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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문헌
구원정문집(九元亭文集)
조선 후기의 유학자 이형천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유학자 이형천(李亨天)의 시문집. 2권 1책. 목판본. 1909년 그의 5대손인 대현(岱鉉)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만규(李晩煃)의 서문과 권말에 이창연(李昌淵)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사(辭) 1편, 시 8편, 잡저 1편, 권2는 부록으로 만사 7수, 제문 4편, 가장·행략(行略)·묘표·묘지명·묘갈명·삼효당봉안문(三孝堂奉安文)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사는 장수찰방(長水察訪)에 제수되었을 때 이를 거절하며 지은 것으로, 안빈낙도하여 진세(塵世)에 불의와의 타협을 거절하고 선비의 도를 고수하려는 뜻을 밝혔다.
잡저인 〈백행집 百行集〉은 그의 할아버지 휴운(休運)이 쓴 〈백원록 百源錄〉과 아버지 직언(直言)이 쓴 〈충효록〉에 뒤이어 지은 것으로, 백행에 대한 조목을 도(圖)로 표시하고 효행에 대한 효경전을 비롯하여 도잠(陶潛)에 대한 효행을 칭찬한 〈도연명효전찬 陶淵明孝傳贊〉과 백행에 대한 조목을 나열하고 그 설명을 첨가한 것이다.
백행의 조목으로는 정일(精一)·함유일덕(咸有一德) 등 심성에 관한 것, 불사이군(不事二君)·불경이부(不更二夫) 등 충렬에 관한 것, 삼강(三綱)·삼친(三親) 등 윤강(倫綱)에 관한 것, 오형(五刑)·오불효(五不孝) 등 효에 관한 것 등으로 대부분 효를 백행의 기본으로 규정한 것이 특색이다.
또한, 시는 분량이 많지 않으나, 기상이 고결하여 그의 단정한 몸가짐과 처세관을 엿볼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연세대학교·성균관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원집(九畹集)
조선 후기의 문신 이춘원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 이춘원(李春元)의 시문집. 4권, 부록 합 2책. 목활자본. 1656년(효종 7) 그의 제자들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경여(李敬輿)·정두경(鄭斗卿)의 서문이 있다.
권1∼3에 시 417수, 권4에 잡저 7편과 부록으로 행장·신도비명·치제문(致祭文)·만사·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고, 보유편으로 〈팔음가 八音歌〉 등 시 8수가 추록되어 있다. 이 책은 시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의 시는 채색을 드날려 장식하지도 않는데, 대상을 마음 속에 얻어 천기(天機)가 스스로 움직여 심중의 깊은 뜻이 시 속에 저절로 나타나 향취를 발하고 있다고 서문에 소개되어 있다.
표현기교나 문장의 멋보다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뜻이나 기개를 중시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시는 많은 시인·묵객에 의하여 오래도록 회자되었다고 한다. 특히 장편시 〈팔음가〉는 더욱 유명하였다. 규장각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은유고(龜隱遺稿)
조선 말기의 학자 변진탁의 시문집
조선 말기의 학자 변진탁(邊振鐸)의 시문집. 2권 1책. 석인본. 1968년 현손 석균(石均)이 편집, 간행하였으며, 이동식(李東軾)의 서문과 후손 호종(鎬宗)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만사 121수, 애사 2편, 잡저 2편, 잠 1편, 권2에 서(序) 3편, 기 4편, 지(識) 3편, 상량문 1편, 제문 25편, 부록으로 유사·행장·묘갈명·묘지명 각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의 〈관해백운 觀海百韻〉은 바다를 구경하면서 1백개의 운을 붙여 노정과 경관을 읊은 것으로, 거센 파도와 험한 물결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낚시터의 경관과 태공망(太公望)·엄광(嚴光) 등이 때를 기다렸다는 고사를 읊으면서, 공명에는 천운이 있음을 서술하였다.
