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듯 흐르는 이야기
지은이:벌마로(김윤식)
훈이오빠 기억이 영우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지워질 무렵 회사동료들과 음악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 겸 약간의 알코올로 몸과 마음을 적신 그녀들이 음악을 들으며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소재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취기가 몸을 휘감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감성적인 분위기에 여자들끼리 앉아 있는 모습은 뭇 남자들의 시선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그녀들 입장에서는 남자들의 접근을 은근히 기대하기도 하고 때론 불편할 때도 있다. 반면 남자들 입장에선 이 시간쯤이 여자들에게 접근해서 성공률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황금 같은 시간대이다.
그때 한 무리의 남자들이 다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영우일행이 앉아있는 테이블 대각선 방향 뒷자리에 앉았다. 영우가 슬쩍 곁눈질로 그들을 보았다. 그중에 낯익은 얼굴이 스쳤다. 다시 확인할 생각에 고개를 돌리려다 그만두었다. 잘 못 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주 앉아 있는 미스 김 언니가 그들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어머 동국 씨,,,”
“네! 안녕하세요”
영우가 고개를 돌려서 그들을 보았다.
“어머! 동국 씨였구나,,,”
영우가 아는 체를 했다. 지난번 종규오빠네서 보았던 얼굴이다.
“어쩐지 영우 씨 같더라,,,”
동국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영우와 미스 김 언니도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종규오빠하고 어울릴 때 만났던 동국 씨를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됐다. 우연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부평번화가의 좁은 바닥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미스 김 언니는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전부 알고 있었다. 하기야 영우보다 훨씬 먼저 사회에 진출했고 살고 있는 집도 이 근처이다 보니 부평의 번화가에서 미스 김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비슷한 나이 또래에 알려진 인물이다.
미스 김 언니는 회사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서 다른 큰 회사 부장님보다도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있었다. 언니의 돈 씀씀이는 주변의 일행들로 하여금 밥값이나
유흥비 걱정을 덜어 주었고 언니를 알고 지내는 것 만으로도 존재감을 한층 높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동국 씨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친형이고 이름이 동일 씨야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부평시장에서 식료품 하는집 아들, 그 옆에는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아무개,,,”
미스 김 언니는 영우에게 작은 목소리로 그들의 신상에 대해서 말해 줬다. 동국 씨 형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었는데, 군대를 제대 한지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아서 취직이 될 때까지 부평시장에서 한복점을 크게 하는 누나네 가게에서 심부름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영우는 그다지 관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서 무심히 들어주었다. 미스 김 언니는 동료들에게 말을 하면서 연신 남자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우는 등 뒤에 남자들이 신경 쓰였다.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시선을 감각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마 그들도 그녀들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매화꽃 피는 3월의 어느 날 동일 씨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동일 씨를 처음 소
받았을 땐 영우의 가슴이 피폐했고 이별의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했다.
“전동일이라고 합니다.”
“아! 네, 동일 씨. 저는 나영우예요”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동국 씨 하고 똑 닮았네’ 영우는 앞에 앉아 있는 동일 씨
얼굴을 보며 동국 씨하고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만남은 미스 김 언니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영우가 훈이를 잃고 슬퍼하는 모습이 안타깝게 보였는지 새로운 인연을 맺으면 금세 잊힐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 따른 배려였다. 그렇다고 무작정 연결을 해준 것은 아니고 동일 씨의 인간 됨됨이도 알아보고 집안 내력도 확인한 후에 내린 결론이었다.
언니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깊은 고민 끝에 이루어진 소개팅인데, 영우의 입장도
충분히 반영된 만남이다. 미스 김 언니는 현재 군에 가 있는 애인 이전에 만나던
남자와 실연의 아픔을 심하게 앓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면서 얻은 교훈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급적 빠르게 새로운 인연을 맺는 거였다. 실연을 겪은 여자의 아픈 마음을 최대한 빨리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만남이고, 그것이 최고의 명약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영우에게도 그런 방법을 쓴 거다.
영우는 미스김 언니의 제안을 처음에는 거부 했었다. 이 세상에 없는 훈이오빠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입장이고 지금의 심정은 어느 누구 하고도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추후도 없었다. 하지만 거듭되고 친절한 강요에 결국 언니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오늘 이렇게 동일 씨와 마주 앉게 된 거다.
지난번에 우연히 마주쳤을 땐 자세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은 좀 자세히 확인
하려는 생각으로 외모부터 말투며 사소한 행동까지 관찰했다. 영우가 오늘 남자를 만나며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 아마 몇 번의 연애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 습성일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다른 이의 소개로 만나게 되는 상대인지라 영우 자신도 모르게 그런 행동이
나왔을 것이다. 어쩌면 아주 중요한 이유는 아닐지라도 결혼을 염두에 두고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이 미스 김 언니의 주선에 의해 이루어진 연출이기는 하다.
처음에 소개팅 제안을 받았을 때는 자신을 위해서 마음 써 주는 언니가 고맙기도
했고 한편으로 무턱대고 거절만 하는 건 언니를 대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약속 장소에 나가기는 하더라도 그냥 얼굴만 보고 커피만 마시고 나오려고 했었다.
동일 씨와는 처음 만남 이후 예의상 몇 번의 만남이 이어졌고, 그런 만남은 깊은
사랑의 감정 없이 무미건조하게 흘러갔다. 그러다 보니 간혹 갈등과 번민도 뒤따랐는데 다행인지는 몰라도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 훈이를 향한 슬픈 기억을 차츰 잊을 수 있었다.
