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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 발한의 문화와 생활상징
1) 마을을 지켰던 우리 서낭님, 용왕님
묵호일대에는 이제 서낭당을 찾기가 쉽지 않다. 민속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동해안일대는 별신굿이 아주 유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마다 서낭당이 있어 매년 마을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개인별로도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서낭당을 찾아 기도를 했다. 그 뿐이 아니다. 마을에 무당이 상주하며 굿을 몇 번씩 하였다.
<배성주이야기>
“여기는 배성주님이 다 있었어요. 아우 정말 잘 모셨지요.”
평생 배를 타다가 일흔 살이 넘어 힘이 부쳐 그만두었다는 김 씨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다. 평생 동안 배를 탔는데, 늙으니 할 일이 없어 근로사업을 나간다고 했다. 그래도 배를 타고 나가서 고기를 잡던 때가 그립다.
배성주는 기관실에다가 한지에 실을 묶어 배성주를 표시했다. 배성주에게는 돈을 바치기도 하고, 고기를 잡으면 제일 먼저 가장 큰 생선을 바쳤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날을 잡아서 뱃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낭망이라고 아시죠. 거기 배에다 거는 깃발 말이요.”
낭망은 배를 조선소에서 가져올 때 세 가지 천으로 기를 만들어서 꽂는 것이다. 선주들은 배를 가져올 때 제물을 차려서 성주에게 빌면서 무사고를 빌었다. 배성주는 여성 성주가 많다. 고기를 잘 잡히게 해주는 풍어의 신이기 때문이다.
<동문산 서낭당>
발한동에는 동문산과 마을이 만나는 지점 언덕에 서낭당이 있었다. 동문산 서낭당은 좋은 목재를 써서 정말 잘 지어져 있었다. 이곳엔 토지신, 성황신, 여역신을 모셨다. 서낭의 성별은 암서낭이다. 동해안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모습이다. 동네에서는 매년 정월 15일 자정이 되면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14일 20시경으로 변경해서 지냈다.
“집에 있다가 궁당궁당하고 소리가 나면 떡 얻어먹으러 올라갔어요.”
그래 올라가 보면 무당들이 굿을 했다. 동문산 아래에는 무당들이 많았다. 옛날에는 먹고 살기 힘든 때라 떡 한 조각 주면 고맙고, 안 주면 그냥 내려왔다. 성황제 지내는 것도 어렸을 때부터 봐 왔다는 기옥순 씨의 증언이다.
그런데 2019년까지는 마을제사를 지내고 무당도 와서 굿을 하였다. 그리고 집집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개인 별로 와서 기도를 하고 갔다. 2020년에 그곳의 밭주인이 서낭당을 헐었다. 밭주인은 서울에 있는 사람인데 얼마 전에 그 땅을 샀다.
서낭당 옆에는 아카시아 나무며 대나무가 많았다. 어느 날 그곳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를 벤 사람이 손가락 하나가 아파서 시름시름 앓다가 어디 가서 물어보니 서낭나무를 베어서 그런다고 했다. 그러더니 나중에 그 손가락이 살이 다 빠지고 뼈만 남았다.
“또 여기는 한 집 건너 무당집이었어요. 오징어 안 잡히면 불러다 굿을 했지요.”
거의 매일 굿을 했다고 한다. 그때 굿을 할 때 동문산 서낭당에서 많이 했다. 사흘이 멀다 하고 굿이 있었다.
<바람신 영동할매>
영동할매는 매년 2월이면 내려왔다. 그러니 2월 초하루에 내려왔다가 보름이면 올라갔다. 영동할매 또는 영등할매라 불렀는데, 영등할매는 바람신이다. 그래서 풍신(風神)이라 한다. 영동할매를 잘 모시면 농사도 잘 되고 고기도 잘 잡히게 해준다. 이 신은 동해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에서만 모시는 신이다. 묵호 발한지역에도 예외가 아니다.
“풍신할미는 바람타고 눈비뿌리며 와요.”
