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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1월 02일, 성탄 후 제2주, 신년주일]
[*. 성
경, 찬송가를 준비합니다.]
*. 예배의 부름: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2년 1월 2일, 성탄 후 제2주(신년주일) 주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성탄 후 제2주 (신년주일) 주일예배를 시작합니다.
온전하신 하나님, 지난 2021년 한 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2022년도 첫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신년)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경배찬송(일어서서):
찬송가 550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교독(일어서서):
시편 147편 12~20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성경)
12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13 그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네 가운데에 있는 너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으며
14 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15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16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17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
18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19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20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 대표기도: 존 챨스 John Charles
이 새해에 앞에 놓인 모든 가능성들로 인해
우리가 감사하게 하소서, 오, 주여,
그 많은 혼돈과 절망과 두려움에 직면해
지혜와 용기와 분별력을 주옵소서.
우리의 환경 속에서
평화와 믿음과 사랑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시고
우리의 갈망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의지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말씀:
에베소서 1:3~14절입니다. (성경)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 특별찬양:
551장 (오늘까지 복과 은혜)을 찬송합니다.
*. 말씀선포: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성탄 후 제2주 (신년) 주일입니다. 2022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고 주님 안에서 강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주제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인데,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여러분 모두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제 송구영신 예배 때, ‘인생에 있어 때에 따른 아름다움’이란 ‘영원을 사모하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하지 못하게 하신 것(전도서 3:11)’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화두로 삼을만한 복음의 핵심적인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심야의 짧은 시간이라 충분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조금 더 살펴보고 오늘의 본문 말씀도 그런 의미에서 살펴봅니다.
2. 측량하는 언어 vs. 사모하는 언어
측량하는 언어와 사모하는 언어가 있습니다. 측량하는 언어는 사실(fact)을 기반으로 합니다. 사모하는 언어는 소망(hope)을 기반으로 합니다. ‘영원을 사모하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은 측량, 곧 ‘사실(fact)’ 여부의 언어로 측량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니 측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소망(hope)’에 마음을 둔 사모의 언어로 읽으라는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듯이 말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 <말괄량이 길들이기>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1590~1592년 경에 쓰여진 작품으로 당시 16세기의 가부장적 제도하에서의 여성상이 오늘날의 여성상과 많이 달라서 예화로 말씀드리기 적절하지 않습니다 만은 ‘측량하는 언어’와 ‘사모하는 언어’를 이해하기에는 딱 좋은 이야기이기에 말씀드립니다. 성(性)이 불편하신 분은 여성을 남성으로 바꿔 생각을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여기서 남자 주인공 페트루치오가 말괄량이 카타리나에게 쓰는 언어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측량하는 언어가 아니라, 소망을 기반으로 하는 사모하는 언어가 됩니다. 쉽게 말하면, “‘달을 달이 아니고 해’라고 말하면 측량하는 언어에서는 틀린 말이 되지만, 사모하는 언어에서는 맞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은 ‘측량하는 언어’가 아니라, ‘사모하는 언어’로 이해해야하는 것입니다.
[*. 셰익스피어 <말괄량이 길들이기> 줄거리:
“부유층의 가정에서 그 시대의 여성상에 걸맞게 모든 소양을 갖춘 아름다운 여인 '비앙카', 반면 거칠고 난폭하여 남자들이 기피하는 말괄량이 카타리나, 남자들은 모두 비앙카에게만 구혼하지만 카타리나에게는 접근도 하지 않는다. 고민하던 아버지 밥티스타는 언니인 카타리나가 결혼하지 않으면 동생인 비앙카도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때 페트루치오가 나타나 카타리나를 끌고 가다시피 해서 결혼하게 되고 말괄량이에다 고집 센 카타리나를 길들이는 부분이 이 희극의 백미다. 페트루치오가 카타리나를 순종적이고 말 잘 듣는 아내로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이상한 행동을 한다. 카타리나를 위한답시고 하인들에게 맛없는 반찬을 내왔다며 밥상을 물려서 카타리나를 굶기고, 침대가 정리되지 않았다, 베개가 더럽다 온갖 구실을 갖다 대며 시끄럽게 만들어 카타리나를 잠도 못 자게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본의 아니게 남편이 된 페트루치오의 괴상한 짓들을 말리는 과정에서 카타리나는 서서히 순종적인 아내가 되어간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 보게 되고 ‘앞으로는 괴팍하게 굴지 않고 얌전하게 지내야겠다’고까지 생각한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남자들끼리 '누가 가장 남편에게 순종적인 아내인가' 시합을 한다. 남편의 부름에 가장 먼저 달려 나온 아내를 가진 남자가 승리하는 시합이었다. 카타리나가 제일 먼저 페트루치오의 부름에 득달같이 달려 나오는 장면이 연출된다. 카타리나 덕분에 페트루치오는 내기(시합)에서 승리하고 모두 축하하며 해피 엔딩으로 이 극은 마무리된다.-인터넷에서]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2절입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고 답하십니다. 제자들은 맹인이 맹인된 원인, 그 시(始)를 측량하고자 물었으나, 주님께서는 사모하는 언어로 바꿔 말씀해 주십니다.
