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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0 주일예배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마태복음 15:1~11
성경을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가지의 핵심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사람의 주장을 따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물어보나 마나 “하나님”입니다. 이 정답을 모르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부터 현대인까지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 정답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는 이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것 책임질 수 있어요
사람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는 섬기되 내 방식대로 섬기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종교 개혁을 하고 나서도 한 세대만 지나면 다시 제 맘대로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은 구약시대에도 그랬고 신약성경에도 그랬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어 오셨어요. 그리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셨어요. 그랬더니 율법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이 틀렸다고 주장하며 예수님께 따집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섬기는 것이 아니래요.
오늘 본문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율법 전문가들인데 모세오경과 선지서와 시가서의 말씀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전문가들입니다. 1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갈릴리 변방 사람들이 아니라 중앙에서 왔습니다.
2절 말씀이 한글 번역에서는 좀 공손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에는 존칭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말했겠죠.
“예수 선생, 당신 제자들은 왜 손을 씻지 않는 것이오?”
바리새인/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아서 비위생적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코로나 걸리면 어쩔 셈이냐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당신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위반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 좀 생각해봅시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우리 가족 네 명이 어떤 식당에 들어가 있는데 다섯 명 가족이 식사하러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감염병 규정 때문에 다섯 명은 식당에 들어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가족은 어차피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차를 다녀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있다면 벌써 주고받은 사이인데도 주인은 규정 때문에 다섯 가족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염이 걱정이라면 식당에 두 명, 세 명 따로 앉아서 식사하면 될까요? 그것도 안 됩니다. 팬데믹 기간에 제가 용인시 목사님들을 모시고 광교의 어느 식당에 갔습니다. 가면서 우리는 작전을 짜서 4명이 먼저 들어가고 잠시 후에 3명이 따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종업원이 멀리서 우리가 오는 것을 봤다고 일행이니까 들어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4명만 들여보내고 3명은 다른 식당에서 식사하고 왔습니다.
식당에서 멀리 다른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겠다는데도 일행이라고 못 들어오게 하는 그런 예방 수칙은 감염 예방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장로들의 전통은 그것보다 훨씬 불합리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유구한 역사가 흐르는 아름다운 전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들의 전통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고 제사와 절기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알기 어렵습니다. 율법은 간단하게 써 놓고 나머지는 모세가 말로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후에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의 설명 외에 랍비들이 더 많은 설명을 추가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일하지 말라고 하는데 일의 경계선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랍비들이 연구하고 의논해서 답을 정해 주었습니다. “벽돌 한 개까지는 된다. 여행은 5리까지만 된다.” 장작을 쪼개거나 옮기거나 활을 비벼서 불을 피우는 것은 일이니까 안 되는데 전기 스위치는 눌러도 될까요? 그것도 안 됩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것도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려는 사람에게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손을 씻지 않아서 예수님이 곤란을 겪게 했을까요? 사실 손 씻는 것은 위생을 위해서든지 종교의식이든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손을 씻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양치질은 3분 동안 하라고 정했는데 2분 50초 동안 하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돼.” 그게 장로들의 전통입니다.
