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노트 24
1. 질문 : 경행을 할 때 무엇을 알아차려야할까 망설일 때가 있습니다.
답변 : 경행을 할 때 특별한 것을 찾아내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는 발에 밀착해서 알아차리면 된다.
< 참고 >
위빠사나 수행은 무엇을 하거나 할 때 하는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릴 때 1차 대상은 자기 몸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걸을 때는 걷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볼 때는 보는 것, 들을 때는 듣는 것, 냄새가 날 때는 냄새가 나는 것. 먹을 때는 먹는 것, 몸이 접촉할 때는 접촉하는 것, 생각을 할 때는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단순화시키려면 언제나 자기 몸과 마음으로 돌아와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감각기관이 아닌 감각대상으로 마음이 나갔지만 이제 순서를 바꾸어서 먼저 감각기관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상황에 따라서 2차 대상인 감각대상을 알아차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3차 대상은 대상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대상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안[內]을 알아차리는 방법, 밖[外]을 알아차리는 방법, 안팎[內外]을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세 가지 알아차리는 방법은 자신의 내면을 통찰할 때의 방법과 상대가 있을 때 알아차리는 방법과 이렇게 알아차리는 마음을 새로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혼자서 수행을 할 때는 당연히 자기 감각기관인 안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을 알아차릴 때는 몸에 있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을 알아차립니다. 좌선을 하면서 움직이지 않을 때의 두드러진 대상은 호흡입니다. 경행을 하면서 움직일 때의 두드러진 대상은 발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외에도 다른 대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 그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가령 좌선을 할 때 통증이 심하면 호흡을 알아차리다가 통증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경행을 할 때 발을 알아차리다가 의도가 나타나면 의도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경행을 할 때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다가 차츰 집중이 되면 발의 실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의 실재란 발의 가볍고 무겁고 단단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경행의 실재는 무게가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재를 알아차린 뒤에 좀 더 집중력이 생겼을 때 움직이려는 의도를 알아차리면 비로소 몸과 마음을 바르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한다고 해서 특별한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현재 있는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현재 있는 것이란 지금 여기에 있는 몸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지나간 과거의 일이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은 대상이 아닙니다. 만약 현재의 일이 아닌 것을 생각을 했다면 생각한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감각기관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계단을 오른다거나 산행을 한다거나 할 때는 반드시 발만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서 알아차릴 범위를 확대해도 좋습니다. 수행자가 일정한 공간에서 왕복으로 걷는 것을 알아차릴 때 천천히 걸어도 되지만 일상생활을 하면서 움직일 때는 자연스럽게 평소의 걸음으로 걸으면서 발에 집중을 합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마음을 발로 보내지 않고 전면에서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알아차림은 집중력이 있는 수행자가 대상을 아는 마음을 상대로 알아차릴 때 가능합니다. 전면에서 알아차릴 때는 좀 더 오래 알아차릴 수 있어 집중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2. 질문 : 수행이 하기 싫어서 무료하게 앉아있을 때가 있습니다.
답변 : 수행이 하기 싫을 때 하기 싫어하는 마음을 알아차려라. 붓다께서도 수행을 할 때 몸뚱이가 귀찮아서 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몸뚱이가 있어야 수행을 한다. 그러므로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지혜다.
< 참고 >
수행이 하기 싫을 때는 하기 싫은 것이 법입니다. 법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대상입니다. 이때 수행자는 와서 보라고 나타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해결된 것입니다.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간단하게 해결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늘 수행을 그만두고 맙니다. 이렇게 마무리 하지 못하는 것은 나타난 대상을 법으로 보는 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대상을 단순하게 보아야 합니다. 알아차리는 것이 단순하게 보는 것입니다. 복잡한 것은 학문이고 수행은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수행이 필요해서 시작했어도 그간 살아온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어 인내하기가 어렵습니다. 수행을 시작하면 반드시 여러 가지 장애가 나타나는데 하기 싫은 것도 장애입니다. 이 장애는 손님으로 찾아온 것이라서 손님에 알맞은 대접이 필요합니다. 이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수행을 계속할 수 있고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신념이 무너지지 않아 장애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노력할 수 없어 수행을 지속하기 힘듭니다. 알아차리는 힘이 적고 장애의 힘이 클 때는 확신에 찬 믿음만 수행을 지속할 수 있게 합니다.