욥은 자기의 고난이 어디서 오는 지 그 시(始)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하시며, 사람으로 답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질문,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를 시작으로 무수한 질문을 쏟아 내십니다(욥기 38-41장). 하나님의 시(始)와 종(終)은 측량하는 언어가 아니라 사모하는 언어인 것입니다. 측량하는 언어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물어 오시면 사람은 할 말이 없습니다. 욥이 사모하는 언어를 득(得)했을 때 비로소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고백합니다. 사모하는 언어를 알아채면 하나님을 눈으로 뵐 수 있습니다.
처음, 시(始)와 함께, 사람들은 마지막, 종(終)을 궁금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태복음 24:36)”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始)와 종(終)은 사람으로 측량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도 요한(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의 종(終, 마지막)이 궁금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한복음 21:21입니다. “…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절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베드로의 ‘측량하는 언어’와 예수님의 ‘사모의 언어’를 엿볼 수 있습니다.
[*.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을 측량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의 시종은 측량해야 합니다. 가령 어떤 문제를 해결(치료)하기 위해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의 시종(始終)을 알아채는 것은 ‘만물의 때를 따른 아름다움’을 아는 지혜가 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의 지평에서 시종(始終)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는 달리) 영원한 시작도 영원한 마지막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시간 사이, 때 시(時)와 사이 간(間)일 뿐입니다. 뱀이라는 동물이 사단의 형상이기도 하지만, 지혜(와 치유)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 차이가 바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측량하고자 하면 사단의 모습이 되는 것이고, 사람의 하는 일의 시종(始終)을 측량한다면 지혜(치유)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 속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始)와 종(終)의 이야기는 (창조부터 재림까지) 측량의 언어가 아닌 사모의 언어로 알아 채시기 바랍니다. 현재 우리의 삶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과, 사람이 하는 일의 시종을 잘 알아채어 지혜를 얻으시되, 사단의 자리에서는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은 ‘사모’하는 것입니다.
세상 지혜자의 가르침은 시종(始終)을 측량하는 언어로 되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 듯 하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사실, 원래의 화자(話者)는 그런 의미로 말하지 않았을 텐데, 측량의 언어로 바뀌어 전해져 온 것입니다. 궁극적, 마지막 종(終)의 의미로, 예를 들면 ‘지혜자(철인), 군자, 혹은 붇다가 되라’ 하고는 그에 이르는 방식들을 가르침으로 전해줍니다.
(플라톤의 <국가>에 의하면) 지혜자(철인)이 되려면, 태어난 아이들은 6세에 공동 생활로 접어 들어 20세까지 시가(詩歌)로 혼(마음)을 교육하고 체육으로 신체를 단련합니다. 여기서 선택된 이들은 20세부터 30세까지 10년에 걸쳐서 (이데아의 추론에 관련된) 다섯 가지의 예비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 다섯 가지 예비 학문으로 플라톤은 수학, 평면 기하학, 입체 기하학, 천문학, 그리고 화성학을 꼽고 있습니다. (522c-532a) 이 다섯 가지의 예비 학문이 끝난 이후, 여기서 다시 선택된 사람들은 30세부터 35세까지 5년간 변증술을 배웁니다(532b-536e). 변증술까지 마치고 다시 선택된 사람들은 15년에 걸쳐서 실제 생활 속으로 들어가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50세 되는 때에 비로서 철인(나라의 통치자)이 탄생하게 됩니다.
(공자의 <논어>에 의하면) 군자가 되려면, 15세는 학문에 뜻을 둔다 하여 "지학(志學)", 20세는 비교적 젊은 나이라 하여 "약관(弱冠)", 30세는 뜻을 세우는 나이라 하여 “이립(而立)", 40세는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 하여 "불혹(不惑)", 50세는 하늘의 뜻을 안다 하여 "지천명(知天命)", 60세는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한다 하여 "이순(耳順)"이라고 부릅니다. 70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 하여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矩)라고 합니다. 이를 줄여 나이 70은 "종심(從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이르러 군자가 됩니다.
(불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붇다가 되려면, 고집멸도(苦集滅道, ‘고’는 생로병사의 괴로움, ‘집’은 ‘고’의 원인이 되는 번뇌의 모임, ‘멸’은 번뇌를 없앤 깨달음의 경계, ‘도’는 그 깨달음의 경계에 도달한 수행)로 8정도와 6바라밀을 행하면 됩니다.
[*. 8정도는 (1)정견(正見, 바른 견해), (2)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 (3)정어(正語, 바른 말), (4)정업(正業, 바른 행동), (5)정명(正命, 바른 말과 행동), (6)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선을 증대시키고 악을 줄이도록 성실히 노력), (7)정념(正念, 바른 관찰/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관(觀)하라는 것), (8)정정(正定, 바른 선정/ 정신통일(몰입)을 하여 마음을 안정시키고 바른 선정에 이르는 상태)을 말합니다. *. 6바라밀(六波羅蜜)은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 paramita를 소리나는 대로 한자로 옮긴 것으로 ‘넘어가기, 곧 피안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이르기 위한 여섯 가지 방편으로 (1)보시(布施)바라밀(한없이 베품), (2)지계(持戒)바라밀(계율을 지켜 범하지 않음), (3)인욕(忍辱)바라밀(욕됨을 참고 용서함), (4)정진(精進)바라밀(쉼 없는 노력), (5)선정(禪定)바라밀(올바른 마음가짐), (6)지혜(智慧)바라밀(완전한 지혜, 반야)를 말합니다.]