잡저의 〈제정초설 除庭草說〉은 뜰에 잡초를 뽑아버리고 지란(芝蘭)을 심어 도연명(陶淵明)의 일취(逸趣)를 본받겠다는 것으로, 풀은 사욕에, 지란은 도심(道心)에 비유한 은사(隱士)의 충심을 엿볼 수 있다. 계명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음유집(龜陰遺集)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양시진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양시진(楊時晉)의 시문집. 1권 1책. 석인본. ≪어은집 漁隱集≫과 합편되어 있다. 1911년 그의 후손인 석장(錫漳)·석구(錫球)·석윤(錫胤)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아들 여매(汝梅)의 서문이 있다.
시 98수와 부록의 봉사연경시별장(奉使燕京時別章)에 시 18수, 조천록(朝天錄)·을묘일기(乙卯日記)·하담록(荷潭錄)·후손상언(後孫上言)·묘갈명 각 1편, 만사·실기후서(實記後序)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차윤오음운 次尹梧陰韻〉은 14세 때 칭찬을 받은 시로 문사의 심오한 표현은 노사숙유(老師宿儒)를 능가할 만하다. 〈영평도중사호석 永平途中射虎石〉은 영평의 밤길에 바위를 호랑이로 오판하고 활을 쏘았더니 활촉이 돌 깊숙이 꼽힘에 정신일도금석가투(精神一到金石可透)의 소감을 술회했다.
〈봉사연경시별장〉은 그가 성절사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갈 때 김상헌(金尙憲)·이귀(李貴)·장유(張維) 등 18인의 이별시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음집(龜陰集)
조선 후기의 학자인 김광수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인 김광수(金光壽)의 시문집. 4권 2책. 목활자본.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경위가 자세하지 않다. 이 책은 권1∼3에는 시 222수, 서(書) 17편, 잡저 3편, 제문 21편, 권4에는 가장(家狀)으로 행록(行錄) 1편, 행략(行略) 1편, 끝에 부록으로 만사 9수, 제문 5편, 유사 1편, 묘지명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주로 서정시가 많은데, 〈춘한연일희견화개 春寒連日喜見花開〉에서는 추운 봄날씨가 계속되는데도 그 아픔을 무릅쓰고 피어나는 꽃을 자기의 생애와 비유하여 잘 묘사하고 있다.
또한, 〈술회사십운 述懷四十韻〉은 오언연작시로 자연을 자신의 은거생활에 흡수시켜 낙천적인 그의 생애를 일관성 있게 서술한 작품이다. 서(書) 가운데 그의 스승인 유치명(柳致明)과 왕복한 것은 주로 경전훈고(經典訓詁)에 대한 논술이다.
잡저의 〈소매초려기 小梅草廬記〉에서는 집을 소매에 지은 내력과 함께 소매는 원래 금마(金馬)였는데 자기가 지명을 소매로 바꾼 경위를 설명하고 있으며, 〈진민사훼철시정본관문 鎭民祠毁撤時呈本官文〉에서는 천년 동안이나 보전해 온 진민사(鎭民祠)는 고려 때 첨사(詹事) 김용비(金龍庇)의 사당으로 훼철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그 사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음집(龜陰集)
조선 말기의 학자인 안기원의 시문집
조선 말기의 학자인 안기원(安冀遠)의 시문집. 5권 2책. 목판본. 1910년 아들 종성(鍾性)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말에 조정규(趙貞奎)와 종성의 발문이 있다.
권1∼3에 시 151수, 만사 38수, 서(書) 8편, 서(序) 2편, 기 3편, 발 1편, 설 1편, 논 2편, 잡저 3편, 제문 12편, 유사 2편, 부록 1·2권에 만사 62수, 제문 17편, 행장 1편, 과정록(過庭錄)·묘지명·묘갈명 각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감상적인 애조와 절망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데, 나라의 운명을 개탄하는 작품들로 〈자사 自思〉·〈만음 謾吟〉·〈탄세 嘆世〉 등이 있다. 논 중 〈양이론 攘夷論〉에서는 국력이 미약한 나라가 외국과 국교를 맺는 것은 세력불균형으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국력을 기를 때까지 국교를 터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척사위아사 斥邪爲我師〉는 국가의 정치가 문란해지고 백성이 도의를 모르는 것은 서양에서 전해온 천주학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천주학의 폐해는 불교보다 몇 배나 더 심하니 이를 물리칠 것을 강조하였다.
