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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목포민미협 원문보기 글쓴이: 사무국장-오승관
* 아래 강의문은 2011. 6.17 카토릭 자활센터에서 발표한 요약문이다. 제2부는 7.15일 예정으로, 누구든 읽고 전파시키는 것은 자유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 지혜로운 삶의 길 찾기 -
제 1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떤 곳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원래 명확한 답은 주어져 있지 않다.
철학이란 용어는 서양의 Philosophy 를 근대 동양 학자들이 밝을 哲, 배울 學으로 번역한 낱말이다 밝음을 배우는 학문이다 는 뜻이다. 무엇을 밝힌다는 것인가? 의미가 없다. Philosophy 의 원말은 고대 희랍어 philos ( 사랑) + sophia ( 지혜)를 결합한 말이다. 즉 지혜를 사랑한다, 지혜를 밝힌다. 그래서 한문으로 애지학 (愛智學), 지학 (智學)이란 말이고 그렇게 번역 사용해야 옳은 데 엉뚱하게 밝을 哲 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대학에 철학과가 있어도 가장 인기없는 학과이자 점차 폐과되는 추세에 있다. 내가 고대 철학과에 입학한 시절에도 가장 입학 성적이 낮은 학생들이 몰려드는 제2의 선택 , 지망학과 이었고 그나마 철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학생은 한 두사람에 불과하다. 고향에서 친지나 친구들은 나를 철학한다고 이상한 눈으로 보고 조롱하기일 수었다. 철학을 개똥철학이라 불렀고 사주나 관상쟁이로 먹고 살터이냐고 비아냔 거리었다.
사법고시 공부한다는 자체만으로 점심 대접 받던 친구들에 비하여 나는 이들을 6법전서의 노예들이라고 깔보았지만 어머니 여자들은 되레 나를 정상취급하지 않았다. 오직 부친과 고교시절의 은사 김용국선생 두 분만이 나를 인정할 따름이었다. 정말 철학 전공으로 직장잡기 힘들었다. 오랜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으나 후회한 적은 없다.
지금까지 철학과를 나와 철학활동을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겨우 교수 신분으로, 먹고 살고 그것도 학문적으로 연구 성과를 내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대학의 상아탑에 갇히어 연명하는 학문인가? 결코 아니다.
서양의 스피노자라는 철학자는 평생 안경알을 갈아 하루하루 살면서도 유명한 대학의 교수직을 초청 받자 조용한 사색의 시간이 방해된다고 사양할 정도로 철학자다운 기개를 보이었다.
따라서 직업으로서 철학 하는 사람과, 일상의 사색과 행위로서 철학을 하는 사람은 다르다. 사주 관상쟁이도 반듯하게 철학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먹고 산다. 내 대학원 동료 하나가 철학관 주인을 찾아가 그대가 진정 철학을 알고서 고상한 이름에 먹칠할 수 있는가 간판 치워라, 호통 치는 일도 있었다. 누구나 어디에도 철학이라는 면허 특권은 없다.
여러분은 김용옥이라는 유명세를 탄 학자를 알 것이다. 연령으로 고대 후배인데 학문적 열정이 대단한 수재이다. 본국에서 신학, 철학을 배우고 중국 대만대학, 일본 동경대학, 미국 하버드 대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수직을 하다가 중도하차 한 다음에 원광대 한의과에 입학, 한의사 자격증을 습득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동양 철학을 상아탑에서 거리로 끌어내어 입담 좋게 새롭게 해설 소개함으로서 수천의 청중들을 사로잡았으며 그의 책들을 베스트셀러로 올리는 데 탁월한 저널리즘 감각을 타고난 글쟁이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의 책을 몇 권 구입했던 독자이기도 하다. 어려운 철학서도 재미있게 쓰면 돈도 벌 수 있다는 성공담을 보여준 사례가 김용옥이지만, 그보다 앞서서 , W. 듀란트라는 미국 철학자는 ‘ 철학야화’ A story of philosophy' 은 써서 백만 부 이상 팔았던 기록이 있다. 고교시절에 나는 이 번역서에 푹 빠져서 외우다시피 하였다. 한국판에도 번역자가 다른 수종이 퍼져 있다.