그래서 2월 초하루는 날씨가 나쁘다. 대개 이 날은 농사일도 뱃일도 안 한다. 이날은 시루떡을 3쪼가리를 해서 내어두면 영등할미가 사흘 만에 내려와서 먹는다. 영등할미를 잘 모시면 풍농과 풍어를 주므로 떡을 해서 정성껏 모신다. 그리고 보름동안 집집이 뒤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쟁반을 받쳐둔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떡과 음식도 우선 쟁반에 올려 영등신에게 드린 후에 가져다가 먹는다.
영등할미는 딸과 며느리가 있는데, 며느리에 대한 시샘이 많다. 그래서 딸을 데리고 오는 날에는 바람이 불고, 며느리 데리고 오는 날에는 비가 온다. 며느리에 대한 시샘으로 비를 내려 며느리 옷을 적시려는 것이다.
2) 묵호는 항구다, 묵호항
한 시인은 <묵호항>이란 시를 썼다. 이 시에는 묵호항의 영화가 고스란히 담겼다. 감상해 보자.
갈매기 날고/ 생선 비린내 가득한 묵호항
어둑한 부둣가엔/ 우두커니 줄지어 선 상점들/ 기선이 엄마 건어물점에서 나오시네
오늘도 변함없이 들리는/ 고기 담는 소리 오징어 배 따는 소리/ 경매장에서 외치는 소리/ 이 모든 두런거림을 한 잔 소주로 씻어 내리는 아침
늦은 고깃배/ 돌아오는가 뱃고동 울리자/ 항구는 일제히 숨죽이고 바다를 본다
뽐내며 배에서 내리는/ 저 선장은 복덕이네 아버지로구나
갈매기 끼룩거리고/문득 잔칫집 마당처럼 붐비는/ 묵호항(이동순의 묵호에서)
한창 호황을 누리던 묵호의 풍경이 눈에 보일 듯 다가온다. 민선에 할복에 경매에 소주에 모두 행복한 묵호사람들의 모습들이다.
묵호항은 이렇게 묵호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곳이었다. 그러면 묵호항은 어떤 변화를 거쳤을까. 잠시 그 역사를 따라가 보자.
묵호항은 먹 묵(墨)자에 호수 호(湖)자를 쓰는 항구이다. 강릉부사 이유응(李儒膺)이 1860년(철종11)에서 1861년(철종12년)까지 재임할 때 이곳을 방문하여 명명한 지명이다. 그 전에는 오이진(烏耳津) 또는 오이진(梧耳津)이라 불렀다. 이유응이 이곳을 방문한 것은 해일이 일어 민심이 흉흉하자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때 이름이 두 가지로 쓰여 혼란이 왔다고 생각하고 “이곳은 물도 검고 바다도 검푸르며 물새도 검으니 먹 묵(墨)자를 써서 묵호라 하면 좋겠다.”해서 묵호(墨湖)라 했다고 한다. 이름에 걸맞게 삼척과 태백에서 생산된 무연탄의 집적지가 이곳 묵호였고, 무연탄을 배로 실어 나르다 보니 온 동네에 탄가루가 날려 검게 되었으니 묵호라는 이름과 어울린다고 후세 사람들은 말한다.
그 때문에 발한동사무소 마당에는 묵호사람들이 신유(辛酉, 1861년) 7월에 세운 “부사이공유응영세불망비(府使李公儒膺永世不忘碑)”가 아직도 있다. 영원히 부사 이유응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비석 옆에는 일심원해(一心願偕) 소사근로(小事勤勞)라 해서 “한 마음으로 함께 원하노니, 작은 일도 부지런히 노력하세”라고 했다.
동해의 한적한 어촌 묵호는 2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입게 된다. 바로 일제가 막바지 전쟁 물자를 만들며 물류항으로 묵호를 지목하였다. 1937년 삼척개발주식회사가 건설되면서부터이다. 1941년 8월 11일 묵호항은 국제항으로 개항을 하였다. 이때 무연탄이 묵호항에서 실려 나갔다. 물자 수탈이라는 아픈 역사를 안고 그렇게 묵호항은 이뤄졌다. 이후 동해항이 건설되기 이전까지는 강원도의 모든 물류가 묵호항에서 배에 실려 나갔다.
