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함께 마실 네번째 잔
2021. 10. 31(종교개혁주일, 총출석주일) 마가복음 14:22-25
어느 잡지사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일상적인 삶에서 오는 나쁜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는 주제로 의식조사를 하였다. 그래서 속상할 때 어떻게 하는가? 그 방법으로 속상한 것이 풀렸는가? 하는 식의 질문을 하였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1) 속상할 때 어떻게 하는가?
①술을 마신다. ②무조건 집을 뛰쳐나간다. ③드라이브를 한다. ④책을 본다. ⑤친구를 만난다. ⑥노래방에 간다.
2) 당신이 선택한 그 방법으로 속상한 게 풀렸는가?
밤새도록 술 마시고 속이 쓰려 죽을 뻔했다, 노래방 가서 소리지르고 노래 부르다가 이비인후과 신세졌다는 등 자신의 감정을 치유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3) 당신이 선택한 방법 가운데 어느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를 만나서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라고 했다.
4) 그럼 당신은 그런 친구를 가지고 있는가? 있다면 몇 명이나 있는가?
이 질문에는 92.5%가 그런 친구가 없다고 응답했다.
이 의식조사를 통하여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고통을 듣고 이해하는 친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친구가 없겠는가? 예레미야 42:19-20절은 먼저 보시기 바란다.
(렘 42:19-20) 유다의 남은 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두고 하신 말씀에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 하셨고 나도 오늘 너희에게 경고한 것을 너희는 분명히 알라 20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이 말씀은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할 때 도망한 사람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황폐한 예루살렘을 보면서 예레미야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물어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명령하는 대로 그들은 순종하겠다고 약속하였는데,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에 순종하기를 거절한다.
왜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예레미야가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래서 황폐한 예루살렘을 떠나 문화와 문명이 발달되어서 바벨론이 침략할 수 없는 그 땅에서 살라는 말을 듣고 편안한 마음으로 내려가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말을 들었을 때 이 사람들은 예레미야는 거짓말을 한다며 말을 듣기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닌가? 저에게도 종종 상담을 하러 오는 분이 있다. 그러면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상담을 하는데, 그 상담에 은혜를 받는 분도 있고, 또 낙심하고 가는 사람도 있다. 아니 제가 설교를 하는데, 제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는 분도 있고, 낙심하고 가는 사람도 있다.
무슨 차이겠는가? 상담을 받으러 왔는데 자기 말을 잘 들어주고 지금까지 잘 살아오셨다고 수고했다고 그냥 그대로 살면 된다고 그렇게 말해주면 아주 만족한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말하는 순간 눈빛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지구촌에서 내 말을 듣고, 또 들으면서 늘 긍정해 주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요즘 전세계 최고 관심을 끄는 영화가 오징어게임이다. 저도 어릴 때 땅에 오징어 그림을 그려두고 친구와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 땅에 그림을 그리고 한발로 뛰고, 힘겨루기를 하면서 웃고 땀흘리며 오징어놀이를 하였다. 그런데 넷플릿스에서는 오징어를 놀이가 아니라, 게임이라 하였다.
놀이와 게임의 차이를 아는가? 놀이는 함께 웃으며 교제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게임은 이기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놀이는 재미가 있지만, 게임에는 긴장과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오징어게임도 마찬가지이다. 넥플릭스에서 상영한 오징어게임은 제가 어릴 때 놀이로 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줄다리기, 구슬치기, 오징어달구지를 한다. 그런데 제가 어릴 때는 웃고 즐기는 놀이였는데, 오징어게임은 이기지 못하면 죽어야 했다. 그래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잡히면 총알이 날아와서 죽어야 했다. 줄다리기도 내가 이기지 못하면 낭떨어지에 떨어져 죽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잔인한 오징어게임을 전세계가 환호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기면 살아남지만 지면 도태되어 고통의 삶을 살아야 하는 전쟁터에서 살다. 그래서 늘 스트레스와 긴장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오징어게임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에는 남의 말을 들어줄 여유도 없고, 위로할 힘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성도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을 게임으로 살아도 되는가?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14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또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몸이다고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한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이 먹도록 하였다. 그렇게 식탁을 섬기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부분이 마가복음 14:25이다.
(막 14: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유월절에는 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15개였기 때문에 15가지의 행사를 한다. 제일 먼저 쇼파를 불어서 그 날을 구별하고, 그 다음 순서로 여인들이 등불을 밝힌다. 이렇게 시작되는 유월절 행사는 만찬으로 들어가는데, 성만찬에는 4번의 잔을 마시는 순서가 있다.
첫 번째 잔은 성별의 잔(the cup of sanctification)이라고 부르는데, 성만찬(쎄데르)의 시작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었음에 대한 잔이다.
두 번째 잔은 기억/기념의 잔(the cup of Remembrance)으로, 이 식사 직전에 마시는 잔이다.
세 번째 잔은 구속의 잔(the cup of Redemption)으로 식사 중에 마시는 잔이다. 이 잔을 마심으로 유월절 만찬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었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예수님께서 성만찬 때 제자들과 잔을 나누신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구속의 잔이었다. 이 구속의 잔은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여 주신 것처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리라는 소망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잔은 찬양의 잔(the cup of Praise)으로 백성으로 삼으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잔을 마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 번째 잔을 마신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겠다고 하였다.
그러면 네 번째 잔을 언제 마시겠는가? 요한계시록 19장에 어린양 혼인잔치가 열린다. 그때 24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세마포 옷을 입고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 혼인잔치에서 우리는 주와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 주님은 그 잔을 마시는 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 앞의 예수님은 어린양혼인잔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성도는 삶의 순간 순간마다 무엇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가? 1787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ary Wars)은 의회를 통하여 종교가 폐기되고, 주일은 사라졌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숲속으로 쫓겨났는데, 그때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였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또 은혜베푸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집 문을 두드리며 검은 습지요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날이면 자정에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습지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쫓겨난 목사님을 통하여 말씀을 듣고, 또 성찬의 떡과 잔을 마신 것이다. 어둡고 컴컴한 그 밤에 사람들은 모여서 성찬의 떡과 잔을 마시다가 잡히는 날에는 모두 죽을 수 있다는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말씀을 듣고, 성찬의 떡과 잔을 마신 것은 그들은 모두 하나였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네 번째 잔을 마실 때 그때 함께 그 잔치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기쁨을 누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그 사실을 소망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성찬의 떡과 잔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떡과 잔에 참예하는 성도의 모습이다. 성찬의 떡과 잔에 참예한다는 말은 우리가 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 떡과 잔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우리가 떡과 잔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그 사실을 기념한다는 상징설도 아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여서 우리가 떡과 잔을 마실 때 연합한다는 영적임재설을 믿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떡과 잔에 참예할 때 그리스도의 연합을 이루는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성찬의 떡과 잔에 참예할 때 주가 내 안에 내가 주안에 거하는 그 놀라운 신비를 체험하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오늘 저와 여러분이 누려야 하는 은혜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이 떡과 잔에 참예함으로 어린양 혼인잔치에서 우리 주와 함께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축제를 바라보는 눈이 열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이기려는 시기와 질투와 욕망이 생길 때 천국잔치를 바라보면서 성도간의 연합을 이루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