지금 와서 보면 깊이가 결여된 통속성이 가미된 철학서에 불과하지만, 대중은 아는 만큼 이해한다고 김용옥이라는 저널리즘 철학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경제, 과학, 신화를 제외하고 안 건드리는 것이 없을 정도로 자만심과 지기 과시욕이 넘처나는, 겸손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다.
널리 원전을 살피고 박학다식한 해석을 하는데, 일가견, 탁월한 재능 발휘를 하면서도 자긍심이 지나쳐 특히 예술에 관해 아는 척 시건 방을 떠는 일에 나는 참을 수없어 이 자리를 빌려 조금 비평의 화살을 날려본다.
그는 한국에서 민중사상이 형성되고 예술운동이 전개되던 시기 7, 80년대의 현장에 있지 않았던 유학시절에 돌아와서는 김지하 시인을 면담하고서 민중 예술가는 오직 그 사람 하나뿐이며 나머지는 헛것, 추종자라고 일거에 폄하하였으며 서양예술의 전위 작가, 비디오아트 창시자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은 백남준을 면담하고 최고라고 추겨 올리면서 자신이 가장 예술을 이해하는 척, 신판 춘향전 극본을 만들어 모범으로 제시하는 허세를 부리었다. 대다수 유학파들이 돌아와서는 서양식 잣대로 국내파 지식 풍토를 비판하는 버릇을 그도 답습한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라고 조롱하나 우물속 사정을 잘 아는 건 토생 개구리인 것이다.
김용욱은 예술의 근원이 되는 신화를 모르면서 불교와 기도교를 가장 아는 척 떠들며 마르크시즘이나 현실 자본주의를 분석할 줄도 모르는 경제학의 무지, 체재의 치명적 약점을 건들이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는 우파 논객이라고나 할가? 실천이 없는 관념적 지식인의 전형이다.
철학은 지식의 집합이나 종합화가 아니다. 감성적 인식이 없는 이성 논리만으로 이룩되지 않는다. 특히 예술에 무지하는 한 그의 철학에 한계가 있다. 우주 자연의 총체적 삶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물음으로부터 시작하며 그 같은 길 찾기로 시작되는 행보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철학은 있다. 자신의 인생 삶의 내력을 뒤집어 보면 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펴보면 자신의 인생관이 곧 철학이다
나는 그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초등교 시절 주위 어른들을 졸라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취미이었고 나는 들은 이야기대로 휴식시간에 급우들 앞에서 풀어놓는 이야기 반장 노릇을 하였다. 그 시절 어른들은 너나없이 이야기를 황홀하게 잘하였고 내가 전하는 얘기를 귀담아 듣는 여자 급우들의 표정이 좋아서 더욱 신바람을 냈다. 그리고 어느 날 늠끔없이 수수께기 같은 화두를 던지었다. 물론 옆집 삼촌에게 들은 것이다. 촌수가 먼 친척이라도 서로 친밀해지면 흔히 삼촌, 아재라고 호칭하였다.
너희들은 살기위해 먹는 거냐. 먹기 위해 사는 거냐? 급우들 대다수가 살기위해 먹는다고 얼른 말한다.
그렇다면 너희는 하루 세끼, 두 끼만 먹어도 살아간다. 그런데 왜 가게에서 풀빵이나 사탕을 사먹는 거냐? 나는 일부러 먹기 위해 산다는 논리 쪽으로 계속 몰아간다. 마침내 급우들은 말문이 막힌다.
후일에 톨스토이의 동화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를 읽고 내 화두는 정해젔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사는가? 동식물의 먹이는 지극이 소박하고 간단하다. 자연 그 자체이다. 그러나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존재처럼 온갖 음식을 개발하고 숱한 이름들의 음식 광고가 TV 를 장식하고 비싼 한우고기로 대접받으면 흡족해 한다.
아프리카는 굶어 죽는 아이들이 많다면 우리는 너무 잘 먹어 비만으로 온갖 병을 앓는다. 지금 우리나라는 잘 먹기 위해 사는 병에 깊이 걸려있다.
우리의 삶을 곰곰이 살펴보자 우리의 생존방식이 무엇인가?
