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앞의 등불 / 조미숙
새벽녘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집을 나섰다. 택시 정류장에서 아는 언니를 만나기로 했는데 뜻밖에 언니의 남편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멀리 시험 보러 간다고 역까지 배웅가다니 전에 없던 일이다. 덕분에 목포역에 편안히 도착해서 기차에 올랐다. 그런데 아차 싶었다. 몇 호 차인지 확인하지 않았는데 순간 표를 어디에 보관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예매해서 보내 준 건데 코레일톡(승차권 예매 앱)에 들어가서 보니 로그인(log-in)을 하라고 한다. 난 회원 가입이 되어 있지 않는데 순간 당황스러웠다. 일행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텅 빈 기찻간에 아무곳이나 털썩 앉아 있는데 지나가던 승무원이 승차표를 보여달라고 했다. 사정을 얘기했는데 표를 찾지 못하면 벌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예매 해 준 이에게 새벽 댓바람부터 전화를 했다. 결론은 코레일톡에 비회원으로 로그인하면 되는데 순간 당황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작은 소란끝에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불길했다.
떨리는 마음을 부여 잡고 책을 펼쳤는데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난 밤에 뒤척이다 잠을 못 잤는데, 머리가 멍한 상태가 지속될까봐 눈이라도 붙여볼 요량으로 자세를 잡아봐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기차는 목적지인 서대전 역에 닿았다. 역 대합실에서 간단히 아침 요기를 하고 택시를 타고 응시장으로 갔다. 학교 교문에는 이미 긴 줄이 서 있었다. 코로나로 응시표를 보여줘야 들어갈 수 있었다. 교문을 통과해서 다시 긴 줄을 섰다. 발열 검사와 장갑과 규정 마스크 착용, 교실 확인 등이 이어지느라 30여분이 지났다. 그 시간에도 열심히 쪽지를 보며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도 얼른 주머니에 메모해 둔 것이 있어 꺼내 보았다.
교실에 찾아가 앉았는데 갑자기 배가 살살 아파왔다. 얼른 화장실에 다녀 왔는데 조금 있으니 다시 아팠다.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것 같았다. 한 번 더 다녀 온 뒤에야 다행히 괜찮아졌다. 휴대폰과 가방을 제출하고 필기도구만을 책상 위에 두고 시험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데 그 30분이 너무나 길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얼른 끝내고 싶은 마음과 시간이 흐를수록 공부한 내용들이 기억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공존했다.
드디어 시험지가 내 손에 쥐어지고, 떨리는 마음을 심호흡으로 애써 진정시키며 펼친 첫장에 실린 두 문제를 보니 기가 막혔다. 사람들이 왜 이 과목 때문에 떨어진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문제였다. 붙잡고 씨름한들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넘겼다. 시험지를 넘길 때마다 그런 것들이 많아졌고 그나마 공부한 내용들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누구 말처럼 내가 이럴려고 공부했나 자괴감이 들었다. 특히 1월 27일에 발표한 제 5차 국민건강증진계획이 2월 6일자 국가 시험에 출제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코로나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검사 도구로 맞는 것을 고르라는 문제도 황당했다. 욕이 절로 나왔다.
책장을 넘김과 동시에 앞의 내용이 사라져버리는 신기한 경험이 나를 몰아세웠다. 반복만이 살길이다 싶어 팔이 아프도록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하루종일 돋보기 끼고 책을 읽어야 했기에 불빛에 눈은 빠질듯 아팠고 움직이지 않으니 살은 쪄서 허리는 통증이 심하고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비슷비슷한 내용으로 외워야할 것들은 산더미였다. 제일 힘든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부족하고 허술한 표준 교재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오타와 오류, 심지어는 같은 내용이 집필자에 따라 다르게 설명해 놓거나 해서 도무지 무엇을 기준으로 공부해야 할 지 몰랐다. 비대면 수업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이미 수업은 종료가 된 상태라 도움을 바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부족한 보건학이라던가 인체생리학은 무료 인터넷 강의를 찾아 들었고 법규는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법규와 별표까지 확인하며 외워야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라 하나에서 열 개까지 다 해야하는 방대한 양에 머리가 터지는 것 같았다. 새삼 사법고시 공부하는 사람이나 수험생들이 위대해 보였다.
합격자 발표일까지 멍한 기분으로 시간을 보냈다. <대상의 이해>에서 과락만 면한다면 실낱 같은 희망은 보였다. 같은 날 목포에서 국가 고시를 본 큰딸에게 "너만 합격하면 돼!"라며 큰소리를 쳤는데 딸은 가채점 결과 합격이었다. 떨리는 마음 진정이 안 되는데 주변에서 합격 소식이 날아들었다. 특히 맨날 여행도 다니고 노는 것 같던 친구도 합격했다고 했다. 덜덜 떨려서 비빌번호도 자꾸 틀렸다. 내정보관리에 들어가서도 글자를 읽지 못했다. 작은딸이 옆에서 "엄마! 합격했잖아." 했다. 다행히 등불을 지켰다.
첫댓글 축하해요 미숙씨 고시 보느라 그간 고생했네요. 새로운 도전 했나 봐요. 늘 좋은 일만 있기바랍니다.
무슨 시험인지는 모르겠으나 동안 고생 많으셨네요. 축하드려요!
조 작가님! 축하드립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는 중년의 삶, 너무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