광복 후에도 그 기능을 계속 수행하였음은 당연하다. 1962년부터 중앙부두가 건설되고 1973년까지 제4부두가 건설되었다. 2006년에는 해경전용부두가 건설되었다. 건설과 개축을 거듭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묵호항은 다목적 항구이다. 화물선, 상선, 어선, 군함, 경비정, 여객선 등이 모두 정박하고 물자를 나르는 구실을 한다.
3) 가고 오고 묵호역
2020년의 묵호역! 그 옛날 화려했던 영화는 찾을 수 없었다. 한적한 대합실에는 한두 명 앉아 있고, 대합실 뒤로 보이는 풍경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연륜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조금 있으려니 모녀인 듯한 여인 두 명이 대합실 표사는 곳으로 들어왔다. 개찰구에는 다음 열차 출발 시간이 표시돼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문밖으로 동해바다가 보이고 가까이는 철로가 보였다. 이제는 시골 간이역 같은 분위기였다. 수많은 사람이 묵호역을 통해 오고 갔을 텐데 어디서든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대합실을 뒤로 하고 역 광장으로 나왔다. 붉은 언덕이 보였다. 붉은 언덕도 화려했던 옛 모습은 저 멀리 사라지고 한적했다. 버스가 다니던 옛 추억도 토박이 주민이 거의 다 떠나자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간혹 이 묵호역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묵호역을 대각선으로 마주 하고 있는 김남현 씨는 연세가 많지는 않지만 묵호의 발전상을 영사기 돌아가듯 훤히 꿰뚫고 있었다. 묵호역은 많은 역사와 추억을 간직한 곳이었다. 1965년 옆의 구역(舊驛)에서 현재 자리로 옮겨왔다. 그리고 지금 해안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역 광장이 무척 컸다.
“거 여기 저 저희들이 어렸을 때 보면 이 묵호역 광장이 굉장히 컸어요. 그래 가주고 그 박정희 대통령하고 저 김대중 대통령이 뭔 시 이런 분들이 유세하던 광장 이였어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등이 있으면 사람들을 모아놓고 유세를 하던 장소였다. 김영삼, 노태우 등 모든 대통령 후보들이 자신들을 뽑아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곳이다. 그러니 묵호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그들의 유세를 들었던 곳이다.
“그 때 70년도 만해도 논산훈련소를 여기서 출발 했어요. 이 광장에서 2천 명씩이 출발할 땐데, 기차에 타고. 기차타고 논산까지 가다보니까 그래서 하숙들이 많은 거야.”
명주군의 병력들이 훈련소로 갈 때 묵호역에서 출발을 했다. 한 번에 2천 명이나 갔다고 했다. 그 후 역 광장이 줄어들면서 동해프라자 자리 광장에서 모였다가 논산으로 갔다. 그러다가 광장이 없어지면서 강릉에서 입영소집을 했다고 한다.
입영장병들은 미리 묵호에 와서 놀다가 가는 사람도 많았고, 전 날 묵호에 와서 자고 가기도했다. 그 때문에 이곳에 하숙이 많았단다. 그들은 며칠 전 또는 한 달 전쯤 와서 오징어 배며 하역장 등에서 일을 해 돈을 벌어 유흥가 술집에 가서 놀다가 가기도 했다. 그러면 또 입영장병들의 돈을 갈취하는 깡패들도 있었다.
“전국에서 이게 깡패가 제일 많았을 거예요. 돈을 이 뜯고 삥 뜯는다고 그러죠? 삥 뜯고 하는 사람들이 여기가 많았어요.”