‘철인이나, 군자 혹은 붇다’라는 끝(종, 終)을 정해 놓고 배우며 수행하는 이 가르침은 보기에 참 근사해 보입니다. 원래 측량하는 언어의 특징이 ‘그럴 듯’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들려주는 언어는 측량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사모하는 언어입니다. 측량하는 언어가 아닌 사모하는 언어는 시종(始終)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현재의 ‘지금’에 관심을 둡니다. 시(始)와 종(終)은 과거와 미래입니다. 사모하는 언어는 측량의 언어인 ‘~이 되라’가 아니라 (지금 현재 상태를 나타내는) ‘~하라’입니다. 사모의 언어를 살펴봅니다. ‘나를 따르라, 서로 사랑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심령을 가난하게 하라, 애통해 해라, 온유 해라, 긍휼히 여기라, 마음을 청결하게 하라, 화평하게 하라 …’ 등등입니다. ‘~이 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철인(지혜자)이 되고, 군자가 되고, 붇다가 되라는 세상 지혜자의 가르침에 비하면 굉장히 유하고 나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린도전서 1:25)”는 말씀입니다.
3.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성경은 측량하는 언어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 우리가 쉽게 측량하는 언어로 들리는 것이 있다고 해도 (철인, 군자, 붇다가 되는 것처럼 굉장한 과정을 스텝 바이 스텝으로 거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단순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말씀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요한복음 1:12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서로 사랑하면 됩니다. 요한복음 13:35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나님의 자녀는 자라서 하나님이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는 자라서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측량하는 언어가 아니라 사모의 언어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 3~14절까지를 보면 우리는 그저 (사모하는 언어인)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그의 영광을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3절, 찬송하리로다. 6절,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2절,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절,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6, 12, 14절에서 하나님의 뜻도 사람이 찬송이 되어(진심이라는 뜻입니다)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고, 이에 응해 사람이 찬송이 되어 3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는 것입니다. 이게 다 입니다.
우리는 찬송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합니다. 왜, 뭐 때문에 찬송합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3)’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령한’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측량의 언어가 아닌 사모하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함으로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지난 주 나눈 요한복음 1장에 따르면) 우리는, 빛 가운데, 생명 가운데, 말씀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찬송이 안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이 땅에서 “우리로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4). 여기서 성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사랑’이고, 성령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복은 ‘거룩’이고, 성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흠 없음’입니다. ‘팔-다리’(사랑)와 ‘가슴’(거룩)과 ‘머리’(흠 없음)의 지평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 안에서’입니다.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본성이고, 그 안에서 흠 없음과 거룩함을 지켜나가는 것은 숙제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이 측량의 언어가 아닌 사모의 언어인 이유입니다. 측량하는 언어로 말하면 너희는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 안에서(그런 사람이 돼서) 사랑하라’가 됩니다. 듣기에는 참 좋은 말 같지만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보면 영원과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사람에게 있어 (측량할 수 없는) 측량의 언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 ‘당신이 그리스도이신가?’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측량의 언어로 답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전하라고,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태복음 11:5)”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둘째,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5)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7). 이 죄 사함의 비밀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으로(8) 알게 된 것이며(9), 결국은 천상천하(天上天下), 곧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것(10)을 의미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것, 그리고 그 일에 그리스도인은 기업이 되었고(11), 하나님의 찬송이 되었다는 것입니다(12)
찬송이 되어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것이 다 입니다.
4. 나가는 말
말씀을 요약합니다.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따라, 인생의 때에 따른 아름다움은 ‘영원을 사모하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은 측량하지 못함’에 있습니다. 사실 여부를 다투는 측량의 언어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특별히 영원을 나타내는 시종(始終) 곧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람은 그저 영원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측량하는 언어와 사모하는 언어의 차이를 알아채시고, 측량하는 언어는 사람이 하는 일의 시종에 국한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련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은 측량하지 못하기에 측량하는 언어를 쓰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영원을) 사모하는 언어’를 체화(體化)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이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께, 하나님의 은혜에, 찬송이 되어 찬송합니다. 이것이 다입니다.
주의 나라 온전히 누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찬송:
477장 (하나님이 창조하신)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봉헌찬송(일어서서):
찬송가 50장 3절 부르며 헌금합니다. (찬송가)
*. 봉헌기도(일어서서):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 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비-대면예배로 드릴 경우, (신년)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합니다. 혹은 신협 131-019-734759 (주안대신교회)로 송금합니다.]
*. 교회소식:
*. 찬송(일어서서):
찬송가 552장 (아침 해가 돋을 때)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축도 혹은 주기도문(일어서서):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 주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