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2편에서 72편까지 제 2권이 시작됩니다. 제 2권은 하나님을 부를 때 주로 ‘엘로힘’이라는 칭호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포로기 이후에 “야훼”의 이름을 극도로 존귀히 여기면서 잘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을 추정을 합니다. 시편 42편은 시편에서 고라 자손의 마스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라 자손은 역대상 6장 22-24절과 31-38절을 보면 성전에서 성전 문을 지키고, 또 노래하는 자들이, 그리고 성전에서 잡무를 맡아서 하던 족속입니다. 마스킬은 교훈이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고라 자손의 시로서 교훈을 주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는 가장 잘 알려진 시 중의 하나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서 갈급하여 이리 저리 뛰어 다니고, 다급하게 찾으러 다니고, 아주 죽을 힘을 다해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영혼이 그렇게 한다고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더 구체적으로 그 갈급함이 무엇을 위한 갈급함인지 2절에서 말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또 그분과 깊은 교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데, 주변 사람들도 놀려댑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 하루 종일 이렇게 놀려 댑니다. 학자들은 이 시가 아마도 이스라엘이 망하고, 성전에서 노래하고, 성전의 일을 감당하던 고라 자손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서 불렀던 노래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나 상황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주변에 사람들이 하루 종일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놀리는 것을 보면 바벨론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잡혀 와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뢰하고 언젠가하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내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로 그렇게 말할 때 그것을 듣고 놀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너의 꼴을 봐라 너희가 지금 망해서 붙잡혀 왔는데, 너의 하나님은 뭘 하길래 도와 주지 않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이렇게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들을 때 마다 슬프고 답답해서 눈물이 아침 저녁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이어지는 4절에 보면 시인은 이전에 동료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면서 안식일과 유월절과 칠칠절, 수장절과 같은성일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예배했던 그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그런 사람들을 성전으로 안내를 했던 그 옛날을 떠올 때 자신의 처지와 상황이 너무 슬프고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지 않은 것 같고, 하나님이 당신을 백성을 버린 것 같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낙담이 되었겠습니까? 그런 자신의 마음에, 자신의 영혼에게 시인은 말합니다. 5절입니다. “ 내여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움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낙담하는 자신에게 스스로 말합니다. 낙담하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나타나 도우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도움 때문에찬송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또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면 자신의 내면이 얼마나 낙심이 되는지 하나님께 토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의 옛 삶을 돌아봅니다. 예전에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님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헤르몬 산은 요단 강의 진원지 입니다. 시냇물을 찾아 헤메이는 지금과 달리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풍부한 물 가운데 시인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곳에 하나님과 동행하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 때에는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보여주시고 밤에그분을 늘 찬송하고 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낮을 가리셔서 갈급하게 찾아도 응답하지 않는 상황에 있고, 종일 사람들이 너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조롱하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묻습니다.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습니까?” 라고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 답답하고 하나님을 향한 갈증이 너무 심한데 하나님은 역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옆에서 계속되는 원수들의 조롱은 뼈를 찌르는 듯 한 고통을 줍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이렇게 조롱에 둘러 쌓인 상황 속에서 시인은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위축되고, 두려워하고, 낙심이 되는 상황 속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영혼에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여기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기대를 하라는 표현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기대하라는 표현입니다. 지금은 비록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시지 않고, 마치 당신의 백성을 버린 것 같고, 예전에 하나님께서 함께 했던 한 참 좋았던 때와 달리 우리와 멀리 계신 것 같지만, 낙심하고 두려워하는 자신의 영혼에게, 두려워하고 자신에게 하나님을 기대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나타나셔서 도우심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다시 찬송이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다시 굳건하게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주변에서 암암리에 너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많은 불신자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또 사상가들이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기독교인들을 맹목적이고 문명적이지 못한 사람들도 치부하기도 합니다. 대놓고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지키는 신념들, 주일을 성수하고, 기도하고,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고 은근히 조롱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번 본때를 보여주셨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또 우리 스스로를 보면 신앙의 슬럼프 때문에 하나님과 한 참 좋았던 그날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만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과 친밀감이 깊었는데, 어느 새 부터 그런 것이 점차 희미해지고, 무감각해 집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우리 마음이 얼마나 낙심이 되고 불안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시인은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낙심하고 불안해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갈급해 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기대하라고 합니다. 결국에 그분이 오셔서 도우실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실일들을 기대하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슬럼프에 있고,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 같이 느껴지지만, 언젠가 우리에게 다시 힘을 주시고다시 찾아오셔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하나님이 어디에 있냐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를 통해서 선포하게 하실 것을 기대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국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의 갈망에, 우리의 목마름에 응답하셔서 영원한 생명수를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면좋겠습니다. 원수들의 조롱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우리 주변에서 늘 울려 퍼지는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