여러분은 목포라는 도시에서 살기위해 직업을 갖고 자녀를 기른다. 자녀를 정기하교에 보내는 시간 이외에 방과 후에는 각종 공부, 특히 영어 공부시키느라고 열성이다. 버는 돈이 적어 휘청거리는 부모가 많다. 무슨 과외 공부가 그리 많고 왜 영어 공부를 시키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들에게 뒤떨어지고 좋은 대학 못 들어가고 좋은 대학 못가면 좋은 직장 잡기 힘들어 열등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는 흔한 답이 나와 있다.
요즈음 뉴스의 화두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대학의 등록금 인상문제로 대학생들이 마침내 들고 나섰다. 부모들이 인내하던 침묵을 학생들이 먼저 항의하고 나선 것이다. 대학이 취업을 보장하는 곳도 아니고 대학교육의 질이 인상 폭만큼 높은 것도 아니면서 물가 상승률 보다 항상 앞질러 뛰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육 소비자인 학생은 항상 봉인가? 학생 입장에서 생각하는 교수가 몇이나 있는가?
지금껏 대학은 등록금 원가 공개를 한 적이 없이 터무니없이 비싼 교육상품으로 지탱하는 풍토에서 개똥같은 철학이 성장할 틈이 없고 자본주의 기업이 낳은 직종에 맞는 기능주의 교육으로 치닫고 있다. 학문 연구의 불균형이 심화된 지 오래되어, 진리의 전당이란 소리는 옛말이다. 대학이 직업양성소로 전락한 것이다.
돈을 벌기위해 일하는 활동은 경제활동, 그 학문을 경제학이라고 한다. 또한 그 같은 활동의 현실 구조, 시스템, 체재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시장경제, 자본주의, 자본가, 신자유주의, 세계 금융경제, 글로벌 경제라는 용어를 갖다 붙인다.
이 같은 경제활동에 자동으로 투입되는 여러분은 치열한 경쟁 속으로 톱니바퀴처럼 휘말려든다. 생존 경쟁에 이기기 위해 내가 살기위해 너를 밀 처낼 수밖에 없다는 경쟁심리가 온갖 분야에 걸쳐 그악스럽게 전개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여러분이 살고 있는 한국이다. 도시가 커질수록 살벌하다 목포도 심심하면 무안과의 통합론을 내세운다
그 덕분에 O. E. C. D 국가 반열에 올랐다. 즉 최우량 경제국가가 되었다는 소리이다. 여러분은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할 만큼 세계가 꼽는 부자나라 국민이 된 셈이다.
여러분은 부자인가? 부자로서 어떤 행복감을 느끼고 사는가?
진보적 경제학자의 말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모두가 고루 잘 사는 구조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세계 경제는 1%도 안 되는 인구가 세계 돈줄의 47%를 장악하고 한국의 10% 인구가 80% 경제권을 쥐고있다고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은 빈부의 양극화 나라, 삼성 공화국으로 변한 것이다. 이같은 불평등한 구조를 심화시키기 위하여 인류 역사가 발전해 왔는가? ‘아아 대한민국 ! ’ 노래 찬가를 부를 수 있는가?
부자들만 살아남은 나라에서 그 대열에 합류하려고 피투성이 경쟁을 벌이는 남한의 모습과 사회주의 북한을 동시에 돌아본 재독 문화비평가가 한 말은 ‘북한이 창살없는 감옥이라면 남한은 생지옥이나 다름없다’ 고 쓴소리를 했다. 그 바람에 안기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렸다.
아마 천국과 지옥을 묘사하기 위하여 모델을 선택하려면 남한이 적합한 소재일 것이다. 민중작가 신학철의 ‘ 현대사’ 시리즈 작품에 묘사된 풍경이 바로 이 같은 것이다.
목포권 경제는 초기의 활발한 주체이었던 중소상인층( 자영업자)은 몰락하고 재벌 기업들이 들어와 시장경제를 요리하고 있다. 목포 경제가 가난하고 침체하는 요인이 여기에 있다. 목포에서 번 돈을 목포에 풀어놓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목포의 경제 소득은 기업의 하청업자, 고용노동자로서 생계를 이어가는 구조이다. 이는 식민지 경제와 닮아 있다 지배 국가는 식민지의 자원과 노동력을 모두 빨아들이면서 그 대신에 제국의 생산품을 사들이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 식민 경제 특성이다. 그것은 도시경제와 농촌과의 관계와 같다.
