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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없는 일탈
지은이:벌마로(김윤식)
남편이 잘 다니던 직장을 접고 부부가 함께 제과점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 부부는 결혼 후 줄곧 영머가 직장만 다니며 생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다 제과점을
하는 친구의 권유로 영머가 제과학원에서 빵 굽는 기술을 배워왔다. 하지만 영머가 배운 제과기술로 혼자 빵을 굽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전문 기술자를 고용하기로 하고 초기 비용은 영우가 결혼 전에 아버지를 도와서 일하며 벌어 놓았던
돈을 가져다 쓰기로 했다. 영우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무슨 일이 있을때 마다 아버지에게 손을 벌렸었다. 결혼 전에 아버지 사업을 도와서 일을 하기는 했어도
자주 손을 벌리다 보니 이번에는 죄송한 마음이 든다.
계획을 세운 영우네 부부는 당장 행동에 옮겼다. 목 좋은 곳에 점포를 계약하고
인테리어를 하고 빵 굽는 기계를 들여놓고 광고 전단지까지 제작하는데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제과기술자는 제과학원 관계자를 통해서 섭외했다.
영우부부는 개업 전날까지 한치의 착오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영우부부는
부푼 기대를 안고 제과점을 차렸다. 내 가게가 생겼다는 현실이 커다란 행복감을
안겨 주었다. 개업하는 첫날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과 친척, 친구, 동네 주민들이
오셔서 축하와 함께 한 보따리씩 빵을 사갔다. 첫날의 매출은 예상보다 많았다.
어젯밤 걱정과 기대로 잠을 설쳤던 부부는 피곤함도 싹 사라지고 매우 흡족했다.
개업 첫날부터 한동안은 제법 손님도 많이 오고 매출도 늘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지나고 충분한 경험이 쌓였다고 생각한 영우네는 안양에 분점을 내고 두 군데 빵집을 운영하며 하루도 쉬지 않고 바쁘게 살았다. 영머는 부천에서 안양으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며 일을 했고 영우는 부천 가게에서 빵을 팔았다. 간혹 안양가게가 너무 바쁠 때는 영우도 안양으로 파견 나가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 부천 가게에서만 있었다, 영머는 밤늦게 집에 왔고 그들 부부는 늦은 밤
잠시 얼굴 보고 다음날 또 각자의 일터로 나가기를 반복하는 날들이 계속 되었다.
하루의 일과 중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하는 시간은 늦은 저녁이 전부였다. 거의 얼굴 볼 시간이 없다시피 하는 생활인 것이다.
그렇게 몇 년간 빵가게를 운영하면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영우에게 낮 시간은 잠깐씩의 여유가 생겼다. 안양가게보다는 영우가 관리하는 부천가게가 상대적으로 손님이 적게 오는 편이라 한가한 시간 때는 종업원한테 가게를 잠깐씩 맡기고 근처에 있는 미용실로 놀러 가기도 했다.
미용실에서는 이웃들도 많이 만나고 많은 정보도 얻을 수 있어서 그녀가 빵 판매
전략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됐다. 여러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 사귀는 것도 좋았고 미용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은희라는 이름의 미용실 원장은 진짜 본명인지 예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엇보다 활발하고 거짓이 없는 탓에, 사람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영우로서는 그런
성격의 은희와 가까이 지내기에 부담이 없기도 하거니와 나이도 비슷하고 서로 말이 통해서 마치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금세 가까워 졌다.
영우와 은희는 서로 왕래하며 친분을 쌓았고 시간만 나면 서로의 가게를 들락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요 며칠사이 영우네 빵집에 손님이 확 줄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영우는 심란한 마음에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고 미용실 은희네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미용실은 바빴었는지 은희도 오지 않았다.
