계절에 따라 제사 대상을 분류한 것은, 오행 사상에 근거하여 각각의 신이 각 계절과 대응한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중류는 오행 중 토(土)에 해당하는데 토는 절기와 정확히 대응하지 않으므로, 여름의 마지막 토왕일(土旺日)에 제사를 지냈다. 토왕일은 각 계절 말미의 18일로, 토의 기운을 지닌 것으로 여긴 날이다. 사시 제향 외에 납일에 거행되는 제사에서는 7신을 모두 모셨으며, 선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도 7신에 대한 제향이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세종실록』 「오례」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칠사에 대한 의주(儀註)가 따로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중류 제사에 대한 의주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국가 사전 체제에는 대사(大祀)인 종묘대제(宗廟大祭)와 달리 칠사의(七祀儀)가 소사(小祀)로 편입되어 있어 그 제향 대상이 독립적인 것만은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칠사가 종묘 제향의 일부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 신위를 모시는 칠사당 역시 공신당과 함께 종묘 정전 마당에 건립되었다. 칠사당이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국조오례의』에 해당 건물의 그림이 실려 있고, 좌우로 나란히 있는 공신당은 『태조실록』부터 그 명칭이 확인되고 있으므로, 조선초기에 종묘를 건립할 때 함께 세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의 칠사는 고려시대부터 시행되어 온 제사를 계승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종묘 제향 때 칠사를 거행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 태종 연간에 의례를 상정할 때 참고한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에도 칠사의가 거론되고 있다. 조선초기 국가 사전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있었을 법한 칠사에 대한 논의가 『조선왕조실록』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의 제도를 큰 수정 없이 수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었다. 이로 미루어 다른 제사를 수용할 때 명나라의 예제(禮制)를 참고한 것과 달리, 칠사의 경우 고려시대에 수용한 당나라·송나라·원나라의 예제를 그대로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태종 때 소사로 편입된 칠사는 이후 조선시대 내내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다만 『세종실록』 「오례」에는 종묘 체제(褅祭)를 규정하면서 칠사도 함께 지낸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 실행 여부는 알 수 없다. 이후 『국조오례의』를 편찬할 때 협제(祫祭)는 칠사를 함께 지내지 않도록 하였다. 그에 따라 칠사는 사시 제향 및 납일 제향을 할 때, 그리고 중류 별제 때만 지내도록 규정되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잠깐 동안 칠사가 중지된 듯하나, 곧 사헌부(司憲府)의 건의로 정상화되었다. 『태종실록』에는 칠사에 축문(祝文)을 빠뜨린 책임자들을 처벌한 기록이 있어, 국가에서 이를 매우 중요한 제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칠사는 대한제국에 들어서도 계속 거행되다가, 1907년(융희 1) 사전 체제를 개정할 때 폐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칠사의 의식과 절차는 『국조오례의』의 길례 서례와 사시 및 납일의 종묘 제사 의주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먼저 칠사의 신위판(神位板)은 종묘 마당 서쪽에, 남쪽으로 치우쳐 동향으로 설치한다. 자리는 모두 왕골자리(完席)로 한다.
종묘 제향의 종헌관(終獻官)이 올라가면, 찬인(贊人)이 칠사 헌관(獻官)을 인도하여 관세위로 나아가 칠사에 대한 제의를 병행하여 거행한다. 먼저 칠사 헌관이 손을 씻은 뒤 홀을 잡고 준소(樽所)로 나아간다. 술잔을 올리는 헌작(獻爵)을 행하고 나면, 축사(祝史)가 부복하여 축문을 읽는다. 납일 제향의 경우 7신 모두에게 제를 올리기 때문에 각각 헌작한 뒤에 축사가 사명의 신위 앞에 서향으로 꿇어앉아 축문을 읽는다. 이후 종묘 제향에서 변두를 거둘 때 칠사의 변두도 함께 거둔다[徹籩豆]. 그런 다음 축판을 구덩이에 넣어 묻는다. 축문에는 ‘국왕’이라 칭하고, 제향 과정에는 절을 하지 않는다. 헌관은 왕의 친제할 때는 종3품관이, 종묘 제향을 섭행할 때는 5품관이 맡았다.