알아차림과 함께 필요한 것이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첫째, 지금 수행을 계속하는 것이 이익인가, 아니면 수행을 그만 두는 것이 이익인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둘째, 지금 수행을 할 때인가, 아니면 수행을 그만 둘 때인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셋째, 지금 필요한 대상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필요하지 않은 대상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넷째, 지금 어리석음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어리석지 않게 보고 있는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네 가지 앎에 비추어보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지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수행이 하기 싫을 때는 먼저 “지금 수행을 하기 싫어하네”라고 하기 싫어하는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린 뒤에 다시 수행을 하기 싫어하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수행은 마음이 일을 하는 것이므로 바로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수행을 하기 싫은 마음이 일으킨 가슴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하기 싫은 마음이 사라지고 다시 수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 거친 느낌, 중간 느낌, 미세한 느낌이 될 때까지 계속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느낌이 고요해지면 가슴에 있는 맥박이나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수행이 하기 싫을 때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기 싫은 것을 알아차린다. 둘째, 하기 싫어하는 마음을 알아차린다. 셋째, 가슴에서 거친 느낌, 중간 느낌, 미세한 느낌이 될 때까지 알아차린다. 넷째, 느낌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서 호흡이나 맥박을 알아차린다.
하기 싫은 마음이 가져오는 결과는 수행을 그만두거나 아니면 무료하게 앉아있는 것입니다. 수행이 하기 싫을 때는 탐욕과 성냄이 지배하는 순간이고 무료하게 앉아있을 때는 어리석음이 지배하는 순간입니다. 무료하게 앉아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이 무기에 빠진 것입니다. 무기가 바로 나태함과 혼침이며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므로 무료하게 앉아있을 때는 “지금 무료하게 앉아있네”하고 이 상태를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가슴으로 가거나 호흡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 중에 나타난 장애를 짜증을 내거나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방법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무런 걸림이 없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면 반드시 반작용이 생깁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고요한 마음이 생겨 통찰지혜가 납니다.
3. 질문 : 위빠사나 수행이 무엇인지요?
답변 : 위빠사나는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을 보는 수행이다. 우리가 세 가지 법을 못 보기 때문에 항상 문제가 생긴다. 일어남과 사라짐이 모두 고통이다. 우리가 좋다고 한 것은 모두 무상하고 고통인데 이것을 좋다고 착각하고 있다.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이 저 스스로 하고 있는데 이것을 자기가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위빠사나는 이러한 착각을 바르게 보는 힘을 길러주는 수행이다.
< 참고 >
위빠사나 수행은 사마타 수행과 함께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경”에 있는 내용을 실천하는 두 가지 수행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붓다께서 수행은 이렇게 하라고 설하신 경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경전 “디가니까야(Digha Nikaya)”에 “마하사띠빠타나 수따(Mahasatipatthana Sutta)”가 있습니다. “디가니까야”는 붓다께서 설하신 말씀 중에 “길게 설하신 경”을 모은 경전입니다. 이 경전에 수록된 “마하사띠빠타나 수따”는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긴 경”입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대념처경(大念處經)”이라고 합니다. 대념처경은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경인데 신(身), 수(手), 심(心), 법(法)입니다. 네 가지 대상인 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을 알아차린다는 뜻에서 “사념처(四念處)”라고도 합니다.
둘째, 경전 “맛지마니까야(Majjhima Nikaya)”에 “사띠빠타나 수따(Satipatthana Sutta)”가 있습니다. “맛지마 니까야”는 붓다께서 설하진 말씀 중에 “중간 길이로 설하신 경”을 모은 경전입니다. “사띠빠타나 수따”는 이 경전에 수록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경”입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염처경(念處經)”이라고 합니다. 대념처경과 염처경은 같은 내용인데 대념처경에서는 법념처 부분을 염처경보다 자세하게 설했습니다.