어느 날 심란한 마음으로 테이블에 앉아서 티브만 올려다보고 있는데, 미용실에도 손님이 없었는지 오랜만에 은희가 영우네 빵가게로 들어왔다. 영우는 소보로빵과 우유를 꺼내서 은희 앞에 놓으며 요즘 들어 손님이 줄어서 걱정이라는 푸념을 하기 시작했다. 은희가 짐작했다는 표정으로 영우를 바라봤다. 은희의 표정을
눈치로 알아챈 영우가 물었다.
“혹시 우리 집 빵이 맛이 없데,,,? 누구한테 그런 말 들었어?”
“사람들이 우리 미용실 와서 하는 말인데, 너네 빵 기술자 바뀌고 나서 빵맛이 예전만 못하데,,, 근데 그건 중요하지 않아 더 큰 이유가 있는 거 같아,,,”
며칠 전 공장장이 새로 오고 나서 빵맛이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던 영우가 ‘역시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떡였다.
“빵맛은 그렇다고 치고 더 큰 이유가 있다는 말은 또 뭐야?”
“너! 저 아래쪽 버스정거장 앞에 빵집 새로 생긴 거 몰라? 그 집 빵맛이 좋다고 하던데,,, 새로운 빵도 많이 진열돼 있고,,, 사람들이 그곳으로 많이 가는가 봐,,,
“난 몰랐어. 그랬구나, 여기 인구도 많지 않은데 빵집은 왜 또 생기는 거야, 너무하네,,,”
영우가 허탈한 기분에 들고 있던 리모컨으로 티브이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화면이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은희가 소보로빵 한 조각을 입에 문채 영우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너 춤출 줄 알아?”
“무슨 춤”
“사교댄스! 우리 손님도 없는데, 낮에 잠깐씩 나가서 춤이나 배우러 다니자”
은희는 영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요즘 댄스가 유행이래. 춤이 몸매 관리에도 최고란다. 맨날 가게에만 갇혀 있으니 너무 답답하지 않아?”
뭐 이런저런 얘기로 영우를 유혹했다. 은희의 제안에 처음 영우는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하지만 은희의 계속된 설득에 영우는 귀가 솔깃해졌고 춤을 배워보고 싶은 충동이 저 밑에서부터 올라 왔다.
요즘 들어 장사도 안 되는데 은희 말대로 하는 것도 기분전환에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의자를 끌어 은희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춤 배우는 데는 어디며 비용은 어떻게 되고 잘못되는 일은 없는지, 궁금한 것을 꼬치꼬치 물었다. 은희는
자신이 알아본 내용을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은희의 설명에 안심을 하면서, 속으로 반쯤 결정을 내렸다. 다만 조금 걱정이 되는 것은 은희의 활달한 성격은 영우도 친근해서 좋지만 날라리 성향이 살짝 있어서 너무 가까이하기엔 걱정이 된다는 점이다. 사실 은희는 날라리 성향만 빼면 정말 좋은 친구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 친구인건 틀림없다. 인정이 많아서 좋은 물건이나 먹을 것이 생기면 영우에게
먼저 가져다주곤 했었고, 영우도 그런 은희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영우가 은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영우가 그렇게 빨리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그녀도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할 만한
게 없을까 하고 찾던 중이었고 평소 사교댄스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동안 마땅히 기회도 없었고 알 수 없는 불안함이 행동으로 옮기는데 망설이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마음에 결정을 한 그녀들은 댄스교습소에 등록하기로 하고 부천역 근처에 있는
댄스교습소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댄스교습소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밖에까지 들리던 음악소리가 문을 열자 더 크게 들렸다.
10여 년 전 고고장에서 놀던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지금과 다른 느낌이 있다면
10년 전에는 고고음악이었고 지금은 트로트 음악인 것이다.
교습소 안에는 남녀가 한 쌍이 되어 서로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서로 말도 주고받지 않는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스텝이 착착 맞았고 남자의 신호에 맞춰 여자가 자동으로 몸을 돌리고 움직였다. 그녀들의 눈에 신기해
보였다.
