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글쓰기-빌고만 싶어지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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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9. 17 그래도
내 생애 최고의 취미를 찾았다. 바느질이다. 혼자 조근조근, 또는 여럿이 도란도란 모여 하는 손바느질도 괜찮지만 나처럼 덜렁대는 성향인 사람에게는 속도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재봉틀이 제격이다. 최고의 속도로 직선 바느질을 할 때면 빨래판을 박박 긁어대는 소리를 내는듯한 소음도 마림바 소리처럼 맑고 경쾌하다. 거기다가 오버록을 칠 때는 60도의 설원을 혼자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것처럼 무아지경이 상태가 된다. 재봉틀의 최고 속도와 오버록 소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소음이지만 내게는 경쾌한 리듬이다.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아가게 한다. 그래서인지 가고파 의상실에서 내 담당 업무는 실밥 따는 일이 아니라 오버록 치기와 바닥 쓸기, 택배 시키고 주문 받기다. 재봉틀을 하면서 또 한 번 알게 된 것은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혼자서 다 전문가일수는 없다. 각 분야에서 특별히 잘하는 구석은 누구에게나 한 가지씩은 있더라는 사실이다.
우리 집에는 5년 동안 사서 모은 옷감이 방 하나 가득이다. 서문시장 2지구 3층의 면직물, 이증 거즈면, 체크면, 린넨, 레이스, 모직물은 물론 올해는 동대문시장까지 진출하여 다이마루, 36수린넨, 인견, 텐셀 섬유까지 사서 쟁여 두었다. 봉급이나 연금의 지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이 원단구입비니까.
이건 남편이 뜯어 말려도 안 된다. 빌어도 안 된다. 제동 장치가 없다. 꽃보다 좋은 것이 천이다. 천을 보면, 직조방식, 무늬, 시중과 날줄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기는 연흔 같은 미세한 움직임은 황홀하다. 마음에 드는 천을 만나면 안 사고는 발이 안 떨어져서 못 간다. 사고 나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살판이 난다. 오죽했으면 베트남 호치민, 호이안, 다낭, 사파는 물론, 그 비싼 물가의 교토에서도 무거운 천을 사서 들고 오느라 짐의 초과분에 대해 경비까지 물었으니까.
그렇게 산 천으로 밤낮없이 옷을 만들어 제낀다. 처음에는 손주들의 옷에서 조카 애들 옷까지, 거기다가 내 옷 니 옷, 제자 옷, 선배 옷, 하다하다 안 되니까 앞집, 윗집, 10층 할아버지부부까지 만들어 드렸다. 며칠 전에는 여름이 끝나기 전에 가고파인생학교이모님들이 입으실 인견 7부 바지를 일곱 벌 만들어 갔다. 황금포도농장에서 거봉포도도 한 상자 사고, 약국에서 파스도 7장 사서 판임이모님댁으로 갔다. 판임이모님께 욕을 한 바가지나 들었다.
“이 정신 빠진 것아, 돈이 썩어 남아 도나? 가고파에 둔 그 많은 천들을 할매가 다 팔아 묵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알끼다. 니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게 무슨 짓이고? 할매는 니 덕분에 수천만원 벌어 묵었을 끼다. 그런데 아직도 그 천을 떠서 그 짓을 한다 말가? 그란다고 니를 보고 좋은 소리 하것나? 넘 좋은 일만 시키지 말고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라. 이 썩어 문들어질 년아.”
“판임이모, 제가 누구한테 배웠겠습니까? 십년도 넘게 매일 밥 해서 사람들 불러 먹이는 이모님 보고 배운 거 아니것습니까? 이모님도 사람들이 맛있어 하고 좋아하니까 하시는 거잖아요. 저도 집에서 밥 해서 사람들 잘 불러요. 음식 하는 것도 좋고, 사람들도 좋아하니까 하는 거죠? 그렇다고 제가 빚을 낸 것도 아니고 제 범위에서 하는 건데.”
남편은 성당 가거든 김미옥 시의원언니에게 통영시민이 남자는 몇 명, 여자는 몇 명, 어린 아이는 몇 명인지 알아봐 주고 올거란다. 통영시민이라면 박미옥이가 만든 옷을 한 벌씩은 다 입어야 하지 않겠냐고.
재봉틀과 오버록은 먼지가 많이 나서 호흡기나 나빠지니까 재봉 방을 따로 꾸며 줄 거라고 한다.
일언지하에 안 된다고 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재봉틀 앞에 앉아야 하는데 다른 방에 있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그랬더니 그럼 안방에 공기청정기를 한 대 들여 놓겠다고.
나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할 때는 피곤하기 보다는 에너지가 생긴다. 이걸 만들어 누구에게 입히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면 그 생각만으로도 신이 난다. 거기다가 입어 본 사람들이 다시 이야기를 하면 또 만들기 시작한다.
남편은 이제 말려서는 안 될 일이 이 일이라는 걸 어느 정도 파악한 것 같다.
오늘은 만든 옷의 실밥을 정리하고 바지는 고무줄을 끼워 박기 좋도록 집게를 물려 내 옆에 놓고 간다.
“누군가의 머리에 두 손을 얹고 나는 빌고만 싶어 지누나”라고 말한 하이네처럼 누군가가 내 손으로 지은 밥을 먹고 힘을 얻고, 내 손으로 지은 옷을 입고 온기를 느끼며 행복해지기를 오늘도 빌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