셋째, 이 외에도 붓다께서는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경”과 “염신경”과 “긴 라훌라 교계경”에서 수행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경전 중에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긴 경”이 수행을 대표하는 경전입니다. 특히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경’을 설하신 곳이 꾸르스 지방인데 이 지역 사람들의 근기가 높아 뛰어난 법문을 하셔서 수행에 대한 내용이 가장 훌륭합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기 위해서 실천하는 수행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마타(samatha) 수행과 위빠사나(vipassana) 수행입니다. 이 두 가지 수행을 합쳐서 한문으로 지관법(止觀法)이라고도 합니다. 두 가지 수행은 깨달음으로 가는데 필요한 수행방법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수행이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모든 수행을 대표하는 수행입니다. 두 가지 수행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서 또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합니다.
두 가지 수행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사마타(samatha)라는 말은 평온, 멈춤[止]이라는 뜻입니다. 고요함에 머문다는 뜻으로 적지(寂止)라고도 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수행(禪定修行)입니다. 빨리어 자나(jhāna)를 선(禪) 또는 선정(禪定)이라고 하는데 이 정신세계의 수행을 하는 방법이 바로 사마타입니다. 우리가 선(禪)이라고 했을 때는 사마타 수행인 선정수행을 말하고, 선원(禪院)이라고 했을 때는 사마타 수행을 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사마타는 수행은 수행을 할 때 장애가 일어나면 번뇌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입니다. 처음에 수행을 시작하면 누구에게나 감각적 욕망, 악의, 게으름, 들뜸, 의심이란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납니다. 이처럼 장애가 발목을 잡아 수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번뇌를 눌러 고요함을 얻기 위해 사마타라는 선정수행을 합니다.
선정의 세계는 색계 4선정과 무색계 4선정이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을 해서 색계 1선정에 이르면 현재도 색계 1선정의 마음으로 살고, 죽으면 색계 1선정에 태어납니다. 마찬가지로 무색계 4선정에 이르면 현재도 무색계 4선정의 마음으로 살고, 죽으면 무색계 4선정에 태어납니다.
몸이 있는 천상인 색계 4선정과 몸이 없는 천상인 무색계 4선정의 세계를 세분화하면 모두 20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들 세계 중에 최상위의 세계가 8만 4천 대겁의 수명을 가진 비상비비상처입니다. 하지만 윤회하는 생명은 천상의 수명이 다하면 죽은 뒤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이때의 태어남은 업의 과보로 결정되기 때문에 어디서 태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다시 태어남이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사악도의 태어남도 예외가 아닙니다. 존재하는 생명들이 거의가 사악도에 모여 있습니다. 이것이 윤회하는 생명이 겪는 괴롭고 슬픈 현실입니다. 이처럼 사마타 수행은 깨달음을 얻는 수행이 아닌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수행이기 때문에 초기에 근접집중을 거쳐 근본집중을 합니다. 그래서 고요함을 얻는 것이 목표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나름대로 목표가 있기 때문에 바라는 것이 있는 수행입니다. 이에 비하여 위빠사나 수행은 아무 것도 바람이 없는 수행입니다. 바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구별하는 또 하나의 차이입니다. 바람이 있는 공덕행을 하면 반쪽짜리 바라밀이지만 바람이 없는 공덕행을 하면 완전한 바라밀입니다. 피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람이 없는 공덕행을 해야 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팔정도의 계정혜 중에서 정(定)까지 이릅니다. 이때 정의 단계가 고요한 마음의 집중의 단계며 지식이나 철학의 단계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근본집중을 하지 않고 찰나집중을 해서 정에 머물지 않고 혜를 계발하여 무상, 고, 무아의 통찰지혜를 얻습니다. 그래서 집착이 끊어집니다. 이것의 차이로 윤회하는 세계에 머물거나 윤회가 끝나는 해탈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누구건 해탈의 자유를 얻으려면 사마타 수행에 그치지 말고 다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통찰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관념, 모양, 명칭, 표상 등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대상의 실재를 알아차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상과 하나가 되는 근본집중을 해서 장애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대상의 실재를 알아차리지 않는다는 것은 대상과 하나가 되어 고요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고요함이 목표라면 대상이 가진 실재를 알아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대상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발견합니다. 이처럼 두 가지 수행의 차이는 관념과 실재를 알아차리는 것으로도 비교됩니다.