그녀들은 등록을 하고 바로 첫날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첫날 기본 스텝을
시작으로 맛보기부터 배우기 시작한 그녀들은 다음날부터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유연성이 남보다 부드러운 영우는 시작한 지 열흘쯤 지나자 금방
스텝을 밝고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나면서 어느 정도 흉내를 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영우보다 먼저 배우기 시작한 남자와 파트너가 돼서 춤을 추게
되었다. 상대 남자는 정곤이라는 이름의 포근한 매력을 지닌 교육자이다. 부천의
모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아내도 교사여서 지방에서 근무 중이라 현재는 부부가 별거 중이란다. 그 남자는 춤추는 몸놀림이 부드러웠고 지긋한
눈빛은 영우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이 자주 손을 잡고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자연스레 서로의 마음이 닿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곤의 데이트 신청을 영우는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이미 정곤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녀는 정곤이 이끄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술기운도 영우의 일탈에 한몫했다. 정곤과의 만남은 시간이 지날수록 잦아졌고 댄스교습소에서 춤 연습이 끝나면 근처의 술집이 다음 코스처럼 돼 버렸다. 그럴 때마다 남편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루는 영머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안양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왔다. 영우도 조금 일찍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영머와 술을 마시는 기회를 만들었다. 정말 얼마만인가. 감개무량 했다. 영우가 먼저 남편의 술잔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자기 요즘 고단하지?”
남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 정도는 누구나 견디며 살아야지 편하게 만 살려고 하면 뭐 되겠어”
영우는 그런 남편이 듬직하고 고마웠다. 한편으로 요즘 자신의 행동에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입 밖으로 꺼낼 만큼 용기가 나지를 않았다. 잠깐 복잡한 심정을 정리하는 사이 영우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며 남편이
말을 했다.
“그런데 요즘 당신 어디를 그렇게 자주 가는 거야. 귀가 시간도 늦는 날이 많아
지고,,,”
순간 변명거리를 찾으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정신을 가다듬은 영우가 사정하는 말투로 말했다.
“나 요즘 뭐 배우러 다니는데, 당신은 그냥 모르고 지났으면 좋겠어. 그렇게 해
주면 않될까,,,”
“요사이 가게도 직원한테 맡기고, 한번 나가면 밤늦게 들어오고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 하다가도 하루 종일 가게에서 시달렸으니 기분이라도 풀려고 친구들하고 어울리다 늦는 거겠지, 이렇게 생각 하면서도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물어볼
참이었어, 혹시 내가 상상하기 싫은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겠지?
순간 뜨끔했다. 이 순간 무슨 변명을 만들거나 핑계를 대는 건 오히려 갈등만 키우게 될 것이 뻔했다. 차라리 감정에 호소하는 게 그나마 부드럽게 넘어 갈수 있는 방법 일게다.
“미안해 여보. 내가 당신을 믿듯이 당신도 나를 믿어줘. 그냥 모른척 만 해주면
아무 일도 없을꺼야”
그녀는 자신의 감정까지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무던한 성품의 남편이 모른 척 묵인 만 해 줘도 좋겠다고 은근히 기대를 하며 간절한 눈빛으로 영머를 바라보고 있다.
무언지 모를 의구심에 굳어 있던 표정을 바꾸며 영머가 대답을 했다.
“당신을 믿어 볼게,,, 그래도 몸조심하고 다녀. 세상이 여간 험 해야지”
“고마워 여보,,, 미안해,,,”
결혼생활 최대의 위기를 맞은 영머는 지금 이 마당에 뭘 어떻게 말을 하고 행동해야 옳은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정말 자신의 예감이 맞았고 또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면, 앞으로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영우를
믿고 기다리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는
아내의 의중을 알거 같아서, 그래서 아내의 약속을 믿기로 한 거다. 결과적으론
영우가 원하는 대답을 한 거다.
