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몸치의 댄스일기36(어느 날 나에게 다가온 숙녀..)
2004. 8. 10
올해는 내 시간에 필요한 연습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필라 같은 곳은 요즘 단체반 강습이 많아서 예전만큼 내 개인 연습장으로 부적합했다.
선배님들의 조언에 따라 장사가 잘 안 되는 변두리 무도장(콜라텍)은 6시 이후에는 사람이 없어서 개인연습을 할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무더위가 절정을 이룬 여름날 오후에 한 번 가보았던 그런 곳을 나 홀로 찾았다. 언제나처럼 나의 댄스 가방 안에는 땀으로 갈아입을 셔츠와 댄스화 타올 등으로 인해 부피가 컸다.
연습 복장을 갖추고 신발도 갈아 신고 낯선 사람들 틈에서 몸을 풀고 내 스타일대로 연습에 열중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난 처음부터 그런 것은 신경 안 쓰기로 했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내 연습을 게을리 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후 6시쯤에 들어갔는데 별도로 마련된 댄스스포츠를 위한 공간에는 그때까지 몇 사람의 남녀가 자이브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요즘 나의 연습 스타일은 왈츠보다 탱고와 슬로우 폭스트롯을 집중하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탱고의 베이직 워킹과 세부적으로 잘 되지 않는 개별동작의 연습에 열중하며 온몸은 땀으로 흔건이 젖어 있었다.
내 방식으로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데...
언제부터인지 나를 주시하는 따가운 시선이 육감적으로 와 닿았다.
그걸 의식한 후부터 나도 모르게 힐끔힐끔 곁눈질을 아니 할 수 없었다.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내가 연습하는 플로어의 가장자리 휴식용 간이 의자에 앉은 채 나를 지켜보는 숙녀 한 분.
나도 방향이 그쪽으로 진행할 때는 본의 아니게 그 숙녀에게로 나의 눈길이 쏠렸다.
얼핏 본 첫 인상은 괜찮다 싶은 외모.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큰 키. 댄스의 연륜이 있는 듯한 꼿꼿한 몸의 선. 머리는 길러서 뒤로 묶어 올려 목이 더 길어 보였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의식하니까 더 긴장감이 들었다.
처음에는 탱고 동작만 연습하다가 그때부터는 폭스트롯과 왈츠도 섞어가면서 계속 쉼 없이 내 연습은 중단하지 않았다.
연습의 강도도 높았지만 본시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라 계속적으로 연습에 매달리다 보니까 온몸이 비에 젖은 듯 흔건했다.
플로어 가장자리에 놓아두었던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으면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고정된 시선 때문에 몸 둘 바 모르게 했던 그 숙녀분이 약간 미소를 머금은 듯한 표정으로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난 속으로 약간 설레는 기분이 들면서도 설마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나에게로 오는 건 아니겠지 하면서도 저런 여성과 댄스를 하면 정말 폼 나고 좀 우쭐한 마음은 들겠다 싶은 생각이 마음속으로 들었다.
그래도 생전 처음 본 사람이라 나의 속마음이 겉으로 나타날까봐서 시치밀 떼며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칼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젖은 땀을 훔치며 딴전을 피웠다.
그런데 그 여자 분은 내 곁에 바싹 다가와서 우뚝 선채로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았기 때문에 여자가 나를 내려 보게 된 것이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더 설레고 심장이 뛰는 걸 스스로가 느낄 정도였다.
생판 모르는 여성이 왜 내게 다가왔을까 하면서도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가는 온갖 상상과 희망 사항들.
저 여성이 내 파트너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댄스파티든 댄스 경기대회에 나가도 손색이 없을 듯한 자신감이 들 것 같은 나 혼자만의 상상을 해도 즐거웠다.
나 혼자 속으로는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아닌 척 하며 땀 닦는 수건만 들고 있는데 여자 분이 조심스럽게 나한테 말을 건넸다.
"혼자 오셨어요?" 하고 나한테 물었다. 나는 처음에는 나에게 묻는 줄도 모르고 고개도 못 들고 그냥 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딴전만 피우고 있었다.
계속해서 여자 분이 "굉장히 열심히 하네요" 하면서 말을 건네며 나의 반응을 살피는 듯 했다.
두 번째 말을 했을 때 비로소 나에게 말을 걸었다는 걸 확신하고 나도 모르게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숙녀는 서 있는데 나 혼자 앉아 있기가 미안하다는 생각에서인지 하여튼 어색하고 서먹한 분위기를 만회하고 싶었다.
내가 별다른 말을 못하고 대꾸할 말을 못 찾아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여자 분이 내 심정을 알아차린 듯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상대를 편하게 해주려는 배려가 엿보였다.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정말 마음에 드는 센스감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이 편한 표정으로 묻는 말에 그제야 나도 떠듬거리며 대꾸를 할 수 있었다.