〈계횡당자제 戒黌堂子弟〉에서는 지금이 바로 우리의 도의 존망을 건 중대한 시기이므로 학문에 더욱 힘써 충군애국의 사상을 기르고 유학을 천양하며, 사학을 배척하여 국가의 장래를 스스로 지켜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 밖에 청량산을 유람하고 보고들은 것을 기록한 〈유청량산록 遊淸凉山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유학도 멀지 않은 장래에 흥성하리라 주장한 〈음식양생설 陰蝕陽生說〉이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의산(九疑山)
이해조가 지은 신소설
이해조(李海潮)가 지은 신소설. 1911년 6월 22일부터 9월 28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고, 1912년 신구서림(新舊書林)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상편과 하편으로 나뉘어 있다. 총 82회가 연재된 장편으로 상투적인 구소설로의 퇴행의 면모와 함께 친일적 성격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작가적 이력에 전환을 가져온 대표적인 공안류(公案類) 소설로 꼽히는 작품이다.
서울 박동에 사는 서 판서는 첫 부인과 사별한 뒤 재취를 얻지만, 역시 아들 오복을 낳고 죽어 과부 이동집을 삼취로 맞아들인다. 이동집은 전실 자식인 오복을 사랑하고 자신의 아들 또복을 낳은 뒤에도 오복을 더욱 아낀다.
서 판서는 친구 김 판서의 딸 애중이와 오복을 결혼시키는데 혼례를 치른 이튿날 아침 신랑이 머리 없는 시체로 발견된다. 신랑의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쓴 신부는 남장을 하고 서 판서 집 근처에 머물면서 염탐하던 중 칠성 어미에게서 실마리를 얻어 이동집의 모계(謀計)에 의한 하인 칠성의 소행임을 밝혀낸다.
서 판서는 범행을 자백한 이동집을 법소(法所)로 보낸 뒤 염증 나는 세상을 버리고 팔영산으로 들어가 숨는다. 김 씨 부인은 첫날밤 얻은 태기로 아들 효손을 낳는다. 효손은 13세가 되어 복수를 하고자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도중에 서 판서를 만나 함께 칠성이를 붙잡자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연이 새롭게 밝혀진다. 하수인으로 알았던 칠성이는 앞서 이동집의 명령으로 범행하러 가던 도중 어떤 불의한 남녀를 죽이고 그 남자의 시체를 신방에 대신 넣고 오복을 업고 일본 구주(九州)까지 달아나서 15년간이나 상전의 아들을 보호하면서 공부를 시켰던 것이다.
공범으로 체포되었던 사람 또한 또복임이 밝혀지고 범인은 법소에서 판결을 받는다. 악독한 계모의 등장이나 남편을 잃은 부인의 열행(烈行) 등 고전소설적 요소가 두드러질 뿐만 아니라, 고전소설 〈김씨열행록〉에서 ‘신랑의 머리를 잃어버린 신부의 범인찾기’라는 사건 전개에서 중요한 주지(主旨)를 가져온 작품이다.
애국 계몽기의 작품군에서 식민지 시대의 작품군으로 이행한 이래 이해조의 작품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일본인 구원자의 등장이나 엽기성의 강화, 신파조의 복수담 등은 이인직(李人稙)이 처음 신소설에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으로 보아 엽기성이나 복수담이 전대(前代)인 고전소설의 시대에 이미 존재하던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탐정소설의 효시로 간주되는 ‘정탐소설’이라는 명칭이 붙은 동일 작가의 〈쌍옥적 雙玉笛〉(1911.12.)에 앞서는 추리소설적 성격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비교문학 분야에서 만청 시대(晩淸時代)의 소설인 〈구명기원 九命奇寃〉과 연관시켜 연구되기도 하였다.