훈이오빠를 잃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토록 가슴 아파 했던 기억이 쉽게 지워지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훈이와 연애의 기억은 깊이 새겨져 있었지만, 잊을 수없이 사무치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동안 사랑했고 그리워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별을 한지 얼마나 됐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있는 자신이 이상했다. 게다가 그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국 씨의 형과 연애를 한다는 게 꺼림칙하기도 했다. 하물며 동국 씨는 영우가 훈이오빠와 연애를 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나중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아니 오해가 아니라 사실이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분란의 여지가 있을게 분명했다. 영우로서도 비밀을 숨기고 연애를 하려니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일까 약간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만남을 하게 됐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건 동일 씨가 영우보다 4살이 많은 오빠뻘임에도 불구하고 오빠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영우는 두 차례 연애도 했었고 이별의 아픔도 있었던 터라 스스로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자신만의 자존심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오빠라는 호칭을 쓰고 싶지 않았다. 성인으로써 동등하게 연애를 하고 싶었다.
이런 모든 불편한 조건들이 바닥에 깔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주보고 대화를 하다보니 어느새 그녀에게 연애감정에 불을 지피고 있었고 그녀가 먼저 만남을 위해 연락을 취하게 됐다.
동일 씨와는 일부러 만나기 위해 약속을 정하거나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어차피 부평거리에 나가면 우연히 마주칠 때도 있고 앉은자리에서 불러도 몇 분 안에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기 때문에 기다림의 설렘이라든가 기대감 같은 느낌은 없었다. 그냥 만나면 반갑고 즐거운 마음이 전부였다.
그러나 만남이 이어지면서 동일 씨는 영우의 과거 훈이와의 관계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눈치가 보였다. 어쩌면 동국이가 말을 했을 수도 있고 자연스럽게 알게
됐을 수 도 있겠지만 동일 씨와 만날 때마다 눈치를 살피게 되고 당당함이 숨어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긴장 속에 조금씩 사랑을 쌓아가던 어느 날 커피잔을 앞에 놓고 동일 씨가 느닷없이 누나얘기를 꺼냈다. 누나가 무속 신봉자인데 영우와 자신의 궁합이 너무 않
좋게 나와서 헤어지라고 종용한다는 거였다. 동일 씨가 하는 말은 정말 어이가
없어서 얼굴도 마주 보기 싫어졌다. 더욱 기분이 나쁜 이유는 지난번 만날 때 자신의 생일을 물어 보길래 아무 생각 없이 가르쳐 줬더니 기껏 누나한테 알려서
궁합이나 보려고 물었던 거였다. 한 가지 더 기가 찬 것은 두 사람이 궁합만 어긋나는 게 아니라 영우가 밖으로 나돌아 다닐 여자라서 안 된다는 거였다. 영우가 감정을 억누르며 입을 뗐다.
“동일 씨 우리가 언제 결혼 얘기한 적 있어? 무슨 궁합을 보고 그래”
“나는 영우하고 결혼까지 생각 했었어”
동일 씨는 변명처럼 얼버무렸다. 영우는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자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씩 정을 쌓아가던 영우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은 동일 씨는 누나의 명령과 영우와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이 일었다. 영우도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회사에 출근을 해서도 온통 동일 씨가 했던 말이 떠올라 괴로웠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동일 씨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고 영우는 받자마자 끊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미스 김 언니가 보다 못해 한마디 거들었다.
“미스 나 그러지 말고 일단 만나서 그 사람 속마음도 들어보고 결정해야지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끌고 갈 거야?”
미스 김 언니는 자신의 소개로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지경까지 된 것이 자신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아마 둘 사이가 잘되기를 바랐을 터인데 어이없는 이유로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이 못내 안타까운 심정이었을
것이다. 영우도 미스 김 언니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영우자신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쯤에서 못 이기는 척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볼 참이었다는데 때맞춰 미스 김 언니가 불씨를 지펴준 모양새가 된 거다.
약간은 굳은 표정으로 동일 씨를 만났다. 보고 싶었던 얼굴을 보니 순간 안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부평역 광장에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안기고 싶었던 감정을 접고 한동안 말없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자주 가던 음악다방에 커피 잔을 앞에 두고 복잡한 심정을 가다듬으며 영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어”
생각지 못한 말에 동일 씨가 놀란 눈으로 영우를 바라보았다.
“아예 나를 멀리하려는 줄 알았어”
“어떻게 그래,,, 나는 그렇게 모질지를 못해”
영우는 그동안 못했던 자신의 감정을 얘기했다. 갑자기 결혼이라는 말에 놀랐고
누나가 반대한다는 말에 더 놀랐다며 결혼은 나중 문제고 우리 만나는 것조차도
누나의 동의를 구해야 되는 집안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동일 씨는 납득이 될 만한 대답을 못하고 어물거렸다. 영우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누나를 설득하던지 아니면 본인 뜻대로 밀어 붙히겠다는 남자의 듬직한 의지를 보여 주든지, 무엇이 됐든 확실한 결단을 해 주기를 바랐다. 동일 씨는 그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고, 오히려 집안 분위기만 걱정하고 있었다. 역 광장에서 잠깐 울렁였던
사랑의 감정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영우는 이런 남자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기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기대를 하는 건 시간 낭비라고 믿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일 씨와의 짧은 인연은 이렇게 끝났다.
동일 씨와 헤어진 뒤 가끔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견딜만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며 지낼 수 있었다. 하루를
바쁘게 지내다 보면 잡념이 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영우는 어느 때보다
회사일에 충실했고 즐겁게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