사마타 수행을 해서 생기는 집중을 “사마디 마음”이라고 하며 이때 생기는 지혜가 “사마디 지혜”입니다. 사마타 수행을 할 때의 알아차림이 “사마디 알아차림”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고요함”을 목표로 하고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지혜”를 목표로 합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얻는 지혜를 “통찰지혜”라고 하지 않고 “사마디 지혜”라고 하는 것은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지혜가 아닌 “선정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고요한 마음의 집중을 뜻하는 사마디(samadhi)라는 말은 사마타(samatha)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마타 수행에서 말하는 마음과 알아차림과 지혜를 모두 사마디라고 합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사마타 수행은 40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열 가지 까시나(kasina, 遍滿) : 땅, 물, 불, 바람, 푸른색, 노란색, 빨간색, 흰색, 광명, 한정된 허공입니다. 까시나(kasina)는 편만한, 전체의, 완전한 등의 뜻으로 대상과 아는 마음이 완전하게 일치해서 틈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까시나는 10가지인 삼계(三界)가 완전하게 하나로 편만하다고 명상하는 선정수행입니다. 까시나는 사마타 수행의 대표적인 용어입니다. 편만(遍滿)은 널리 참, 꽉 참으로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2. 열 가지 부정(不淨) : (시체가)부었고, 검푸르고, 문드러지고, 끊어지고, 뜯어 먹히고, 흩어지고, 난도질당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피가 흐르고, 벌레가 버글거리고. 해골이 된 더러움입니다. 열 가지 부정관은 특히 시체가 부패하는 과정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시체가 변해가면서 더러워지는 것을 통찰하여 인간이 가진 감각적 욕망과 집착을 끊으려는 의도로 수행을 합니다. 여기에 백골관도 포함됩니다.
3. 열 가지 알아차림 : 붓다, 법, 승가, 계, 관대함, 천신, 죽음, 몸, 들숨과 날숨, 고요함
4. 네 가지 무량한 마음[慈悲喜捨] : 자애, 연민, 함께 기뻐함, 평정
5. 네 가지 무색계 :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6. 한 가지 인식[想] : 음식에 대한 혐오
7. 한 가지 분석 : 지수화풍
이상 40가지가 사마타 수행의 대상입니다. 사마타 수행을 한다고 해서 40가지를 다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을 배우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대상의 선택이 다릅니다. 또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대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수행을 하거나 스승의 가르침이 없으면 바르게 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근본집중을 하여 고요함이 생기면 집중의 힘으로 초능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붓다의 제자 중에 아누룻다 존자는 사마타 수행으로 뛰어난 신통을 얻었습니다. 물론 사마타 수행을 한 뒤에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아라한이 되었지만 신통한 힘을 가진 아라한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수행자가 사마타 수행으로 신통한 힘을 키운 뒤에 위빠사나 수행으로 도과를 성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마타 수행을 해서 집중의 힘이 생겨 능력이 생길 때 잘못하면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수행자의 궁극의 목표는 괴로움을 해결하고 열반을 성취하는 것인데 이 길을 모르기 때문에 신통한 능력에 매달리면 궁극의 이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길로 빠져 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능력과 지혜는 유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입니다. 수행자가 자연스럽게 어떤 능력을 얻는 것은 무방하지만 이것이 결코 지혜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능력이 생기면 아만심이 생기고 능력을 남용하여 혹세무민 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 생겨 신비한 체험을 하면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수행자에게는 치명적입니다. 이러한 신비체험은 단지 수행의 과정에서 생기는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집중의 힘으로 능력을 얻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라밀 공덕이 있으면 능력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바르게 정진하여 윤회가 끝나는 해탈의 기쁨을 누립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능력이 결코 자신의 괴로움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붓다가 되기 전 보살께서 알라라 깔라마를 만나 무색계 3선정에 이르렀지만 이 수행이 자신의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서 다음 스승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웃다카 라마뿟다를 만나 무색계 4선정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무색계 4선정을 얻고도 괴로움을 해결하지 못해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 6년간 고행을 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수행이 향상되어서 나타나는 현상을 오히려 번뇌라고 여깁니다. 그냥 번뇌가 아니고 천박한 번뇌로 여깁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점진적으로 지혜가 계발되는데 바로 이것을 모두 번뇌라고 여기고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열 가지 번뇌는 광명, 앎, 희열, 평온, 행복, 확신, 노력, 현기, 평등, 욕구입니다.