권선징악의 장치를 볼 때, 초월적 존재가 재판에 의한 징계로 변모하고, 범인이 구출자로 전환되는 역전 등의 근대적 면모를 보이는 서술 수법을 구사한 공안류 소설이지만 신소설의 고전소설과의 접맥을 재고시킬 여지를 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참고문헌>>韓國開化期小說硏究(李在銑, 一潮閣, 1975)
<<참고문헌>>新小說에 미친 晩淸小說의 影響(성현자, 정음사, 1985)
<<참고문헌>>韓國近代小說史論(崔元植, 創作社, 1986)
구이당유집(具邇堂遺集)
조선 중기의 학자 하달영과 그의 아들 현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학자 하달영(河達永)과 그의 아들 현(灦)의 시문집. 2권 1책. 신활자본.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집, 간행된 경위나 연도는 알 수 없다.
권1은 구이당유집으로 시 7수, 행장 1편, 장계(狀啓) 1편, 제문 6편이 수록되어 있고, 부록으로 만사 27편, 제문 1편, 가장 1편, 묘지명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2는 만향당유집(晩香堂遺集)으로 시 5수, 제문 3편이 수록되어 있고, 부록으로 만 58편, 뇌문(誄文) 3편, 제문 6편, 가장략(家狀畧) 1편, 묘갈명 1편, 향장(鄕狀) 2편, 도장(道狀) 2편, 목사서목(牧使書目)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권1의 시는 대부분이 만시로 고인들의 높은 학식과 인품을 기리고 그들과의 우정을 읊은 것이다. 특히, 〈전춘일배제장유송강정사유허 餞春日陪諸長遊松岡精舍遺墟〉는 3월 그믐날 마을의 여러 어른을 모시고 함께 봄날을 즐기며 풍류를 읊은 것이다.
장계의 〈병사박상원유장 兵使朴瑺願留狀〉은 당시 그 지방의 수령이었던 박상원이 병을 빙자하여 사퇴함에 그의 덕과 선정을 칭송하며 그의 사표를 수령하지 말도록 촉구한 것이다. 권2의 시 역시 대부분이 만시로 영남지방 선비들의 풍부한 학식과 고매한 인격을 기린 작품이다.
이 가운데 〈오재연구 梧齋聯句〉는 1683년(숙종 9) 가을에 친지와 선비들이 오재에 모여 가을의 정경을 즐기며 각자의 포부와 풍류를 읊은 시이며, 〈만박수졸재대경 挽朴守拙齋大卿〉은 오언배율의 장시로 고인의 지극한 효성과 맑고 장대한 기상을 질박하게 읊은 것이다.
부록의 향장·도장·목사서목 등은 그의 지극한 효성과 우애를 포상하여 만인의 모범을 삼고자 하는 도내 유생들의 글이다. 장서각도서와 진주하씨 종손가에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재문집(鳩齋文集)
조선 후기의 문신 김계광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 김계광(金啓光)의 시문집. 4권 2책. 석인본. 1943년 그의 8대 손인 동진(東鎭)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유동준(柳東濬)·이제상(李濟相)의 발문과 동진의 후지(後識) 등이 있다.
권1·2에 시 361수, 권3에 소 1편, 전(箋) 1편, 서(書) 10편, 제문 4편, 봉안문 3편, 고유문 2편, 상량문 2편, 명 2편, 정문(呈文) 1편, 권4에 부록으로 행장·행록·묘표·묘갈명 각 1편, 만사 90수, 제문 3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소 1편은 1659년(효종 10) 권벌(權橃)을 봉안한 삼계서원(三溪書院)의 사액을 요청한 상소문이다. 서(書) 가운데에는 1672년(현종 13) 남중휘(南仲輝)에게 답한 편지가 있는데, 고려 때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의 교정을 필하여 일부는 경상도 현풍(玄風)에서 간행하였다. 일부는 전주에서 분간(分刊)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서, 이 편지는 ≪동국이상국집≫의 간행처와 간행연도를 밝혀주는 서지적으로도 중요한 기록이다. 정문은 1671년에 흉년을 만나 환자(還子)를 탕감하여줄 것을 수령에게 건의한 내용이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재실기(求齋實記)
조선 후기의 학자인 정동구의 실기
조선 후기의 학자인 정동구(鄭東龜)의 실기. 2권 1책. 목활자본. 1919년 후손 시학(時學)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정건모(鄭建摸)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장기상(張基相)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52수, 장(狀) 1편, 권2는 부록으로 행장·유사·비문·기와 문 2편, 지 1편, 녹 2편, 뇌사(誄詞) 1편, 정려각운시(旌閭閣韻詩) 131수, 보유(補遺) 5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시는 50여 수에 불과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효심을 노래한 것이 많은데, 그 중에도 공산(公山)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할 때를 추억하여 지은 시는 산경(山景)의 아름다운 경치가 잘 묘사되어 있으며, 그의 효성에 감동한 호랑이가 여막을 호위하여준 사실들을 담고 있다.