한편 중류에 대한 제사는 별제로, 6월 토왕일에 따로 거행하기 때문에 별도의 의주로 기록되어 있다. 중류제는 종묘서(宗廟署) 령(令)이 전사관(典祀官)을 맡았다. 의식은 사배(四拜) 이후 제사의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고 다시 사배한 뒤, 세 차례 향을 올리는 삼상향(三上香), 술잔을 올리는 헌작(獻爵), 축문을 읽는 독축(讀祝), 음복(飮福), 사배(四拜), 제기를 물리는 철변두(撤邊豆), 사배의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예가 끝났음을 알리는 예필(禮畢)을 하고 나서는 축판을 감(龕)에 묻는 망예(望瘞)를 끝으로 의식이 모두 끝났다. 중류에 대한 별제는 종묘 제향 때의 칠사와는 의식의 절차가 약간 다르고 축문의 내용 구성 면에도 차이가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칠사는 문·부엌·집·길 등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신들을 모신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왕이 신하와 백성을 위해 지내는 구복적(求福的) 성격의 제사이다. 그러나 제사의 대상에 후손이 없는 제후의 귀신이 포함되어 있으며, 신들의 명칭에 국문, 국행 등 ‘국(國)’ 자가 붙어 있다. 이러한 점은 칠사가 단순히 복을 비는 차원을 넘어, 최고 권력자가 주재하는 국가적인 제사의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한편, 계절에 따라 그와 관련된 신에게 제사하는 점은 오행설(五行說)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인간의 일상을 관리하는 신들에게 계절마다 돌아가며 제사를 지낸 것은 일 년 동안의 평안을 염원하는 의미이자, 동시에 당시 사람들의 순환론적 우주관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예기(禮記)』
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권용란, 「조선시대 七祀에 대한 小考」, 『종교와 문화』12, 2006.
이현진, 「조선시대 七祀의 성격에 대하여」, 『규장각』29, 2006.
포작(匏爵)
정의
하늘에 제사할 때 사용하는 바가지로 만든 술잔.
내용
포작(匏爵)은 하늘에 제사할 때 사용하는 제기(祭器)의 하나이다. 1423년(세종 5) 예조(禮曹)에서 하늘에 제사할 때에 술을 담는 준(尊)과 제물을 담는 그릇이 있는데 기물은 질그릇[瓦]으로 하고 술잔[爵]은 바가지[匏]로 한다고 하였다. 또한 포작, 즉 바가지술잔은 봉상시(奉常寺)로 하여금 씨를 심어서 준비하게 하며 촉대(燭臺)와 전작과 포작 등은 사용한 뒤에는 묻어버린다고 하였다[『세종실록』 5년 10월 27일].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지내는 데에는 송아지[犢] 한 마리, 창벽(蒼壁)·창백(蒼帛) 각 1개, 변(籩) 12개, 두(豆) 12개, 보(簠)·궤(簋) 각 1개, 두(豆) 1개, 등(登) 1개, 비(篚) 1개, 조(俎) 2개, 조(俎) 2개, 향로(香爐) 1개, 향합(香合) 1개, 촉(燭) 2개, 포작(匏爵) 3개, 축판(祝版) 1개의 물품이 소요되었다. 그 가운데 포작은 3개로 매 작마다 받침인 점(坫)이 있고 변두(籩豆)의 남쪽에 둔다.
용례
禮曹啓 謹按杜氏通典 周祀天 尊及薦器以瓦 爵以匏 又用襌勺 匏爵令奉常寺栽種預備 其燭臺襌勺匏爵等 用畢埋之[『세종실록』 5년 10월 27일]
禮曹啓 上帝犢一 壁用蒼 蒼帛一 (중략) 匏爵三(各有坫)[『세조실록』 3년 1월 8일]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정의
천신(天神)인 풍운뇌우지신(風雲雷雨之神)을 주신으로 삼고, 지기(地祇)인 국내산천지신(國內山川之神)과 국내성황지신(國內城隍之神)을 함께 모시고 제사하기 위해 설치한 제단.
