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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회주의
이스트번 메자로스 지음,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옮김, 한울아카데미 2012.
이용利用에서의 질적 성장: 유일하게 실행 가능한 경제
옛날 옛적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그 이전의 모든 생산양식에 비해 대단한 진보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 역사적 진보는 결국 문제가 있고 실제로 파괴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인간의 사용과 생산 사이의 (오랫동안 널리 통용되었으나, 강제적인) 직접적 연계를 파괴함으로써, 그리고 그 연계를 상품 관계로 대체함으로써 자본은 (자본 시스템과 그것의 ‘의지의 인격화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어떤 인지 가능한 한계도 있을 수 없는) 억누를 수 없을 것 같은 확장이 역동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을 열었다. 왜냐하면 자본의 생산 시스템의 역설적이고 궁극적으로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내적 규정 때문이다. 즉 상품은 “그 소유자에게는 비非사용가치이고 그것의 비非소유자에게는 사용가치이다. 따라서 상품은 모두 그 소유자를 바꾸어야 한다. …… 그러므로 상품은 사용가치로 실현될 수 있기 전에 먼저 가치로 실현되어야 한다.
자본 시스템의 이런 자기 모순적인 내적 규정은 인간의 필요를 (소외를 야기하는) 자본 확장의 필요성에 무자비하게 굴복시킬 것을 강제한다. 그리고 이 역동적인 생산 질서로부터 전반적인 합리적 통제 가능성을 제거한다. 그것은 장기적으로는 위험스럽고 잠재적으로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머지않아 (이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경제발전의 거대한 긍정적인 힘을 (필수적인 재생산 제약이 총체적으로 부재한) 파괴적인 부정성으로 변형시킨다.72-73
체계적으로 무시되고 있고, 자본 시스템의 변경 불가능한 물신숭배적 명령과 기득권 때문에 무시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문자 그대로 결정적인 객관적 한계를 가진 유한한 세계에 불가피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발달의 수 세기를 포함한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그러한 한계는, 실제로 그러했던 것처럼,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무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불가역적인 역사적 시대에 그 한계가 단연코 드러날 수밖에 없듯이, 그 한계가 드러나면 불합리하고 낭비적인 생산 시스템은 아무리 역동적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더 역동적일수록 더 악화되는) 그 영향을 결코 피할 수 없다. 불합리하고 낭비적인 생산 시스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시스템을 보존하라는 다소간 공공연한 파괴적 명령을 냉철하게 정당화함으로써 그 한계를 잠시 동안 무시할 수 있을 뿐이다. 즉 ‘대안이 없다’는 금언金言을 설교함으로써, 또한 ‘대안이 없다’는 식으로 일축함으로써, 그리고 지속 불가능한 미래의 징조를 보이는 매우 명백한 경고 신호조차 필요하면 언제나 야만적으로 억압함으로써 그 한계를 무시할 수 있다.73
잘못된 이론화는 (이처럼 균형을 잃은) 교환가치의 사용가치에 대한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규정과 지배의 필연적 귀결이다. 이는 매우 부조리하게 그리고 맹목적으로 변호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의 조건들하에서뿐만 아니라 자본 시스템의 역사적 선조先祖인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고전적 시대에도 그러하다. 이것은 자본의 지배하에서는 가공架空적으로 무제한적인 생산만이 유일하게 훌륭한 것으로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할 뿐 아니라 그런 가공적으로 무제한적인 생산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추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다음 두 가지에 대한 어떤 보장도 있을 수 없다 할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추구되어야 한다. 즉, ①공급된 상품들에 요구되는 지속 가능한 ‘소유자 교환’이 (애덤 스미스의 훨씬 더 신비한 ‘보이지 않는 손’의 신비한 자비심 덕분에) 이상화理想化된 시장에서 일어날 것이다. ②상품들의 계획된 무제한적인 − 그리고 그 1차적 규정에서 필요와 사용으로부터 유리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제한될 수 없는 − 공급을 생산하기 위한 객관적인 물질적 조건들은, 자본의 사회신진대사 재생산양식의 자연에 대한 파괴적 영향과 따라서 인간 생존 자체의 기초 조건들에 대한 파괴적 영향과 무관하게, 영원히 확보될 수 있다.74