묵호역의 또 다른 어두운 역사였다. 하기야 그 당시는 어디를 가나 길가는 사람들 돈 뺏는 거는 부지기수였으니 묵호역 주변도 다를 리는 없었을 게다. 그러고 보니 묵호역은 묵호행사의 중심지였다. 그렇게 많던 궐기대회, 국민운동촉진대회, 시가행진 등 모두 묵호역에서 시작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다시 묵호역을 찾았다. 묵호역 광장 울타리에는 한창 시화전을 하고 있었다. 묵호의 시인들은 저마다 묵호역에 서린 추억을 쏟아냈다. 세상에 같은 사람 없다고 하더니, 시인들 마다 묵호역을 생각하는 이미지가 다 달랐다. 그 중 <묵호역>이라 쓴 김경희 시인은 그리움으로 묵호역을 표현했다.
“기적소리가 그리움의/ 통증이 될 줄 몰랐습니다.// 긴 꼬리 흔들며 묵호역 떠나던/ 기차에 손 흔들 때도 몰랐습니다.// 당신을 싣고 오지 않는 기적소리/ 그리움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림자조차 찾을 길 없는 어머니/ 텅 빈 대합실에서 기다립니다.”
묵호역에 대한 살가운 그리움이 절절히 배어나온다. 그리고 요즘 가보면 누구나 느낄 대합실의 애잔함이 시 속에서 글로 굴러다님을 알 수 있다. 정말 사람들마다 기억의 한 조각으로 있을 그리움이다. 묵호역은 그런 그리움의 이미지로 아직도 묵호를 지키고 있다.
4) 꿈의 세계로 이끈 극장가
젊은 청춘남녀가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던 장소가 있었다. 한껏 차려 입은 멋쟁이 남녀는 극장 앞에서 얼른 표를 끊고 얼굴을 붉히면서 정한 자리로 찾아갔다. 청춘남녀는 영화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잡은 손바닥에서 촉촉하게 따뜻한 땀이 흐를 따름이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대한뉘우스가 흘러 나왔다. 애국가에는 동해시의 촛대바위가 언제나 나왔다. 그걸 볼 때마다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대한뉘우스는 온통 대통령 자랑이고 국가발전이 이뤄진다는 희망 섞인 소식으로 가득 메웠다. 동호동에 살고 있는 박흥규 씨는 한동안 자신이 애국가에 나왔다고 했다. 교복 입은 학생들 사진이 나올 때 장면이었다면서 앨범을 보여주었다. 중학교 때 교복을 입고 애국가의 한 장면을 장식했던 박흥규 씨는 어느 덧 환갑을 넘긴 나이가 되었다. 물론 묵호의 발전상도 가끔 대한늬우스의 한 장면을 장식했다.
당시 묵호에 극장가가 즐비했다고 할까. 동호극장, 보영극장, 동해극장, 묵호극장, 문화극장. 무려 묵호에만 몇 개의 극장이 있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묵호의 문화를 이끈 또 다른 풍경이었다. 상당히 빠른 상영문화의 도입이었다.
김태훈 씨는 묵호에서 건어물 장사를 한다. 건어물가게 벽면에는 커다란 영화광고판이 그려져 있다. 영화광고 그림은 한때 유행했었다. 그런 영화광고 그림이 건어물과는 전혀 상관없는데 그려져 있다. 김태훈 씨가 화가에게 돈을 주고 부탁해서 그린 그림이라 했다. 김태훈 씨는 자신의 가게 외에도 영화포스터 등을 선물한다. 상당한 수집가인데 본인 소유의 커다란 수집 창고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김태훈 씨의 묵호사랑이 이뤄낸 쾌거이다. 그의 묵호사랑은 앞으로 많은 사람이 찾는 묵호로 만드는 것이다. 옛 묵호의 영화(榮華)를 영화(映畫)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1967년에 세워져 상영을 했다는 보영극장은 아직도 건물이 그대로이다. 안에는 영사기까지 고스란히 있다. 정말 전기를 꽂고 필름만 넣으면 <엄마야 누나가 강변 살자>라는 영화가 화면에 보일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젠 그 시절 추억의 사진 속에만 남아 있다.