또한, 장의 〈혈서장 血書狀〉은 그 어머니의 묘소에 대하여 은해사(銀海寺)의 승려들이 작당하여 훼방을 놓으니 이를 조처해달라고 혈서로써 관청에 호소한 것으로, 그의 후손들에게는 가장 의의가 있는 글이다. 부록에는 정려각시 등 그의 효행을 찬양하는 내용의 글이 많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전집(苟全集)
조선 중기의 학자 김중청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학자 김중청(金中淸)의 시문집. 8권 4책. 목활자본. 문인 남형회(南亨會)와 손자 양렬(楊烈) 등이 모으고, 현손 이명(爾銘)과 5대손 태운(泰運) 등이 교감하여 1824년(순조 24) 간행하였다. 이광정(李光庭)·김정균(金鼎均)의 후서가 있고, 김시찬(金是瓚)의 발이 있다.
권1∼3은 사(辭) 1편, 부 2편, 시 390수, 권4·5는 교서 2편, 소 7편, 계사 2편, 서장(書狀) 7편, 책 1편, 서(書) 11편, 녹(錄)·변(辨) 12편, 서(序) 4편, 기 2편, 발 3편, 명(銘) 5편, 권6은 전(箋) 3편, 축문·제문 39편, 행장 1편, 권7은 부록으로 연보·행장 각 1편, 만사 23수, 제문 2편, 연행증유(燕行贈遺) 24수, 시장(詩章) 1편, 상량문·봉안문·상향축문·봉안축문 각 1편, 권8은 조천록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교도의부 作橋渡蟻賦〉는 장마비에 떠내려가는 개미떼에게 다리를 놓아 건네주어 그 공덕으로 입신출세했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작은 선행이라도 행하면 공덕이 쌓여 의외로 좋은 일이 생긴다고 선을 권장하였다.
〈임진의병시의상소 壬辰義兵時擬上疏〉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여러 번 치른 격전의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고, 난리에 시달리는 민생의 참혹한 모습과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병기와 식량의 조달책 등을 건의한 것이다.
〈조천정예부청면연문 朝天呈禮部請免宴文〉은 1614년(광해군 6) 조천사(朝天使) 허균(許筠)의 수행원으로 중국에 갔을 때 예부에서 연회를 베풀자 그곳에 참가할 수 없는 사유를 들어 중지해줄 것을 청한 것이다. 이 글에는 중국의 외국사신에 대한 접대절차와 사신으로서의 체모를 지키려는 우리 나라 수행원의 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제임진년창의병총록 題壬辰年倡義兵總錄〉은 임진왜란 때 각 지방에서 일어났던 의병들의 활동내용을 총정리한 것으로,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중심으로 활약한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해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조헌(趙憲) 등 당시의 의병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도 학문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상월천선생 上月川先生〉과 〈답한강선생 答寒岡先生〉 등 이황의 제자와 교환한 서간이 있고, 가뭄에 비를 내려줄 것을 역대 임금에게 청한 〈종묘기우문 宗廟祈雨文〉이 있다.