위의 ①에서 지적된, 변경 불가능한 구조적 결함을 교정矯正하는 데 시장이 이상적으로 적합하다는 것은 하나의 불필요한 사후 약방문에 지나지 않고, 수많은 자의적인 가정假定과 실현될 수 없는 규제적 기획을 똑같이 헛되이 수반한다. 교정적인 사후 약방문인 시장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냉혹한 현실은 일련의 극복하기 어려운 적대적인 권력관계들이고, 이 권력관계들은 경향적으로 독점적 지배로 나아가고 시스템의 적대성을 심화시킨다. 마찬가지로 위의 ②에서 부각되었듯이, 무제한적인 자본 확장을 추구하는 것−없어서는 안 될 ‘성장’을 목적 그 자체로 이상화하는 것−의 심각한 구조적 결함 역시 일부 교정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될 때 똑같이 허구적인 사후 약방문에 의해 보완된다. 그리고 그렇게 기획된 처방−19세기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에 의해 이론화된 숙명적인 ‘정상상태’라는 구제할 수 없는 부정성으로 시스템이 붕괴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은 단순히 분배를 ‘더 공평하게’ (그리고 그럼으로써 갈등으로 인해 더 적게 분열되게) 만든다는 희망적인 주장이지만, 생산 시스템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다. 자본의 사회질서의 기본적인 위계적 구조 규정에서 기인하는 이런 이론은 물론 실행될 수 없지만 설혹 실행될 수 있다 하더라도, 생산−그 토대 위에서 자본 시스템의 구제 불능의 분배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모순도 또한 발생되는−의 심각한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74-75
자유주의 사상의 주요한 대변자 중 하나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미래의 ‘정상상태’에 관해 진정한 관심을 가지지만, 그 ‘정상상태’에 대한 처방으로 그가 제안한 것에서는 그 진정성만큼 절망적으로 비현실적이다. 이 문제에 관한 논의에서 그는 공허한 희망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문제는 공교롭게도 자본의 관점으로는 절대로 고치기 어렵다. 그는 ‘필연성이 후손들에게 정상상태를 강제하기 훨씬 전에 그들이 정상상태에 만족할 것을 나는 후손들을 위해 진심으로 희망한다’고 서술한다. 이와 같이 밀Mill의 담론은 온정주의적 설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본의 재생산 질서의 모순들을 전혀 인정할 수 없고, 그가 받아들인 맬서스주의적 진단과 일치하게 인구 증가로부터 야기된 곤란만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부르주아적 자기만족이 명백하게 보이는데, 이는 그의 분석과 온정주의적 개혁 의도로부터 모든 알맹이를 빼앗아 버린다. 밀은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생산 증가가 여전히 중요한 목표인 것은 오로지 세계의 후진적인 나라들에서뿐이다. 즉 선진적인 나라들에서 경제적으로 필요한 것은 더 나은 분배인데, 그에 꼭 필요한 수단은 더욱 엄격한 인구 통제이다.“ 그런데 ‘더 나은 분배’라는 그의 생각조차 절망적으로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밀이 아마 인식(또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분배의 압도적으로 중요한 측면이 생산수단을 자본가계급에게 매우 배타적으로 분배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사회질서에 대한 이런 자기 편의적인 조작적 전제하에서는 다음과 같은 온정주의적 우월감이 항상 우세하게 된다. 즉 “더 나은 심성을 지닌 사람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교육하는 데 성공”하여, 나머지 사람들이 인구 통제를 받아들이고 “더 나은 분배”는 아마도 그런 통제로부터 이루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어떤 해결책도 기대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를 침체된 정상상태로 냉혹하게 몰고 가는 기존의 사회신진대사 질서의 파괴적인 구조적 규정을 바꾸는 것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야만 한다. 밀의 담론에서 자본주의적 천년왕국이라는 유토피아는 −그것의 이치에 맞는 정상상태와 더불어− 계몽된 자유주의적 ‘더 나은 심성’의 훌륭한 교육 서비스 덕분에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가존의 사회재생산 질서의 구조적 규정에 관한 한, 모든 것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76-77