여러 산업체와 유통업체로 구성된 도시가 농촌 인구를 흡수하고 필요한 식량을 사들이는 대신에 도시 상품의 비료, 농약, 농기구를 비싸게 팔아먹고 곡물가의 이윤을 크게 남겨 농촌의 자본축적이 생겨나지 않도록 억제하고 조종한다. 곡물가격이 상승하면 노동자의 생계부담이 커지고 잘사는 농촌으로 돌아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공생관계 같지만, 농촌은 도시 자본가의 손에 의해 빈한한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 농촌의 자원, 자본이 되는 산림, 토지의 노른자는 이미 자본가의 소유로 넘어가 있다.
역사가 오늘의 현대에 오기까지 ‘ 근대화’라는 용어가 정치, 경제, 모든 학문의 화두처럼 유행한 적이 있다. 역사를 발전의 개념으로 전제한 다음에 나라가 부강하려면 근대화되어야한다. 정치, 경제 , 문화, 교육, 등 모든 면에서 근대화되어야 선진국가로 올라선다. 그 모델은 어디 있는가? 당연히 근대화에 성공한 미국, 서유럽 국가이다. 따라서 이들 모델을 추동하는 것이 근대화 방법의 수순이다.
근대화 이전의 봉건국가는 왕권의 세습 체재이므로 권력을 국민 손에 넘기는 민주정치체재이여야 하며 경제는 농업에 토대를 두었던 자급자족적 경제의 한계로부터 벗어나 모든 자원이 활용되는 도시 중심의 산업경제로 바꾸어야 하며 과학이나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하여 해외 유학이 장려되고 이들이 돌아와서는 지배 권력의 핵심인사, 주류세력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하여 모든 대학의 교육, 학문, 예술, 철학의 교과목까지 서양식 개념으로 번역되고 이해되며 역사를 배우게 되며 과거의 동양문물이 배제된 기초다지기, 입문으로 변한다. 진리의 잣대는 서양의 규정안에 근거한다.
나의 대학시절에도 미국의 분석 철학, 과학철학이 크게 유행하여 그것을 모르면 교수직 얻기가 힘들었고 동양이나 한국철학은 한 구석에 위치하여 모른다고 흉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국사회, 한국사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교수나 저서를 본적이 없다. 진리의 정체가 없는 언어논리의 희롱을 읽었을 뿐이다. 관념 언어들의 난무가 마치 지식인의 특성처럼 작동하는 것은 지금도 되풀이 하고 있는 모습이다.
위와 같이 서양문물을 배우고 익히는 핵심, 근대화의 요소는 무엇인가? 서양역사가 말하듯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를 정착, 발전시키는 것이었으며 자본가를 중심한 정치체재, 용어상으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근대화의 2축은 산업화와 민주화로 요약하는데 산업화라는 경제 방식이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 민주 공화국이며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고 명시된 문장은 민주주의를 함축하고 자본주의라는 어휘는 없다. 그럼에도 모든 경제 활동의 작동원리는 시장 경제를 움직이는 자본주의 방식이다. 시장경제가 생산방식이라면 자본주의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요소로 이룩된 생산관계인데 자본(자본가)이 주체이고 노동(노동자)은 객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요즈음은 기술이라는 요소를 덧붙이고 있지만-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자본주의는 결코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 , 객체간의 관계가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진리이다 는 사실이다. 즉 노동이 자본의 주체일 수 있고 자본의 소유자인 자본가 없이도 시장경제를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회주의를 연상하는데 사회주의 이외에 다른 대안 방식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 자본주의 극복의 전망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상품을 내다 판다. 모든 상품에는 유형, 무형의 종류도 많지만, 원자재는 물질이며 에너지이다. 초기 산업화의 에너지는 석탄이었고 다음으로 석유가 주류를 이루고 원자력, 태양, 풍력 수력 에너지 등을 나열할 수 있다.