그런데 이들 극장은 영화만 상영한 것이 아니었다. 극장에서 할 수 있는 많은 문화행사가 열렸다. 그 중의 하나가 “예비군 돕기 영동지구 가요 콩크르 대회”였다. 1970년 2월 28일 보영극장에서 열린 노래자랑 대회였다. 아마도 50대만 넘은 사람들은 콩크르대회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남자와 여자를 따로 해서 지정곡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이런 구분이 있을 수 없지만, 노래대회에서 그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로울 따름이다. 남자는 <잊을 수가 있을까>, <미워도 다시 한 번>,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비롯하여 10곡이고, 여자는 <기러기 아빠>, <세월이 가면>, <당신을 알고부터>를 비롯하여 역시 10곡이다. 왜 남녀 지정곡을 나누었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상품은 손목시계, 금반지, 고급구두, 고급경대, 고급스텐식기였다.
세월이 가면 아마도 더 그리워지고, 더 세월이 흐르면 그땐 그랬을 거야하고 추억할 순간들이다. 어쩌면 멀지 않은 날에 우리가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를 생각하는 모습으로 남을 것이다. 극장이 준 선물은 묵호의 청소년과 주민들에게 영화 속 장면처럼 한 번 가보고 싶고, 해보고 싶은 꿈의 세계로 이끈 옛 모습들이었다.
5) 문전성시 상가와 백화점
“묵호거리에서는 무엇을 해도 됐어요.”
무슨 장사든 펼치기만 하면 물건이 팔렸다고 했다. 만나는 사람들 마다 다 같은 얘기를 헸다. 그러면서 묵호의 지난 모습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회상했다. 묻지 않아도 말만 터놓으면 줄줄이 곶감 꿰든 엮어 나왔다. 묵호에 상가와 백화점이 문전성시를 이룬 사연이다.
묵호거리는 사람들로 까맣게 붐볐다. 묵호의 지명이 또 한 번 까만 호수에 어울리는 수식이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동해시 말로 ‘새까맸다’. 사람들을 만나면 명동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서울의 명동처럼 사람이 붐볐다는 얘기다. 그것도 밤낮 사람들로 붐볐다.
저녁과 새벽이면 바다로 조업을 가는 어부들로 거리는 메워졌고, 이어서 고기를 할복하고 덕장으로 실어가는 사람들로 거리는 까맣게 메워졌다. 반면 까만 밤바다는 오징어 집어등으로 환하게 빛났다. 외항선원들이 들어오면 알록달록 색시들이 길을 까맣게 메웠다. 아침이면 길을 쓸고 가게 준비를 하는 상가사람들이 묵호의 거리를 메웠다. 학도호국단 학생들은 거리행진을 하였고, 밴드부 학생들은 거리공연도하였다. 반공 멸공으로 뭉친 궐기대회는 북한의 도발이 있을 때마다 열렸다. 재건운동, 새마을운동 등 참 많은 단체들이 잘살기 운동을 하며 거리를 누볐다. 밤이면 한 잔 걸치러 집을 나선 사람들로 거리는 붐볐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발한동의 시가지 중심을 ‘거리묵호’라 했다. 이 거리묵호는 동해시 지명지에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발한동의 시가지 중심 지역을 일컫는다. 묵호역 못 미쳐 있는 굴다리로부터 강원은행이 위치한 발한삼거리 일대까지의 거리를 가리키는데, 은행과 상가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다. 1931년 묵호항이 축항되고, 19326년부터 삼척지역에서 생산되는 무연탄 수송을 위해 무연탄을 집산하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동해시 지명지)
얼마나 사람들로 붐볐으면 ‘거리묵호’라 했을까. ‘사람들이 붐벼 길거리가 가득 찬 묵호’라는 뜻일 게다. 거리묵호를 이루는 지역은 발한삼거리와 중앙시장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발한천을 따라 난 지역과 붉은언덕과 관사로까지 이어졌다. 물론 묵호진동, 그리고 묵호항으로 이어졌다.