이런 모든 것은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얼마쯤 의미가 있었다. 비록 자본 시스템의 구조적 위기가 극적으로 시작되었고 냉혹하게 심화되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런 의미가 문제시되고 궁극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판명될 수밖에 없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 희망적인 입장의 그런 부분적인 의미마저도 노동의 전략적 이해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개량주의 정치운동에서 연유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는 당초에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그런 느슨한 −처음에는 진정성을 가지고 주장되었을지라도− 사후 약방문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래서 재생산 신진대사의 도전할 수 없는 통제자인 자본의 관점과 기득권에서 유래하는, 채택된 사회적 전제의 내적 논리로 인해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가 실제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발전 도정道程을 끝냈다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즉 스스로를 (영국에서) ‘신노동’으로 (또한 다른 나라들에서 그에 상응하는 것들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리고 기존 사회질서의 매우 제한된 개량에 대해서조차 관심을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말이다. 동시에 진정한 자유주의를 대신하여 매우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다양한 종류의 신자유주의가 역사 무대에 등장했고, 자유주의 신념을 가진 진보적인 과거로부터 한때 주창되었던 사회적 처방들−희망적인 온정주의적 해결책까지 포함한−의 기억을 일소했다. 현대의 역사적 발전의 하나의 쓰라린 역설로서, ‘신노동’형型의 예전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 운동은 (영국에서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선진’ 자본주의와 개발도상 자본주의 체계에서도) 집권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자본 옹호론의 억압적인 신자유주의 국면과 거리낌 없이 일체감을 갖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변형은 명백히 개량주의 노선의 종말을 고했는데, 개량주의 노선은 처음부터 막다른 골목이었다.78-79
경제적으로 실행 가능하고, 또한 장기간 역사적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재생산 질서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필요need와 사용을 (소외를 야기하는) 자본 확장의 필요에 무자비하게 복종시키는 기존의 사회재생산 질서의 자기 모순적인 내적 규정들을 근본적으로 변경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는 지배적 생산시스템의 부조리한 전제조건이 영원히 과거에 귀속되어야 한다(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역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전제조건은 자본의 자기실현 확대를 만들어내고 순환적⋅임의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미리 정해지고 총체적으로 매우 부당한) 소유권 규정에 의해 사용가치가 사용가치를 창출한 사람들로부터 분리되고 그들과 대립하게 만든다. 이 전제조건이 폐기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유한한 가용자원들을 합리적으로 절약하는 것이라는 경제economy의 유일하게 실행 가능한 의미는 핵심적인 지향원리의 하나로 설정되거나 존중될 수 없다. 그 대신에, 절대 무적無敵의 ‘효율성’이라는 자기 신화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제도화된 무책임으로 거듭 드러나는 자본의 사회경제적−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질서에서 무책임한 낭비가 지배적으로 된다. (확실히, 이런 식으로 찬양된 종류의 ‘효율성’은 적대적이고 갈등적인 부분들을 맹목적으로 추동하여 전체를 희생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잠식하는 자본 효율성이다.) 그러므로 소련과 동유럽 정부가 열심히 조장했던 ‘시장사회주의’라는 판타지(환상)는 그러한 전제와 자본주의적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 규정을 수용했기 때문에 굴욕적인 붕괴 형태로 흐지부지 끝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79-80