또한 〈문견사건말단헌설 聞見事件末端獻說〉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 사신들이 지키고 시정해야 할 것들을 왕에게 건의한 내용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구정문집(龜亭文集)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유사온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유사온(柳思溫)의 시문집. 2권 1책. 목활자본. 1911년 그의 후손 응삼(應參)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서영곤(徐永坤)의 서문과 권말에 응삼의 발문이 있다.
서문 다음에 연보가 있고 권상은 부 1편, 시 8수, 한거강록(閑居講錄)·자경록, 권하는 부록으로 행장·묘갈명·경행록(經行錄) 각 1편, 용사척록(龍蛇摭錄)·부록(裒錄)·사우록(師友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성지시부 聖之時賦〉에서는 춘하추동의 사시 외에 이 네 계절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성시(聖時)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한거강록〉은 이기설·성명설(性命說)·인설(仁說)·의설(義說)·도설(道說) 등 성리학의 제반 개념에 대한 선현들의 인식을 압축, 요약하여 설명한 것으로 성리학의 기본이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용사척록〉은 당시의 관찰사 한준겸(韓浚謙)과 어사 이상신(李尙信)이 그가 임진왜란·정유재란 등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물리치고 무기를 제작하여 조달한 사실을 조정에 알리는 보고서이다.
그리고 〈사우록〉은 스승인 서사원(徐思遠)이 유성룡(柳成龍)·이원익(李元翼)·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 그와 교유하였던 사람들에 대하여 써놓은 기록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정유고(龜亭遺稿)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개국공신인 남재의 시문집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개국공신인 남재(南在)의 시문집. 상·하권 1책. 활자본. 1675년(숙종 1)과 1689년에 저자의 11대손 학명(鶴鳴)·용익(龍翼) 등에 의하여 편집되었으나 간인(刊印)하지 못하고 산일(散佚)되었던 것을 저자의 20대손 일우(一祐)가 1869년(고종 6)에 재편집, 간행한 것이다.
책끝에 학명·용익·일우의 발문이 있다. 내용은 상권에 저자의 시 13수, 소 2편이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저자의 세계·연보·유사(遺事), 그리고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집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소(疏) 2편 중에서 1392년(태조 1) 저자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올린 〈시무소 時務疏〉는 조야(朝野)의 상황과 풍속·민심,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담고 있어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연보는 저자 개인의 사적이라기보다 고려 말기의 국가상황에서부터 정몽주(鄭夢周)와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남은(南誾) 등에 관련된 기사, 위화도회군에 관한 기사들이 들어 있어서 당시의 정치상황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高麗史
<<참고문헌>>東國輿地勝覽
<<참고문헌>>秋江冷話(南孝溫)
<<참고문헌>>靑坡劇談(李陸)
<<참고문헌>>藥泉集(南九萬)
구주문집(鷗洲文集)
조선 후기의 의병장 강대적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의병장 강대적(姜大適)의 시문집. 4권 2책. 목활자본. 1916년 후손 성조(聖祚)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장석영(張錫英)의 서문과 권말에 정재기(鄭在0xF195)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135수, 권2에 소 1편, 계(啓) 2편, 서(書) 2편, 잡저 3편, 잠 1편, 의표(擬表) 1편, 축문 2편, 제문 4편, 부록의 권1·2에 증유(贈遺) 8편, 서(書) 1편, 수시(壽詩) 3편, 만(挽) 8편, 제문 3편, 언행략(言行略) 1편, 행장 2편, 묘갈명 1편, 묘지명 1편, 묘표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주로 서정시가 많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한 뒤 벼슬에의 뜻을 버리고 시작(詩作)에 전념, 도잠(陶潛)의 정취를 자아내는 작품이 상당수에 달하는데, 그 대표작으로 〈감회 感懷〉를 들 수 있다.
정온(鄭蘊)의 〈사시영 四時詠〉을 차운하여 춘하추동 사시절의 경물을 읊은 서경시가 있고, 〈효소요부수미음사수 效邵堯夫首尾吟四首〉는 소옹(邵雍)의 시를 모방한 것으로 걸작이다.