영머는 평소 자기의 아내가 연애도 한번 못해보고 자신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연애를 시작할 때 영우의 나이는 고작 스물두 살 밖에 안 됬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영우가 자신은 남자경험이 한 번도 없었고 연애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으니 그렇게
믿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영우에게 늘 고맙게 생각했고 한편으로 미안한 마음도 갖고 있었다.
영우는 바쁜 하루를 마무리하고 저녁이 되면 피곤할 법도 한데, 알 수 없는 마법에 이끌리듯 정곤과의 테이트 약속을 했다. 물론 정곤이 적극적으로 영우를 만나고 싶어 했고 거절을 못하는 영우의 성격이 맞아떨어진 이유가 컸지만 지난번 남편과의 대화에서 믿음과 묵인이 한몫 했다.
영우와 정곤 두 사람은 댄스교습이 끝나면 계곡물이 풍부하게 흐르고 경치가 좋은 양주 장흥유원지를 자주 간다. 영우네 가게에서 승용차로 한 시간쯤 달리면
갈 수 있는 곳인데, 최근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신흥 데이트 장소로 떠오르는 곳
이다. 여기는 갖가지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계곡을 끼고 있어서 풍류를 즐기려고
찾는 사람들도 많지만 곳곳에 여관도 많이 있어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둘만의
밀회를 즐기려는 커플들이 사랑을 나누기에 안성맞춤이다. 영우처럼 조용히 낭만을 즐기면서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아베크족들이 일 년 내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더구나 하루 종일 가게에 갇혀 있던 영우에게 이곳은 신선한 활력을 주는 곳
이기도 했다. 상큼한 바람과 맑은공기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 물소리는 해방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영우는 정곤을 만날 때면 장흥유원지로 가자고 한다.
두 사람은 어쩌다 시간에 여유가 있거나 또는 주말 일때는 장흥유원지를 이용했고 시간이 많지 않은 평소에는 주로 정곤의 하숙집 근처의 술집에서 만남을 가졌다.
오늘 두 사람은 정곤의 집 근처 술집에서 만나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이 놓여 있다. 소주는 정곤 씨가 마시고 맥주는 영우가 마시는 술이다. 술기운이 오르자 정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우도 따라 일어났다. 적당히 술기운이 오르면 다음 목적을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두 사람의 패턴은
거의 매번 비슷했다.
술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정곤 씨의 하숙집에 왔다. 이곳 하숙집 주인은 원래 정곤 씨의 아내를 알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영우가 들락거리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두 사람 관계를 눈치챘을 수도 있다. 혹시 정곤 씨의 아내에게 언질이라도 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도 했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이 있고 난 이후
부터 두 사람은 그 정도의 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처음 정곤 씨의 집에 들어갈 때는 하숙집 아주머니와 마주칠까 봐 조심스럽게 출입했었는데, 어느 날 무심결에 마주친 이후로 조금은 배짱이 생겼다. 그날도 얌전히 정곤 씨의 방에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마당에 널어놓은 생선을 훔쳐 먹으러 온
고양이가 놀라 ‘야옹’하고 소리를 내며 도망가는 바람에 주인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나오면서 마주치게 되었던 거다. 그런데 그 후에 염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때 영우가 잠시 생각난 것이 있었는데, 왜 자신은 하숙집에 사는 남자만
만나게 되는 걸까, 그리고 늘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는 만남만 하는
걸까? 물론 그리 오래 고민을 하지는 않았지만 살짝 의문을 품어 봤었다.
정곤의 집은 언제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정곤 씨 성격이 그대로 반영 돼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남자 혼자 사는 집 치고는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영우는 정곤의 방에만 들어서면 마치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이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녀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든가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한 사람의 아내로서 최소한의 신뢰를 지키려던
의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마는 자신을 발견 한다. 그녀는 이 남자를 마주하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하고, 아주 깊은 곳에 잠재 돼있던 욕망이 어느새 꿈틀 대며 살아나고 있었다.
그 느낌은 사랑인가 욕망인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반응하는 대로
몸을 맡기기로 했다.
