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 원망, 미움을 넘어 희망의 빛
김 병노
오늘은 왠지 60년 전 기억이 떠오른다.
아직은 추운 이른 봄 아버지 손잡고 초등학교 소집 일에 갔다 콧물 닦는 손수건 가슴에 단 까까머리 아이들 먼저 온 또래 아이들은 홑바지 속을 파고드는 찬바람을 조금 이라도 피하려고 양지바른 학교 벽에 나란히 해를 향해 서 있었다. 반이 편성 되고 담임선생님 선창에 따라 하나, 둘, 하면 셋, 넷, 외치며 병아리 떼 지어 가듯 이곳저곳 학교생활에 필요한 화장실, 우물 등을 꼼꼼히 알려주고 교실로 들어가 나의 자리에도 앉아 보았다
그 시절로 돌아가니 가슴이 울컥해진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도시락은 한 번도 싸가지고 간 적이 없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육성회비를 못 내면 담임선생님은 앞으로 불러 내 창피를 주며 집에 가서 가져 오라고 할 때에는 못 내고 있는 것도 속상한데 정말 학교 다니고 싶지 않았었다. 집에 가 본들 돈이 어디서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은 품팔이 가고 집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가도 무슨 뾰족한 수가 없었다 지금은 육성회비 그런 것이 없지만 그 땐 없어서 못 내는데 왜 그렇게 선생님이 혼을 냈을까 가끔 생각해보기도 한다
나의 형제 6남매중 형은 장남이라 안 되고 나의 아래로는 여동생이 셋, 막내 남동생이 있는데, 둘째인 나만 아버지는 품팔이 가신 집에 저녁밥을 먹게 해 주었다 아버지는 같은 반 여자 친구 집에 일하러 가는 날에는 그 집에서 저녁밥을 먹는 것이 정말 창피하고 싫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아버지 따라 저녁밥을 먹으러 다녔다. 졸업 무렵 중학교 진학 할 수 있는 친구들은 늦게까지 남아 선생님이 보충 수업을 해 주고 나도 희망을 갖고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울어도 보고 사정도 해봤지만 부모님께서는 먹고 살기도 힘든데 중학교는 꿈도 꾸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졸업 후, 아이스케키 통도 메보고 우체국 급사라는 일도 해보고 조금 더 돈을 벌겠다고 서울로 상경하여 밤을 지새우며 만두공장에서 만두 빚는 일도 했다 그리고 서울 시내 있는 학교 매점마다 빵 배달하는 일도 했다 군대 입영 통지서를 받기 전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입영 후 군대 생활도 녹록치 않았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 일어난 후 군대 생활은 사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유격 훈련도 그때 생겼다. 그렇게 36개월을 만기로 전역했다. 전역 3년 후 지금의 아내를 중매로 만나 결혼 했지만 모아 둔 돈이 없어 아내가 마련한 혼수 장만 비용으로 인천 송현동 달동네 맨 꼭대기에 위치한 자그마한 집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큰 아이가 태어나고 작은 아이 임신 중 일 때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 온 나에게 밥상 앞에서 “여보 우리는 언제 집 장만 할 수 있을까?” 아내가 말을 꺼냈다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어야했다. 아내 역시 푸념하듯 해 본 소리라는 걸 알지만 나는 답변 대신 속으로 결심 했다. 당시는 중동 건축 경기가 좋아 건장한 사람이면 대부분 중동의 건설 노동자로 갈 수 있었다. 나는 H건설사, D건설사 등의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냈다. 가장 먼저 연락이 온 곳은 D건설사였다. 현지에 가서 지켜야 할 법규 문화 행동 등 4박5일 간 교육을 받고, 1980년 구정 하루 전 날 출발 한다고 준비하라는 통보가 왔다. 난 마음속으로 가족과 구정이나 보내고 출발 할 줄 알았다. 아내는 출발 하는 날 큰아이를 업고 임신한 몸으로 배웅했고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니 아내는 손수건을 눈가로 가져갔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난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고 꼭 성공해서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를 만들 것이라는 다짐을 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어느 새 도착한 곳은 ‘리비아 트리폴리 공항’이였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니 훅하는 뭔가가 한국에서 느낄 수 없는 뜨거운 공기가 느껴졌다 그래도 11월부터 4월 초까지 제일 시원한 우기란다. 건설사에서 생산한 십 여대의 버스에 일행을 나누어 태우고 ‘뱅가지’란 지역으로 이동했다. 배정 받은 숙소는 작고 먼저 온 선배들 틈에 끼어 자야했다 그리고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숙소부터 짓는다고 했다. 나는 벽돌을 제작하는 조에 속하게 되었다. 가끔씩 불어오는 모래바람은 옆에 있는 사람이 흐릿하게 보였고 작업을 할 수가 없어 바람이 잦을 때 까지 기다려야했다. 드디어 숙소가 완성 되고 한국인 1500명, 방글라데시인 700명, 태국인 백여 명이 한 울타리 안에 다국적 사람들이 살고 있다 보니 사건 사고도 자주 일어났고 싸움으로 귀국 하는 사람, 아내의 불륜으로 귀국 하는 사람, 도박으로 한국 가족에게 빚을 떠안기는 경우도 있고, 작업복부터 비누, 치약, 휴지, 의무실, 세탁실까지 갖춰져 있는데도, 작업하다 다쳤다는 둥 가족을 속여 돈 보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고스톱을 칠 줄 모르는 나를 제외한 십여 명은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화투와 친한 친구들이 되었다 각 숙소마다 매일 밤 벌어지는 일이다.