〈인한재진언소 因旱災進言疏〉는 유배된 효종의 이복동생인 숭선군(崇善君)·낙선군(樂善君)의 석방을 건의하면서 때마침 닥친 한발이 동기간의 형벌에서 비롯된 것임을 은근히 비쳐 역옥(逆獄)에 관한 사대부들의 전통적인 처사를 보여주고 있다.
잡저 중 〈벽암설증혜원상인 碧巖說贈惠遠上人〉에서는 철저한 유교적 이념사회에서도 불교 및 승려와의 교류가 끊이지 않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서횡당경충록후 書黌堂景忠錄後〉는 훈련원정(訓鍊院正) 심자광(沈自光)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지키다가 적에게 잡혔으나 항거하여 끝내 굴복하지 않고 순절하였던 행적을 기록한 〈경충록 景忠錄〉에 발문을 쓴 것이다.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천유고(龜川遺稿)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이세필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이세필(李世弼)의 시문집. 35권 18책. 필사본. 그의 문인들이 필사하여 전하였다. 권1∼7은 서(書) 27편, 권8∼35는 예설(禮說)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서는 스승인 송시열(宋時烈)·박세채(朴世采)를 비롯하여 최석정(崔錫鼎)·이희조(李喜朝)·김간(金幹)·김창흡(金昌翕)·박필주(朴弼周)·남학명(南鶴鳴) 등과 ≪대학≫·≪예기유편 禮記類編≫ 등의 의문점을 토론하거나 선인들의 학설에 대하여 치밀한 분석과 해설을 시도한 내용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또한, 광범위하게 서술된 예설은 가례도(家禮圖)를 비롯하여 통례(通禮)·관혼상제의 각종 절차와 의식에 대하여 수많은 인사들과 ≪가례≫ 중에서 명시되지 아니한 부문, 특히 상례를 집중적으로 다루어서 반함(飯含)·상복(殤服)·심상(心喪)·조전(祖奠)·합장(合葬)·석비(石碑)·졸곡(卒哭) 등 각종 절차와 의식을 조목별로 구분하여 해설하였다.
〈예설 禮說〉에서는 거상잡의(居喪雜儀)·제례·국휼(國恤)·왕조례(王朝禮) 등에 대하여도 상세히 설명하고, 이 밖에 사당(祠堂)·종법(宗法)·반부(班祔)·신알(晨謁)·사감봉주(四龕奉主)·천신(薦新) 등을 포함한 각종 의식과 절차에 대하여 이진유(李眞儒)·유징(柳澂)·홍종성(洪鍾聖) 등과 토론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서 예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촌유고(龜村遺稿)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이명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이명(李溟)의 시문집. 상·하 2책. 필사본. 1765년(영조 41) 후손들이 유고를 모아 편집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이정작(李庭綽)과 현손 숭(崇)이 쓴 발문이 있다.
1책에 시 18수, 소 43편, 연주(筵奏)·원정(元情)·장계 각 1편, 그리고 과제 2편을 끝에 수록하였다. 2책은 부록으로 신도비명·묘지명·행장·유문(遺聞)·교유서(敎諭書)·사제문(賜祭文)·제문·만사 59수, 별장(別章) 24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소는 주로 병자호란 이후 국내외의 어려운 사정들을 다룬 것이다. 국가재정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호조판서에서 체직(遞職)되자 자신을 변호한 것도 있는데, 1년 동안 청나라의 칙사가 네 번 왔고, 한번 올 때마다 경비가 1만 냥에 달한다는 내용의 명세서 성격의 것이다.
이 밖에 계속된 흉년에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는 관리들의 녹을 올리지 말자는 것, 세폐(歲幣)의 변통을 언급한 것 등이 있다. 장계는 왕세자·원손·대군부인 등이 심양에서 돌아올 때 예정일자의 차이와 건강문제, 그 곳의 형세 등을 이두를 섞어 기록하였다.
부록의 시문은 당시 태관을 역임한 신익성(申翊聖)·이명한(李明漢)·김신국(金藎國)·김상헌(金尙憲)·이경석(李景奭) 등이 썼다. 규장각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