묵호의 거리가 더 붐볐던 것은 묵호 망상으로 휴가를 오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했다. 교통편이 좋지 않던 시절 묵호역과 묵호터미널은 삼척과 태백과 영월과 정선 등지의 탄광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여름 휴가지였다. 그 당시는 해수욕장이 휴가지로 가장 각광을 받던 시절이다. 바캉스(Vacance)라는 말이 유행을 할 때이다. 바캉스는 주로 여름에 피서나 휴양을 떠나는 휴가이다. 바닷가 백사장에 수영복 차림으로 물놀이를 하고 까맣게 살을 태워야 여름을 잘 보냈다고 했을 시절이다. 이들은 한 번에 몇 백 명이 가족들의 손을 잡고 밀려들었다. 묵호굴다리 부근에서 슈퍼를 하는 주인은 그 시절을 “여기 여는 사람이 어깨가 부딪혀 피해 다니지 못할 정도였어요.”라고 했다.
묵호중앙시장 입구 먹거리광장에는 개가 만 원짜리를 물고 있는 조형물이 있다. 바로 묵호의 호황기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그곳에는 묵호야시장을 열면서 만든 작은 광장이 있다. 동쪽바다 중앙시장 청년몰을 하는 곳이다. 그곳에 가면 묵호의 또 하나 상징이었던 보영백화점의 추억을 미니백화점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주 재미있는 발상이다. 그곳엔 “묵호에 봄이 오길” 바라면서 묵호의 옛 영화(榮華)를 상가 이름으로 담아 놓았다.
돈도 고기도 사람도 넘쳐나던 묵호 그곳을 스쳐간 잊히지 않는 이름들
보영백화점 보림백화점 OK백화점 강남원 백화원 충북관 명월관 영동관 보영극장 묵호극장 문화극장 동호극장 시대양복점 조일라사 제일라사 강호양조장 야광카바레 동락카바레 현미사진관 나포리다방 장미다방 양지다방 상록수다방 초원다방 태양원 부산가 비비미용실 수정양장점 미미양장점 서울양화점 삼일양화점 명동양잠점 제일당 삼일당 정금당 복순루 합동연탄 안동연탄 카네기홀 도라지위스키시험장 ……… 이제는 없다
백화점, 극장, 양복점, 보석상, 양조장, 다방, 미용실, 양장점, 양화점, 카바레, 연탄공장 등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묵호에는 많은 상가들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제는 없다”는 말이 가슴 먹먹하게 한다. 물론 지금도 있는 상가가 있지만 그때의 호황기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묵호의 ‘봄(꿈, Dream)- 여름(붐, Boom)- 가을(부, Rich)’을 간절히 빌어본다.
6) 또 다른 인생, 절망 속 가족의 대들보
영화 <고래사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서울 사창가에서 병태와 민우는 춘자를 몰래 데리고, 춘자의 고향 동해안으로 달아난다. 포주가 뒤를 쫓아오지만 결국 춘자를 고향에 데려준 이야기이다. 충격에 벙어리가 되었던 춘자는 고향에 오자 말을 하게 된다. 여기서 고래는 청춘들의 꿈이었고 희망이었다. 영화 <고래사냥>은 세상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깨는 약자들의 몸부림이었다. 고래는 먼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이웃을 도와 알콩달콩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바로 고래사냥의 촬영장소로 양양의 남애항과 정선 임계와 함께 한 곳이 묵호의 술집거리였다고 한다. 그곳에 가보니 여인숙처럼 방이 여러 개 붙어 있는 술집이었다. 슈퍼 아저씨는 영화 제목은 모르지만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여기다 철로를 쫙 들어놓고서 카메라에서 찍었어. 저 방에서 있다가 나왔어.”
이 영화처럼 묵호의 밤거리는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힘든 일상이었다. 아무래도 원해서 온 여성들은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엄청 많은 여성들이 이 일에 종사를 했다.
“여기 서른세 집까지 있었는데, 아주 대단하지 저녁에 남자들 지나다니지도 못해.”