처음엔 모든 것이 낮 설고 시차도 있고 현지에 적응 하느라 애를 먹었지만 인내하며 참고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긴 3년을 가족을 그리며 견뎌야 했고 정지된 것 같은 시간은 어느 새 흘러 귀국의 날이 왔다
총무과장은 현장에서 작업하다 부상 입은 동료를 김포공항까지 잘 부탁한다고 하였다. 공항에 도착한 난 동료의 휠체어를 밀고 나오는데,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 옆에 아들은 어느 새 부쩍 자라있었고 중동으로 가기 전 태중에 있던 아이는 태어나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반가움의 눈물인가 앞을 가린다. 동료를 가족에게 인계하고는 우리 가족은 공항을 빠져나왔고 택시 안에서 작은 아이가 “우리 아빠야?”하며 묻는다. 나의 가슴이 먹먹했다. 그동안 아내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한 푼이라도 벌어 살림에 보태려고 온갖 부업을 다했고 나의 월급은 거의 쓰지 않고 모두 모아 두었다. 그런 아내의 도움으로 생애 첫 집을 마련하게 되었고 그리고 두 아이와 가정을 지켜준 아내가 고마웠다.
회사에서 다시 중동으로 재취업을 권유했으나 이번에는 아내가 반대 하고 나섰다. 난 아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 뒤, 한국에서 직장을 구해 30년 가까이 일을 하고 65세에 퇴직을 했다. 아내와 나는 오래전 퇴직하면 각자 하고픈 일을 하자며 약속을 했었다. 그동안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었던 난 잊고 있었던 하고 싶었던 공부가 문득 생각이 났다. 아내는 나의 공부시작을 적극 찬성했고 내친김에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다행이다 싶어 급한 일 아니면 타지 않는 택시를 타고 학교로 갔다.
인천에는 성인 대상으로 한 ‘남인천중고등학교’가있는데 원래는 매년 10월부터 다음 해 신입을 모집한다고 한다 나에게도 운이 있었나 보다
학교에 도착한 난 교무실이 3층에 있다는 안내판을 보고 뛰어 올라갔고 입학담당 선생님의 도움으로 접수하고 집에 오는 동안 이게 꿈인가 내가 이제 학교에 다니게 되다니 오랜 소망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에 가슴이 벅찼다. 그 뒤로 나는 공부에 올인하며 오랜 소망인 작가의 꿈도 키워 나가고 있다.
지난날을 떠올리니 감회가 새롭다. 이제 내 나이 일흔에 누가 봐도 노년의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학생신분으로 당당하게 교정을 밟으며 즐거움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노인이라 하는 나이에 나는 청년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새롭게 비상하려 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자전적 삶의 소설 잘 읽었습니다.
동 시대를 살아온 저로서는 너무나 감명깊게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허리띠 졸라매고 앞만 보고 허덕이던 지난 세월
동시대 사람들은 너무나도 뼈에 저린 추억입니다.
보리피리 14집이 님의 글로 인하여 더욱 빛이 날 것이라 생각하니 기쁩니다
선생님!
머물다 갑니다.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을 도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인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꽃을 알 수 없다고 고백하는 식물학자가 되고싶습니다
별을 알 수 없다고 고백하는 천문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무지의 양은 바다임을 알고 지식의 양은 물방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열심히 공부합시다
축하드립니다.
어릴적 꿈을 이룬다는것은 극히 드문일인데 김병노님 글 속에 빠져 들어 봅니다.
누구나 계획을 세우는건 쉽지만 실천하기는 그리 쉽지만은 않은데
나이에 상관없이 노력이 대단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