개설
국가의 제사 대상 가운데 하늘에 속한 것은 ‘천신’이라 하고, 땅에 속한 것은 ‘지기’라고 한다. 그에 따라 천신에 대한 제사는 ‘사(祀)’, 지기에 올리는 제사는 ‘제(祭)’라고 하여 따로 구분하였다. 풍운뇌우단의 주신인 풍운뇌우지신은 하나의 신이 아니라, 풍사(風師)·우사(雨師)·뇌사(雷師)·운사(雲師) 등의 개별 신을 합하여 지칭한 것이다. 풍운뇌우지신과 함께 제사를 받는 배위(配位)인 국내산천지신은 국내의 산천 전체를 추상화한 하나의 신격을 가리키는데, 이는 국내성황지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풍운뇌우단에서는 이들에 대한 정기제와,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 및 여제(厲祭) 3일 전에 설행되는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 등을 거행하였다. 도성의 남쪽인 숭례문 밖 교외에 위치한 까닭에 남단(南壇)이라고도 불렀으며, 단의 수리는 자문감(紫門監)의 9영선(營繕)에서 담당하였다.
위치 및 용도
풍운뇌우단은 도성의 남쪽인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에 자리 잡고 있었다[『세종실록』 지리지 경도 한성부].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민생의 안정을 빌기 위해 사풍운뇌우의(祀風雲雷雨儀)를 거행하였다. 날이 가물 때에는 기우제인 풍운뇌우단기우의(風雲雷雨壇祈雨儀)를 지내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5년 3월 3일][『세종실록』 오례 길례 의식]. 기우제가 효험이 있어 비가 온 경우에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보사(報祀)를 지냈다[『정조실록』 1년 7월 8일]. 한편, 여러 사정으로 인해 제사를 받을 수 없는 여귀(厲鬼)에게 올리는 제사인 여제를 지낼 때는 제사 3일 전에 성황신에게 여제를 거행할 것을 아뢰는 성황발고제를 지냈는데, 이 역시 풍운뇌우단에서 설행하였다[『태종실록』 16년 8월 5일].
변천 및 현황
고려시대에는 풍운뇌우 가운데 운사를 제외하고 풍사·우사·뇌신(雷神)에만 제사를 지냈다. 제단의 규모는 높이가 3척, 넓이가 23보(步)였으며, 두 개의 담과 제사가 끝난 뒤 폐백과 축판을 태우는 요단(燎壇)을 갖추고 있었다. 풍사는 도성(都城) 동북쪽 영창문(靈昌門) 밖에 있는 제단에서 입춘(立春) 후 축일(丑日)에, 우사와 뇌신은 성안 서남쪽 월산(月山)에 설치한 제단에서 입하(立夏) 후 신일(申日)에 제사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13년(태종 13)에 예조(禮曹)에서 여러 제사에 관한 규정을 상정하였다. 이때 『홍무예제(洪武禮制)』를 근거로, 풍사·우사·뇌신에 운사를 추가하여 풍운뇌우지신이라 통칭하고, 산천과 성황을 같은 제단에서 함께 제사하며 제사의 등급은 중사(中祀)로 하자는 예조의 상정안이 받아들여졌다[『태종실록』 13년 4월 13일]. 그 뒤 천신인 풍운뇌우와 지기인 산천 및 성황을 함께 제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점, 개별 신인 풍·운·뇌·우를 같은 단에서 제사하는 것의 문제점 등이 유신(儒臣)들에 의해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그러나 시왕지제(時王之制)를 바꿀 수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1897년(광무 1)에 이곳에 있던 풍운뇌우의 신위를 원구단(圜丘壇)으로 옮길 때까지 이들의 합사는 계속되었고, 1430년(세종 12)에 정해진 단유(壇壝)의 체제에 관한 규정[『세종실록』 12년 12월 8일]도 조선시대 내내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형태
풍운뇌우단은 신위를 모시고 예찬(禮饌)을 진설하는 제단과, 단을 둘러싼 2개의 담, 제사가 끝난 뒤 신에게 올린 예물인 폐백(幣帛)과 축판(祝板)을 태우는 요단(燎壇)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단의 규모는 넓이가 영조척(營造尺)으로 2장 3척, 높이가 2척 7촌이었으며, 단의 사면에는 오르내릴 수 있는 섬돌이 있었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서례 단유]. 단을 둘러싼 두 개의 담은 길이가 각각 25보(步)였다. 요단은 단의 남쪽인 병지(丙地)에 있었는데, 넓이 8척, 높이 1장, 호방(戶方)이 3척이었다.