농업경제의 중심 시대에서는 재생 가능한 자연의 원자재를 사용하여 자연 생명의 순환을 역행하지 않았다. 심지어 인간의 분뇨까지 비료로 이용하여 버리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근대 산업화 이후로 땅 밑에 감춰진 지하자원을 캐내고 철저하게 이용 소모함으로써, 이른바 엔트로피 파국, 기후 재앙이라는 대가를 치루고 있다.
석유나 석탄의 에너지는 쓰고 나면 다시 얻지 못한다. 지하 매장량도 한계가 있다
지구 에너지의 한계 법칙을 말한 것이 엔트로피 법칙이다
이미 석유는 오일 피크 점을 지나서 21세기 중반에 바닥을 친다는 보고서는 널리 알려저 있다. 아마 그 시기 쯤이면 각종 석유제품의 단절, 에너지 고갈 사태로 도시의 고층 빌딩, 아파트, 자동차 등 인간이 자초한 쓰나 미를 겪으면서 도시의 유령화, 황폐화한 풍경을 후세대들은 볼 것이다. 부모들은 자신이 살지 않는 미래라고 무감각하다 자본의 속성은 냉혹 그 자체이다 물질에 도덕이 없는 것과 같다.
도시 공간의 팽창, 문명 변화의 가속도에 비례하여 에너지 소비량도 증폭하며 재생불능의 쓰레기 폐기물 속도도 불어난다. 기후 재앙도 동시에 불러들이어 온갖 동식물이 살고 있는 지구의 자연 공간도 좁아지고 황폐화되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세계 인구를 먹일 식량의 고갈 사태가 닥칠 것이다고 예견하는 미래학자도 있다. 녹색의 자연이 존재하지 않으면 화려한 도시문명은 존재할 수없다. 농촌이 사라지고 도시만이 남은 사막화를 상상할 수있는가 ?
일찍이 번성하였던 고대 도시문명이 왜 사라졌는지를 역사적 교훈을 읽지 못하면 인류 문명의 종말이 인류 스스로 자초하는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지금 세계경제는 총체적으로 경제 불황의 공황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어떻게 불황인가를 자세히 알려면 전 서울대 교수 김수햏의 최근 저서 ‘세계대공황’을 읽어 보기 바라며 대다수 진보적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자본주의가 종말로 치닫고 있다고 있다고 진단한다. 자본주의가 무한한 경제성장의 신화를, 장밋빛 환상을 심어 주어도 자본가의 탐욕의 실체를 밝혀줄 따름이다 는 것이다.
세계 공황의 첫 징후는 자본주의를 선도하고 있는 종주국 미국에서 출발한다. 현재 자본의 중심은 산업자본도 아니고 금융자본이다. 어떤 국내 대기업체도 세계 금융자본의 지원 받지 못하면 하루아침에 망한다. 다시 말해 다국적 세계화의 금융자본의 손아귀에 잡혀있다. 국가의 존망도 그들 손에 있다는 사실을 김대중 정부시절의 IMF 사태를 통해 체득했을 것이다. 대출로 시작하고 부채로 거덜 난 무수한 기업과 은행을 쓸만한 곳을 골라 주식과 펀드 자금으로 인수, 합병한 시나리오가 IMF 사태인 것이다.
금융자본가의 대다수가 미국의 윌스리트에 몰려있다. 금융자본은 그 속성상 이윤, 이자를 내서 먹고 사는데 투자의 대상으로 주택을 사고 싶은 자에게 장기 대출을 해주는 것이며 그 위탁을 맡은 것이 모기지 기업이다. 한국 경제도 일부러 부동산 경기를 부치기어 아파트 주택 담보 대출을 유도한다. 명분 좋게 뉴타운 도시 운운하면서 잘하면 부동산 투자가 땅짚고 헤엄치기이다. 이런 식으로 돈방석에 앉은 자들이 정계나 정부 각료가 되어 권력 창출의 주류로서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여기에 전제가 있다. 주택 매입자가 소득이 높고 매입한 주택을 되팔았을 때 시세 차익이 높아야 수지타산이 맞는데 소득이 떨어져 대출이자가 부담되고 매입주택 가격도 제자리걸음, 오히려 하락 추세라면 집도 뺏기고 거리로 내몰린다.