굴다리 밑 골목에만 그렇게 많은 술집이 있었다. 술집 아가씨 때문에 장사가 잘 됐다. 옷가게, 보석가게, 화장품가게, 구둣가게 등은 술집이 번창할 때 호황을 누렸다고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지금은 항구 입구가 바뀌었는데, 옛날 항구 입구에는 사창가가 죽 늘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아파트를 지어서 사창가를 운영했다. 그때 외항선이 들어오면 아가씨들이 줄을 지어서 선원들을 맞아들였다고 했다. 그 때문에 그곳 골목은 남학생들은 갈 수 없는 금남의 집이었다. 사람들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허허 웃었다. 호기심에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용기기 안 나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단다.
묵호항 물류적재지 뒤쪽으로 가면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집창촌 아파트를 지나면 슬레이트집이 있는데, 집 앞 노란색 간판에 영어로 요지경(YOJILYUNG)이라 쓰여 있다. 아마도 외국 손님을 받기 위해서 영어로 간판을 쓴 것일 게다. 현재는 단풍나무와 과실수 한 그루가 울창하게 집 앞에 서 있고, 점박이 검은 개와 누렁이 개가 집 앞을 지키고 있었다. 아련한 흔적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술집과 사창가는 붉은언덕과 발한천을 끼고 있는 동호동까지 번창했다. 지금도 그곳에 여인숙과 여관이 많다. 그곳에서 장사를 하면서 아가씨들을 봐 왔던 어느 가게 아주머니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참 씁쓸해 했다.
“밤 되면 이 거리에 아가씨들이 나와요. 흥정할 때보면 화대가 많지도 않더라고요. 겨우 2,3천원이었어요.”
역에 사람들이 내리면, 거리에 아가씨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뭘 했는지 궁금해 물었더니, 아주머니는 한 마디로 말했다.
“집에 보냈지요. 일부는 포주에게 뜯기고요. 가난하던 시절에 딸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벌어 보낸 돈으로 동생들 공부시키고 집안에 보탰지요. 가족의 대들보였어요.”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었다. 그 말을 그 아주머니로부터 들으니 왠지 코끝이 찡하였다. 초등학교만 마치면 공장으로 나갔던 그 시절 우리 누나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배우지 못한 설움을 가슴에 안은 채 산업전사로 나가 밤낮 일을 하다 청춘을 보냈던 슬픈 우리의 역사였다.
7) 발한천에 얽힌 추억
발한천(發翰川)에 대한 이야기는 만나는 사람들 마다 했다. 동해시 지명지에서는 발한천을 “느릅재 쪽의 큰바란이에서 발원하여 묵호 시가지를 지나 묵호항으로 흘러가는 하천인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 복개되었다.”라고 했다. 그러니 느릅재에서 시작하여 묵호를 가로 질러 묵호항 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었다.
지금은 하천을 복개하여 도로를 만들고, 그 위에 포장을 하였다. 묵호시내에서는 볼 수 없는 추억의 하천이 되었다. 중앙시장이 생기고 지금처럼 커진 배경에도 발한천 복개가 한몫했다. 그러니 발한천은 묵호가 커지기 전에는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하천으로 큰 구실을 하였다. 우리가 그림에서 보던 풍경이 그대로 이 발한천에 있었다. 이야기가 있는 묵호에서는 이렇게 기록을 했다.
발한천의 맑은 물이 시장 양쪽으로 흐르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이 발한천에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미꾸라지를 잡으며 미역을 감고, 양치질 후 입안을 헹구고 세수를 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시장이 커지자 발한천에 오물이 흐르고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조합을 결성해 이 악취 제거를 논의하다 발한천을 아예 복개를 해 버렸다. 상설시장은 점차 변모해, 중앙시장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이야기가 있는 묵호)
발한천의 모습과 역사가 일목요연하다. 발한천이 중앙시장이 커지면서 복개되었다고 했다. 묵호읍이 커지는 과정에 하천이 자연스럽게 없어진 것이다. 빨래하고, 멱감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이학주, 강원아카이브협동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