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최선 선택하기 / 정선례
입춘을 시샘이라도 하듯이 아침에 어린 눈발들이 하트를 그릴 수 있을만큼 쌓이더니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산과 들, 지상의 모든 경계가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허물어졌으면 좋겠다. 예전 같으면 출퇴근길 걱정으로 눈은 그저 두려움의 대상이였다. 상황이 바뀌니 이런 생각도 하고, 사람이란 참 자기중심적이다.
내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에는 50여 년간 여의도의 세 배에 해당하는 면적에 편백나무 삼나무 백합나무 440만 그루를 조성한 초당림이 있다. 가끔 숨이 턱턱 막히고 생각이 많아지면 집과 가까운 이 숲길을 일주일에 서너 번 찾는다. 이곳에 들어서면 숲이 내뿜는 공기와 나무 사이를 지나는 부드럽고 맑은 바람, 위로 곧게 뻗은 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좋다. 세상의 온갖 복잡함에서비켜나 겨울 나뭇잎처럼 바싹 마른 분주한 일상의 지친 마음을 숲의 품에서 위로 받는다. 강진 3대 물놀이장의 한 곳답게 물이 계곡 따라 철철 흘러서 여름에는 특히 시원하다. 지칠 줄 모르고 흐르던 물줄기도 겨울 가뭄으로 군데군데 고여 산짐승들의 목을 축이고 마른 나뭇잎을 적신다. 숲 가꾸기로 잡목을 베어내서 쭉쭉 곧게 뿌리 박혀 있는 편백나무를 올려다보면 애써 내딛지 않아도 발걸음이 가볍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추운 겨울에는 사람이나 차량이 거의 없어 저절로 무념무상이 된다는 점이다. 다음 생애가 있어 다시 태어난다면 아주 깊은 산속 사철 푸른 한그루 편백나무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인적 드문 숲을 찾아 흙길을 정처 없이 걷는 걸 즐기는 것은 아직 다 치유되지 않은 내 유년의 습한 기억 때문일 거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우리 반에는 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 나도 고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맏딸로서 부모님이나 피붙이들이 마음의 부담이 되어 힘들었나 보다. 근면, 성실하고 교육열이 남달랐던 아버지는 사람은 사대문 안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서울 종로구 이화동으로 이사를 왔다. 부모님의헌신적인 노력 덕분으로 또래 아이들에 비해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내 기억으로 분홍색 사각 책가방에 운동화 블라우스에 치마를 입고 다녔고 흰쌀밥에 보리가 어쩌다 섞여 있었고 용돈도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꺼내 쓰도록 항상 장롱 귀퉁이에 넣어두곤 하셨다.
궁핍하지 않은 생활에서도 내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어둠 속 골방에 웅크린 채 늘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잦은 음주로 술주정이 원인이었다. 언변이 있고 사람 좋아해서인지 회사 동료나 친구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높아서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다. 퇴근 후 일주일에 두서너 번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만취해서 들어오셨다. 문제는 술만 드시면 기분 나빠지는 습관인데, 아버지가 퇴근이 늦어지면 우리는 불안에 떨었다. 우리에게는 화를 내거나 매 한 번 든 적 없었지만 종일 힘들게 일하고 들어오신 아무 잘못 없는 어머니께 괜한 시비를 걸어 괴롭혔다.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우리들은 마음속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서로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사회 생활하면서나 마을에서 힘 있는 사람이 아무 잘못 없는 사람에게 시비를 하면 나는 못 참고 나선다. 마음 넉넉하고 따뜻한 성품에 인자한 사람들과는 잘 지내는데, 트라우마인지 아버지 성향의 남자 어른과는 그러지 못한다. 아버지는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가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지 못하셨다. 마음이 편해야 학업성적도 오르고 미래를 향한 좋은 꿈도 품었을텐데, 내 어린 시절은 행복한 기억보다는 불안과 걱정이 마음속에 가득했다. 청소년기를 지나 지금껏 아버지와 다정하게 대화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때의 아버지 나이보다 세상을 더 살아와서인지 아버지가 가끔 애잔하기도 하다.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형님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불우한 환경 탓인지 보기 드물게 영특했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형님 밑에서 농사일을 해야만 했었다고 한다. 당신이 못 배운 한이 깊어 자식들만은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은 마음이 워낙 강했다. 현실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도 모른 채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지 않았나 싶다. 고백하건대 나 또한 잘한 것이 하나도 없다. 불만을 품고 방황하기보다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동생들에게 아버지께서는 내가 아주 어릴 때 당신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았고 어디든 데리고 다니며 예뻐해주셨다.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나는데 하얀 큰 병에 원기소란 영양제가 있었다. 뚜껑을 열면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여 오도독 깨물어 먹었던 기억이 있다. 밥도 못 먹는 집이 있었지만 우리들은 원기소와 함께 성장했다.모범이 되었으면 아버지도 술을 끊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후회된다.
자식들을 품고 놓지 않으려고 당신 삶은 희생한 어머니께 아무 희망이 되어 주지 못한 그때 그 아이가 안타깝다. 의식 밑에 가라앉아 있다가 떠오를때면 가슴이 쥐어짜듯이 아프고 괴롭다. 지나온 시간은 되돌리지 못한다. 하지만 더 이상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주어진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리라. 사춘기 한 때 생의 끈을 놓아 버리고 싶었을 만큼 아픈 기억, 이제는 오뉴월 햇볕에 바짝 말려 완전히 자유롭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