신위를 놓는 자리인 신좌(神座)는 모두 제단 위 북쪽에 남향으로 설치하였다. 주신인 풍운뇌우지신의 신좌는 가운데에, 함께 제사를 받는 국내산천지신과 국내성황지신의 신좌는 그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춘관통고(春官通考)』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풍운뇌우단기우의(風雲雷雨壇祈雨儀)
정의
숭례문 밖 남쪽 교외에 설치한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던 의식.
개설
조선시대의 국가 제사는 일정한 주기마다 올리는 정기제와, 신에게 기원하거나 아뢸 일이 있을 때 지내는 기고제(祈告祭)로 구분할 수 있다. 풍운뇌우단기우의는 날이 가물 때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로, 기고제에 속하였다. 제삿날은 점을 쳐서 정했는데, 서둘러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경우에는 점을 치지 않고 정하기도 하였다. 헌관(獻官)은 2품관 중에서 임명하였으며, 풍운뇌우지신(風雲雷雨之神)과 국내산천지신(國內山川之神) 및 국내성황지신(國內城隍之神)을 모신 풍운뇌우단에 나아가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였다. 신에게 올리는 폐백으로는 자의 일종인 조례기척(造禮器尺)을 기준으로 1장 8척 길이의 흰색 저포(苧布)를, 희생(犧牲)으로는 돼지 1마리를 사용하였다. 기우제를 지낸 뒤 비가 온 경우에는 입추가 지난 다음 감사의 의미로 보사(報祀)를 지냈다.
연원 및 변천
1415년(태종 15)에 예조(禮曹)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에서는 풍운뇌우단기우의를 비롯해 여러 제사의 의식을 심사하고 결정하여 왕에게 올렸다[『태종실록』 15년 3월 3일]. 이듬해인 1416년(태종 16)에는 예조에서 기우계목(祈雨啓目)을 올려, 풍운뇌우지신에게 기우제를 지낼 때 ‘운한편(雲漢篇)’을 부르도록 할 것을 건의하자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태종실록』 16년 6월 5일]. 1425년(세종 7)에는 풍운뇌우단에서 실제로 기우제를 거행하였다[『세종실록』 7년 6월 26일][『세종실록』 7년 7월 30일]. 기우제는 비가 내릴 때까지 반복적으로 지냈는데, 그런 까닭에 1704년(숙종 30)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대상과 순서, 제사 장소 등을 확정하여 12제차(祭次)로 정례화하였다. 이후 12제차 중 3차와 8차의 기우제를 풍운뇌우단에서 거행하였다.
절차 및 내용
의식은 의례를 거행하기 전의 준비 과정과, 당일의 의례 절차로 구분된다. 재계(齋戒)와 진설(陳設)이 준비 과정에 해당하고, 당일의 의례는 사배(四拜)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폐(奠幣), 작헌례(酌獻禮), 철변두(徹籩豆), 망료(望燎)의 순서로 진행된다. 보사를 지낼 때는 철변두를 행하기 전에, 헌관이 제사에 사용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받는 음복수조(飮福受胙)를 행한다.
재계는 예조의 요청에 따라 3일 동안 행한다. 2일 동안은 산재(散齋)라 하여 평소처럼 일하면서 음식과 행동을 삼가며 근신하고, 하루 동안은 치재(致齋)라 하여 오직 제사와 관련된 일만 행한다. 가뭄이 심하여 제사를 서둘러 지내야 하는 경우에는 하루 동안 근신하며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청재(淸齋)만 행한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의식 풍운뇌우단 기우의]. 진설은 제사 전날, 일을 맡은 유사(有司)가 제단을 청소하고 제사에 사용할 각종 집기를 설치하며, 제사에 참석할 사람들의 자리와 의례를 행할 자리를 정하는 일을 말한다. 여기에는 제사 당일 축시(丑時) 5각(刻) 전에 신위를 놓아두는 신좌(神座)를 설치하는 일까지 포함된다.
제사에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과 신에게 잔을 올리는 헌관은 축시 1각 전에 각자 정해진 자리로 나아간다. 1각은 약 15분이다. 헌관이 자리에서 4번 절하면 참석자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4번 절하며 신을 맞이하는데, 이를 사배례라고 한다.