손을 씻는 데는 물의 양과 한꺼번에 씻는 사람의 숫자까지 정해져 있었습니다. 손을 씻을 때는 한 통의 물을 한 손에 부으면 정결, 두 손에 부으면 불결, 거기에 1/4의 물을 추가하면 정결해집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절차와 방법을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손 씻는 방법이 아니라 손의 먼지를 씻는 것 자체입니다. 또 뱃세다 들판에서 손을 씻을 상황이 안 되면 그냥 빵을 먹어도 안 죽습니다. 손 씻지 않고 빵 먹는다고 하나님께 죄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되게 살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지 우리를 괴롭히고 불편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라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이 몸으로는 법을 다 지키면서도 마음으로 얼마든지 법을 어길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법률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허허벌판 한가운데 대형 베이커리 카페가 많이 생겨 있습니다. 저런 곳에 손님이 올까 싶은 곳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유튜버의 설명을 들으니 (그 말이 맞는지 나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베이커리 카페를 만드는 목적이 증여세 안 내고 자식에게 증여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부모가 10년 이상 운영하는 가업을 물려주고 자녀가 그것을 이어받아 운영하면 증여세를 안 내도 된답니다. 물려받은 자녀도 그 빵카페를 운영해야 하는데 그거야 종업원 시켜서 하면 됩니다. 결국 빵카페는 운영의 수입보다는 증여세 피해서 상속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그런식으로 피해 갈 방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어떤 부분에서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의 전통 중에는 손 씻는 방법처럼 본질과 상관없이 사람을 얽매고 괴롭히는 전통이 있고 반대로 율법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전통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코르반 제도입니다. 제5계명에서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들의 효도는 물론이고 나이 든 자식이 연로한 부모를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장로들의 전통에는 효도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피해갈 방법도 주고 있는데 바로 코르반 제도입니다.
코르반이 무엇일까요? 코르반은 ‘예물’,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레위기 1장부터 나오는 모든 제사가 코르반입니다. 마태복음 15:5에서 말하는 “드림”이란 헬라어로 도론(δῶρον)인데 선물, 예물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도론은 히브리어 코르반과 같은 뜻입니다.
코르반 제도는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이 있는데 그것을 팔아서 부모를 공양하기 싫으면 그 양을 드림(코르반, 도론)이라고 선언하면 제5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장로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입니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코르반을 선언한 가축을 팔아서 일부만 성전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전통은 명백히 제5계명 위반입니다.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됩니다.
3~9절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10~11절에서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사람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들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바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제가 설교 서두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고민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훈하는 법 정신을 지킬 것인가? 교회가 정해놓은 규칙과 전통이 말씀에 어긋나도 그대로 지킬 것인가?”
옛날에 박윤선 박사는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주일에 선교사님을 배웅하면서 택시를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인이 그 모습을 보고 “고려파도 별수 없네. 고려신학교 교장도 주일날 돈 주고 택시 타고 돌아다니더라.”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이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자고 했더니 박윤선 박사가 교장직을 사임했습니다. 주일에는 택시를 타면 주일성수를 어긴 것입니까?
지난 10.27 연합예배 때는 오전에 예배드리고 오후에 시청앞에 가서 연합예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일은 종일 거룩히 지켜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한다고 비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방에서 오는 성도는 버스 안에서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본교회 예배를 영상으로 연결하여 예배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주일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교회당이 좁아서 다른 장소에서 영상으로 예배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는 전 교인이 가정에서도 영상으로 예배했습니다. 그 당시 기윤실은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는 것은 살인행위라고 했습니다. 그랬던 기윤실이 10.27 연합예배가 주일성수 위반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괜한 시비입니다.
지방의 어떤 목사는 10.27에 버스에서 예배드리고 나면 앞으로 가족들이 관광지에 놀러 가서 영상예배 해도 막을 수 없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동성애 독재법을 막기 위한 연합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그래서 버스로 이동하며 예배드리는 것과 개인적인 편리나 관광을 위해 휴양지에 가서 영상으로 예배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상식으로 생각해봐도 구별이 됩니다.
11절에서 예수님은 먹는 것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은 모든 행동에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떤 행위가 사람의 경건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과 동기가 경건을 파괴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랍비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요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으면 형식도 깨지 말아야 하지만 형식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 자세가 훨씬 중요합니다.
교회가 정해놓은 것이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면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 하지만 비성격적인 전통이라면 열심히 바꾸고 고쳐야 합니다. 그것이 종교개혁 정신입니다.
사람은 어떤 것을 먹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것으로 경건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의 동기가 경건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행동인가? 이 행동이 성경적인가? 아니면 내가 편하려고 우기는 것인가? 사람들이 좋아하기에 하는 행동인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https://youtu.be/CNMl0Du9l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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