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세계
나는 191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학교인 서화미술회에 들어가 小琳소림 趙錫晉조석진、心田심전 安中植안중식선생에게 공부했다.
소림과 심전은 조선시대의 대통을 잇는 마지막 화가들이었다.
이분들에게 화업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맨처음 그린 그림이 인물화다. 사실 그때부터 여태까지 나는 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이때문인지 어떤 사람은 나를 인물화가로 규정짓는 경우도 종종 보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잘 모르거나 너무 잘 아는 소치일 것이다.
나는 조선시대와 연결되는 전통적인 화법의 북화계열과 남화계열 어느 한쪽에도 구속됨이 없이 양면을 모두 흡수하고 조화시켜 내 나름의 독자적인 회화양식으로 발전시켰다.
나를 가르쳐준 심전선생은 남화를 주로 그렸지만 북화의 기법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자연 그 영향을 받았다.
나는『墨묵으로 그려도 북화가 있고 채색으로만 그려도 남화가 있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미술은 인공적으로 자연물을 그대로 표현하는 기교이며、그 기교가 완벽한 연후에 비로소 예술적 진미가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남화의 「想상」보다 북화의「技기」를 더 존중한다.
남화의 현실도피적인 면과 색채를 거부、억제하는 수묵위주의 풍류적 詩想主義시상주의의 優位觀우위관보다는 미술의 기본적인 요소인 색채가 풍부하고 다채롭게 구사한 현실 주제의 인물、풍경、화조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다. 미술평론가 윤희순은 40년대 초에 이미 세필채색화로 하나의 화경을 이루고 있던 나에게 『고아한 품격과 용필의 묘는 전통의 기법인으로 최고봉』이라고 예찬해 줬지만 나는 나대로 현실주의와 자연의 다양성을 외면하지 않는 미의식탐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인물、산수、어해、초충、령모、절지、기명、화조는 물론、사군자、풍속화에 이르기까지 손 안댄 것이 없다.
초상화만 해도 역대제왕으로 단군·세조·원종·고종·순종、천도교주로 최제우·최시형·김연국(시천교)、역대명인으로 정몽주·사임당신씨·이율곡・ 충무공·논개·춘향·아낭·민영휘·윤택영·윤덕영·민병석·이재완・김성수·김규진·유창환·안중근·서재필·이승만、현존명사로 백낙준·이병철·박종화씨 등을 그렸다.
외국저명인사의 초상화로는 「윌슨」미대통령、영국 「엘리자베드」여왕、인도 「간디」수상、미국 「무초」대사 등이 있다.
벽화로도 창덕궁벽화、 YMCA벽화、북경박물관벽화、봉천박물관벽화、 미 「하버드」대학도서관벽화 등이 있다.
주요작품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호암미술관의「霜葉상엽」、「목단치」、「濠上知樂호상지락」、「삼고초려」、정진숙씨가 소장하고 있는「화조」 김용주씨가 소장하고 있는「풍악추명」、김월화씨가 소장하고 있는「수렵도」、 최두선씨가 소장하고있던 「산상군선도」、김형태씨가 소장하고 있는 「방직도」 문영회씨가 소장하고 있는「후적벽부」、「하버드」대학에 가있는 「시집 가는 날」、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순종황제」등은 아끼는 작품들이다.
이밖에도 수많은 작품이 국내는 물론 중국、일본、미국、「유럽」등지까지 나가 있지만 평생 나는 내 그림을 그리지 못한게 한이다.
운이 좋았든지 화재가 있었든지 심전문하에 입문한지 2일만에 어진을 모시는 영광이 내게 떨어져 그때부터 남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온 처지가 되었다.
이제 내 작품을 남겨야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었지만 이번에는 미술애호가들이 나를 홀가분히 놓아주지 않았다.
연초부터는 아무리 급하고 중한 부탁도 물리치고 지금까지 그리지 않았던 작품을 몇점 만들어보았다. 전에 한 작품도 새로운 기법으로 참신한 맛을돋우었다. 바깥 출입을 않고 집에서 꼼지락꼼지락 하면서 그렸더니 대작과 소품이 근 100점 모여졌다.
주위의 권도 있고 어떤 사람과의 인간적인 약속을 지키기 위해 76년 12 월중순께에는 「古玉堂고옥당」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지금까지 변변치 못한 글을 살펴 읽어준 독자, 미술애호가 여러분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앞으로 남은기간도 힘써 일할 것을 약속한다.
글을 마치면서 당국에、어린이들이 붓을 잡는 요령이라도 터득할 수 있도록 국민학교 시절부터 동양화 기초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때、전통적인 우리 미술을 멀리 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또 한가지 숙제거리인 「국전」문제가 있다.
나는 57년 제6회 국전 때 『선배의 도의를 찾자』고 외치면서 국전개혁론을 폈다. 국전은 공정하고 개방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내 소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1976년 중앙일보 연재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서화백년'을 마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