전폐는 헌관이 향을 3번 올린 뒤 미리 준비한 폐백을 신위 앞에 놓는 일을 말한다. 폐백은 조례기척을 기준으로 1장 8척 길이의 흰색 저포를 풍운뇌우지신, 국내산천지신, 국내성황지신의 순서로 올린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서례 폐백]. 작헌례는 신에게 술잔을 올리는 일로, 순서는 폐백을 올리는 순서와 같다. 잔을 올린 뒤에는 축문을 읽어 기원의 말을 아뢴다. 철변두는 모신 신을 다시 돌려보내는 송신의 절차이다. 원래는 제기인 ‘변(籩)’과 ‘두(豆)’를 거둔다는 뜻이지만, 실제 의례에서는 변과 두를 조금씩 움직여 놓는다. 그런 다음 헌관이 4번 절하여 송신을 마치면, 제사에 사용한 축판과 폐백을 미리 준비한 요단(燎壇)에서 태우는데 이를 망료라고 한다. 축판을 태우는 나무가 반쯤 타면 헌관이 먼저 나가고, 이후 다른 참석자들도 4번 절하고 퇴장한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
정의
국가에서 바람·구름·우레·비를 각각 관장하는 신들에게 중춘(仲春)인 2월과 중추(仲秋)인 8월에 지낸 제사.
개설
풍운뇌우제는 풍사(風師)인 비렴(飛廉), 운사(雲師)인 풍융(豊隆) 또는 운중군(雲中君), 뇌사(雷師)인 헌원(軒轅), 우사(雨師)인 평예(萍翳)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이들은 농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후를 관장하는 신들로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신앙의 대상이었는데, 당(唐)나라 때 유교 의례를 정비하면서 국가의 사전(祀典) 체제에 수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이들 중 일부가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에 따라 제사의 격을 중사(中祀)로 승격시켰으며, 아울러 이들을 한 제단에 합사하였다. 『세종실록』 「오례」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이들 풍운뇌우에 대한 제사는 왕이 몸소 지내는 제의가 아니었으나, 중종대 이후부터는 왕의 친제가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제후국이어서 원구제(圓丘祭)를 지낼 수 없었던 조선의 사전 체제에서는 풍운뇌우가 제사할 수 있는 가장 격이 높은 천신(天神)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조 때 발행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왕이 친제할 경우에 대한 의주(儀註)가 실리게 되었다.
연원 및 변천
원래 중국에서는 풍·운·뇌·우를 별도의 네 신으로 파악하였으며, 주(周)나라 때는 이들 중 풍백과 우사만을 제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당나라 때는 풍백과 우사에 대한 제사를 소사(小祀)로 규정하였고, 말기에는 뇌사를 제사 대상에 추가하였다. 송(宋)나라 때는 풍백·우사·뇌사에 대한 제사를 중사로 격상하였으며,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서야 『홍무예제』를 통해 운사를 제사 대상에 포함하였다. 『홍무예제』에서는 별도의 제단에서 각각 제사하던 이들 네 신을 한 제단에서 함께 제사하도록 하고, 여기에 산천(山川), 성황(城隍)까지 합사(合祀)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이들에게 제사를 지낸 것은 고려시대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풍백·우사·뇌사에 대한 제사를 각각 시행하였는데, 모두 소사로 규정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 연간에 국가 사전을 정비하면서 명나라의 『홍무예제』를 모방하여 운사를 제사 대상에 추가하였고, 이들 네 신을 합사하고 그 신위를 ‘풍운뇌우지신(風雲雷雨之神)’으로 통칭하였다. 또한 산천과 성황도 이들과 함께 제사하도록 하였으며, 제사의 격을 중사로 높였다.
세종대에 이르러 명나라의 예제가 집대성된 『명집례(明集禮)』가 도입되면서, 『홍무예제』에 따라 정비한 예제 중 일부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풍운뇌우제도 그중 하나였다. 비판의 요지는 네 신을 한 제단에서 합사하는 것이 예제에 부합하지 않으며, 또 천신인 풍운뇌우와 지기(地祇)인 산천·성황을 함께 제사하는 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풍운뇌우제는 시왕지제(時王之制)인 『홍무예제』의 체제에 따라 시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고, 『국조오례의』에도 그대로 수용되었다.