‘사랑이면 어떻고 욕망이면 어떤가, 지금 이 순간 이 남자와 함께 있어서 좋고 사랑하고 행복하면 그만이지’
그녀는 오늘밤 여자의 정절 같은 거추장스런 옷들을 다 벗어 버리기로 했다. 오직 모든 것을 이 남자에게 던지고 이 남자의 열정적인 사랑 행위를 온몸으로 느끼기로 했다. 남자의 손길이 닿는 순간 이미 그녀의 몸은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이 남자와 격정의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다가 돌아 앉아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 이 사람 벌써 깨어있었네, 어젯밤 피곤했을 텐데 나만 정신없이 잤나 보네’
영우는 그대로 누워서 남자의 넓은 등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남자의 넓은 등을 뒤에서 안으며 자신의 가슴을 남자의 등에 밀착 시킨 채 남자의 귀에 대고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제 집에 가야돼. 집에 아이들도 걱정되고 남편도 그렇고...”
남자는 아무 말이 없다. ‘왜 말이 없지, 이 남자도 아내를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럴테지. 이 사람도 가정이 있으니까,,,’
정곤이 자신의 차로 집에까지 데려다 준다는 것을 마다하고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택시가 됐든 버스가 됐든 먼저 오는 차를 타려고 기다렸다. 정곤의 차가 떠나고 곧바로 버스가 도착했다. 그녀는 무거운 몸을 버스에 실었다. 출근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라 좌석은 거의 비었다. 평소에 그녀는 앞자리를 선호했는데 오늘은 맨 뒷자리 창가 쪽에 앉았다. 모르는 사람과 마주치는 시선이 어쩐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죄짓고 들킨 기분이랄까, 어쨌든 누군가 내 모습을 보면서
상상할까 봐 싫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어제 일을 떠올려 본다. 더 이상 남편한테
미안한 짓은 하지 말자고 다짐을 하건만 이 남자를 만나는 순간, 그 다짐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마는 나약한 자신의 의지를 원망 해본다. 그러다가 자신의 욕망을 채워 주는 이 남자에게 길들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정조와 욕망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며 스스로 모순에 빠져버리게 된다.
‘정조라는 것은 옛날 어른들이 자기들 멋대로 정해놓은 낡은 관습에 불과한 거야
내가 느끼는 감정대로 표현하고 행동한 건데, 무슨 문제 될 것이 있다는 말인가, 나 만 이러고 다니는 것도 아닐진데, 내가 왜 중요하지도 않은 관습에 얽매일 필요가 있겠어’
‘내 운명은 내가 만들어 가는 거야 물론 사랑도 행복도 마찬가지지’
그녀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양심의 가책을 억지로 누르려고 자기 합리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다 슬며시 어제의 느낌이 되살아나면서 스멀스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야릇한 느낌에 그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비틀고 있었다. 버스가 어느 정류장에 멈추고 사람들이 올라타서 그녀의 옆자리에 앉자 그제서야 그녀는 자세를 얼른 고쳐 잡고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 시선을 피했다.
집에 다 왔다.
현관문에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안락함에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역시 내 집이 최고야’
그녀는 빨리 눕고 싶은 마음에 안방으로 향하다가 주방식탁에서 혼자 햄버거를
먹고 있는 남편과 마주쳤다. 안돼 보였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제과점을
하고 있어서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변명이 될 수는 없었다.
“애들은,,,”
“어린이집 보냈어,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응 내 걱정은 마! 나 눈 좀 붙이고 일어날게 당신 이따가 안양가게 갈 거지?”
“오늘은 안가 오늘 안양쇼핑센터 휴무날이야”
“아 그렇구나 깜빡 잊고 있었네”
“그럼 나 한잠 자고 일어나면 가게는 공장장한테 봐달라고 하고 오랜만에 영화 한 편 보러갈까 요즘 개봉영화 재미있는 거 한다던데”
남편은 잠시 머뭇하더니
“우선 당신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그래 그럼”
그녀는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후 2시가 지나고 나서야 잠에서 깨어난 영우의 머리맡에 오렌지 주스가 놓여있고 메모지가 있다.
