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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자리란? / 사 53:10-12, 막 10:35-45
인간에게는 좋은 자리에 앉아서 남을 지배하며 섬김을 받으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욕구 때문에 성공도 하고 발전도 한다. 좋은 자리 하나 잡으려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모든 영역에서 피나는 투쟁을 거듭하고 있다. 조그마한 가게, 주택, 모든 것에 이권이 있는 좋은 자리는 엄청난 권리금이 붙어 있다. 길거리에 보면 포장마차도 아파트나 서울역 주변은 1천만원에서 3천만원까지 자릿세가 붙어 있다. 번화가의 신문 노상 판매대는 천오백만원, 구두닦이 터는 빌딩 건물 내는 1천만원에서 3천만원까지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권력이나 명예나 직업이나 어떤 자리이든지 좋은 자리를 잡고자 자리다툼을 끝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선의의 자리싸움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초청하시는 좋은 자리로 가야 한다. 우리는 좋은 저리를 발견하고 추구할 수 있는 신앙적 가치관이 분명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무슨 자리를 원하고 있으며 일생을 추구할 목표를 어느 자리에 두고 있는지 묻고 싶다.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들에게 영원히 후회도 아쉬움도 없는 그 자리를 원하여 나아가고 있는지 묻고 싶다. 복있는 사람은 생각이 다르고 걷는 방향이 다르고 앉는 자리가 다르다. 인간이 앉을 수 있는 최고의 좋은 자리는 예수님게서 주신 자리이다. 공간적으로 어느 곳에 있든지 인간적으로 얼마나 대우를 받든지 상관이 없다. 주님 좌우편에 앉을 수만 있다면 최고의 영광스런 자리이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우리가 구하는 바를 들어주소서 할 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말씀하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영광 중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햇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다고 하였다. 다른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화를 냈다고 하였다. 우리도 3년 동안 주님의 뒤를 따랐는데 너희들이 좌우편에 앉으면 우리는 어디에 앉으란 말이냐? 다른 제자들 역시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생각으로 주님의 좌우편에 앉고 싶은 마음이기에 화를 낸 것이다. 이것이 다 자리다툼이다. 제자들이 이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자리다툼을 하는 때가 어느 때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때이다. 제자들에게 자기는 십자가의 수난을 향하여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그 자리를 향하여 나아가는데 제자들은 십자가 없는 영광을 탐하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좋은 자리를 보는 가치 기준이 달라야 한다. 하나님 왕국의 좋은 자리는 이 세상 자리와는 다르다. 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좋은 자리는 죽음과 고난으로 얻는 자리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마시는 잔과 그리고 그 고난의 세례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영광스런 자리요, 빼앗길 수 없는 자리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경쟁과 자리다툼의 세계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네가 지금 내 우편에 앉겠다 하는데 그 자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데 이런 허탄한 소원을 가지고 있으니 진정 구하는 바를 모르고 있구나 하신다.
1.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좋은 자리를 십자가를 통하여서만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 받는 자리는 정욕의 자리요, 그리스도에게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자리는 자기가 죽는 죽음으로 얻는 자리이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았던 바울의 고백에 귀를 기울이자. 빌 3:18-19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우리가 땅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면 어찌 하늘의 생각이 떠오를까? 어떻게 주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이 말씀은 2천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때 그 무리들은 알지 못하여 그런 죄악을 범했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삼년 동안 따른 제자들은 이 무슨 꼴인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가련한 처지인가? 지금 성령님께서 조용하게 말씀으로 울려주고 있다.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하신다. 성서는 말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야고보와 요한이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한다. 예수님은 영광을 십자가에서 보았고 그의 죽음을 앞두고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앉으려고 싸우는 자리는 언제나 만원이다. 이 좋은 자리를 내놓느니 차라리 죽이라고 버틴다. 이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자기 영광을 누리려는 자리는 항상 만원이다. 그러나 항상 비어있는 자리가 있다. 그 자리는 지극히 큰 하늘의 영광을 누릴 자들이 앉는 자리이다. 예수님이 친히 그 자리를 우리에게 앉도록 시범을 보이셨다.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여러분, 우리가 앉아야 할 자리는 자기가 죽어야 할 자리이다. 예수님이 친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시범을 보이셨다.
김성식 교수의 시가 있다.
빌딩은 높이 솟았는데 생각은 낮아만 가고
길은 탄탄대로라지만 마음은 첩첩산중이 되어 간다.
옷은 고와만 가는데 사람은 밉게만 보이고
물질은 풍요로워지는데 인정은 말라만 간다.
도처에 교회당은 있어도 참 기독교인은 찾기 힘들고
십자가는 높이 솟았는데 달린 사람은 아니 보인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십자가는 저주의 나무요, 사형기구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저 갈보리산 언덕에서 만백성의 죄를 지고 홀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 지금도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내가 진 그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 이제는 너희들 스스로 네가 선 자리에서 십자가를 스스로 지라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란 말은 두 가지로, 하나는 자기가 져야 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자기가 져야 할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너 스스로가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우리는 죽을 자리가 있다. 자기가 선 자리, 현재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죽느냐가 최대의 과제이다. 만명이 모여도 하나의 그리스도인이 없을 수도 있다. 호산나를 외치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칠 무리들로 가득찰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수많은 무리들에게는 하나의 그리스도인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서야 제자들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내 욕심을 죽이고 주님을 생각하면 그만큼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다. 내가 소유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면 그만큼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내가 누려야 할 안위를 포기하고 그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는 것이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인에게 최대의 과제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얼마나 죽이고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높은 권위는 상대적으로 만들어진다. 상대가 없을 때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 전문직에서 오는 권위는 다른 사람보다 그 전문적인 지식이나 실력이 있을 때 주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권위는 시간과 함께 반드시 상실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권위는 희생적 권위인 것이다. 이 권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다. 이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할 자가 없다.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민을 위해 자기가 죽었기 때문이다. 가정에 돌아가면 어머니의 권위에 도전할 자가 없다. 왜냐하면 희생적 권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비록 부족하고 무식해도 그 희생적 권위 때문에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빌 2: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최대의 권위가 되는 것이다.
2. 예수님께서 섬기는 자리가 비어 있으니 우리에게 앉으라고 하신다.
주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고 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하늘에 있는 자와 땅에 있는 자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두 무릎을 꿇게 했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한다.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야 한다. 이제 주님께서 참으로 앉기를 원하시는 그 자리에 앉도록 노력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1924년 보수당 정치인이며 소문난 부자인 그랜트가 서민생활 체험을 위해 지하철을 탔다. 거기에 노동당 내각 수상인 맥도날드가 타고 있었다.
‘왜 수상 전용차가 있는데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십니까?’
‘수상 전용차는 공무용이라서 출퇴근은 사적인 용무이기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총리께서는 일국의 최고 통치자인만큼 과로하지 않는 것도 국사의 하나입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요. 하지만 부정행위의 대부분은 그럴싸한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법이지요.’ (1995-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