댄스를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냐는 둥 어디서 배우고 있는냐는 둥 통상적인 그런 말들로 대화가 이어졌다.
아직도 다른 몇 커플은 자이브를 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고 몇 사람은 사교춤을 추고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여자 분은 다른 학원에서 개인레슨을 받고 있는데 모던댄스를 한 경력도 몇 년 되었다고 했다.
대화를 좀 하다가 여자 분이 왈츠 한 번 해보자고 했다.
처음 보는 여성과는 아무래도 어색하고 긴장이 되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난 최선을 다해서 베이직 루틴으로 음악 없이 왈츠를 췄다.
낯선 사람이라서 그런지 내 몸도 굳은 듯 했고 상대방도 긴장하고 있는 듯해서 춤은 아주 만족스럽게 할 수 없었지만 바디 컨텍에서 전달되는 느낌은 아주 좋았다.
스텝은 서로 약속되지 않아서 아무래도 아직 내가 잘 리드를 못해서 엉키는 바람에 맥이 중간 중간에 끊어졌다.
그래도 마음이 통해서인지 함께 동호회에서 단체 강습을 받는 어지간한 여성회원들보다는 훨씬 좋았다.
작은 플로어를 세 바퀴 정도 돌아보고 가장자리 의자로 나왔다. 다시 그 숙녀가 나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파트너가 있는지 등 누구랑 주로 연습을 하며 어디서 하느냐는 등등.
또한 서로 상대방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잘 한다고. 숙녀 분은 진심으로 나를 칭찬해주었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리고 숙녀 분이 먼저 앞으로 함께 좀 해볼 의사가 없느냐고 속내를 내보였다. 이미 나도 그렇게 되리라는 걸 직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숙녀가 먼저 그런 말을 하니까 더욱 기분이 좋았다.
솔직한 나의 심정도 그렇게 되길 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숙녀분이 먼저 내 연락처를 물었다.
내 휴대폰 번호를 숙녀의 전화기에 입력시켰다. 상대방도 나의 전화기에다 연락번호를 입력시켜 주었다.
숙녀분이 먼저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혼자 남아서 연습을 늦게까지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주인이 문을 닫을 때가 되어서야 나왔다.
여름밤의 열기가 후끈 얼굴을 스쳤지만 왠지 기분이 들뜨고 상쾌함을 느꼈다.
평소에도 연습을 제대로 하고 난 후의 카타르시스였지만 그날은 좀 더 특별한 기분이었다.
며칠 후에 그 숙녀 분한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나는 의례적인 답장을 보냈다. 몇 번 그런 후에 숙녀 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결론은 함께 댄스 파트너로 연습도 하고 레슨도 받아서 시합도 나가고 댄스를 함께 하자는 뭐 그런 뻔한 제의였다.
처음에는 내 마음이 몹시 설레었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난 며칠 후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유는 언제나처럼 솔로 연습과 혼자서 레슨을 받고 단체반 강습을 받으면서 올해 한 해 더 모던댄스에 심취해서 나만의 즐거움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고정 파트너와 댄스를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나는 이미 겪어 보았다. 처음에는 좋은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모르게 겪는 감정의 변화들...
그리고 남녀가 파트너가 되어서 댄스를 하다가 서로 맞지 않는다는 핑계로 결별했을 때의 그 아픔과 쓰라린 마음의 상처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 분한테서 계속 문자가 오는데도 나는 맞장구를 쳐주지 않고 있다. 스스로 포기할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서...
만남의 즐거움보다 난 헤어짐의 아픔이 더 견디기 어렵다는 걸 절실히 맛보았다.
그 경험으로 이제부터는 가볍고 경박스런 만남은 아예 만들지 않기로 굳은 각오를 하고 있다.
2004.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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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미래를 바라볼수 있는 그대 안목에 대해 경의를표합니다.. 04.08.10 01:17
답글 cbmp
강변마을님 여전히 열심인 모습 보기 좋습니다......즐댄하시길.... 04.08.10 06:37
답글 blue
...'나도 솔로가 좋다'... 하지만 어딘가에 나와 같은 불쌍한 여성이 있다면,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행복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이 또한 예수님의 사랑이며 붓다의 자비심이 아닐까???... 암튼, 열심히 하세요..........^^* 04.08.10 09:42
답글 헵번
강변마을 님의 댄스 열정에 다시함번 경의를 표합니다.또 열중할수 있는 여건도 부럽습니다.하고싶어도 할수없는 사람들도 많거든요.화이팅!!! 04.08.10 12:58
답글 알티
소설같은 땐스일기..이젠 몸치라는 단어는 떼어도 되지 않을까요? 잘 읽고 갑니다// 04.08.10 13:13
답글 백조
저 역시도, 헤어짐의 아픔이 두려워 솔로를 고집합니다. 04.08.11 07:37
답글 지미
저돈디 .... 04.08.14 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