(여보 나 가게 나와 있어 일어나면 가게로 나와)
남편이 평소에 그다지 다정한 성격은 아니지만 영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외박까지 하고 돌아온 자신을 위해서 마음을 써 주는 남편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영우가 몸을 일으켜 주스를 마신다. 시고 달콤하다. ‘인생의 모든 현상에는 달콤함이 있으면 이면에 신맛이 있다. 영우는 어제밤 달콤함을 맛봤다면 지금은 신맛을 보는 기분이다. 달콤함을 맛보려면 반드시 신맛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주스를 마시면서 알 것 같다. 그래서 마음의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영우가 화장대 거울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얼굴이 살짝 부어 있다.
‘어제밤 술도 마시고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그런가 보다.’
간단하게 화장을 하며 잠시 자신의 행동을 더듬어본다. 술기운이든 타고난 욕망이든 남자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달콤함에 이끌려 밤을 불태우고 오늘 아침
깊은 후회를 하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길가에 가로수 낙엽이 뒹구는 초가을 어느 한낮 영우가 가게 앞 평상에 앉아서
한가하게 월간잡지를 보고 있다. 한여름 더위가 지나면서 조금씩 매상이 오르고
있기는 하지만 낮에는 손님이 거의 없다. 미용실 은희가 인기척도 없이 영우 앞에 앉았다. 영우가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은희를 봤다. 이때다 싶었는지
은희가 급하게 말을 걸었다.
“영우야 너 소식 들었어?”
“뭘?”
“정곤 씨 부인이 서울로 발령받아서 다음 달부터 정곤 씨와 같이 살기로 했데,,,”
“너는 그런 말을 누구한테 들은 거야? 나도 모르는 일을,,,”
영우와 정곤과의 관계를 알고 있는 은희가 마치 숨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은희의 말인즉슨, 정곤 씨가 댄스 교습소에 나와서 여러 사람들과 대화 도중에 말을 꺼냈는데, 내용인즉 오랫동안 부부가 따로 살면서 점점 부부 사이에 애정도 멀어지는 것 같고 부인이 키우고 있는 아이들도 서울에서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정곤 씨 부인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어렵사리 서울 발령을 허락 받았다는 거다. 은희가 그 자리에서 직접 들었기 때문에 정확한
이야기라고 했다.
은희가 했던 말이 맞았다. 며칠뒤 정곤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곤의 입에서 무슨 말을 꺼낼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한적한 길가에 세워진
정곤의 차가 보였다. 정곤은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있고 영우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탔다. 정곤은 말없이 영우의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평소 자주 가던 장흥유원지로 달렸다. 영우는 정곤이 하는 대로 가만히 맡긴 채 차 안에 있는 카세트 테이프를 뒤적였다. 그중에 좋아하는 테이프 하나를 골라서 카세트 주입구에 꽂았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감미로운 여자가수의 노래 소리가 차 안에 부드럽게 퍼졌다. 얼마쯤 달렸을까? 정곤이 말을 꺼냈다. 영우가 음악소리 볼륨을 작게
줄였다. 정곤의 이야기는 은희가 전해준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방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을 하던 정곤의 아내가 서울로 발령이 나서 다음 달
부터 부부가 함께 살게 됐단다. 그러면서 정곤은 아내와 살더라도 영우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영우는 불안한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또 다른 이유는 너무도 소중한 남편에게도 더 이상 실망 시키고 싶지
않았다. 묵묵히 영우를 믿고 기다려준 남편에게 더는 믿음을 저버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쯤에서 관계를 정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우리 관계 더 이상 안 될 거 같아,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어 “
정곤은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애들 엄마 모르게 우리 충분히 만날 수 있어,,,”
“누가 알고 모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제 우리 각자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자는 거야”
영우는 좋은 인연 추억으로 간직하고 먼 훗날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웃으면서 볼수 있게 이제 여기서 끝을 맺자고 설득했다. 사실 영우도 이렇게 모질게 하려는 의도는 분명 아니었다. 깊게 정들었던 사람과 헤어질 때 심정은 한동안 아픔으로
남는다는 것을 지난 세월 살면서 체험으로 알기 때문에 어쩌면 그녀 스스로에게
흔들리지 말라고 매정하게 채찍질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정곤은 영우의 결단이
너무 완고한 것을 알고 계속된 만남을 더 이상 고집 하지 않았다. 정곤도 이런
상황에서 둘의 만남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깊은 밤 영우네 집 근처 인적이 뜸한 골목에 차를 세운 두 사람은 차 안에서 이별의 키스를 나누었다. 옷매무시를 단정히 정리한 영우가 차에서 내렸다. 영우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정곤의 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영우가 몸을 돌려 멀어져 가는 정곤의 차를 바라보았다. 정곤의 차는 점점 멀어지더니 눈앞에서 사라졌다.