풍운뇌우제는 다른 중사와 달리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에 왕이 친제할 때의 의식과 절차를 규정한 의주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농경 사회인 조선에서는 기우제나 기청제 등 기후와 관련된 제사를 필요로 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왕이 친제를 해야 할 상황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중종대 이후에는 조선의 사전 체제에서 가장 격이 높은 천신인 풍운뇌우에 대한 친제가 종종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정조 연간에 편찬된 『춘관통고』에 ‘친향풍운뇌우산천기우의(親享風雲雷雨山川祈雨儀)’라는 친제 의주가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풍운뢰우제는 대한제국기에 들어와 폐지된다. 하지만 남단에 모셔졌던 풍운뇌우신과 성황신은 환구제 때 종향으로 모셔져 계속 제사를 받았다.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풍운뇌우제는 2월과 8월에 지내는 본 제사와, 기우제 등의 용도로 활용되는 기고제로 나뉜다.
본 제사의 과정은 제사 전의 준비 절차와 실제 예식을 행하는 절차, 송신(送神)의 절차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준비 절차는 규정에 따라 제일(祭日)을 정하는 절차, 5일간의 재계(齋戒), 제사에 쓸 물건들을 차려놓는 진설(陳設), 제사 전날 왕의 향축(香祝) 전달, 초헌관(初獻官)의 희생과 제기에 대한 검사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행례는 크게 전폐(奠幣), 작헌(酌獻), 송신으로 구성된다. 전폐에서는 풍운뇌우신위(風雲雷雨神位)에 세 번 향을 올리고 폐백을 올린 뒤 부복했다가 몸을 일으켜 펴고, 산천성황신위(山川城隍神位)에도 같은 의식을 행한다. 작헌에서는 먼저 초헌관이 풍운뇌우신위에 술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은 뒤 부복했다가 몸을 일으켜 편 다음, 산천성황신위에 같은 의식을 행한다. 초헌례가 끝나면 아헌례와 종헌례가 동일하게 이루어진다. 작헌을 마치면 음복(飮福)을 행하고 제기를 물린다. 이후 송신의 절차에서는 폐백을 태우는 과정을 감시하는 망료(望燎)를 행하고, 초헌관이 제사가 끝났다는 뜻으로 예필(禮畢)을 아뢰고, 신위판을 다시 들이는 납신(納神) 의식을 끝으로 제례의 모든 과정이 마무리된다.
기고제 역시 같은 절차로 진행되지만, 음복을 생략하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보사(報祀)의 경우에는 음복을 한다.
제사를 지내는 제단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높이를 3척, 넓이를 23보로 하여, 풍사·우사·뇌사의 제단을 별도로 세웠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13년(태종 13)에 풍운뇌우단을 세우고, 1430년(세종 12)에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 양유(兩壝)의 형태로 제단의 규모를 조정하였다. 또한 『홍무예제』에 따라 풍·운·뇌·우를 모두 같은 단에 배치하였으며, 산천과 성황의 신위를 합사하였다.
풍운뇌우제는 『국조오례의』에 수록된 여러 제사 중 그 대상이 천신으로는 가장 격이 높았으며, 유일하게 중사에 속하였다. 그 때문에 『세종실록』 「오례」에 초헌관은 정2품, 아헌관(亞獻官)은 정3품, 종헌관(終獻官)은 종3품관으로 규정된 직질(職秩)이, 세조 연간에 원구제가 폐지된 뒤 최고의 천신을 모시는 제사라는 점이 강조되면서 『국조오례의』에서는 초헌관이 정1품, 아헌관은 정3품 당상, 종헌관은 종3품관으로 높아졌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농업을 근간으로 하였으므로 기후와 관련된 신들에 대한 믿음과 숭배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중국의 고대 왕조들은 이러한 신들을 국가의 제사 체제에 편입하여 통치 권력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삼았고, 이는 우리나라의 왕조들에도 그대로 수용되었다. 특히 조선은 유교적 왕도 정치와 민본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농업과 관련된 제사들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제후국인 조선은 세조대 이후 원구제의 시행을 중지하였고, 그에 따라 풍운뇌우가 조선시대에 제사 지낼 수 있는 가장 격이 높은 천신으로 중시되었다. 16세기에 왕의 친제가 이루어진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한편 풍운뇌우제는 중앙에서 거행하는 제향이기 때문에 지방에 별도의 제향이 없었다. 다만 제주도에서는 오래전부터 풍운뇌우에 대한 제향이 있었는데 1697년(숙종 23)에 조정에서 그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공식적으로 허락하였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이욱, 「근대국가의 모색과 국가의례의 변화-1894~1908년 국가제사의 변화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95,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