이처럼 위빠사나 수행은 어떤 현상에도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모든 결과를 싫다거나 좋다고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만이 더 높은 단계인 무아의 지혜를 향해 갈 수 있습니다. 능력이 생기면 내가 능력을 얻었다는 유신견이 생기고 아상이 강화되어 삿된 길로 갑니다. 수행자는 어떤 능력에 대해서도 초연해야 궁극의 결과를 얻습니다. 좋은 것조차 버려서 집착하지 않아야 하거늘 하물며 좋지 않은 것을 집착한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요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욕망을 가지고 복을 바라기 때문에 사소한 신비체험을 한 사람을 따르고 매달립니다. 그래서 능력을 원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삿된 길로 가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이 만듭니다. 만약 누군가가 복을 준다면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복을 주는 존재에게 매달리는 일만 해도 될 것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맹신에 빠진 결과입니다.
가보지 않은 정신세계를 가는 길은 동굴탐험이라서 반드시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가거나 결국에는 수행을 포기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선업의 공덕인 바라밀 공덕입니다. 평소에 바라밀 공덕을 쌓으면 여러 가지 위험에서 벗어나 바른 길을 갑니다. 이상이 사마타 수행의 득과 실입니다.
둘째, 위빠사나(vipassanā)는 올바른 직관 또는 내관(內觀), 내관적 지혜입니다. 올바른 직관(直觀)이란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고 대상을 분리해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내관(內觀)이라는 말은 자기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모두 밖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았지 제대로 자기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 적이 없습니다. 내관적 지혜는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의 통찰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사실은 누구도 이렇게 해본 적이 없는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뿐더러 이 말의 뜻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성품을 발견하지 못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경”에서 이 길을 “유일한 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은 관념적인 선언이 아닌 자신이 직접 체험해보고 난 결과로 한 선언입니다. 그리고 모두 이 길로 오라고 45년간 설법했습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은 상좌불교의 독단적 교리가 아니고 괴로움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모든 인류의 진실입니다.
빨리어 위빠사나(vipassanā)는 ‘위(vi)’와 ‘빠사나(passanā)’의 합성어입니다. 접두사 ‘위(vi)’는 분리, 반대, 다름, 분산이라는 뜻입니다. ‘빠사나(passanā)’는 알아차림, 응시, 주시, 관찰, 수관(隨觀)이란 뜻입니다.
분리라는 뜻의 ‘위(vi)’는 보이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고 객체로 분리해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보이는 대상을 내가 본다는 전제로 볼뿐만 아니라 선입관을 가지고 보지만 이때의 분리가 되면 내가 보는 것 아니며, 선입관 없이 있는 그대로 봅니다. 이렇게 분리해서 알아차릴 때만이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알아 집착이 끊어집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 알아 완전한 인식이 이루어집니다.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린다고 할 때 몸은 느껴지는 대상이고 마음은 보이는 몸을 아는 것입니다. 이때 몸의 역할과 마음의 역할이 다릅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수 있을 때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과 아는 마음이 분리됩니다. 이렇게 분리될 때 객관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고정관념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아 대상의 실재를 아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몸과 마음을 하나로 알았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기능과 마음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기능을 다르게 봅니다. 그래야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아프지 않고, 마음이 아플 때 몸이 아프지 않습니다. 그래서 몸이 늙을 때 더불어 마음이 늙지 않습니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1단계 지혜입니다. 이런 분리는 붓다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된 수행방법입니다. 바로 이런 시도가 있어서 깨달음에 이르는 법을 발견했습니다.