이 같은 사태가 빈부격차가 심한 미국 땅에서 일어나 중산, 서민층의 몰락을 가중시키고 이들의 몰락은 주식 폭락과 금융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정상적 소비 수요가 없는 금융 자본은 스스로 망한다. 구매력을 상실한 빈자 층이 늘수록 시장경제는 침체되고 대공황으로 돌입하게 된다.
그 해결 방안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전쟁도 전쟁경기라는 자본주의 성장 방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 곳이 없고 미국처럼 ‘전쟁중독’ [ 조엘 안드레이스 지음]에 빠진 나라도 없다. 오죽하면 자국에서 그 같은 이름의 책자가 베스트셀러에 올라갔는가? 석유자원 확보를 위하여 이락과 아프카니탄을 침공하여 친미 정부를 세우고 한국만 하더라도 6.25 전쟁이 끝난지 6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휴전 상태이다. 평화조약을 맺자고 요구하는데도 북한 핵 제거라는 6자회담을 핑계로 장기 주둔하면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 국민 여론은 미군 철수를 반대한다는 주도세력에 의해 남한은 미국 식민지이다 는 오명을 언제 벗어나는 시대가 올련지? 우리는 스스로 올가미에 걸러 있으면서 그 것이 올가미라는 사실을 모르는 백성이다 일찍이 ‘ 씨알의 소리’ 라는 책자를 냈던 함석헌 선생이 ‘ 생각하는 백성이여야 산다’ 고 들소리를 냈음에도 생각없는 백성들이 지금의 정부를 선출하고 지탱하게 한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는 내가 존재하는 것은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각이 없다면 죽은 백성이나 다름없다.
자본주의는 평화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구미중심의 식민지 침탈사가 그대로 증명한다. 아시아권에서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제국주의를 흉내 내어 아시아 국가들을 침탈하는 살육 전쟁을 벌이다가 패망한다. 미국 다음으로 부강을 자랑하던 도덕불감증의 나라 일본의 경제가 지금은 장기 불황의 늪에 빠져 있다. 세계 2위권의 원자력 발전소의 위용을 떨치더니 지진 쓰나미 한방으로 공포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탐욕의 전쟁으로 얼룩 지고 번성한 물질주의를 청산하고 진정으로 ‘아시아의 공영’ 아시아의 정신 자산을 찾아야한다는 근원적인 반성의 목소리가 없다 .
여기까지 너무 딱딱하고 우울한 우리의 현실세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 같은 사실을 몰라도 무감각해도 살아간다. 내 한 몸 사리기도 바쁜데 어찌 다른 생각할 틈이 있는가? 소시민적 개인주의 의식이 만연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가 키워온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부정부패가 일상화되어도 반응없는 도덕 불감증에 빠저있고 우리의 정신, 사상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철학이 뇌사 상태 직전에 이르렀다. 우리의 참 예술도 위기에 직면하였다.
남아 있는 건 자본주의로 치장한 예술이 관료주의와 결합하여 판을 치는 꼴불견의세상이다. 자본가가 장악한 대중의 전파매체를 타고 보여주는 연예 공연물이 밤낮 없이 TV 시청자들을 세뇌시키며 멍청한 웃음짓기로 시간을 빼앗기게 한다. 즉흥적 흥미꺼리, 짜릿한 감각을 자극하는 환상 놀이, 물질적 우상 숭배로 가득한 아이텀 등이 요란하다 이들의 스타 주역이 팔팔한 젊은 세대 층이고 보니 이들의 사고, 감정 , 행동 양식이 모두 현실에서 그런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물론 이를 모방하는 젊은 층의 추세도 있으나 이들 모든 주역들이 자본의 흥행사, 이벤트 꾼에 조정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여기에 북장구 치고 있는자들이 미디어 문화 기자다. 스타상품은 오래가지 않아 새로운 자극 상품으로 교체된다. 언제 도중하차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늘 스트레스 받고 자살 하는 소동을 보게 된다. 젊은 세대 층의 자산율 1위라는 기록은 출구 없는 자본주의 비극의 측면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정작 출구가 없는 것인가? 물질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의 조상, 선조들의 사상이며 예술은 무엇이었던가 돌아보게 된다.
이들의 철학 사상을 살펴보고 우리가 찾아야 할 핵심이 무엇인가는 다음의 2부 강의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원동석 [ 예술비평가 / 목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