우리 시대에 진실로 지구적인 규모로 벌어지는 매우 극심한 낭비조차 전혀 제한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지배적인 ‘경제’관觀은 자기 편의적인 동어반복과,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자기정당화를 위해 고안된 (동시에 기각될 뿐 아니라 임의로 조립된) 잘못된 대당對當이나 허위의 양자택일과만 양립할 수 있다. 빤한−그리고 위험스럽게 모두를 감염시키는−동어반복인 성장으로서의 생산성과 생산성으로서의 성장이라는 임의적 규정이 제시되고 있다. 비록 성장과 생산성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제한되고 객관적으로 지속 가능한 각각의 평가를 필요로 하지만 말이다. 당연히, 명백한 동어반복의 오류가 (요구되는 적절한) 이론적⋅실천적 평가보다 훨씬 더 선호되는 까닭이었다. 그것은 자본 시스템을 보증하는 이들 두 핵심 용어의 동일성을 임의로 선포함에 의해, 극히 문제시되는−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 파괴적이기도 한−사회재생산 질서의 자명한 타당성과 초超시간적인 우월성이 그럴듯하게 보일 뿐 아니라 절대 의심할 바 없게 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성장과 생산성의 임의로 선포된 동어반복적 동일성은 ‘성장이냐 제로 성장no-growth이냐’ 간의 똑같이 임의적이고 자기 편의적인 양자택일에 의해 지탱된다. 게다가 이 양자택일은 자본주의적으로 가정되고 정의된 ‘성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자동적으로 예단豫斷된다. 성장 그 자체와 동의어인 영원永遠을 전제前提하는 방식−현실에서는 엄격히 역사적이지만, 그 주장에서는 부조리하게 초超시간적인 방식−에 부응하여 성장은 물신숭배적 수량화로써 이미지가 부여되고 정의된다. 즉 인간의 필요와 사용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본 전제로서 툭수하고 인간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자본 확장의 증대라는 추상적 일반성으로 정의된다.80-81
이 양자택일은, 자본주의적 성장이 인간의 필요와 사용으로부터 교정할 수 없게 유리遊離되는 것−실제로, 자본주의적 성장이 인간의 필요에 대해 잠재적으로 매우 재앙적이고 파괴적으로 대립하게 되는 것−이 은연중에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는 곳이다. 범주적으로 선포된 성장과 생산성의 잘못된 동일성의 뿌리에 있는 물신숭배적 신비화와 임의적인 가정假定이 일단 벗겨지면, 전제됨과 동시에 모든 비판적인 검토로부터 자동으로 면제된 그런 종류의 성장은 인간의 필요에 상응하는 지속 가능한 목표들과 결코 본질적으로 결부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매우 뚜렷해진다. 자본의 사회신진대사적 우주에서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주장되고 수호되어야 할 유일한 연결은, 전제된 자본 확장과 순환적으로 상응하는 (그러나 실제로는 똑같이 전제된) ‘성장’의 잘못된 동일성이다. 심지어 가장 파괴적 유형의 성장이 자연과 인류에게 가져올 결과가 무엇이 될지라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자본의 실질적 관심은 오직 그 자신의 계속 증대하는 확장−비록 그것이 인류의 파괴를 초래한다 할지라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81-82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기왕 어떤 기회에 인간의 필요가 언급될 바에는, 가장 치명적인 암 癌적 성장조차 인간의 필요와 사용에 맞서 그것의 개념적 우선성을 지켜내야 한다. 그리고 자본 시스템의 변호론자들이 『성장의 한계』를 고려하고자 할 때−1970년대 초에 로마 클럽이 광범위한 자본변호론적 선전사업에서 그러했듯이−그 목적은 여전히 불가피하게, 현존하는 심각한 불평등의 영구화이다. 그 방식은 현존하는 문제들을 (멜서스 이래로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이 관습적으로 그랬듯이) 주로 ‘인구 증가’ 탓으로 돌리면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생산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수준에서 허구적으로 (그리고 돈키호테식으로) 동결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인류의 곤경’과 관련된 것처럼 수사적修辭的으로 그럴듯하게 둘러대는, 그런 냉담하고 위선적인 ‘개선 의도’와 비교해보면, (자신이 익숙했던 것보다 다소라도 더 공평한 분배를 진정으로 주장했던) 존 스튜어트 밀의 온정주의적 설교는 급진적 계몽 패러다임이다.82-83
‘성장이냐 제로 성장이냐’의 특징이 자기 편의적인 잘못된 양자택일이라는 것은 ‘제로 성장’의 가정假定이 자본의 사회질서에서 불평등과 고통의 심각한 조건들에 미치는 불가피한 영향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자명하다. 그것은 인류의 압도적 다수에게 (현재 그들이 견디도록 강요되고 있는) 비인간적 조건들을 영원히 선고宣告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제로 성장’에 대한 참된 대안을 창출할 수 있는 때에, 수십억 사람들에게 그런 비인간적인 조건들을 견디라고 문자 그대로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범죄적으로 낭비되고 있는 물적⋅인적 자원들 세계에서, 아미 달성된 생산성 잠재력을 인간적으로 훌륭하고 보람 있게 사용함으로써, 적어도 지구적 궁핍의 최악의 효과를 바로잡는 것이 분명히 실행 가능한 그런 조건들이 현재 갖추어져 있는데도 말이다.83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