‘빠사나(passanā)’는 ‘아누빠사나(anupassanā)’라는 뜻인데 ‘아누빠사나’는 수관(隨觀)이라는 말로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림과 알아차림을 지속해서 생기는 집중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수행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어는 ‘사띠(sati), 사마디(samadhi)’입니다. 수행자는 알아차림이란 사띠(sati)와 집중이란 사마디(samadhi)가 함께 있어야 마음이 고요해져 단계적 과정의 지혜를 얻습니다.
수관(隨觀)이라는 말은 따라가면서 본다는 뜻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알아차린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만이 꿰뚫어서 보는 통찰지혜가 생겨 무상, 고, 무아의 법을 압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절대 뒤따라가면서 보면 안 됩니다. 대상과 아는 마음과 알아차림이 항상 함께 일치해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성, 일치성, 현장성, 즉시성이 모두 있어야 합니다. 만약 뒤따라가면서 알아차리면 현재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이미 지나간 과거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의 불이 나지 않습니다. 지혜의 불은 현재에서만 납니다. 또 현재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고 지난 것을 알아차리면 작은 틈이 생기는 순간 망상이 들어오고 졸음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일어나는 현상을 따라가면서 본다고 했을 때 뒤따라가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자유롭게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대상이면 무엇이나 알아차려야 합니다. 가령 호흡을 알아차릴 때 강한 통증이 새로 나타나면 계속 호흡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새로 나타난 강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찰지혜라고 하는 것은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아무 걸림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통찰지혜는 대상의 본성을 보지 못하도록 가린 무명을 부수고 대상의 본성을 봅니다. 몸과 마음의 본성을 알아야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을 끊습니다. 무명은 모르는 마음이라서 번뇌를 움켜쥐고 지혜는 아는 마음이라서 번뇌를 끊습니다.
경전에 기록된 도과를 성취하는 네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마타 수행으로 시작해서 위빠사나 수행으로 열반에 이른다. 둘째, 위빠사나 수행으로 시작해서 사마타 수행으로 열반에 이른다. 셋째,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병행해서 열반에 이른다. 넷째, 위빠사나 수행으로 열반에 이른다.
이상과 같이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작용하여 최종적 단계인 열반에 이릅니다. 그러나 네 번째 과정에서는 사마타 수행 없이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열반에 이릅니다. 이 네 번째 방법을 순수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사마타수행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은 모든 수행을 아우르는 두 개의 큰 산입니다. 반드시 40가지 수행이 아니더라도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선정의 고요함을 얻는 것이면 사마타 수행입니다. 대상을 분리해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이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붓다가 출현하기 전에도 있었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붓다가 출현해서 찾아낸 수행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수행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마타 수행도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입니다. 앞으로도 사마타 수행은 계속 존속하겠지만 언젠가 위빠사나 수행은 사라집니다. 이런 시대는 도과를 얻을 수 없는 정신적 암흑기입니다. 그러나 겁의 세월이 지난 뒤에 새로운 붓다가 출현할 때 다시 위빠사나 수행이 인류에게 전해집니다. 정법은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법이 있는 시대에 태어나기 어렵고, 정법을 지도하는 스승을 만나기 어렵고, 정법을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라밀 공덕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이상 세 가지 조건이 모두 갖추어진 때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이 모두 깨달음을 얻는데 필요한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마타 수행을 하지 않고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도 있지만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병행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수행의 우열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두 가지 수행이 스승의 가르침으로 실행되는 것이므로 수행방법의 선택은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붓다가 되기 전의 보살이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12연기법입니다. 연기법에서 몸과 마음이 발견되고, 몸과 마음에서 느낌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느낌에서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찰나집중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찰나집중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찰나집중으로 느낌을 알아차린 결과 무상, 고, 무아의 법이 발견되어 위대한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고따마 붓다만 이룬 길이 아니고 지금까지 출현하신 25분의 붓다가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