영우는 집으로 들어가려던 발길을 돌려 가게로 갔다. 가게에 셔터문이 올려져 있고 실내 전등불이 켜져 있었다.‘공장장이 벌써 나와서 일을 하나?’ 조심스럽게 가게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내는 벌써부터 오븐의 열기가 가득했고 빵 냄새가 고소하게 퍼져 있었다. 공장장이 일을 시작 한 모양이다.
“벌써 나왔어? 좀 더 자고 나와서 해도 될 텐데,,,”
마치 죄진 사람 마냥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오늘 주문빵 있었잖아요. 사모님은 더 주무셔도 되는데,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아! 그랬었지. 그것도 잊어 먹으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공장장의 그 말에 스스로를 자책하며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얼른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테이블을 닦고 쇼케이스 안에 케잌을 정리하고 바쁘게 움직였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맛있게 구워진 빵이 나왔다. 가게 안에 퍼지는
고소한 빵 향기가 오늘따라 유난히 코를 자극했다. 그녀는 언제나 하던 대로 빵을 자르고 크림을 발라서 봉지에 넣고 포장박스에 담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진열대에 진열했다. 그 와중에 일찍부터 와서 식빵을 사가는 사람들도 있어서 제과점의 아침은 늘 이렇게 전쟁을 치르듯이 바빴다. 영우는 평소와 다름없이 바쁘게 움직이는데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대량 주문한 손님이 와서 주문빵도 가져갔고,
아침 빵도 준비됐고, 손님 맞을 준비를 마치고 공장장은 아침을 먹으러 집으로
들어갔다. 영우도 잠시 여유로움이 생겨 의자에 앉아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한순간 불꽃처럼 타올랐던 정곤과의 관계는 꿈을 꾼 듯 지나간 것 같다. 그 시간이 허망하고 아득했고, 한편으로 그렇게 끝난 것이 아쉽기도 했다. 어찌 됐든 우연히 연애를 하게 됐고 예상치 못한 일로 끝을 맺게 됐다. 아마 영우의 기억 속에는 한 여름밤의 불장난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첫댓글 놀랍습니다. 짦은 이야기를 38회까지 연재하는 문장력과 열정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한 여인이 불륜 이야기를 어찌 그렇게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는지요!
인터넷 카페에 연재 되는 소설의 개척자이십니다.
처음 저는 인터넷의 특성상 짧게 스토리의 극적 전개가 필요하지 않을 까 생각했습니다만
독자들의 관심도 크지 않았는데(?) 이어오는 집념이 존경스럽습니다.
앞으로를 더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쩌면 7~80년대 청춘을 보낸 많은분들이 경험했을 법한 이야기를 저 나름대로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조금은 다듬어지지 않았고 매끄럽지 못한부분이 많으리라 짐작됩니다 전문작가가 아님을 인정해주시고 끝까지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